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58
눈 폭풍 속의 무대
멤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씩씩하게 홍보를 계속했다.
처음 방문했던 팀과 달리 다른 곳에서는 단체로 인사를 한 후 프로필을 넘기는 게 고작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팀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거기다 사무실에 우르르 몰려온 아이돌의 존재를 꺼리는 분들도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눈치챌 수 있었다. 미세하게 찡그려지는 눈이라던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꿋꿋하게 미소 지으면서 인사를 마치고 나왔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인기 많은 아이돌이었더라면 달랐을까? 아이돌이 아니었어야 환대받을 수 있었을까?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해졌다. 홍보하자고 먼저 제안했던 사람은 나니까.
“미안. 내가 먼저 직접 나서자고 해서….”
냉담한 반응을 예상했으면서도, 실제로 느끼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내색하지 않았다.
“다들 기죽었어? 고작 이 정도로?”
오란의 되물음에 멤버들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초록 형은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곤 입을 열었다.
“이원아. 우리도 동의한 일이야. 그리고 적어도 나는 이런 냉대에 상처 안 받아.”
“관계없는 사람은 신경 안 써. I’m damn busy.”
“여기 방송국이야. 말조심.”
작게 안 그러겠다고 사과한 지온은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툭 쳤다. 말로 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전해졌다.
“대스타가 돼서 후회하게 해주면 돼! 초록 형, 얼굴 다 기억해뒀지?”
얼굴 구분하는 데 약한 박하는 자기가 외울 엄두는 못 내고 사람을 귀신같이 기억하는 초록 형에게 역할을 넘겼다.
“…가끔 생각해. 우리가 여럿이라서 다행이라고.”
다른 설명이 없어도 서혼 형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멤버들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모든 시련을 혼자 겪어야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로움을 타지 않는 나조차 이런데.
“이원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런 대접에 무너질 만큼 우리 약하지 않으니까.”
괜한 조바심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는지도…. 이런 데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서툰 티가 나나 보다.
가만히 보고 있던 매니저 형이 오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매니저 형이 어린 동생처럼 대하는 순간이 있었다. 나이로 따지면 틀리진 않는다.
나는 그 손길에서 전해지는 위로와 응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가만히 있곤 했다.
“그럼 다음 목표물을 향해 가볼까?”
“좋아! 오늘 이 방송국은 정복하고 가야지!”
초록 형이 선창하자 박하가 받아쳤다. 오란은 내 어깨에 팔을 걸고는 끌어당겼다. 그런 오란의 어깨에 지온이 팔을 올렸고,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동참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 걸었다. 장난처럼 시작된 어깨동무가 뭐라고 기분이 금세 나아졌다.
복도 폭을 꽉 채우는 바람에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팔을 내려야 했지만, 여전히 어깨에 남아있는 온기 덕분에 힘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인 아이돌 그룹 테오라입니다!”
* * *
방송국 홍보 투어는 1회로 끝나지 않았다. 예능이나 음악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출연할 수 있겠다 싶은 모든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프로필을 돌렸다. 그 때문에 한 방송국을 도는 데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앞으로는 공중파뿐만 아니라 케이블 방송국 쪽에도 도전해볼 계획이었다. 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연습도 해야 해서 홍보 투어는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하루면 될까요? 아…. 괜찮을 것 같아요. 네. 그러면 거기서 뵙겠습니다. 네. 삼촌 들어가세요.”
스케줄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어제부터 초록 형은 휴대폰을 붙잡고 살았다.
이번 통화는 결과가 좋은 듯했다. 초록 형의 가늘게 접힌 눈을 보면.
멤버들은 초록 형의 기분을 눈의 크기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웃음 짓지 않고 눈을 크게 뜨면 그때부턴 도망갈 준비 해야 한다나.
“카메오 확정! 두 명이니까 서혼 형이랑 이원이 가면 돼. 나머지는 구경이라도 갈래? 어쩌면 감독님 눈에 들어서 지나가는 행인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영화 촬영장 구경? 다른 배우님도 오시겠지?”
“Oh, extra. 나도 갈래. 궁금해.”
“감독한테 눈도장이나 찍으러 가볼까.”
박하와 지온, 오란까지 동의해서 테오라 멤버들 모두 영화 촬영장에 가게 됐다.
둘보다 여섯이 좋았다. 함께 가면 조금이라도 긴장이 덜할 테니까.
“우선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우리는 지금 귀중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가평에 와 있었다. 빙어 축제가 열려서 개막 무대의 초대 가수로 오게 된 것이다.
매니저 형이 노력한 결과였는데, 정작 매니저 형은 강원도 인제로 운전해오면서도 우리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 인제 날씨가 최악이라는 일기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겨울이라 안 그래도 추운데 기온이 더 낮은 강원도, 그것도 야외에서 무대를 해야 했다. 게다가 바람이 많이 분다는 소식까지 있었다.
“아티스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조급한 마음에 스케줄을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고밖엔…. 다시 사과하마.”
“사과는 받을게요. 고맙습니다. 사과해주셔서.”
리더인 초록 형은 우리를 대표해서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과받을 일까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귀로 들으니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준현 형. 잠깐 참으면 되잖아요.”
서혼 형이라면 이까짓 추위쯤은 기합으로 이겨낼 수도 있다.
“미리 물어봤어도 여기 오자고 했을 거예요.”
난 스케줄을 잡아준 매니저 형이 고맙기만 했다. 우리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신인 때 고생하면 나중에 이야깃거리로 쓸 수 있잖아요!”
“너 그거 매니저 형 먹이는 거냐?”
“뭐? 아니야! 절대 아니에요! 준현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죠?”
오란이 긍정 회로를 돌리는 박하의 말꼬리를 잡는 바람에 대기실 안이 시끄러워졌다.
대기실이라고 해봤자 가운데 난로를 둔 천막에 불과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인제 빙어 축제는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추운 날에도 빙어 축제에 참여하는 방문객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다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툼하게 중무장하고 있긴 했다.
우리 앞 순서인 초대 가수는 트로트를 부르셨는데, 그리 인지도가 높은 분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혹한의 날씨 탓에 유명한 가수분들은 참가를 거절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천막을 살짝 걷어서 밖을 보니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보다 바람이 강해지고 있었다. 천막의 펄럭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날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바깥에서 들리는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갔다.
멤버들은 난로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손을 녹이다가 천막 밖의 행사 진행자에게서 테오라가 불리자 다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의상과 메이크업을 재빠르게 점검했다.
우리가 출격해야 할 시간이었다.
“눈은 안 내려서 다행….”
오란의 말의 끝나기도 전에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원망의 시선으로 오란을 쳐다봤다.
“홍. 오. 란.”
단순한 우연 아닌가? 왜…? 나 혼자만 영문도 모른 채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지켜봤다.
“오늘은 눈 속에서 무대를 해야겠네. 다들 발밑 미끄러울 테니까 조심해.”
“응응!”
“알겠어.”
“홍오란 너는 무대 끝나고 보자.”
평소라면 직설적으로 대꾸했을 오란이 왜인지 조용했다.
“파이팅 한번 하고 갈까?”
테오라 멤버들이 모두 손을 모았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됐다가 맞닿은 피부가 따듯했다. 누구 체온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함께한다는 감각이 강하게 들었다.
믿을 수 있었다. 비록 서툴더라도 우리가 함께라면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테오라, 파이팅!”
* * *
지붕 비슷한 무언가가 있긴 했지만, 사방이 뚫린 작은 무대 위는 추웠다. 너무 추워서 살이 얼어붙는 느낌이 났다.
눈을 떠 마주한 세상은 너무나 신기해
노래 부르면서 춤도 춰야 해서 무대의상이 둔해선 안 됐다.
코디님은 데뷔곡의 아련·청량이라는 컨셉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춥지 않게 신경 써주셨다. 남색의 정장 안에 얇은 니트나 울 같은 따뜻한 소재의 옷을 겹쳐 입는 식으로.
휘이이이잉?
하지만 그 정도론 어림도 없었다. 거세게 치는 눈보라를 견디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그저 참는 수밖에 없었다. 추위 따위는 느끼지 않는 척해야 했다. 춤추는 우리가 추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곡에 몰입하지 못할뿐더러 덩달아 추워할 수도 있으니까.
그 무엇에도 눈뜨지 못한 나에게 기억을 입혀줘
물들여줘 너의 손으로 너의 색으로
눈보라가 강하진 않아서 환상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고 희망해보기도 했다. 영화 속 얼음 여왕이 눈으로 마법을 부리는 장면처럼.
희망은 곧 무너졌다. 눈보라는 점점 속도를 더해가더니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강력한 바람이 몰려오자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졌다. 우리를 위한 환호라고 여기기엔 너무 본능적인 비명이었다.
눈 폭풍이 일었지만, 온 힘을 다하기로 했다. 그것이 무대에 대한 예의이고, 아이돌인 우리의 의무니까.
나에게 너를 각인시켜 그리고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내게 새겨줘
관객들에게 춤추는 모습이 보이긴 했을까? 노래가 제대로 들리긴 했을까? 바람 소리에 묻힐까 봐 성량을 키웠지만, 자연의 섭리에는 이겨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힘차게 인사를 하고 내려와서 다시 대기실로 들어왔다. 매니저 형은 재빨리 이불만 한 담요를 우리 몸에 칭칭 감아줬다. 난로 앞에 있어도 싸늘함이 가시지 않았다.
멤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갑자기 눈보라가 쳐서 무대가 엉망이 되리라고 어디 예상이나 했겠나.
“하, 하하하하?”
황당해서 말보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나. 내가 먼저 웃자 다들 픽 웃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필사의 각오로 올라갔는데! 미끄러질까 봐 걱정했는데!”
“리얼 블리자드 처음 봐.”
박하는 투덜대기 바빴고, 지온은 처음 보는 경이로운 눈보라에 감탄부터 했다.
“…오란아.”
이름 하나에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서혼 형까지 오란을 원인으로 지목할 정도면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왜 오란 때문인데? 아까부터 궁금했어.”
“이원이는 아직 모르는구나. 오란이가 나쁜 쪽으로 운이 안 좋아.”
“운? 운이 안 좋아도 안 내리던 눈을 오란이 내리게 할 수는 없잖아.”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의심이 생기더라. 혹시, 하고. 이원아. 내가 말 한 적 있지 않아? 운 필요한 게임이면 전부 꼴찌 하는 애가 있다고.”
기억났다. 월말 평가 끝나고 달리기했던 날이던가. 서혼 형이 가위바위보가 낫다는 내 말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운 나쁜 애가 오란?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인 오란이 아무런 변명도 못 한다니. 정말 이상했다.
오란도 인정하는 건가? 자기 말 때문에 눈이 내린다고? 정말로?
“오란이랑 가위바위보 해볼래?”
오란은 대뜸 담요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적극적인 태도에 덩달아 가위바위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운 게임에서 모조리 꼴찌하는 오란보다도 운이 없다고 증명되는 셈인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긴장감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