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49
마지막 일꾼 (2)
제작진이 준비한 고층 외벽 도색 체험.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이 됐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기다란 롤러로 벽을 열심히 칠했다. 판자로 만들어진 의자가 흔들거릴 때마다 운동화 속에서 발가락이 움츠러들기도 했지만, 상태는 양호했다.
오란과 내가 허술하게 페인트칠 한 부분은 사장님이 한번 지나가면 말끔하게 칠해졌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서혼 형은 어땠냐면.
“혹시 저랑 동업할 생각 없습니까? 도색업자도 유망한 직종이거든요. 서혼 씨는 외벽 도색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혼 씨와 함께라면 이 업계를 평정할 수 있을 겁니다!”
“어, 저기 사장님….”
왜 사장님이 우리 멤버를 꼬시고 계시지? 그림이 이상하다.
물론 우리나 제작진이 보기에도 서혼 형의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았다.
서혼 형은 사장님의 시범을 한번 보더니, 줄에 의지해 공중에서 곡예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한 면을 순식간에 칠해냈다.
기다란 롤러를 든 채 발을 벽에 대지 않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서혼 형에게선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10년 경력의 사장님과 거의 비슷한 경지였다.
“오란 학생, 괜찮습니까? 무서우면 위에 연락해서 잠깐 쉬고 오는 게….”
“아, 아니에요. 중간에 포기할 순 없어요. 제가 서툴러서 불편하세요? 죄송해요. 열심히 해볼게요오.”
“아니, 아니에요. 오란 학생은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아이구, 울지 말고….”
가증스러운 오란. 저 연약하고 무해해 보이는 말랑이가 진짜 홍오란이랑 동일 인물이라니….
사장님, 그 녀석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려 보이면 오란한테 학생 호칭을 붙이시지? 인생무상을 맛보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하늘만 눈에 들어왔다.
“이원 씨는 참, 기특해요. 이 높이에서 엄살 하나 없이, 무서우면서도 꿋꿋하게…. 우리 아들도 이원 씨처럼만 크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아닌데요, 사장님. 저 별로 안 무서운데….”
“우리 와이프가 지금 둘째 임신 중인데 예쁜 것만 보겠다고 찾아다니거든요. 아기가 여자애라서 더 그런가 유난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이따 사진 찍어줄 수 있을까요?”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예쁜 것? 여자애? 그게 내 사진과 도대체 무슨 연관이…?
얼결에 알겠다고 대답부터 했지만, 여전히 사장님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쁘고 잘 생겨야 아이돌 한다고 듣긴 했는데 실물 보니까 왜 열광하는지 알겠습니다. 와이프가 눈이 정화된다든가 미남은 인류의 유산이라나 뭐라나 그러던데 그런 표현이 나오는 이유가 있네요. 이원 씨는 부모님 뵐 때마다 감사드려도 모자라겠습니다.”
아니 사장님, 그런 사적인 정보를…. 방송에 이 얘기가 나가면 사모님께 구박당하시지 않을까요.
방송 당일 사장님께 안부 물을 겸 연락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우리 셋은 한 시간쯤 푸른 빛이 살짝 도는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바톤 터치를 했다. 나머지 세 명, 초록 형과 지온, 박하 차례.
촬영을 위해서 촬영 스탭은 옥상과 도색이 진행되고 있는 아래층의 가정집을 미리 빌려 창문을 통해 촬영하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님도 줄에 매달려 촬영하기는 싫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촬영팀과 합류해 도색 체험을 하는 세 명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사장님. 너, 너무 ㅊ, 추운데 얼음 되면 어떡해요?”
“아직 10분도 안 지났습니다. 제톤 씨….”
저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수 쓰는 거 같은데. 사장님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거 안, 안 떨어져요? 떨어지면 immediately 죽음 아니에요?”
“이미, 이미디? 떨어지면야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톤 씨가 쓰는 줄이 약해 보여도 특수소재에….”
어긋나 있으면서도 묘하게 대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지온은 이후에 혼자 외계어를 중얼거렸다.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새로운 언어에 눈을 뜬 게 아닐까.
“괜찮습니까?”
“…….”
고개를 빳빳하게 세워 앞만 응시한 채로 새하얗게 질린 초록 형. 제작진도 초록 형의 안색을 관찰하더니 동요하기 시작했다.
“초록 씨? 초록 씨?”
“네. 저는 남초록. 이제 스무 살이고 혈액형은 O형입니다. 가까운 병원에 신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고를? 그것도 병원에…?”
사장님은 이상을 감지하고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피디님에게 눈으로 구조요청을 보냈다. 피디님은 급하게 회의에 들어갔다.
나를 포함한 멤버들도 당황했다. 목표를 이룬다는 핑계로 초록 형의 고소공포증을 가볍게 봤다. 고소공포증은 기합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초록이 형! 내 말 들려? 차라리 눈을 감아! 흔들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해! 내 말 들려?”
“박하야…. 눈 감기 무서운데….”
“그럼 다른 데 보지 말고 나만 봐!”
박하가 당당하게 자기만 보라고 외쳤다. 로맨틱하게까지 느껴지는 대사였다. 다만, 문제는 박하가 초록 형보다 아래에 있다는 점.
초록 형이 무심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동안 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던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초록 형!”
“갸아아아아아아악!”
“초, 초록 큽, 크흐흐, 초록, 풉, 푸하하하하!”
“악! 박하준 너! 두고 봐!”
“실, 실순데, 크하하, 미, 큽, 미안. 푸푸푸풉! 으하하하핫!”
으득?
어디선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초록 형은 박하와 공중에서 격한 설전을 벌였다. 초록 형은 말싸움하느라 자기가 대롱대롱 매달린 곳이 어딘지 싹 잊어버린 듯했다.
제작진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미소를 띤 채 티격태격하는 둘을 구경했다.
“내가 무섭댔지! 고소공포증이 장난인 줄 알아? 박하준 너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실수였다니까!”
“그래! 그건 실수일 수도 있지. 깜빡했을 수도 있어! 근데 깔깔거리고 비웃어? 아주 통쾌하게 웃더라?”
“내가 언제! 웃음은 그냥, 그냥 이 속에서 내장에서 우러나왔을 뿐이야! 내 의지로 어쩔 수 없었어! 리더라고 이래도 돼? 이건 권력의 횡포야!”
“권력의 횡포? 내가 언제 부당하게 혼낸 적 있어? 너 제대로 권력의 맛 좀 볼래?”
“도와줘! 서혼 형! 이원 형! 지온! 오란!”
귀여운 생명체의 탈을 쓰고 무서운 척하는 오란,
겁먹어서 아무 말이나 하는 지온,
벌벌 떨다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초록,
그런 모습에 웃겨 죽는 해맑은 박하.
경이로운 신체 능력으로 사장님께 스카웃 제의까지 받은 서혼.
나만 정상이었다. 멤버들을 흐린 눈으로 보다가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촬영 이대로 괜찮을까…. 피디님이 잘 편집해주시겠지? 피디님과 작가님의 환한 미소를 믿기로 했다.
초주검이 되어 내려온 초록 형의 손에는 박하의 귀가 잡혀있었다. 짧은 시간에 정신없는 멤버들을 겪은 사장님은 혼이 빠져서 허허 웃고만 계셨다.
하나 같이 개성이 강한데 특별한 환경이기까지 해서 폭발이 일어나버린 셈이었다. 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에 사진을 잔뜩 찍어드렸다.
사장님과 같이 찍는 줄 알았는데 사장님은 내 독사진을 원하셨다. 찍힌 사진을 확인해보니 상반신도 아닌, 가슴 위로 잘려서 거의 얼굴만 나온 사진이었다.
“사장님…? 잘못 찍으신 건가요? 다시 찍어드릴까요?”
“아뇨. 좋은 건 크게 봐야죠.”
“…네?”
어쨌든 사장님은 만족하신 듯했다. 매니저 형도 허락했으니 괜찮겠지.
인터뷰는 다음 날 방송국에서 따로 진행했는데, 내 예상보다 촬영 시간이 훨씬 길었다. 질문이 정해져 있어 짧게 끝날 줄 알았지만, 심층 인터뷰처럼 세세한 질문까지 받았다.
“이번 촬영 너무 재밌었어요!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요. 테오라 멤버분들 예능에 재능이 엄청나네요.”
“편집해봐야 확답드릴 수 있겠지만, 두 회차에 나눠 방송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절대 한 회차로는 못 담아요. 피디님.”
“김 작가 생각도 그렇지? 버릴 수 없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편집하기 아깝겠지?”
“그럼요!”
작가분들의 칭찬도 받았고, 피디님은 우리가 2주에 걸쳐 TV에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주시기도 했다.
“와아?!”
웃음과 감동을 주려던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졌을지는 일주일 후에 알게 되겠지. 적어도 최선은 다한 것 같아서 후련했다. 결과가 어떻든 후회는 없었다.
“테오라 여러분, 우리 다음에 또 봐요. 이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다른 프로그램에서라도 꼭 부를게요.”
“물론이죠. 작가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저는 테오라가 반드시 뜰 거라고 봐요. 나중에 잘 돼서 만났을 때 모르는 체하면 안 돼요. 나 모른 척하면 울 거예요.”
“에이. 작가님이야말로 저희 잊지 마세요.”
기운을 차린 초록 형이 능글맞게 멘트를 던졌다. 제 컨디션을 찾은 초록 형을 보던 작가님의 콧구멍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저건 웃음이 터지기 직전의 움직임인데. 속으로 어제 촬영 현장에서의 모습과 비교해 본 게 아닐까?
“잊을 일 없을 거 같은데요? 맨날 여기저기에서 나오게 될 테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참, 테오라 측에서 원한 프로그램 작가한테 연락 넣어둘게요. 왜 아이돌이 주로 출연하는 예능이나 토크쇼가 아니라 그런 프로그램을 골랐는지 물어보면 안 되겠죠?”
여기저기 우리의 입장을 알려도 도움이 되긴커녕 불리해지기만 하겠지.
POT 엔터가 모든 방송국의 모든 프로그램에 압력을 넣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POT 엔터의 행적까지 드러날 위험이 커진다. 아이돌이 효율적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에만 집중적으로 입김을 불어 넣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틈을 파악해 공략하기로 했다. 시청자들에겐 뜬금없는 프로그램에 신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것처럼 비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프로그램이라도 테오라에겐 감지덕지니까.
“제가 추천한 프로그램에 출연 확정되면 ‘마지막 일꾼’ 끝에 자막이라도 넣어달라고 피디님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시청자 한 명이라도 더 보겠죠.”
‘마지막 일꾼’ 자체 포맷에서 추천하는 일이고, 연결해주려는 프로그램이 같은 채널 프로그램이라서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의외의 소득에 테오라 멤버들 모두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언젠가 이 은혜 꼭 갚을게요.”
“별말씀을요. 제가 더 고마워해야 하는 날이 온다고 봐요. 전.”
“네?”
“이번 촬영분이 ‘마지막 일꾼’에 전환점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방송물을 오래 먹은 작가의 예감이랄까.”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선, 우리가 화제가 되어야 했다.
“마냥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긴 싫네요. 제 예감도 그렇거든요. 작가님.”
건방지기까지 한 초록 형의 발언에도 작가님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테오라 멤버들도 방영 날을 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