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9
인간관계 개척
하눌 엔터 오디션의 합격을 알린 날, 우리 가족은 성대한 파티를 했다. 그냥 축하만 해주시면 된다고 해도 신난 두 분을 말릴 수 없었다.
엄마는 내게 계약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재차 주입했다.
그 말을 실천하듯, 엄마는 연습생 계약서를 들고 회사 법무팀 소속 변호사에게 가서 검토를 개인적으로 부탁하셨다고 했다.
겨우 연습생 계약이긴 해도 계약은 계약. 과하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내 꿈에 관한 일이기도 하니까.
계약서 검토를 끝내고 엄마와 하눌 엔터에 가서 계약하던 날.
나는 단정한 셔츠에 슬랙스를 업었는데, 엄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해 꾸미고 오셨다.
거기다 선글라스까지 쓰고 시크한 태도를 연기하시며, 반쯤 회사 관계자들을 협박하러 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포스 있는 모습으로 입장하셨다.
중간에 대표님이 엄마를 알아보는 바람에 고비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들의 보호자로 왔을 뿐이라며 자기를 함이원 엄마로만 여겨달라고 일침을 날리셨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업무 모드의 엄마는 이런 모습일까.
“우리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엄마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발음했다. 우리 아들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어쨌거나 엄마가 원하던 대로 기선제압은 확실히 성공이었다.
* * *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는 설렘을 느낄 새도 없이 연습실의 시계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나와 같은 시기에 들어온 연습생 동기는 둘.
그중에서 여자 연습생은 동선이 달라 마주치기 힘들었고, 남자 연습생은 회사에 이미 아는 연습생이 있었는지 그쪽으로 스며들었다.
다른 연습생들을 소개받기는 했는데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연습생 경험이 없어 기본 트레이닝부터 받아야 했기 때문에 별개의 수업을 받고 있어서 다른 연습생들과 친해지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도 왕따인가. 이러면 안 되는데.
현오 형 외에 친구가 없어서 친해지는 방법을 모르겠다. 우선은 가장 만만한 사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신인 개발 팀장님이 학교에 하눌 소속 연습생 형이 있다고 했으니 그 사람부터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현대무용 전공, 3학년, 이름은 남초록.
사람을 찾기엔 넘치는 정보였다.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1교시 쉬는 시간에 3학년 교실 앞에 서 있자니 온갖 시선이 집중됐다.
2학년이 3학년 교실 앞에 있어서 그런가?
“실례지만 남초록 선배 불러주실 수 있나요?”
눈이 마주친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
“헉! 인어왕자가 아니었어….”
내가 뭔가 잘못했나?
교실을 어슬렁거리던 선배 하나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창가 자리로 다가갔다.
“야, 남초록. 일어나봐. 후배가 너 찾아온 것 같은데?”
초록이라고 불린 사람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일어났다.
머리가 부스스했지만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분위기가 있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 그가 나를 가리키는 손을 보고는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쌍꺼풀 없이 긴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여우를 닮은 사람이었다.
얼굴의 전체적인 선이 날카로운 편이었는데, 느긋한 말투와 부드러운 웃음 덕분에 그 날카로움이 중화됐다.
미소가 패시브로 장착된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함이원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하눌 엔터 연습생이 돼서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함이원? 함이원이면 그 인어왕자 아니었나? 말, 하네?”
“네?”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했구나. 미안. 너, 인어왕자라고 유명하거든.”
“인어, 왕자요?”
어디서 나온 근본 없는 단어지?
“음, 말을 안 했던 거겠지만, 네가 목소리를 잃은 인어왕자 같다고 2학년은 물론이고 3학년 사이에서도 유명해. 그런데 목소리 정말 좋다. 목 관리하느라 그랬어?”
이 사람 편견이 없구나…. 하긴, 눈앞에서 말을 하고 있으니 성대 기형은 떠올릴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참, 우리 소속사 들어왔다고? 나랑 마주친 적 없었지? 주로 2 연습실을 쓰다 보니까 엇갈렸나 보다. 일부러 찾아와줘서 고마워. 아직 회사에 대해 잘 모를 테니까 선배인 내가 열심히 챙겨줄게.”
“감사합니다. 남초록 선배님.”
“에이, 거리감 느껴지게 그게 뭐야. 형이라고 불러. 잘 지내보자. 이원아.”
인간관계를 개척했다. 그것도 혼자 힘으로! 조금 뿌듯해져서 어깨가 올라갔다.
용기를 낸 덕분에 학교에서 점심시간을 함께할 말동무가 생겼다.
초록 형의 친구들과도 덩달아 친해졌다. 나를 이따금 흐뭇한 시선으로 보곤 했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꽤 짓궂긴 했지만.
여러 번 같이 밥을 먹어본 결과, 초록 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미친 사교성.
초록 형은 학교의 모든 사람과 인사를 하고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연습생은 물론이고 직원들, 심지어는 경비 아저씨와도 친해 보였다.
…그동안은 나만 몰랐나?
나와는 다른 종족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초록 형을 제외한 다른 연습생들이 어색한데.
원래 천천히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다 거짓말이다.
아직 기본 트레이닝을 끝맺지 못해서 다른 연습생들과 오래 부대낄 틈이 없었던 탓도 있다.
다행히 보컬 트레이닝은 내일 심화로 넘어가고, 댄스 트레이닝도 조만간 마무리될 것이다.
“이원아, 밤에 나랑 자주 연습하는 애들이랑 같이 치킨 먹기로 했거든. 같이 갈래?”
“내가 가도 괜찮을까?”
말을 편하게 하라는 강권에 초록 형에게 말을 놓은 지 오래였다.
“그럼. 애들도 너 보고 싶다고 그랬어. 내가 자주 네 얘기 자주 했거든.”
“그럼 갈래.”
“10시에 볼 건데 괜찮아?”
“어차피 평소에도 1시까지 연습하다가 가서 괜찮아.”
요즘은 새벽 5시에 일어나 헬스장 갔다 와서 씻고 밥 먹고 학교 갔다가 바이올린 연습 끝나고 회사에 와서 연습하는 루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일정이 끼어들었다.
“회사 바로 옆에 있는 꽃집 앞에서 10시에 봐. 그럼 연습 열심히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조금 떨렸다.
예전엔 스스로 벽을 세웠기 때문에 제대로 사람을 마주하려고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내게 다가오다가도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무관심으로 일관했었다.
이번엔 잘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솟는다.
10시 되기 전에 미리 나와 꽃집 앞에서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되기 2분 전에 한 무리가 우르르 정문으로 빠져나오더니 키가 훤칠한 남자들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먼저 나와 친분이 있는 초록 형이 말문을 열었다.
“일찍 와있었네? 이쪽은 이번에 들어온 연습생 함이원. 서로 인사해.”
“안녕하세요. 함이원입니다. 열여덟 살이고 특기는 노래입니다.”
“내 이름은 서 혼, 외자 이름이야. 스무 살이고 랩 해.”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서, 체대생 같은 몸을 갖고 있었다. 얼굴이 어딘지 익숙해서 갸웃거리자 서혼이 작게 웃었다.
“낯익어서 그러지? 나 아역 배우로 활동했었어.”
아! 체격은 천지 차이지만 아역배우일 때 봤던 그 이목구비가 남아있었다. 어릴 때 몇 번 드라마에서 본 기억이 났다.
“내 이름 김지온. 래퍼고 너랑 동갑. 친하게 지내봐.”
“지온이는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가끔 말실수할 때가 있으니까 참고해.”
초록 형이 주의사항을 미리 말해줬다. 외모랑 어울리는 저음의 목소리 탓에 지온이 서혼 형보다 연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깊게 들어간 아이홀과 진한 이목구비 때문에 혼혈처럼 보였다.
“박하준! 내가 17살이라 이 중에 막내! 근데 형 반말하면 안 돼…요? 나도 불편한데…요.”
조각같이 생긴 정석적 미남. 외모만큼은 지금도 완성형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로 그룹을 만든다면 비주얼 멤버는 단연 박하준이었다. 다만 말투에서 어린 태가 났다.
“아, 서혼 형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한두 살 차이는 사회 나가면 다 친구라고 하잖아. 형이라고만 하면 되지. 그런 면에선 너그러워서.”
“저도, 아니 나한테도 반말해도 괜찮아.”
서혼 형과 내가 수락하자 다 같이 말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땡큐! 이원 형! 그럼 다 준비됐지? 우리 빨리 가자! 아까부터 배가 꼬르륵거리고 있어!”
* * *
일행은 골목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가더니 허름한 외관의 치킨집에 도착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은 찾기도 힘든 길이었다.
“여기는 양념치킨이 제일 맛있어. 내가 찾아낸 맛집인데 가성비도 좋고 주인 할머니 솜씨가 진짜 좋으셔.”
초록형은 이곳에 처음 방문하는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할모니이! 여기 양념치킨 6마리랑 후라이드 3마리 주세요!”
“박하야, 물어보고 시켜야지. 이원아. 치킨 한 마리는 먹을 수 있지? 평소보다 1마리 추가된 건데.”
박하준이 무작정 주문을 넣어버리니 초록 형이 부드럽게 충고했다.
입을 삐죽거린 박하준이 자기가 잘못했냐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적극적인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다른 사람한테는 물어봐. 나는 그런 데에 예민하지 않아서 괜찮아. 박하준.”
“엇! 정 없게 박하준이 뭐야! 박하라고 불러!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얘도 이름을 전부 붙이면 정 없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인가. 박하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그런데 원래 넷이서 8마리를 시켰어? 다들 잘 먹는구나.”
한창때의 남학생들이라면 먹을 수도 있었다. 인당 2마리씩 먹으면 살짝 과식하게 될 듯싶지만.
“아, 그거? 닭이 작아서 그래.”
“초록 형 거짓말! 여기 닭 프랜차이즈보다 크잖아. 왜 나 대식가다, 혼자 5인분 먹는다 말을 못 해!”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초록형을 보니 박하의 발언에 신빙성이 실렸다.
키도 나랑 비슷하고 말랐는데 치킨을 다섯 마리나 먹는 대식가였구나.
“초록이는 살 안 찌는 체질이라 부러워.”
“그러는 서혼은 항상 운동하잖아. 먹는 대로 찌는 체질이어도 살찔 틈 없어. 운동 freak.”
영국식 영어 발음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우리 말보다 외국어를 할 때 귀족적인 저음이 돋보였다.
별걸 다 알게 된다. 대식가, 체질, 운동광. 다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면서 친해지나? 그럼 나도 TMI를 말해야 하나?
“내 생일은 식목일이야.”
“…갑자기?”
“…TMI 타임인 줄 알았는데.”
이게 아니었나?
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멈칫했다가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해석에 오류가 있었나?
“이원, 뜬금없이 웃기네. un peu, 그러니까 약간 눈치 없는 편?”
“아닐걸…? 이런 상황이 낯설어서 그래.”
한 번도 눈치 없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다. 뭐 그렇게 말할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기분이나 좋고 싫음, 미묘한 몸짓언어에도 민감했다.
“이원 형, 이런 상황이 정확히 뭐야?”
“여러 명의 동년배에게 에워싸여서 사교하는 상황?”
“단어 선택 봐! 크크크크 이 형 진짜 친구 없나 보다!”
어떻게 알았지. 겉으로 티가 많이 나나?
“박하야, 형을 그렇게 놀리면 된다고 했어, 안 된다고 했어.”
“안 됩니다!”
“이원이는 음, 그러니까 고독한 천재 같은 타입이라 그래. 그래서 우리 학교 명물이기도 하고.”
왠지 ‘그’ 단어가 나올 것 같았다. 입에 담기도 수치스러운 그 인…, 어쩌고 단어.
절대 말하지 말라고 열심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더니 초록 형이 웃으며 윙크했다.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냉미남이라고 인기 많은데 성적도 상위권이야.”
“옷! 수석이라고 했으면 만화주인공이었는데 아쉽다.”
“모의고사 볼 때마다 전교 1등이라던데? 바이올린 전공 실기시험 때마다 클래식 곡을 재즈곡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지.”
학년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데 소문이 어디까지 돈 거야. 남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지?
“아하하! 세상에 반항하는 고독한 천재 맞네! 이 형 진짜 웃긴다. 왜 그랬어?”
“…맨날 악보 그대로 켜기 지겨워서.”
안 그래도 정통 클래식은 아기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다.
틀에 박힌 악보 그대로의 해석을 따르면,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기분이라 도저히 그렇게 연주할 수가 없었다.
“언제 jam 해보자. 내가 piano. 이원 violin. 어때?”
“이원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진짜 예술가같이 멋있어서 친구 하고 싶어.”
“나도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왜 다들 나한테 치댄다는 기분이 들지? 내가 무슨 짓 했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니 좋긴 한데, 기분이 이상하네.”
“으하하하! 눈치 없는 편! 오케이!”
다들 왜 고개를 끄덕여?
나, 눈치 없지 않은데.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