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93
차라리
온몸을 휘감은 둔중한 통증.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가습기가 김을 내뿜고 있고,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들과 여러 개의 링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VIP 병실에 입원한 상태인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
마지막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딱 한 번만 약에 손대기로 한 결심은 곧 무너졌다.
바에서 만났던 웨이터가 어떤 종류를 줬는지 몰라도, 얘기해준 용량보다 훨씬 적게 사용했는데도 지독한 금단 현상이 찾아왔다. 참기 싫었고, 참아야 하는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 네 번으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환각 속에 빠지면 고통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세계가 그 안에 존재했다.
약효가 떨어지면 그 모든 것들이 환청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현실을 인지하는 과정은 터무니없이 고통스러웠다.
끔찍한 허기를 느끼는 사람에게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만 맡게 하는 격이었다.
흙이나 고무까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지옥 같은 허기에 시달려야 한다면, 누가 도피하지 않을까.
현실이 환각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환각 속에선 모든 번뇌가 지워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을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한번 알아버린 이상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멈출 수 있기나 할까?
‘기억이 뒤섞여서 진짠지 가짠지 알 수가 없어.’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흐려져서 전신을 뒤덮은 통증으로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작업실이 있는 곳에서 함이원이 오길 계속 기다렸던 것도 같은데….’
손을 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중증 중독자가 된 것처럼 금단 증상에 시달리다가 약을 구하러 갔고….
황홀해진 기분으로 생각했었다. 여기에 함이원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면 얼마나 더 좋을지를.
다급하게 함이원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일할 때 빼면 숙소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 건지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다.
언젠가는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작업실 근처에서 잠복을 했다.
함이원이 혼자 부른 OST를 재생시켜뒀다가 멈췄다. 맑은 목소리에 녹음 과정에서 끼어든 노이즈가 섞여 오히려 신경을 더 긁었다.
약효가 점점 떨어져 갔다. 발끝부터 개미 수천 마리가 기어오르는 듯 간질거리더니 곧 따끔거리는 통증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차에 함이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서 함이원을 보호하고 있는 경호원 같은 덩치 큰 남자까지도.
우산을 쓰고 재잘거리고 있는 함이원을 보며 명치 끝부터 불길이 치솟았다.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매정하게 호의 한 조각 나눠주지도 않는다니!
잠깐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은 억울함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이 손안에 굴러떨어져서 아무것도 모른 채 깨끗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줬으면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는 과격한 수단은 자제해왔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팔다리를 못 쓰게 되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걷지 못하게 되더라도 노래만 부를 수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해 노래하지 않겠다던 그 결심도 무용지물이 되겠지.’
운이 나빠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 계속 둘 수도 없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게 해야 하지 않겠어?’
만에 하나 함이원이 죽는다 해도 마석희에겐 차선책이 있었다.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고, 때로는 환상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마석희는 액셀을 세게 밟았다.
차는 비싼 값을 하기라도 하듯 큰 소리도 내지 않고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함이원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지는 그 찰나에 해방감을 느낀 것도 같았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을 두고 그간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으하하?!”
잠깐이었는데도 그때 창문으로 스쳐 지나간 비 오는 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굉음과 커다란 충격, 그리고 암전.
‘마지막 순간에 함이원이 피했던가?’
곤죽으로 망가진 기억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어차피 몸을 추스른 다음 확인해보면 되는 일이니까.
그보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것이 있었다.
아무리 VIP 병실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조용할 수가 있는 건가? 모니터에서 삑삑거리는 소리는 안 나더라도 가습기가 수증기를 내뿜는 작은 소리도 나지 않는다니?
마석희는 몸을 일으켜보려다 포기했다.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는 몰라도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 상태였다.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병실에 아무도 없다고?’
이상한 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얼마 만에 깨어난 거야…?’
저 광경이 거짓이 아니라면 최소 두 계절을 뛰어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왜 부모님이 이 자리에 없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공사다망한 분들이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자식에게 매달리는 대신 최고급 간병인을 붙여줄 분들이었다.
‘진짜로 그렇게나 흐른 게 맞나?’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시간을 건너뛰어 버렸다. 몇 년 단위로 잠들어 있지는 않았기를 기도해야 할 판이었다.
팔을 다시 움직여보는데 뭔가 손목을 묶여있는 듯했다. 뭔가 싶어서 손목을 들 수 있을 만큼 올려 쳐다봤다.
‘이게 뭔데?’
부드러운 하얀 천으로 두 손목이 침대 난간에 묶여있었다. 아픈 사람 손목을 묶어두는 건 무슨 짓인가 싶지만, 발작이라도 했다면 그럴 법도 했다.
꼼짝없이 구속된 상황에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육체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땐 통증에 가려져 못 느꼈는데 속이 좋지 않았다.
‘욱?’
훅 치밀어 올라오는 울렁거림을 참을 수 없어서 고개만 돌린 채 연신 토했지만,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
위가 비어 있어서 그런지 토사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그건 천만다행이지만, 아직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간병인과 의료진에게 신경질이 일었다.
돈을 한두 푼 받은 것도 아닐 텐데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들을 혼쭐이라도 내줄 생각이었다.
‘돈을 받은 값은 해야 할 거 아냐!’
속으로 이를 갈고 있던 차에 드디어 병실 문이 열리고 간병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간병인이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지만, 이윽고 인사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서는 입을 닦아주더니 이것저것 능숙하게 만지며 자신의 업무에 몰입했다.
어이가 없었다. 늦게 들어왔으면 사죄의 말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몇 개월 만에 정신을 차린 사람을 봤으면 너스 콜을 하든, 다른 의사를 부르든 해야 했다.
목이 여간 깔깔한 게 아니지만, 따끔하게 말을 해둬야 했다. 안 그러면 이 버릇없는 간병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무시당할 게 뻔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라고 지금 무시하는 거지?’
건조한 입술을 떼어내고 목에 힘을 줬다.
“??!”
‘…뭐, 뭐지? 왜 소리가 안 나? 평소처럼 목에 힘을 주고 간병인을 불렀는데? …아니, 틀렸어. 그게 아니야!’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간병인이 보였다. 간병인을 제대로 부르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내 귀가 안 들리는 거야…!’
계속 목에 힘을 주고 소리쳐봤지만, 병실에 깔린 완벽한 정적은 여전했다.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리던 점이 실체를 드러냈다.
몸을 뒤척거릴 때 들렸어야 할 바스락거림이나 자신의 거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일 리 없었다.
‘잠깐 이러다 말겠지. 일시적인 증상일 거야. 그래야만 해.’
“?, ???”
왜 안 들리냐는 질문에 간병인이 뭐라고 대답해주는 듯했지만, 벙긋거리는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
이해를 못 하는 기색을 보였더니 태블릿을 꺼내더니 화면이 잘 보이도록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금방 보여주는 걸 보니 미리 써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디까지 기억하시는지 몰라도 사고 이후로 7개월이 지났습니다. 수술 이후로 자주 깨어나셨었는데 기억하세요?]의식이 돌아왔었다고? 그런 기억은 없었다.
간병인이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일하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주 의식이 돌아왔다면 호들갑 떨 이유가 없었다.
[약물 후유증 때문에 기억 못 할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설명하셨어요. 중간중간에 발작하시는 바람에 손이랑 발을 부득이하게 묶어둘 수밖에 없었는데 아프진 않으세요?]후유증? 약물이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의료용 약물이 아니라 자신이 손댄 환각제 때문인 듯했다.
딱 한 번으로도 지독한 금단 증상을 겪게 하는 약이었다. 기억의 증발이나 발작은 아마 약을 강제로 끊은 여파인 듯했다.
본의 아니게 몇 개월이나 약을 끊었는데 어쩐지 바로 어제의 일 같았다.
[그리고 귀가 안 들리시죠? 사고로 뇌를 다치셨는데 그게 청각에 영향을 줬다고 해요.]글이 중간에 끊긴 것 같았다. 수술로 되돌릴 수 있다든지, 어떤 치료법을 쓸 예정이라든지 그런 설명이 추가되어야 마땅했다.
“???”
언제 낫냐고 물어봤더니 간병인은 입을 꾹 다물고 눈동자만 굴려댔다.
설마.
‘설마, 나을 수 없는 건가? 계속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채로 살아야 한다고…?’
요즘 의료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그거 하나 못 고칠까. 국내에서 고칠 수 없다면 해외로 나가서 치료하면 될 것이다.
건드리기 어려운 뇌의 문제라고 해도 못 고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청각 장애인이 되었을 리가 없었다.
태어나보니 재벌가의 귀한 딸이었고, 뭐든 원하기도 전에 손에 들어오는 삶을 살았다.
지금껏 살아오는 내내 옆에 머물렀던 행운이 자신을 버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한순간에 버려졌을 리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난처해하던 간병인이 병실을 빠져나가는 걸 알아차릴 정신도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와서 미리 준비해둔 듯한 종이 쪼가리로 추가 설명을 했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부러져서 얼른 재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거라고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자신의 관심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에 있었다. 진공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귀.
의사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려보자면서 책임감 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소리가 들리게 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귀나 고막을 다친 게 아니라 뇌의 문제라서 보조기기를 사용해 청력을 보조할 수도 없다고 했다.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흘러갔다.
며칠이 흐른 후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는데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침대 난간에 묶인 손은 떠나는 어머니를 잡지도 못했다.
병실에서 나가기 전에 안타까운 얼굴로 한마디를 하셨는데, 그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병원에 누워있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곤란해하는 간병인을 들볶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낸 교통사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신상이 밝혀졌다는 것과 병원에서 퇴원하면 마약 소지, 투약과 살인미수 혐의로 감옥에 가게 생겼다는 것을.
상해죄는 따로 언급하지 않고 살인‘미수’라는 것으로 보아 함이원은 멀쩡한 듯했다. 몸은 엉망이 됐고 귀까지 멀었는데, 목적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헛수고였다는 뜻이었다.
“?! ???!”
침묵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