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44
파이팅!
음원 플랫폼 순위를 확인한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몸은 피로와 근육통에 욱신거리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렸다.
나지막한 숨소리만 들리는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자, 현오 형이 습관처럼 떠올랐다.
형과의 만남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목소리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리라.
현오 형이 있었다면 아이돌이 된 오늘의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해줬을까? 자랑스럽게 여겨줬을까? 어쩌면 갓 아이돌이라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줬을지도.
현오 형의 목소리와 내 곡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할 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형이 나와 함께 즐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쩌면 내가 가진 목소리는 형의 영혼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할 때의 환희가 큰 만큼, 무대 아래로 내려온 후의 허전함도 커졌다.
‘직접 현오 형을 만날 수 있다면 이런 허무함은 없었을 텐데….’
이제는 형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소중하게 품고 있는 기억을 꺼내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득, 가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작정 견디는 수밖에는.
언젠가 그리움에 무뎌지는 날이 올까?
내일도 예정된 일정이 있으니 빨리 자둬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만 술렁거렸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동안에도 가슴 한편이 시려서 손으로 한참을 문지른 후에야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다.
* * *
매니저 형이 깨우러 올 때까지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 뒤척거린 나는 물론이고, 잠귀가 밝은 오란이나 초록 형마저도 피곤함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육체적인 피로만 따지면 어제 일정은 엄청 고된 편은 아니었지만 긴장하고 낯섦에 적응하느라 정신적 피로가 심했다.
매니저 형의 재촉에 일어난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낄낄댔다. 다들 퉁퉁 부어서는 붕어가 따로 없었다.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잔 것도 아닌데! 억울해!”
박하가 눈 위에 차갑게 만든 숟가락을 올리며 투덜댔다. 그보단 어제 울어서 그런 게 아닐까?
거울로 슬쩍 확인해봤더니 나는 살짝 붓긴 했어도 크게 티 나진 않았다. 부기가 없는 편이라 이것도 금방 사라지겠지.
아침부터 부기 뺀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나서 느지막하게 매니저 형과 함께 소속사 빌딩으로 출근했다.
테오라 스탭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다 얼굴만 마주쳤던 직원분들도 모두 우리의 데뷔 성적을 축하해주셨다.
회사 소속 연예인이라고 우리 음원 성적에 관심을 기울여 주셨구나. 진심으로 기뻐해 주셔서 우리도 어쩔 줄 모르고 90도로 허리를 숙여서 꾸벅꾸벅 인사했다.
실시간 차트가 아닌 Top100 차트에 꼴찌에서 세 번째라도 테오라의 노래가 들어갔다는 게 중요했다. 대중들이 플레이리스트 끝자락에서라도 우리 곡을 듣게 될 테니까.
음악 방송이 연속해서 잡혀있으니 이보다 순위를 올릴 수 있겠지. 요즘 음악방송 시청률이 처참하다고 해도 대한민국 전체의 시청자 수를 기준으로 나온 비율이라 우리에겐 그마저 영광이었다. 음악방송도 누구나 출연할 순 없으니까.
첫 음방 무대는 KBC 음악피크.
라이브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고 첫 음방이라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리허설하고 사전 녹화, 다시 리허설을 한 후에 생방송을 진행하는 순서였다.
대형 신인이 아니면 사전 녹화을 못한다고도 하던데 우리 스케줄에는 사녹이 들어가 있었다.
하눌 엔터와 KBC의 관계가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우리의 TV 광고를 처음으로 내보낸 채널도 KBC였고 첫 음방도 KBC에서 하고, 사녹까지 할 수 있는 걸 보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신인 아이돌 그룹 테오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들의 대기실을 일일이 방문해서 사인 앨범을 드리고 인사했다. 나는 아이돌 음악도 많이 들어서 앞부분만 들어도 무슨 곡인지 알아낼 수 있지만, 그게 어떤 그룹의 곡이고 그 그룹에 누가 속해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인사 오기 전에 열심히 공부해서 머리에 새겨두었다. 혹시나 실수라도 해서 찍히면 큰일이니까.
다행히 다들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키씨 엔터의 바닐라진 선배들에게도 산뜻한 인사를 되돌려받았다.
‘뮤비 감독 빼가기’에 바닐라진 선배님들의 의사가 들어갔다고 보기엔 억지스러운 것 같았다. 감쪽같이 연기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그보단 키씨 엔터에서 손을 댔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대부분의 연예 기획사는 아이돌을 ‘기획’해서 내놓고 아이돌은 그에 따라 움직이니까. 하눌 엔터가 예외적인 경우였다.
“남초록? 초록이냐?”
인사를 하느라 복도를 걷는데 초록 형을 알아보는 중년의 남자분을 만났다. 어디로 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분으로 보였다.
“잘 지내셨어요. 삼촌?”
초록 형의 인맥이 여기까지 퍼져있었나. 놀라면서도 납득했다. 대배우인 아버지를 두면 아버지 나이대의 지인을 방송국에서 만날 수도 있구나. 대선배 가수와 격의 없이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겠다.
“이런 화장에 의상…. 아이돌? 아이돌로 데뷔한 거냐? 네 아버지는 어쩌고.”
“모른 척해주세요. 삼촌. 아버지가 물어보시면 시치미 떼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애교 있는 어조가 초록 형과 삼촌분의 친분이 얼마나 깊은지 나타냈다. 초록 형을 제외한 멤버들은 복도 벽에 바짝 붙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자리를 비켜주고 싶기는 한데 초록 형 혼자 남겨두기도 그렇고 좁은 복도에서 어디 숨어들 곳도 없었다.
“초록아….”
“어차피 아버지도 곧 아시게 될 텐데 그거 삼촌이 감당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 어린 애 아니에요. 삼촌.”
초록 형의 단호한 대답에 삼촌이란 분은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뭉툭한 손으로 두드려 격려한 후에 사라졌다. 눈치를 보니 초록 형의 아버지는 아이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그럴 수 있다. 그 나이대 어른들 대부분의 머릿속에 박힌 아이돌 이미지는 별로 좋진 않은 게 실상이니까.
게다가 연예계에 연이 있는 분이라면 아이돌의 삶이 어떤지 알아서 더 반대하실 수도 있었다. 어찌 됐든 초록 형과 아버지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였다.
말발로는 안 지는 초록 형이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하다니. 초록 형의 아버지가 그만큼 완고하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우리는 가까이 모여 앉았다. 칸막이로 나뉜 대기실은 넓지 않은 데다 방음이 허술해서 다른 팀을 방해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미안. 내 문제 때문에 시간 빼앗겨서.”
개인적인 사정이더라도 사과까지 하면서 선을 그으면 서운하다. 앞으로의 7년 동안 우리는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 텐데.
내가 멤버들과 거리를 뒀다고 다신 그러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우린 친형제나 마찬가진 줄 알았는데…. 착각….”
멤버 누군가 문제가 생긴다면 다들 나서서 도울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막내라고 했던 것도 불쾌하지 않았다. 형제자매가 없어선지 조금은 기쁘기까지 했는데….
“…이원아. 형이 잘못했어. 우리 애기 맘도 몰라주고.”
무의식중에 중얼거림으로 마음이 새어 나왔나. 머리로 생각한 것보다 더 서운했는지도. 초록 형이 나를 껴안고 흔드는 동안 고개만 숙이고 달아오르는 귀를 숨겨야 했다.
진심을 말로 표현하는데 왜 부끄럽냐고 물었던 과거의 나를 매우 치고 싶었다. 진심이어서 더 부끄러울 수도 있구나.
“애기는 아니고….”
“아이구, 애기는 아니에요? 그래쪄요?”
눈을 꾹 감고 민망함을 견뎠다. 주변에 어린아이가 없어서 초록 형의 말투에 소름이 끼쳤다.
부르르 떨자 멤버들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눈동자만 슬쩍 돌려서 초록 형의 얼굴을 확인하니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진짜 막내가 있으니까 막둥이라고 부르긴 그렇고, 애기로 가자.”
“이미 결정된 듯이 권유하지 마…. 초록 형.”
적어도 나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열여덟 살이면 시커멓고 징그러운 시기일 텐데. 함이원 넌 귀엽네.”
“누가 봐도 귀여운 홍오란이 할 말은 아니야. 그리고 내가 너보다 9개월은 일찍 태어났는데 왜 내가 더 동생인 것처럼 그래?”
“내가 외면의 귀여움이라면 너는 내면의 귀여움이랄까. 귀여움에 나이 있나?”
그런, 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오란이 귀여움에 대해 연설했다.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용하는 오란은 귀여움의 작동방식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고심한 티가 났다.
“다들 똑똑히 들어둬. 귀여움은 강력한 무기야. 아기나 고양이, 강아지를 떠올려보면 생존전략의 하나이기도 해. 처음 볼 땐 겉모습의 귀여움이 눈에 띄겠지만 어느 순간 사라질 수 있으니 잘 가꿔야 해. 반면 귀여운 행동이나 생각은 대중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아이돌인 우리의 수명을 늘려줄 열쇠야.”
“와?! 오란 형 귀여움학 박사야?”
“아이돌로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지.”
“어려운데. 귀여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제톤. 우선 귀여움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 귀엽다는 ‘사랑스럽다’와 비슷해. 칭찬이겠어, 아니겠어?”
‘귀엽다’는 확실히 아기나 반려동물에게 쓰는 경우가 많고 다 큰 남자에겐 익숙지 않은 단어다. 연인 사이에서나 쓰면 모를까.
오란이 내게 귀엽다고 했을 때, 초록 형이 내게 아기라고 했을 때 거부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잘못된 인식이었구나! 누군가 귀엽다고 하면 감사하게 받아들여야겠다. 날 사랑스럽게 여겨준다는 뜻이니까.
“일부러 귀여운 척 오버할 필요는 없어. 저절로 우러나는 귀여움이 더 특별하니까. 잘못하면 비호감이 되기도 하고. 대신 명심해. 귀여움은 세상을 구해.”
거, 거창하다.
오란이 너무 진지해서 멤버들 아무도 대꾸할 엄두를 못 냈다. 오히려 신선한 자극을 받고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결론은 이원 형이 애기라는 거지?”
“왜 그렇게 되는데?”
진짜 막내 박하에게까지 애기라는 호칭을 듣기는…. 그렇지만 방금 들은 얘기 때문에 차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오란의 일장 연설은 이를 위한 밑밥이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오란을 쳐다보자 의미심장한 미소로 내 시선을 마주했다. 아, 맞구나.
“맙소사….”
용의주도한 홍오란. 완전히 당해버렸다. 다들 눈치챘는지 내 감탄사에도 웃느라 들썩이는 어깨를 감추지 못했다.
아니, 눈치 없는 서혼 형까지? 이럴 수가. 애기라고 불리긴 싫어서 말을 꺼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우물쭈물하다가 리허설과 사전 녹화 때문에 전부 잊고 말았다.
* * *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전부 신기하기만 했다. 음악 방송의 세트장도 PD님도, 우리 모습을 모니터링하는 것도, 객석에서 우릴 지켜보는 분들도.
무대에 설 때마다 객석에서 열심히 환호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우리 팬들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마도 다른 분들의 팬이신 것 같았다. 생방송 일정은 공식 계정에 공지됐지만, 테오라 사녹 스케줄을 알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그래도 호응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한껏 힘이 났다. 그리고 생방송이 더욱 기다려졌다.
이번에 데뷔 평가 무대에서 느꼈던 그 짜릿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도 그때의 기분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숙소에 갔다가 생방송을 위해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묘했다. 내가 진짜 아이돌이구나 싶어서.
1년 전만 해도 누가 나보고 방송국을 드나들게 된다고 했으면 코웃음을 쳤을 텐데.
내가 어떤 감상을 느끼던 스케줄은 착착 진행됐다. 리허설을 하는데 선배 가수분들이 구경 오셨다.
원래 이런가?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아서 쑥스러운데. 그래도 우릴 보시는 선배님들에게 ‘신인치곤 괜찮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게 리허설에 최대한 집중했다.
생방 순서는 빠르게 다가왔다.
수정 화장을 마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을 풀었다. 매니저 형이 들고 다니는 카메라엔 이제 익숙해져서 신경도 안 쓰였다.
“실수 없이 잘 끝내고 오자. 다들 손 모아.”
“각자 수식어 붙여서 한마디씩 하는 건 어때. ‘우주최강귀요미 오란!’ 이렇게.”
오란의 제의에, 첫 음방 무대를 앞두고 가졌던 긴장감 대신 어이없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귀여운 척을 넘어 뻔뻔함이 극에 달해 있는 멘트. 그런데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진짜로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바로 무대에 올라가야 할 시간. 홍오란의 돌발 행동은 거기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리더 초록 형의 손 위에 차곡차곡 손을 쌓았다.
희망찬 예감이 들었다. 설령 이번에 실수하더라도 테오라는 반드시 뜨고야 말 거라고.
“둘셋, 테오라, 테오라,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