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84
벌칙 수행 (3)
“가감 없이 말해도 되겠습니까?”
“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대표님과 마주 앉아 있자니, 손에 땀이 났다. 우리의 벌칙은 ‘여장하고 돌아다니기’이지 ‘대표님을 속여라!’가 아닌데! 이게 다 홍오란 때문이다.
녹화 중이라는 표시의 빨간불은 우리가 역할극을 이어가도록 부추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 혼자서만 빠져나갈 수는 없다.
“다른 부분은 판단할 수 없으니 외형에 한정한 이야기라는 점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대표님은 눈을 빛내며 우리를 유심히 살폈다. 상품에 값을 매기는 경매사의 눈초리가 이럴까.
손중기 대표님과 인사는 몇 번 나눠봤어도 이렇게 밀접한 거리에서 관찰당한 적은 없었다. 대표님은 우리를 이런 눈으로 보고 계셨을까?
“두 분 다 연예인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큰 키 때문에 배역을 맡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페널티를 뛰어넘을 만큼 비주얼이 훌륭합니다.”
대뜸 찾아와서 질문을 툭 던지는데도 이렇게 친절하고 진지하게 대답해준다니. 연예기획사 대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실감했다.
“맨얼굴을 봐야 더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리 화장한다고 해도 이 정도까지 비주얼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죠. 광고모델도 나쁘지 않네요. 저희가 제안할 전략은 각자 가족 동반으로 예능에 출연해서 인지도를 얻는 겁니다.”
최근엔 연예인의 가족들이 출연하는 예능이 많이 늘어났다. 그 기회를 노리면 순식간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겠지. 외모가 뛰어난 연예인 가족은 수요가 있다.
대표님이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게 뭐지…? 홍오란, 이 상황을 어떻게 무마하려고 이래?
“그렇지만, 이것보다 확실한 건 본 캐릭터로 활동하는 거겠죠? 이원 씨, 오란 씨.”
“네?!”
심각하게 듣고 있다가 흠칫, 상체를 뒤로 물렸다.
언제부터 알아채셨지? 일부러 지금까지 우리의 장단에 맞춰주신 건가?
“겉모습이 조금 달라진다고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하죠. 아무렴 내가 직접 뽑은 우리 회사 보물들인데.”
오! 한 회사를 이끄는 위치에 있으려면 그만큼 날카로운 선구안을 가져야 하는구나.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대표님이 두어 번 헛기침하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끊어갑시다.”
“…?!”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전부 연출이었다고…? 내가 역으로 속아버렸나? 대표님은 연기자도 아닌데?
이럴 순 없다. 이러면 내가 눈치 없다고 하는 멤버들의 말이 진실이 되어버리는데….
“언제부터 눈치채셨어요?”
목소리를 바꾸는 데 애를 먹었던 오란은 목에서 힘을 풀고 평소 목소리로 되돌렸다.
“처음부터 눈치챘습니다. 카메라 잡은 직원, 내가 일부러 테오라 담당하라고 뽑은 사람이거든요.”
“네?”
카메라를 들고 멋쩍은 미소를 짓는 크리에이티브팀 직원. 그럼, 저 직원분은 대표님이 우리의 정체를 알아챌 거라고 짐작했겠구나. 테오라 담당하라고 보낸 직원이 뜬금없이 다른 신인을 맡을 리는 없으니까.
하긴, 하눌 엔터 직원으로선 대표를 속인다는 위험천만한 작전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가담하긴 힘들 터다.
어쩐지 순회 코스에 대표실을 넣더라니.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다.
“실례를 덜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대표님 이미지에 보탬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다. 그 사이에 대표님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따졌다고…?
“허허. 오란 씨는 보는 시야가 넓군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연예기획사 대표는 얼굴이 드러날 기회가 많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인터뷰형 예능이나 관찰 예능 같은 곳에서 종종.
하눌 엔터의 내력은 다른 연예기획사 비해 밀리지 않지만, 대표님의 모습은 연예계 관계자들 한정으로만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앞으로도 대중 앞에 나설 일이 없다면 모르지만,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엔 불가능에 가깝긴 하다.
“어차피 대중 앞에 나서야 한다면, 전략적으로 이미지를 구축해야죠. 안 그런가요, 대표님.”
“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나 보군요. 이거 내가 오란 씨가 어리다고 만만하게 봤던 모양이네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획사의 대표와 아이돌 멤버. 나이 차이만 해도 서른 살은 넘는다. 그런데 둘은 마치 사고방식을 공유하기라도 하듯 척하면 척하고 통했다.
“소속 연예인이 깜짝 카메라를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친근하면서도, 전문성과 안목을 갖춘 대표, 멋있습니다. 대표님.”
“오란 씨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사회생활 현명하게 잘할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제 차림이 이래서 아쉽네요. 대표님이랑 대화 더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카메라를 든 직원분과 나는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란 씨랑 이원 씨가 놀라고 대표님이 다독여주시는 모습만 추가해서 담으면 될 것 같습니다!”
바짝 언 채로도 본분을 다하는 모습은 멋있었다.
“영훈 씨. 긴장 풀어요. 나 그렇게 권위적인 사람 아니라니까. 오란 씨 보면 알잖아요?”
홍오란은 특이케이스가 아닐까. 나랑 크리에이티브팀 직원분이 보통이고.
어쨌거나.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대표실을 나섰다. 문 근처에서 조용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이 쪼르르 다가와서 궁금해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뭐라고 해야 하지…? 호랑이와 사자의 눈치 게임에 등 터진 새우 둘?”
멤버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재촉했다. 오란이 반박하지 않고 의뭉스럽게 웃는 걸 보면 잘못된 묘사는 아닌데.
오란과 대표님의 대화를 하나하나 되짚어주자 그제야 밖에 있던 멤버들이 와르르 웃었다. 오란을 오래 봐왔던 멤버들에게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앞으로 대표님 뵐 일 있으면 홍오란한테 맡기면 되겠다.”
리더 역할 외에도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 잠도 줄이고 있는 초록 형이 일거리 하나를 덜었다며 이때다 하고 오란을 대표님 담당으로 임명했다.
“찾아가서 얼굴 보고 우리 의사만 전달하면 되나? 그러든가. 그게 뭐가 어렵다고.”
테오라 멤버들 전부 초록 형이 과중한 일정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아서 하나라도 짐을 나눠 들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는 오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대로 회사 밖으로 데려가고 싶다~. 우리만 보기 진짜 아깝다~!”
오란과 내 주위를 빙빙 돌던 박하가 아쉽다는 듯이 칭얼댔다. 제톤까지 동조했다.
“나가면 된다. 안 그래?”
되긴 뭐가 돼. 벌칙은 ‘회사 내’에서 여장하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
“그럴까?”
“미쳤어?”
표정의 변화 없이 받아들이는 오란 탓에 놀랐다. 여장으로 어디까지 갈 작정인데?
내가 아무리 여자 옷에 거리낌이 없다지만, 회사를 한 바퀴 돌아보니 작정하고 ‘여장’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야 되니까 거기까지 걸어가면 되잖아. 여장해서 우리인지 몰라볼 테니까 안전에도 걱정 없고.”
“지금 안전이 문제야?”
“그럼?”
홍오란 사전에 ‘수치’라는 단어는 정말 수록되어 있지 않구나. 부끄럽다는 감각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평범한 사람 기준에서는 괴상한 선택을 남발하는 거다!
“쪽팔리냐? 지나가는 사람들은 네가 남자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텐데?”
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대로는 다수의 결정에 휩쓸려버릴지도.
나머지 네 명은 우리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했다. 샛별보다도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테오라 멤버들은 ‘재미있으면 오케이!’라는 이유로 똘똘 뭉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슬프게도 그게 지금인 것 같다.
“우리는 아이돌로서 일을 하는 거야. 연예인이라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부끄러움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야 해.”
어떻게든 이상 행동을 합리화시켜보려고 초록 형이 애썼다. 멤버들을 알게 된 지가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나도 멤버들의 시커먼 속내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이원아,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아니, 믿었던 서혼 형까지!
“나가자, 이원 혀엉! 재밌을 것 같잖아!”
“Go! 이원! Go!”
박하와 지온은 대놓고 설득하고 있었다. 다들 입가에 웃음기라도 지우고 말할 것이지.
“어쩔 수 없나….”
“와아아아아! 이원 형 잘 생각했어!”
아주 신나셨다.
처음부터 우리 멤버들한테 내가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결과는 정해져 있지만, 그냥 한번 튕겨본 것뿐.
한숨을 푹 내쉬다가 픽 웃음이 샜다. 부모님도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려서 온갖 해괴한 짓을 다 해봤다고 하던데, 나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어서.
이제야 제 궤도를 찾아 돌아온 것 같았다.
“선글라스나 하나 가져다줘. 도저히 맨얼굴로는 못 가겠으니까.”
“알았어! 빨리 다녀올게!”
“Yes, sir!”
쏜살같이 튀어 나간 박하와 지온은 금방 짙은 선글라스를 찾아서 돌아왔다. 선글라스를 받아서 쓰고서 자기최면을 걸었다. 지금 나는 누가 봐도 멋있는 여자 함이은이다, 하고.
“가자.”
또각또각?
낮은 통굽 부츠가 또각거리면서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달아오르는 피부를 메이크업이 감춰주기를 바라면서.
* * *
팬들은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컨텐츠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멤버들 개인 셀카도 자주 올라오고 라디오나 예능 출연도 많아지고 있었다. 거기에 자컨까지.
특히 이번 자컨은 테오라 멤버들의 실제 생활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다.
특히 서혼이 언급한 ‘함이원표 맛집 리스트’를 얻고 싶다는 코티지들이 넘쳐났다. 멤버 피셜 미식가인 함이원이 보증하는 맛집이라면, 믿고 먹어도 될 거라는 의견들이었다.
함이원이 절대음감, 상대음감에 예민한 청각을 가졌다는 건 코티지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 반만큼만 미각이 날카롭다면 함이원의 맛집 리스트는 실패할 리가 없었다.
먹을 것에 진심인 코티지들은 다른 화제로 얘기하다가도 꼭 중간에 ‘함이원이 엄선한 맛집 리스트’가 탐난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화제는 코티지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다. 그 결과.
[여기 이원이 단골집이라고 사장님이 인증…] [예전에 음식점에서 인형 같은 애 보고 감탄한 적 있는데 함이원인 듯?] [함이원 맛집 리스트에 포함됐을 걸로 추측되는 음식점 정리글.jpg]1차 목적은 맛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거기에 우연히 테오라 멤버들을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테오라 멤버들이 바쁠 때는 이 맛집에 다녀갈 여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실제로 다이어트식을 먹거나 숙소에서 제톤의 요리를 먹었다. 가끔 드물게 외식도 했지만, 팬들이 찾아내지 못한 곳이라 꿈을 이룬 팬은 없었다.
타팬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에 홀린 듯이 내용을 읽게 됐고 자연스럽게 다른 커뮤니티로 퍼져나가서 인기 글이 됐다.
– 그거 봤음? 테오라 함이원 맛집 리스트 추정한거?
└그게 몬데?
└멤버 피셜 “함이원 공인 맛집에 가면 실패 없다”라고 해서 나온 얘기ㅋ
└ㅇㅎ
– 나 프랑스 현지인 맛집에서 함이원 사진 발견했음!!!!!!
└웬 프랑스?
└프랑스 여행 왔는데 여기 즉석 사진 붙이는 곳 있어서 구경하는데 함이원 발견! 가족끼리 여행 왔었나봄!
└주작ㄴ
└개인 사진이라 안 올리려고 했는데 10분 뒤 펑예!
└(삭제된 사진입니다)
└ㅎㄹ 진짜네? 저 용안이 둘이나 존재할 리가!
└함이원 부모님의 미모가 블러를 뚫고 나온い빱빱?
└외국에도 함이원 공인 맛집 있는 거면, 이거 거의 미슐* 아님?
└삭제됐네.. 사진 보고 싶다ㅜ
…….
커뮤에서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면서 재미 삼아 해보는 ‘함이원의 맛집 찾아내기’ 이벤트로 변했다.
함이원 본인에게 물어보면 그 음식점 사장님에게 허락받고 순순히 대답해줄 테지만, 그 사실은 이미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