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3
치명적인 함정
방앗간을 찾는 참새처럼, 나는 현오 형의 작업실을 틈틈이 찾았다.
시간이 빌 때마다 찾아오는 나를 형은 매번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귀찮은 기색도 보이지 않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10년을 알고 지낸 것처럼 형의 곁이 편했다.
최소한의 수업, 연습 시간을 제외하고 연습실에서 죽치고 뒹굴었다.
주말엔 이것저것 악기를 가지고 놀다가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가 혼나기도 했다.
요즘은 일정이 널널했다. 실기도 코피 쏟아가며 준비하진 않는 편이라 실기평가 기간에도 미친 듯이 바쁘진 않을 거다.
시험 기간이 되면 조금 바쁜 정도? 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니까.
오늘은 모의고사 날이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작업실에 방문했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고 안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늦지? 연습실에 있다고 했는데.
도어락 비밀번호라도 알려달라고 슬쩍 말해봤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자기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알려줄 순 없다나.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도어락 풀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젖은 채 수건을 뒤집어쓴 현오 형이 나타났다. 내가 씻는 도중에 온 모양이다.
“이원이 너 오기 전에 후딱 씻는다는 게. 어서 들어와. 뭐 먹을래?”
대답 대신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학교에서 오는 길에 있는 제육볶음 맛집에서 포장해왔다. 버스 타고 오는 동안 식긴 했겠지만 괜찮을 거다.
“네가 엄선한 식당이니까 먹어보나 마나 맛있겠지만, 얻어먹기 좀 그렇다니까. 돈도 내가 더 많은데.”
부모님 돈은 내 소유가 아니니 당연히 돈은 형이 더 많겠지. 그래도 용돈으로 이 정돈 살 수 있다.
부모님은 음악에 필요한 물품이나 의류 같은 지출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구매해주시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용돈으로 쓰는 건 교통비와 식비뿐. 집과 학교만 오가는 모범적인 생활(완벽한 외톨이 생활)에는 돈 쓸 구석이 없다.
사람을 만나기나 해야 이래저래 돈이라도 쓰지….
누군가를 만나면 대화는 기본. 그 기본을 하기 싫어 아싸를 자처해왔다.
그래서 현오 형과 친구가 되어서야 용돈을 조금 더 사용하게 됐다. 형과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더 먹게 되니까.
“차라리 내 카드를 줄까.”
형은 참.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않으려나 걱정이다. 무턱대고 카드를 넘기려고 하다니. 뭐 내가 카드를 받지도 않겠지만.
“모의고사는 잘 봤어?”
그거야 당연하다. 의기양양,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자 현오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고등학생은 다 이래? 키는 나만큼 커서 행동은 왜 이렇게 귀여워?”
“안 귀여워.”
조카 보는 삼촌같이 굴지 마. 시커먼 고딩이 어디가 귀엽냐고. 웃기는 소리.
“우리 이원이 공부도 잘하는구나?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노래를 못하지.
현오 형과 놀면서 보물 같은 그의 목소리가 문득문득 부러워진다. 아마도 이 콤플렉스는 평생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의학 발전은 왜 이렇게 더디지? 성대 이식 수술쯤은 간단히 해치워버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기형적인 성대만 빼면 나는 가진 것이 많다.
날 사랑해주시는 부모님.
부족함 없는 경제적 상황.
음악적 재능도 어느 정도 있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1% 안에 들 수 있는 지능.
부모님을 닮아 사람들에게 괜찮게 보이는 얼굴.
평균 이상의 키….
그래도 나는 부러움을 버리지 못하는 욕심쟁이다. 사람은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는 존재라지만….
오늘따라 진짜 못났다. 나.
우울해지는 마음은 속으로 접어두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척했다.
제육볶음을 한 입 먹으니 기분이 좀 풀린다. 역시 까다로운 내 혀를 만족시킨 맛집답다.
절묘한 간과 맵기, 그리고 살살 녹는 제육볶음의 육질이 입안에 군침을 돌게 했다.
싱싱한 상추와 깻잎에 제육 한 점을 올려놓고 청양고추와 뒤끝을 책임지는 마늘을 한 개씩. 밥도 조금 넣고 한입에 넣어 씹으면.
이게 바로 극락이지.
아삭한 식감으로 감싸인 감칠맛 나는 고기와 함께 매콤함과 알싸함이 혀를 자극했다. 균형을 잃지 않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현오 형도 말없이 밥 한 숟가락에 고기를 올려 입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의 식사란 보통 조용하고 빠른 흡입이었다. 우리는 경쟁하듯 제육을 정복하고 뿌듯하게 배를 두드렸다.
포장 용기를 치우고 나서 형은 연습실 청소를 해야겠다면서 곡을 선곡했다.
오늘의 선곡은 나도 멤버 이름을 전부 알 정도로 인지도 있는 의 ‘춤춰’였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파워풀하게 추는 댄스가 특징.
내 취향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틀어서 지겹게 들었던 노래다.
체할 생각인가? 형이 이 곡에 춤추지 않을 수 있을까? 선곡이 너무 세다고 생각할 때 현오 형이 자세를 잡았다.
그럼 그렇지. 벌써 발동걸렸네.
말리긴 늦었다. 춤추라는 단도직입적인 가사는 사람을 세뇌시키는 듯했다.
춤춰! 바로 지금! 춤춰! 숨이 차도록!
아이고 신나셨다. 빗자루를 든 채로 열창하면서 골반 돌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해는 된다. 형같이 흥 많은 사람이 참을 순 없을 테니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당장 춤추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고음을 질러댔다.
“이원아, 너도 같이하자!”
춤을 추라고? 내가…? 뭐, 못할 것도 없나? 어설프고 뚝딱거리겠지만, 초보니까 참작해서 봐주겠지?
프로 앞에서 추려니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아서 쪽팔리지만, 비웃음거리가 되진 않을 거다. 형이 날 낮춰봤다면 애초에 멀리했을 테니까.
“먼저 나 하는 거 봐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양 발바닥을 비비는 거야. 그리고 팔은 이렇게 들고 뻗었다가 접고, 반대편도 그렇게. 맞아. 잘 따라오는데? 그럼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한 번 쭉 보여줄게. 이 곡은 안무가 과격한 대신 어렵진 않거든. 누구든 춤추라는 뜻이라나.”
형은 처음부터 다시 ‘춤춰’를 재생시키고 자세를 잡았다. 나도 옆에서 시작 포즈를 흉내 냈다.
한쪽 벽을 채운 거울이 나와 형을 비췄다.
외롭게 우릴 기다리는 텅 빈 무대
마이크는 꺼져있고 노래는 멈췄지
Right now, out of breath
형 말대로 동작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문스톤처럼 춤출 수 없을 뿐.
내가 수월하게 동작을 베끼자 현오 형은 거울 속의 나를 흘깃거리다 안무를 이어갔다.
생명을 잃은 무대에 인공호흡
본능처럼 살아서 움직이게
마이크에 새로운 양분을
지루한 노래는 던져버리고
다음 부분은 형이 아까 이렇게 췄었지?
춤춰 바로 지금 춤춰 박자에 맞춰
춤춰 바로 지금 춤춰 숨이 차도록
어설프지만 박자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자 형이 입 모양으로 ‘오!’하고 기특해했다.
춤은 내가 추는데 왜 자기가 뿌듯해해?
무대를 점령하는 것이 나의 임무
이 위에 장렬하게 전사하더라도
누군가는 마지막 춤을 춰야 해
턱 끝까지 차오른 중독적인 숨
승리는 먼 곳에 있지 않아
Right now, out of breath
Right now, out of breath
심장 박동이 빠른 비트에 맞춰지는 것 같다. 몸에서 본능적인 흥이 우러났다.
원시적인 의사소통이 몸짓인 이유가 있구나.
몸을 이용한 표현은 극적이고 자유로웠다. 노래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춤춰 바로 지금 춤춰 박자에 맞춰
춤춰 바로 지금 춤춰 숨이 차도록
춤춰 바로 지금 춤춰 박자에 맞춰
춤춰 바로 지금 춤춰 숨이 끊어져도
Don’t stop dancing
Never stop dancing
그나저나 가사 한번 살벌하다. 죽더라도 춤을 멈추지 말라니….
무거워진 팔다리를 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음악을 멈춘 형이 달려들었다.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왜 이렇게 잘 춰? 춤 배워본 적 있는 거 아니야? 안무까지 잘 외우네!”
이게 잘 추는 건가? 즐겁긴 했는데, 잘 모르겠다. 문스톤 멤버들이나 형이랑 비교하자면 한참 부족해서.
“너 속으로 프로랑 비교하는 중이지? 그거야 아직 춤이 낯설어서 그렇지. 조금만 익숙해지면 실력이 쑥쑥 늘어날걸? 널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생기는데? 춤 배워볼래? 우리가 같이 노래 부르고 춤추면 그게 아이돌이지! 한 팀 하면 어때? 고등학생이랑 같이 아이돌팀 짜면 양심 없다고 하려나.”
어차피 볼 사람도 없을 텐데 타인의 평가야 무슨 상관.
지금처럼 같이 논다는 마음으로 해도 된다면, 괜찮을 것 같다. 재미도 있었고 더 잘하고 싶기도 하다. 재능도 있다니 괜히 흥미가 생겼다.
체력이 부족해서 조금 하다가 퍼질지도 모르지만,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까.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현오 형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조금만 어렸다면 좋았을 걸 그랬어. 한 5살만이라도. 그럼 이원이 너랑 진짜 같은 그룹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돌은 무슨. 헛소리다.
그런데 문득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연예계의 더러운 면을 체감했을 현오 형이 어떻게 나를 그 속에 끼워 넣는 상상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지.
진창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보통은 뜯어말리지 않을까 싶어서.
부정적인 가정이 몇 가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억측하기엔 형은 너무 선한 사람이었다. 혼자서 끙끙대기보단 솔직하게 물어보는 편이 오해를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질문까지는 음악으로 대체할 수 없다. 입을 여는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길게 말할수록 소리가 이중으로 섞여 상대방도 알아듣기 곤란해진다는 점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질문을 길게 적어 폰을 넘겼더니 그걸 읽고 현오 형은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윽고 정리를 마쳤는지 현오 형이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잠깐 앉아서 얘기하자면서 연습실 바닥에 나를 앉히고 본인도 앉았다.
“지저분한 연예계의 민낯을 낱낱이 알게 될 수밖에 없지. 직접 겪어보기도 했고. 솔직히 가끔 진저리치기도 했어. 그렇지만 연예계가 노골적일 뿐이지 어느 분야나 그런 면모를 가지고 있을걸? 욕망이 넘치는 사람들이 방송가에 모이니 격한 후폭풍이 일어나는 셈이지.”
어디든 인간이 모이는 곳이 깨끗하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대중도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도 연예인 지망생들은 넘쳐. 유명해지고 싶어서? 돈 많이 벌어서? 그것도 맞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때문일 거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라….
“연예인은 다수의 사람에게 사랑받을 기회가 주어져. 누가 그러더라. 대중의 사랑은 끊기 힘든 마약 같은 거라고. 망돌인 나도 저절로 납득되더라.”
형은 한쪽 다리를 접은 채 앉아있다가 과거를 되새기듯 천천히 대화를 이었다.
“리스크가 큰 만큼 열매도 달다는 뜻이야. 만약에 위험을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인 스타성이 있거나 강철 멘탈이 있거나 든든한 뒷배가 있거나 하면 난 추천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 결정은 결국 본인이 내리겠지만, 나라면 한 번쯤 모험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서.”
큰 위험엔 큰 이득. 논리적인 이유로도 설득되었다.
“그러니까 너를 아끼지 않아서 그런 소릴 했다고 오해하지 마. 내가 네 재능을 그만큼 높이 사고 있다는 의미니까. 너 천재야. 떠받들어 모실 만큼.”
“…노래하지 못해도?”
“Why not? 노래는 패널티라고 생각하면 되지. 노래까지 완벽하면 바로 아이돌 추천이겠지만, 이원이 너도 별로 원하진 않잖아. 난 아이돌 외길이지만 넌 달라. 네 앞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탑급 세션? 그거야 지금도 그냥 할 수 있지. 작곡, 편곡에도 미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작곡가나 프로듀서 쪽이 제일 유력하려나. 더 봐야 알겠지만, 댄서도 나쁘진 않아.”
이렇게까지 내 기분을 띄워주지 않아도 되는데 과장하긴. 알면서도 웃음이 피식피식 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 연예인을 수두룩하게 본 내 눈에도 띄는 아이돌 센터급 외모. 뭘 하든 ‘잘생겨서 유명해진다’에 전 재산도 걸 수 있어. 전직 아이돌의 판단은 그래.”
전 재산이라니. 칭찬 대회에 나가도 우승하겠다. 빈말이라도 기분이야 나쁘지 않지만, 그러다가 진짜로 믿어버릴까 겁난다.
기준선이 어디 저 아래 놓여있기라도 하나?
게다가 현오 형은 퍼주는 스타일이라 신빙성이 영….
어떻게 아이돌로 데굴데굴 구르고서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 인간혐오에 걸려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누가 나쁜 길로 유혹해도 쫄래쫄래 따라갈 것만 같았다.
분명 형이 연상인데 왜 어린 애 보듯 하게 되는지.
그나저나 그렇게 데이고도 아이돌을 하고 싶어 하다니. 엄청난 사랑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아이돌이었을까?
내 질문에 현오 형은 회상하듯 먼 곳을 응시하며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직접 겪어보니 의지할 수 있는 멤버들이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 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동료가 있는 거잖아. 힘들었어도 혼자서 외로울 틈이 없었어.”
마지막 말이 핵심이려나.
아직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현오 형은 고독을 즐길 수 없는 스타일이다.
심지는 곧은데 외로움에 흔들리는 사람.
현오 형은 무의식적으로 생존을 위해 아이돌 그룹을 원했을 수도 있다.
아이돌이 아닌 지금, 형은 외로울까?
노래할 수 없는 나라도 괜찮다면, 이젠 내가 형을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검지로 나를 가리키고 형을 다시 가리키면서 최대한 명확하게 발음했다.
“함, 정.”
“함정? 무슨 뜻이야?”
다시 한번 반복하자 현오 형은 그제야 뜻을 읽어냈다.
“너랑 나? 우리 성? 우리 그룹 이름?”
이윽고 형은 폭소를 터뜨렸다.
기막힌 우연이다. 함 씨인 나와 정 씨인 형이 이렇게 만나서 팀이 되다니.
팀 이름이 너무 촌스러운가. 영어로 해야 하나. TRAP?
“아하하, 웃겨서 눈물까지 난다. 난 직관적이라 좋아! 당신들을 퐁당 빠뜨려버릴 치명적인 함정!”
현오 형이 본격적으로 달려들 기세다.
…말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