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85
마석희
참을 만큼 참았다. 3년이나 참았으면 충분히 오래 참지 않았나.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온 탓인지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함이원은 이미 이 손아귀에 들어와 있어야 했다. 새장이라는 것조차 눈치챌 수 없는 안락한 공간에서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했다.
“어째서 아직 내 손에 없냐고! 왜!”
들키지 않게 법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생각나는 방법은 전부 써봤다. 그런데 테오라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스케줄을 취소해 압박하기도 하고 루머를 부풀리고 가짜 뉴스를 만들고…. 그런데도 테오라는 점점 인기를 얻어가기만 했다.
이제 테오라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져서 웬만한 압박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테오라와 하눌 엔터에 밉보이면 자기들도 큰일 난다고 엄살을 피워댔다.
비서에게 아무리 윽박질러도 현실은 테오라 중심으로 흘러갔다. 자신은 엑스트라가 된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특히 이 결정적이었다. M.com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압력을 넣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반대로 경연에서 우승함으로써 아이돌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듣기만 해도 날카로워진 신경이 누그러지는 목소리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다가 실망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만큼 지독하게 원했던 건 이전에도 이후로도 없을 텐데 이것 하나 얻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얼마나 대단한 걸 원한다고 희망은 자꾸만 멀어졌다. 달콤한 딸기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 ‘기다려’를 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일이었다.
점점 업무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져 갔다. 한 번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할아버지께 불려가기도 했다.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냐고,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대표에서 내려오라는 꾸중을 들어야 했다.
경쟁자라곤 건물주랍시고 유흥에 빠져 지내는 미덥지 않은 사촌들 뿐이라 아직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방계 친척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해도 명예 회장으로서 가진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했다. 넌지시 M.com 대표를 교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언질만 줘도 자리를 빼앗기는 건 한순간일 것이었다.
함이원의 존재가 자신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어서 할아버지 때부터 집안의 뒤처리를 맡던 아저씨에게 일을 맡길 수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심부름꾼을 구해봤지만, 일 처리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함이원을 독점할 수는 없어도 라이브 무대에서 충분히 들으실 수 ….”
노이즈가 끼지 않은 깨끗한 목소리는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다. 음악 전문 채널을 소유한 만큼 라이브 무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기도 하고, 돈만 들이면 테오라 콘서트 VIP석 표를 얻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석희는 남들과 똑같이 무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지?”
“이제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고? 네가 능력이 없는 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사직서 바로 제출하겠습니다.”
“내가 한마디 했다고 건방지게 사표를 내? 돈이 부족해서 그래? 어디서 스카웃 제의라도 왔어?”
그간 임 비서를 질책했던 건 더 잘하라는 일종의 채찍질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못 버티고 그만두려고 한다니 괘씸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아닙니다. 한동안 쉬어 보려고 합니다.”
일을 험하게 시켰다는 자각은 있었다. 건강이라도 나빠진 게 아닐까 싶었다.
“대표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저 같은 비서보다는 다른 유능한 비서가 어울릴 겁니다. 후임은 저보다 스펙도 좋고 일도 잘하는 인재로 구해두겠습니다. 인수인계 완벽하게 끝내고 나갈 테니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뭐 그러던지.”
오래 일하던 비서가 그만두면 한동안은 새 비서에게 적응하느라 귀찮겠지만, 잠깐만 참으면 잘 바꿨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임 비서의 일 처리가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으니 환경을 바꿔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딜 가더라도 입단속 단단히 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민감한 정보가 새어 나갔을 때 네 목이 제일 먼저 날아갈 될 테니까.”
비서는 임원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는 직업. 여러 가지 기밀이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알게 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네.”
비밀 유지 서약서에 적힌 위약금 액수만 봐도 배신할 엄두는 내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노예로 일하더라도 갚지 못할 금액이니까.
“알았으니까 가봐.”
평소처럼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대표실에서 나가는 임 비서의 뒷모습을 보다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 올 비서가 크게 기대되지는 않았다. 업무 능력은 조금 나을지 몰라도 과연 함이원을 잡아 올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듯했다.
솔직히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앞으로 함이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란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테오라가 해외 활동을 시작했으니 국내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초조해지는 마음에 회사 일보다 함이원 관련한 일을 우선했는데도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납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함이원 같은 인기 아이돌을 납치했다간 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도 있었다. 리스크가 크지 않았더라면 시도해봤을 테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데뷔 초 인지도가 거의 없었던 시기에 함이원을 알지 못했던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아…. 목소리 듣고 싶어. 듣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데.”
테오라가 한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탓에 함이원의 목소리를 들은 게 벌써 3개월은 흘렀다. 출장을 핑계로 해외 콘서트에 가려는 생각도 해봤지만, 위태로운 대표 자리를 생각하면 특별한 목적 없이 출국하는 건 악수였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치미는 짜증에 버릇대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잠깐 보러 가는 건 괜찮겠지?”
며칠 뒤에 M.com 사내에서 촬영하는 함이원의 개인 스케줄이 잡혀 있다. 테오라가 해외에 나가기 전에 잡았던 스케줄 같았다.
가수 오디션에 특별 심사위원으로 깜짝 등장한다고 들었다. 다양한 장르의 인기곡을 만들어내는 작곡가이자 인기 아이돌을 불러서 화제성을 꽉 잡아보겠다는 제작진의 속셈이 보였다.
“누가 뭐라고 하겠어?”
대표가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겠지만, 가끔 둘러보기도 했으니 격려차 들렸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노래 한 곡 시키라고 해야 하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는 거라 함이원의 노래를 못 들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미친 듯이 듣고 싶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신의 신경이 간지럽게 달아올랐다.
한동안 겪어야 했던 괴로운 금단 증상을 없앨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 * *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임 비서는 아직 망설이는 중이었다. 사표를 내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과격한 방법을 쓰려는 마석희를 말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점점 쌓여만 가는 죄책감에 허덕여야 했고, 회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웬만한 전문직도 받기 힘든 월급,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더러운 일에 손을 대야 했고 그 대가가 뒤늦게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비서로 채용됐을 때 보았던 마석희 대표는 유능한 리더였다.
재벌 3세라는 타이틀에 안하무인 망나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겁을 집어먹고 마석희를 만났을 땐 편견이 깨지는 느낌이었다.
여자 대표를 모시는 만큼 성추행 같은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석희의 뒷배에 겁을 먹었는지 다른 사장들도 비서인 자신을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대표로서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나이가 대표치곤 어리긴 했어도 모시는 보람이 있었다.
함이원, 아니 정현오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임 비서는 마석희가 정현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임 비서는 그때 대표가 정현오라는 사람에게 반한 줄 알았다. 그만큼 격렬한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소리 얘기만 했지만, 반하는 계기는 다양하니까 목소리에 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마석희가 이혼한 후여서 나이 차이가 크게 나도 애인이 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돈 있고 능력 있고, 자기 관리까지 잘 된 마석희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뭔가 이상함을 느끼게 됐다.
가볍게 만나면서 스폰서가 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정현오의 목소리에 보이는 애착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밀 연인이 될 거라 추측했건만, 그 추측은 전부 빗겨나갔다.
마석희는 정현오의 ‘목소리’만을 원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인 정현오가 힘들어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어하다가 아이돌을 그만두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다.
대표가 지시하는 일만 기계적으로 했던 그때는 별 죄책감이 없었다. 마석희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정현오가 소속된 그룹은 망했을 확률이 99퍼센트는 됐을 테니까.
투자를 제대로 받기를 했나, 그렇다고 진흙 속에서도 광채가 보일 만한 매력을 가진 멤버들을 모으기나 했나. 사기꾼으로 전직할 가능성이 농후한 소속사 대표에, 노예 계약서까지 쓴 상태였다.
어차피 망할 그룹, 조금 더 빠르게 망하게 했을 뿐이라고 합리화했다.
그 합리화는 잘 먹혀서 정현오의 그룹이 해체했을 때도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한동안 일이 바쁘기도 했고, 마석희가 알아서 달콤한 미끼로 정현오를 구슬리고 있을 거라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안일한 마음은 커다란 충격으로 돌아왔다. 정현오의 목소리와 똑같은 함이원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조사를 한 후에야 자신이 해온 일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꿈을 악의적으로 무너뜨린 도구였나, 내가….’
정현오의 죽음에 책임은 없더라도 짧은 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자각은 생겼다.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되뇌었지만, 어쩐지 가슴이 무거웠다.
그 와중에 마석희의 관심은 함이원에게 넘어갔다. 한 번의 실패를 맛본 탓인지 예전보다 훨씬 초조해 보였다.
원하는 바를 이뤄드리겠다, 그렇게 말했다. 정현오 때의 실수를 만회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함이원이 속한 그룹은 신인 아이돌. 불확실한 확률에 기대기보다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는 편한 위치가 보장되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현오 때와는 달랐다. 함이원은 여러모로 인기 아이돌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테오라를 방해하려는 수많은 시도는 물거품이 됐다. 테오라는 조잡한 방해물을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으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얘들을 무너뜨릴 수 있긴 할까…?’
함이원을 지켜보면서 테오라를 오래 관찰하게 됐다. 왜 사람들이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왜 팬이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꿈을 가지고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애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