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48
마지막 일꾼 (1)
촬영일이 멀지 않았다.
예능 초보인 테오라에게는 준비가 필요했다.
원래 ‘마지막 일꾼’은 일반인이 출연해서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을 체험시키는 프로그램. 그 모습을 찍어 원하는 선택에 따라 자기 PR 자료로 활용하게 해준다고 했다.
TV에 출연할 용기를 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방송으로 이 사람과 함께 일해도 괜찮겠다 싶은 모습을 보여주면 면접에 도움이 됐다. 방송을 봤다면서 역으로 취업을 제안받았다는 후기도 있었다.
시청자들은 빡센 일을 해봤으니 새로 일하게 된 회사에서 오래 버틸 순 있겠다고 평가했다. 취지 자체는 훈훈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구성이 느슨해서 지루하다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보다 보면 은근히 재밌긴 한데, 다큐의 느낌이 물씬 나는 터라 채널을 돌리기 쉬웠다. 목요일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방영한다는 약점도 있었다.
여러모로 약점투성이인 프로그램이지만 테오라는 ‘마지막 일꾼’에 사활을 걸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테오라가 출연한다면 포맷이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회의 끝에 취업 기회를 알선해주는 대신 일일 체험 후 테오라가 원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추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정말로 저희가 원하는 프로그램 뭐든지요?”
공중파 PD와 작가의 추천이란 소리에 멤버들의 눈이 확 뜨였다.
“섭외야 그쪽 판단이라 꽂아드릴 순 없어도 추천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저희가 비록 이번 프로그램에선 빌빌거리지만, 방송국 짬이 되니까 여기저기 찔러보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죠!”
두 손을 모아 꼭 쥔 작가님은 우리를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바라봤다. 구원자라도 만난 듯한 태도라 살짝 귀가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초록 형이 한껏 눈을 휘며 감사를 전했다.
우리 쪽에서 매달려야 하는 처지라고 생각했는데 서로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였던 것 같다. 테오라 멤버들은 괜한 자신감까지 생겨서 한껏 어깨가 솟아있었다.
“이번엔 테오라 분들 전부 일일 체험을 하게 될 예정인데요. 직업 체험한다고 생각해주시면 돼요. 테오라 여러분이 느끼는 보람,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드리는 감사에 초점을 두려고 해요.”
프로그램이 폐지의 갈림길에 섰으니 신인 아이돌이라는 보기 좋은 간판을 이용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도 모든 일꾼을 응원한다는 애초의 취지는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
이전 회차에서는 체험자들의 사정이나 각오에 서사가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누가 대상이 되느냐에 따라 재미있을지, 없을지가 갈리기도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의욕이 넘치셔서 든든한데요. 그래도 단단히 각오하셔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안 그래도 ‘마지막 일꾼’ 이전 회차를 복습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특별히 당부할 만큼 각오가 필요하다고?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킬지 예상이 안 갔다. 소를 키우는 농장에 가서 똥을 치운다거나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다거나 택배 상하차를 돕는 편도 있었다. 이보다 더할 수가 있나?
* * *
며칠 후, 칼바람이 부는 아침 길거리에서 ‘마지막 일꾼’ 촬영이 시작되었다. 아파트단지 주변에 작게 조성된 공원이었는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행인이 아무도 없어서 촬영하기는 편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마지막 일꾼을 찾아주셨는데요. 바로~.”
마지막 일꾼의 MC는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나운서 최정상 씨.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진행으로 예능보다는 교양 프로그램에 특화된 분이셨다. 체험에 동행하진 않고 초반 진행이나 개인 인터뷰 촬영에만 함께했다.
“안녕하세요! 마지막 일꾼 시청자 여러분! 오늘의 게스트! 신인 아이돌 테오라입니다!”
“무한한 가능성, 테오라! 인사드립니다! 저는 상냥한 리더 초록.”
“여러분의 든든한 지킴이 서혼.”
“카리스마 래퍼 제톤. a-yo!”
“하늘이 내려준 아이돌 함이원.”
“애교 만점 귀염둥이♡ 오란!”
“테오라의 자부심이자 비주얼 박하입니다~.”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는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로 결정하고, 서로의 수식어를 고쳐주기도 했는데 직접 들으니 파괴력이 굉장했다.
내 입으로 ‘하늘이 내려준 아이돌’ 같은 말을 이름 앞에 붙이게 되다니…! 과장과 허언은 연예계의 특징인가?
미모에 한 톨의 의심도 없는 박하의 태도는 익숙했다. 하지만 오란의 변화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충격.
무대에서 오란의 비즈니스 모드를 봤지만, 예능에서는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천연덕스러울 줄이야.
파르르 떨리려고 하는 입가에 힘을 주어 견뎠다. 저런 뻔뻔함은 본받아야 하는데.
테오라 멤버들은 첫 예능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삐걱대기도 했다. 그렇지만 PD님은 신인이라고 치면 양호하다고 우리를 다독여주셨다.
“실수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기죽을 거 없어요. 오히려 텐션이 좋아서 덩달아 힘이 나는데요? 아이돌은 아이돌이네요.”
“PD님, 혹시 저희한테 바라시는 거 있으세요? 있으면 몽땅 말씀해주세요! 뭐든지요!”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박하 때문에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PD님이 뒷걸음질 치셨다. 부담스러울 만도 하지. 우리 멤버들도 가끔은 지치지 않는 치근덕거림에 기를 빨리는데.
서혼 형이 조언하길, 그럴 땐 산책을 4시간 정도 시켜주면 된단다. 박하가 활동량 많은 대형견인가? 뭐, 하는 짓을 보면 별반 다르진 않다.
“컷!”
오프닝을 찍은 후에 오늘의 일거리를 제공해주실 분을 만나러 이동했다. 왜 오프닝 장소가 아파트단지 주변인가 했더니….
테오라 멤버 일동은 촬영 전에 작가님이 우려를 표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여기 도대체 몇 층이야…?”
아파트 꼭대기가 까마득했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 물론 있어도 해야 함!”
우리가 체험하게 된 일은 아파트 외관 도색작업.
아파트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면서 페인트를 칠하면 된단다. 적어도 3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 옥상까지 몇 미터나 될까?
“아…. 나 큰일 났다….”
무슨 걸림돌이든 후딱 치워버리는 능력자 초록 형답지 않은 약한 소리였다. 하긴 고소공포증이 사람을 가리진 않는다.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 손들어 봐.”
매니저 형도 자세한 사항은 전달받지 못해서 뒤늦게 멤버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초록 형과 지온이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제톤 너도?”
“심하진 않아요. 근데 혹시나. 높이가. 높아서…. 혹시나. 떨어지면….”
최악의 사태를 머리에 상상하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지온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든 멤버인데….
나는 고소공포증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재차 감사함을 느꼈다.
오늘의 작업 환경은 일의 고됨이 아니라 높이의 공포과 싸워야만 한다. 이번 촬영에서 멤버들의 의외의 모습을 여럿 목격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누가 봐도 아이돌 같았던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모였다. 야외 촬영이고 온몸에 페인트가 묻을 것을 생각해서 활동적인 작업복으로 골랐다.
겉은 스포티한 트레이닝복에 경량 패딩만 가볍게 걸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안은 기능성 의류와 핫팩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낮 기온이 영하 5도,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라니 아파트 꼭대기에 매달린 동태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입어야 했다.
오늘 우리를 하루 고용할 분은 젊은 남자분이셨다. 아르바이트로 도색작업을 해가면서 대학교 등록금을 벌다가 직업으로 삼아서 지금은 어엿한 사장님이라고 하셨다. 작업복을 입은 사장님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촬영팀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신인 아이돌 ‘테오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메라가 낯선지 사장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사장님의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잠깐의 쉬는 시간에 조연출님으로부터 ‘다들 열정을 조금만 줄여주실래요…?’하는 부탁을 들었다.
다들? 박하 한정이 아니라?
사장님의 긴장은 카메라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애들이 본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었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나도 그랬다고? 난 얌전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소개를 마치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왔다. 제작진까지 전부 올라오느라 엘리베이터가 몇 번이나 30층을 왕복했다.
“오늘 도색할 아파트는 지상 30층이고 높이는 100미터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100미터…. 100미터. 위에서. 떨어지면….”
옥상에 올라와 땅을 내려다본 지온이 넋을 빼놓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박하가 얼른 끼어들었다.
“어쩐지 꼭대기가 엄청나게 멀리 있더라고요! 사장님. 저희는 뭘 준비하면 될까요?”
“다른 준비는 해둬서 페인트만 칠하시면 됩니다. 본 작업만 해도 하루가 부족해서요.”
“안전 장비는 어떻게 하세요? 사장님은 안 무서우세요?”
눈을 꼭 감은 초록 형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대신 박하가 질문 로봇이 되어 정적이 흐르지 않게 이야기를 이었다.
“저도 무섭죠. 그래도 이젠 적응돼서 괜찮습니다. 가족들 먹여 살리려면 이 정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우와! 사장님 멋있어요! 가족분들이 사장님을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저라면 그랬을 거니까요!”
살짝 볼을 붉힌 사장님은 미리 준비해둔 안전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장비까지 모두 가져온 상태였다. 그래도 테오라 멤버 전원을 태우기에는 모자라서 테오라는 두 팀으로 나눠 체험하기로 했다.
제작진도 출연진의 안전을 위해서 장비를 따로 준비해서 옥상에는 줄이 12개나 매달려있었다.
“원래는 로프를 이중으로 거는데 거기에 한 줄이 더 추가됐으니 안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심하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제 줄 타고 내려가면 되나요?”
사장님은 내 질문에 몸에 줄만 걸면 된다면서 누가 먼저 내려갈지 정해달라고 했다.
“먼저 내려갈 사람? 우선 나하고.”
오란은 먼저 자기를 포함해서 물었다.
“…….”
“…난 나중에.”
초록 형은 입술을 뗐다가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물었다. 지온은 매를 나중에 맞겠다며 순서를 미뤘다.
이 둘이 줄에 의지해 공중에 매달릴 수 있을까? 나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초록 형과 지온이 체험을 포기할 거란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다.
테오라에게 이번 촬영은 사활이 걸린 일이니까.
“나 지원할게. 안전한지 확인시켜주면 덜 무섭겠지?”
“서혼 형, 나도 먼저 내려갈래.”
먼저 내려가는 조에는 오란과 서혼 형, 그리고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 있게 나섰지만, 솔직히 30층은 너무 높았다. 뒤로 돌아 다리를 하나씩 벽에 딛는데 손이 미끄러웠다.
땀이 언제 이렇게….
“이원아. 많이 무서워? 더 천천히 가자고 할까?”
“아니. 인간의 생존본능이 나왔을 뿐이야. 별로 안 무서워.”
이상하게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렇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촬영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