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46
누군가의 입김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우리 무대의 완성도는 높아져만 갔다. 팬카페에 가입한 사람 수도 차근차근 늘고 있다고 들었다.
음방 PD님이나 관계자분들에겐 계속 칭찬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실질적인 성과로 돌아오진 않았다.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 결과를 바란다면 욕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햇병아리에 불과하니까.
“데뷔하면 스케줄이 쏟아질 줄 알았더니.”
나도 스케줄이 넘쳐서 컨디션이 엉망이 될까 봐 겁부터 먹었다. 하지만 그건 극소수의 케이스에만 해당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데뷔 전에 앨범을 사전 예약하거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지도를 얻은 멤버가 있어야 일정이 빽빽하게 찰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오랜 기간에 거쳐 예비 활동을 해서 미리 팬을 확보하던가.
우리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3대 기획사에 들어가 데뷔했더라면 더 큰 관심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의 멤버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 기획사를 모두 걷어찰 수 있었다. 얼마든지.
뭐, 그중 하나는 이미 걷어차기도 했고.
“일정이 여유로워서 축하도 제대로 해줄 수 있잖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난 생일선물보단 스케줄을 받고 싶은데.”
스케줄이 없으면 바로 연습실 행인데 오늘은 특별히 오란 생일이라서 외식을 하러 나왔다. 풀떼기만 먹느라 멤버들 모두 오늘만을 기다렸다.
생일이라고 파티한다거나 요란하게 축하하진 않았다. 케이크 하나 사고 함께 밥 한 끼 먹을 뿐이었다.
오늘은 매니저 형이 같이 자리했다. 머리 색이 형형색색이라 누가 봐도 아이돌이라서 경호원이 필요했다.
“근데 오란아. 생일 밥상으로 매운 닭발은 아니지 않을까? 네가 원하니까 여기로 오긴 했지만.”
“여기 갈비찜도 팔아. 그거 먹어.”
“그것도 매운 갈비찜이잖아….”
오란은 매운맛에 빠져있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만큼 잘 먹기도 했다. 입술까지 얼얼하게 매워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데 보통 사람들에게 그 정도는 극한의 매운맛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매니저 형도 있어서 그런지 자제해서 마지막 단계 매운맛으로 시키진 않았다.
데뷔 전에 와서 시도했다가 나가떨어진 경험으로 나는 앞으로 매운맛을 즐긴다는 발언을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갈비찜 제일 약한 맛으로 시켜 먹어.”
약하다고 해도 칼칼한 정도의 맵기라 순한 맛은 아니었다. 오란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그래도 매운 음식을 아예 못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식당의 음식 솜씨가 뛰어나기도 해서 또 오고 싶긴 했다.
연습하고 다이어트하고 데뷔 준비하느라 올 시간이 없어서 이제야 두 번밖에 못 왔지만.
“매니저 형도 먹어요! 먹고서 케이크랑 커피 디저트로 먹어도 되죠?”
오랜만에 달달한 디저트를 먹을 생각에 박하는 벌써 입맛을 다셨다. 디저트를 자주 먹진 않았지만 다이어트하느라 금지된 당을 섭취할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다들 매니저 형에게서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먹어도 된다. 여태 꾀부리지 않고 다이어트 잘 해왔고, 가끔은 치팅데이도 필요하지.”
“오오오오.”
“디저트! 디저트! 케이크! 바닐라 라떼!”
나는 호들갑 떠는 멤버들이 부끄러워서 슬쩍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일행이 아닌 척하고 싶지만, 행색이 누가 봐도 같은 팀이었다.
모자를 써도 화려한 염색은 가려지지 않았다. 갈색이면 모를까 푸른 빛이 도는 은색 머리는 보통은 엄두도 내지 않는 색상이었다. 연예인이라서 허용할 수 있지 일반인이 이러고 다니면 관심이 고프구나 싶을 것이다.
“오란아 생일 축하해. 잘 먹을게.”
“생일 축하해! 오란 형!”
“happy birthday, 오란.”
“생일 축하한다. 홍오란.”
멤버들과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겹쳐서 가게 안을 울렸다. 칸막이는 되어 있어서 그나마 시선을 막아줬다.
“생일 축하는 그걸로 됐으니까 먹기나 해. 매니저 형도요.”
새빨갛게 양념한 갈비찜은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색이 나올까 싶은 빨강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 얹어서 한입에 넣자 소고기 특유의 향이 맡아지고 칼칼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버섯을 하나 집어 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는데 옆에서 과격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매니저 형?”
“괜찮아요? 여기 물이요.”
“이모! 여기 쿨피스 하나만 주세요!”
낯빛이 갈비찜과 같은 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매니저 형은 매운 거 못 먹는구나. 같이 밥을 먹긴 해봤어도 각자 메뉴를 시켜서 매운 걸 못 먹는다는 건 처음 알았다.
어쩐지 김밥이나 뚝배기 불고기, 계란찜 같은 메뉴를 고르더라니. 라면도 시킨 적이 없었네?
“매운 거 못 먹으면 말하지 왜 그냥 먹어요.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오란은 핀잔을 날리는 와중에 무섭기까지 한 뻘건색의 닭발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매웠는지 매니저 형이 다시 콜록거렸다. 190이 넘어가는 건장한 사내를 무너뜨리는 게 매운 갈비찜이라니.
“괜찮, 큽, 괜, 콜록, 괜찮아졌어.”
“괜찮긴요. 다 죽어가는데요.”
“준현 형. 돈가스랑 냉면 중에 뭐가 나아요?”
몇 달을 알았는데 이런 것도 모르다니. 매니저 형에게 무심했던 것 같다. 묵묵히 우리 곁을 지키다가 필요한 순간마다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매니저 형이었는데.
개성적인 애들 여섯을 건사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매니저 형은 업무 외적으론 우리를 터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아프진 않은지, 불편함이나 외로움을 느끼진 않는지 세심하게 신경 써주곤 했다.
아무리 일이라고 해도 거기까지 배려해주는 매니저를 만난 건 천운이었다.
매니저 형은 쿨피스를 들이키고 나서야 진정했다. 나는 슬그머니 물컵을 매니저 형 쪽으로 밀었다.
“이원아. 괜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약한 매운맛이라길래 얕본 내가 멍청했으니까.”
표시가 났나? 사적인 자리에선 아무래도 표정이 솔직해지게 돼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전에도 표정으로 다 말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
“매니저 형. 하나 물어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매니저 그만둘 계획 없죠?”
콜록콜록?
단체로 사레라도 들렀나? 갸웃거리며 매니저 형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따끔따끔한 시선이 온몸을 찔러댔다.
“야. 그게 무슨….”
“없다. 그만두긴 싫은데. 너희처럼 바른 애들 만나기도 힘들고. 내가 담당을 바꿨으면 하나? 그러면….”
“네? 아니요. 오래 매니저 해줬으면 해서요. 그만두더라도 연락 끊지도 말고요.”
또다시 이별부터 걱정해버렸다. 헤어짐이 겁나서 마음을 주지 못하는 건 나쁜 버릇인데 고치기가 어려웠다.
사람을 사귈 때 헤어질 걱정을 먼저 하면 안 되는데 그게 잘 안됐다. 그래서 아예 이별을 전제해두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젠가 헤어질 사람이지만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식으로.
그래도 준현 형이 금방 매니저를 그만둔다면 힘들 것 같아서 물어봤는데 의사소통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혼 형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초록 형은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지온은 무슨 말이 나오거나 말거나 식사에 전념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던 오란이 시큰둥하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깜짝이야. 에둘러서 매니저 그만두라고 말하는 줄.”
“내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으면 그대로 말하면 되잖아?”
“헐.”
투욱.
오란이 들고 있던 뻘건 양념이 묻은 닭발이 그릇으로 떨어졌다. 뭐 문제 있나? 눈만 깜빡이면서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그걸 직설적으로 얘기하겠다고? 당장 그만둬, 이렇게? 와? 싸가지가 아주.”
“내가 언제 그렇게 막….”
“이원아. 사회생활을 하려면 돌려 말할 줄도 알아야 해. 안 그랬다간 곤란해질걸.”
우리 중에 제일 사교적인 초록 형이 말하니 신뢰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직설적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 이상이구나.”
지금까진 아무런 문제 없었는데. 소리 내어 말하게 된 날 이후로 난 에둘러 말한 적이 없었다.
머릿속의 이야기나 감정을 이리저리 꼬아서 표현하면 오해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속뜻까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간접적으로 말하려면 피곤하기도 하고.
“돌려 말하는 거랑 상대를 배려하면서 말하는 거는 별개라고 생각해.”
미안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덜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돌려서 말한다지만, 과연 그런 의도이기만 할까.
상대방이 의도를 눈치채도록 돌려 말하면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고서도 압박할 수 있다. 자신은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위치에 서서.
“…그래. 이제까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상대에게 예의 갖춰 말하기와 돌려 말하기는 엄연히 다르지.”
“나도 동의. 이원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초록아.”
솔직할 뿐이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말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도 눈치는 나쁘지 않다. 아마도….
“내가 오해했어. 방송에 어떻게 비칠 지부터 걱정하다 보니까 어쭙잖게 충고부터 해버렸네. 미안, 이원아.”
초록 형의 사과에 오란도 자기가 오해의 소지를 만들었다며 짧게 사과를 남겼다. 괜찮다고 대꾸하면서 다시 숟가락을 잡았다.
“밥 먹다가 웬 날벼락? 이원 형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그래.”
“이원아. 너 혹시….”
“얼른 먹고 카페 가자. 시간은 여유 있죠, 형?”
“3시까지만 들어가면 된다.”
내가 매니저 형에게 질문을 해야 했던 이유를 초록 형에게 들킨 것 같아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며 물이 들어 있는 컵을 잡자 초록 형이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얘기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당장은 회피에 성공했다.
* * *
오란의 생일 이후로 몇 번의 음악방송에 더 출연했다. 데뷔한 지 한 달을 다 채워갈 즈음, 회사 분들과 테오라 멤버들은 슬슬 불안함에 휩싸였다.
신인이라 방송 관계자들에게 우리 인지도가 거의 바닥이겠지만, 그렇다 쳐도 심할 정도로 추가 스케줄이 잡히지 않았다.
“관계자 평가는 우호적인데 이상하군.”
“매니저 형도 그렇죠? 저만 뒤끝이 찝찝한 거 아니죠?”
은연중에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매니저 형까지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뜻.
하지만 이유를 알아낼 방법도 없었고, 이유를 알게 되더라도 그걸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없었다.
“잠시만. 통화하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매니저 형은 지인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캐내려는 계획 같았다. 멤버들은 각자의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음방도 잘했고! 대형은 아니어도 방송가엔 잘 알려진 회산데 이렇게 접촉이 없다니. 말도 안 돼! 유명 예능이나 뮤직 토크쇼 같은 스케줄까진 바라지도 않는데. 아이돌 우르르 몰려갈 때 한 자리 낀다거나! 인터넷 방송 게스트도 괜찮은데! 테오라 불러달라고요….”
박하가 줄줄이 하소연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지온은 테이블 위를 손톱으로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혼 형과 오란은 테오라 전용 휴대폰을 가지고 나갔다 돌아오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린 초록 형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그 눈빛을 못 이기고 초록 형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입김을 넣은 것 같아.”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