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89
우당탕탕 코티지 (1)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돌을 접해왔다. 여러 아이돌을 파다가 이제는 거의 아이돌 준전문가가 된 수준.
‘쏟아부은 시간을 대충 따져도 10,000시간이 훌쩍 넘을 테니까 말이지.’
조금 과장해서 2만 시간은 쏟았다고 봐야 했다. 그간의 덕질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덕질을 하면서 내가 금사빠지만, 노래 취향만큼은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얼굴만 잘생겼다 싶으면 금방 빠지는 만큼 금방 애정이 식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그간 거쳐 간 아이돌만 해도 두 손으로 헤아려야 했다.
노래 실력도 중요하게 보는지라 가장 오래 좋아했던 아이돌은 비주얼까지 갖춘 메인보컬이었다.
‘노래는 배신을 안 하지.’
여러 명이 있는 아이돌 그룹은 사건, 사고가 터지지 않기가 어려웠다.
‘바로 떠오르는 아이돌 그룹들만 봐도, 전부 한 명이나 두 명쯤 없어진 채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또라이 불변의 법칙처럼, 인성 쓰레기 불변의 법칙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원래 사건, 사고를 일으킬 사람이 연예계에 끌리나? 아님, 연예계에 들어와서 사람이 변하는 건가?’
뭐가 맞는지는 몰라도 참 다사다난한 세계였다. 팬들은 그 세계에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덩달아 싸잡혀서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돌 그룹에 문제가 터지면 팬덤 내부는 끓어오르는 용암이 되어버린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딜 만큼의 애정은 없었다.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가 있는 그룹이 안 좋은 주제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면 쿨하게 작별을 고하곤 했다.
대신 그 그룹의 노래가 취향에 맞으면, 탈덕을 한 후에도 플레이리스트에는 꼭 넣어두고, 신곡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앨범을 구매했다.
‘예전 같으면 잡팬이라고 욕 한 바가지 먹었을 텐데.’
요즘은 덕질 문화에 예전보다 관대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라이트 팬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인지 나 같은 다양한 아이돌에게 다리를 걸치고 있는 팬들에게도 유하게 대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이돌 팬이라기보단 아이돌 노래 덕후에 가깝긴 하지.’
한결 평온하게 덕질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는데, 이상하게 끌리는 아이돌이 없어서 한동안 휴업 상태였다.
최근에 나오는 아이돌 노래들은 유난히 트랜드를 민감하게 반영했다. 그래선지 전부 비슷비슷하게 들렸다.
‘진짜 전문가가 듣기엔 다르려나?’
할 수 없이 옛날 노래들을 들으면서 추억 여행을 해야 했다.
“역시 명곡은 시대를 가리지 않아.”
가끔 역주행하는 아이돌 노래들은 사실 그 당시에도 좋았지만,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곡들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곡은 당시에는 신선해서 좋았고, 현재에는 유행 코드에 맞아서 좋은 곡이었다.
국물이 우러나다 못해 골수까지 쪽쪽 빨린 청량상큼 플레이리스트를 들을까 하다가 오랜만에 아이돌 신곡들을 찾아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신곡 가뭄 시즌이라 새로운 곡을 듣고 싶으면 노력이 필요했다.
“바닐라진이 차트를 점령해버렸으니 뭐….”
키씨 엔터가 배출한 최고의 아웃풋인 바닐라진은 이런저런 논란을 겪고도 여전히 1군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다.
키씨 엔터는 다른 건 몰라도 좋은 노래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는 스타일.
바닐라진은 다른 그룹과 달리 곡에 관련해서는 멤버들보다 대표 기용수의 입김이 세게 들어갔다. 키씨 엔터의 대표는 세월이 흘러도 노래 쪽으로는 감각이 탁월했다.
‘노래로는 깔 수 없지만, 그 외엔 정말….’
만능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팬들을 경기하게 했다. 특히 50대 아저씨의 패션 취향을 바닐라진 멤버들에게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최악이었다.
“애증의 기용수다, 진짜.”
바닐라진의 이번 앨범은 아이돌 노래의 정석이었다. 컴백하자마자 괜히 음원 차트 상단에 줄 세우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드라이브할 때 흥을 돋울 수 있는 사랑 노래. 아주 대놓고 대중성을 잡겠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바닐라진은 팬덤의 화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차트 상단에 말뚝을 박을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대중성까지 잡으시겠다? 기용수 생각이겠지.’
듣기 편한 멜로디라는 점을 부정할 순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바닐라진의 노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은근한 섹시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용수도 맛이 가려고 하나.’
키씨 엔터 대표의 목적은 이루겠지만, 바닐라진의 특색을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실망스럽지 않을까.
‘곡 자체로는 괜찮으니까 플레이리스트에 넣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아서 새로운 곡을 찾아보려고 차트를 뒤져보는데 중간쯤에 ‘TEORRA(테오라)’라는 낯선 가수명이 보였다. 딱 아이돌스러운 이름.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하눌에서 새로운 애들 데뷔시킨다고 했는데, 그게 얘넨가?’
노래가 이어폰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감은 틀리지 않았다.
‘각인’이라는 곡은 비트부터가 아이돌 노래였다.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발굴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시간이 흐를수록 곡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래는 이미 끝나있었다.
“이야. 원하는 곡 나올 때까지 작곡가를 쥐어짰나? 노래는 또 왜 이렇게 잘하는데? 신인 아니야?”
한 곡 반복 모드를 켜두고 검색해보니 하눌 엔터의 신인 아이돌이라는 정보가 떴다. 그리고 타이틀곡을 함이원이라는 멤버가 작곡했다는 내용까지도.
“이게 스물도 안 된 남자애 작곡 실력이라고? 소속사에서 이미지 메이킹 하나?”
그러나 아이돌 덕질을 하면서 알게 된 하눌 엔터는 결벽적인 성향이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워낙 소문이 빨라서 어차피 어떻게든 다 밝혀지게 되어 있었다.
“음음~, ‘내게 새겨줘~’ 어 뭐야…. 벌써 노래가 입에 뱄잖아?”
계속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노래가 좋다면, 언제가 됐든 이 곡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날은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테오라 멤버들의 비주얼은 아이돌에게 관심 없던 사람들도 한 번쯤 눈길이 가게 했다.
“그런데 노래까지 좋다? 그 말은 즉, 저평가된 주식이라는 의미지.”
오랜 휴식을 깨고 새로운 신인 아이돌에게 마음의 한 귀퉁이를 내어주기로 했다.
오랜 덕질 라이프로 인해 경계심이 커질 대로 커져서 바로 풍덩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을 줄 알았건만.
테오라에게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예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메인보컬 함이원으로 맛만 보려고 했건만. 역시 절제란 어렵고도 어렵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그래도 테오라 애들을 알게 될수록 더 괜찮은 애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카메라 앞에서 본성을 숨기려고 해도, 은은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팬들은 웃으면서 무안을 주거나 분위기가 싸해지는 순간을 알아채도 모른 척 감싸주곤 했다.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감상하다 보면 눈치가 없어도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정도는 본능으로 느꼈다.
그런데 테오라는 그런 가식이 보이지 않았다. 오란이라는 멤버한테서는 살짝 어색함이 보이긴 했는데, 카메라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듯했다.
‘아직 데뷔 초라서 바짝 긴장했을 시기긴 한데, 눈치 100단인 내 눈에도 안 잡힐 정도면 안심해도 파도 되겠는데?’
적어도 불화가 있다는 찌라시가 돌 일은 없어 보였다. 멤버들끼리 사이가 좋으면 지켜보는 팬들도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아주 바람직했다.
아이돌 그룹에게 관계성이라는 요소는 단순히 팬들의 즐길 거리를 넘어서 그 그룹의 수명까지도 결정짓기도 했다.
팬들이 처음 좋아하게 된 멤버부터 시작해서 관계가 좋은 멤버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다가 그룹 전체를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수도 있지만 서먹서먹한 것보다는 낫지.’
화면에 보이는 관계가 실제로도 유지되는 그룹이라면, 외부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 한, 장수 그룹이 될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짐승처럼 날카로운 감으로 짐작하건대, 테오라는 싹이 파란 그룹이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숨기려고 해도 데뷔 초 어리바리할 때는 티가 나게 되어 있지. 후후.’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에 낯선 일. 낯선 것들투성이일 데뷔 초에 멤버들 사이의 케미까지 신경 쓸 수가 있을까. 본인은 그렇다 쳐도 받아주는 사람의 반응까지 하나하나 제어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면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배우로 전향해야 했다. 연기 선생이 되던지.
실제로 같이 지내보지 않으면 실상은 모르는 거지만 자칭 ‘아이돌 감별사’의 눈을 속이려면 웬만한 내공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두 명, 세 명씩 모여서 같이 다닌다는 정보가 종종 들어왔다. 스케줄도 아닌데 여섯 명이 우르르 돌아다녔다는 목격담까지도.
멤버끼리 사적인 시간까지 함께하는 사이라면 친분을 증명된 셈이었다.
“드디어 진득하게 응원할 수 있는 아이돌이 등장한 건가?”
워낙 음악 취향이 확고하고, 아이돌을 좋아했던 기간이 길었던 터라 지인 전부 내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반인 코스프레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는 대신 덕질을 이해해주는 사람만 주위에 남게 돼서 편했다.
그런데도 이따금 난감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카이다 멤버 학폭 터져서 탈퇴한다며? 카이다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같은 위로를 듣는다든가 하는.
이미 사건을 일으킨 멤버가 있는 그룹을 손절하고 다른 아이돌에게 갈아탄 지 오래였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민망해 어색하게 얼버무리는 순간이라던가….
다시 떠올려도 낯 뜨거웠다. 아이돌이면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간을 본 대가. 누굴 원망할까.
그때부터다. 한 그룹을 일편단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부러웠던 것은. 철새였던 내가 텃새가 되려고 마음을 먹어보니 여러 가지 조건이 붙었다.
외모는 예선이고 본업, 그중에서도 노래는 특히 잘해야 했다. 이건 애정을 품게 하는 전제조건이었다.
기본적으로 올바른 행동거지를 보여야 했다. 사회면에 등장해서 팬인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아이돌을 바라는 건 당연한 이치.
또한 팬 사랑이 진심이어야 했다. 타돌 팬들의 부러움을 사는 정도까진 바라지 않았다. ‘팬은 돈줄에 불과하구나.’ 하는 식의 서운한 마음만 들지 않으면 괜찮았다.
멤버들끼리 사이가 원만해야 하고, 열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아야 했다. 그 외에도….
“…내가 한 아이돌에 정착 못 하는 이유가 있지.”
모든 기준을 통과하고 나를 평생 팬으로 삼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테오라가 그 바늘구멍을 뚫으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합격점이었다.
게다가 테오라에겐 ‘드라마’가 있었다. 팬들이 올리는 자료를 보면, 일반인이라면 하나라도 겪기 힘든 일들을 연달아 겪고 있었다.
팬들이 ‘테오라 성장 스토리’라는 주제로 영상을 편집해서 올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늘이 돕는 거 아니야?”
내일은 또 무슨 떡밥이 추가돼서 웃음을 줄지 기대하게 됐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져서 픽 웃고는 습관처럼 뉴튜브에 들어가 개인 뉴튜버의 게임 중계 영상을 재생시켰다.
한참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중간 광고가 떴다.
“아오!”
휴대폰을 잠시 내려두려고 하던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테오라의 서혼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광고 찍었구나. 무슨 광고….”
다시 휴대폰을 두 손으로 들고 영상을 감상하려는데, 애들이 말을 못 하고 동물 울음소리를 냈다.
[크엉! 크아아아! 크앙!] [꺄르륵! 꺄륵!] [냥! 냐아아앙!]“이건 또 뭔데…?”
당황한 나머지 광고를 멈춰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