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94
습작을 털어라 (2)
고양이, 정확히는 운명처럼 만난 천재 고양이 함현을 떠올리면 드는 감정을 표현한 곡.
‘함현 No. 3’이라는 제목만 정해뒀을 뿐, 가사는 없었다. 피아노 음을 메인으로 한 유려한 진행 때문에 뉴에이지 장르에 가까운 곡이었다.
반복 구간이 있긴 해도 이 곡은 9분짜리였다. 곡을 쓰고 보니 현이에 대해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쌓여있었구나, 싶어서 머쓱했다.
이 곡은 현이한테만 들려주려고 했었는데….
“이 곡을 묻어두려고 했어?”
묻어두려던 곡은 아니었다. 아직은 공개하기 부족한 곡이라고 생각했을 뿐.
“괜찮은 곡이긴 한데 다듬어야 해서.”
“따스한 봄에 야외 그늘에서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잠들락 말락 하는 노곤한 기분?”
“……!”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작곡할 때, 짧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해먹 위에 현이와 함께 누워서 낮잠을 자고 싶다고.
서혼 형의 예민한 감수성은 음의 나열만을 듣고도 그 안에 담긴 단상을 읽어냈다. 이럴 수가 있구나.
“비슷한 상상 하면서 작곡했어. 작곡 의도가 전해졌어? 신기하다. 이렇게까지 내 뜻을 읽어주는 사람은 드문데.”
“정말? 이원이 칭찬을 듣다니 영광이네.”
순박하게 미소 짓는 서혼 형에게서 자애로운 후광이 이는 착각이 들었다.
“이원 형! 이 곡 현이한테 들려줬어?”
“아직?”
“내가 랜선 프로 집사라서 아는데 이 곡 고양이들이 좋아할 만한 곡이야!”
랜선 집사는 아는데, 프로와 아마추어가 따로 있나?
박하는 당장 현이를 데려와야 한다고 우겼다. 그래서 내친김에 현이를 데려와서 작업실을 한번 구경시켜 주기로 했다.
앞으로도 작업실에서 보낼 시간이 길 테니 여기로 같이 출근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물론 현이가 숙소에서 뒹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다녀올게. 노트북에서 아무 곡이나 틀어봐도 돼.”
현이가 다른 멤버와는 친하지 않아서 내가 직접 데려와야 했다. 다른 멤버가 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어버리니까.
* * *
작업실이랑 숙소가 가까워서 뛰어갔다가 현이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왔는데도 10분이 지나지 않았다.
내가 ‘작업실에 가볼래?’하고 물었더니 냉큼 이동장으로 들어가 버린 현이 덕에 시간이 단축됐다. 이쯤 되니 현이가 정말 고양이계의 아인슈타인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현이 데려왔…?”
문을 열면서 현이를 데려왔다고 알리려는데 멤버들이 내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함이원은 이런 보물 같은 곡들을 꿍쳐두려고 했단 말이야? 자기가 낳는 알이 황금알인지도 모르는 거위네.”
방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치고 들어온 오란의 말에 서혼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서 웃으면 홍오란의 발언이 진짜 같아지잖아.
“H21 Violin Etude No. 5? 뭐야, 바이올린 연습곡도 썼어?”
나 혼자서 한 곡으로 손을 완벽하게 풀어보려고 만들었다. 오로지 굳은 손을 풀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서 멜로디는 엉망인 곡이었다.
“몇 곡은 엄청 실험적인 뉘앙스가 강하더라. 우리 앨범은 상당히 대중성을 고려했구나.”
초록 형이라도 알아주면 됐다. 아무리 경험 삼아 제출했어도 우리의 데뷔 앨범을 위한 곡이라 음 하나하나 고뇌했다. 특히 상업성에 관해서는 오래도록 고심했다.
“그러네. 이원이가 듣는 노래 플레이리스트 본 적 있는데 장르를 안 가리더라고.”
잡식성 음악 청취자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신선한 곡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조금만 엇나가면 시대를 훌쩍 앞서나갔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 간격을 잘 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아이돌로 활동을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이 올까?
“정했어. 이걸로 달라고 할래.”
설마 지온이 정했다는 곡이 지금 작업실에 흘러나오는 이 곡은 아니겠지? 붐뱁이나 트랩 비트를 주로 랩에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 연습곡은 대중들에겐 해괴한 수준인데?
“…정말 그거?”
“이원 왔어? 왔으면 기척을 내지.”
기척을 냈는데도 까맣게 모른 채로 이야기에 폭 빠진 사람들이 누군데.
나는 대꾸하는 대신 고양이 이동장을 열어준 다음 소파에 앉아서 무릎을 두 번 툭툭 두드렸다.
대번에 이동장에서 쏙 나오더니 허벅지 위에 안착하는 현이를 보고 멤버들에게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훈련해도 될까 말까 일 텐데? 고양이는 변덕스러운 동물인데?”
예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다는 박하는 자기의 상식과 어긋나는 현이를 연구하기 직전이었다.
“현이는 천재 고양이라 그래.”
시도해보진 않았지만, 어깨를 두드리면 어깨에도 올라오지 않을까. 가만히 형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하가 슬쩍 츄르를 꺼내 들었다.
“현아~ 내 무릎에도 올라와 주지 않을래? 츄르 줄게. 응?”
워낙 말귀를 잘 알아듣는 고양이라 멤버들도 아이 대하듯 하고 있었다. 평범한 고양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냐악!
울음소리가 날카로웠다. 박하도 거절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조건을 낮췄다.
“그럼 츄르만 먹어. 그건 괜찮잖아?”
현이는 허벅지에서 내려가서 츄르를 얻어먹고 재빠르게 복귀했다. 츄르를 먹이고도 박하는 절망에 빠졌다.
유난히 나만 따르는 고양이라서 나날이 멤버들의 도전 욕구도 자라나고 있었다.
“나만 고양이 없어….”
시무룩해진 박하를 두고, 다시 지온에게 말을 걸었다.
“지온, 설마 지금 이 연습곡을 달라는 거야? 이 곡으로 랩을 해보려고?”
“어. 편견을 깨는 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들쑥날쑥한 음의 높낮이와 길이, 생소한 전개뿐인 곡이라 편견이 깨지는 대신 듣는 사람들의 평온이 깨질 것이다.
만들어놓고도 몇 번 연주해보지 않은 이유가 있는데.
“꼭 이 곡으로 해야겠어?”
“이미 꽂혔어.”
지온의 고집을 말릴 수 있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타협점을 찾는 게 시간 절약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럼 다듬어서 줄게.”
다듬다가 다 뜯어고치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다듬기의 일환이다.
“이원 형! 현이한테 노래 들려주기로 했잖아. 함현 No. 3!”
그랬다. 현이한테 피아노곡을 들려주려고 데려오고선 딴 데 정신이 팔렸다. 멤버가 6명이나 되니 흔한 일이었다.
“현이한테 들려주는 첫 곡이니까 직접 연주해줄게. 현아, 여기 앉아서 들어.”
박하의 소원도 들어줄 겸 앉아있는 박하의 허벅지 위에 현이를 올려뒀다.
냐아?
맘에 안 들지만 한번 참아주겠다, 하는 느낌으로 박하의 허벅지에서 편안한 자세를 찾아 웅크렸다.
박하가 현이를 깨지기 쉬운 설탕 장식처럼 조심스레 쓰다듬는 모습을 보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작업실 공간의 문제로 내 그랜드피아노까지 가져오긴 무리라서 아직 집에 있었다. 오늘은 어쿠스틱 피아노로 연주하게 됐다.
‘함현 No. 3’는 악기나 프로그램 없이 떠오르는 악상대로 악보를 손으로 그렸던 곡이라 전부 외우고 있었지만, 악보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하기로 했다.
주제인 현이를 관객으로 두고 연주하면 더 감정이 풍부한 곡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테니까. 일관성을 유지하는 선에서 편곡하는 느낌으로.
♬♩♪~
차분하게 시작해서 잔잔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이어 나갔다. 손가락에 힘을 빼고 페달을 밟아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클라이맥스도 없는 곡이라서 조용히 집중하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들을만한 곡이었다.
중간에 힐끗 현이를 쳐다보니 눈을 감고 평온하게 고롱거리고 있었다. 들어줄 만한가?
후반부에는 낮잠을 자고 있는 상황을 가정했기 때문에 소리를 줄여서 연주했다.
원곡의 감성을 유지한 채로 연주는 조용하게 끝맺음했다.
디링….
박하가 입을 벙긋거리며 손가락으로 현이를 가리키더니 두 손바닥을 모아 볼 옆에 가져다 댔다.
아, 현이가 잠들었다고? 깰까봐 목소리도 못 내고 숨죽이는 거고?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부르는지 알겠다. 그나마 순화해서 불러주는 거구나.
고양이를 맡아 키우는 사람도 아닌데 박하는 사고의 중심을 현이에게 두었다.
저 정도면 진짜 신을 모시는 신도 같은데….
“피아노 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른해 보이더니 잠들었네. 이원아, 이 곡 상업적으로 쓸 생각 없으면 뉴튜브에 올려서 팬들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내키는 대로 휘갈겨서 현이한테만 잠깐 들려준 후에 습작 목록에 들어갔을 곡.
혹시나 하고 디지털화해둔 보람이 있었다. 부족한 곡이지만 뉴튜브 영상으로 남기는 정도는 괜찮았다. 팬들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도록.
“좋은 아이디어야. 고양이 자장가라고 올려도 되겠다. 함현 No. 1, 2도 들려주면 좋고.”
두 곡은 더 부족한 수준이지만, 일단 알았다고 대답은 해두었다.
순식간에 할 일이 불어났다. 지온에게 줄 곡을 갈아엎어야 하고, 함현 테마곡도 다듬어봐야 하고.
“디데이를 일주일 후로 잡아줘.”
* * *
테오라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닷새가 흐른 후에 곡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함현 테마곡 자체는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곡조라서 건드릴 부분이 별로 없었지만, 문제는 지온에게 주기로 한 연습곡이었다.
지온이 ‘연습곡 No. 5’에서 느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거슬림이 없어야 했다.
두 가지를 만족시키려고 하다 보니 곡 하나를 통째로 다시 쓰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나름 그럴듯하게 나왔다. 여전히 랩비트보다는 다이내믹한 클래식 반주곡에 가깝지만, 조금 더 손봐서 지온에게 곡을 전달해주기로 했다.
함현 테마곡이 완성되고 별생각 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게 뉴튜브에만 공개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저작권 등록을 먼저 진행하자고 제안해왔다. 저작권 시비에 휘말릴 일을 사전에 차단하자면서.
이 곡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지만, 그와 별개로 문제가 될 요소가 있다면 사전에 방지하는 게 현명했다.
멤버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마자 회사에서 모든 일 처리를 대신해주셨다.
저작권 등록 후, 뉴튜브 촬영을 위한 준비도 순조롭게 마쳤다. 그리고 오늘, 테오라는 촬영을 위해 그랜드피아노가 있는 공간을 대여했다.
촬영은 저번 ‘야! 타! 테오라!’의 첫 자컨을 찍어주셨던 직원분이 맡아주셨다.
【코티지에게 깜짝 (선물 이모티콘) by.테오라】
“안녕하세요! 무한한 가능성, 테오라입니다!”
코티지들이 빠른 속도로 라이브 방송에 들어오는 동안, 초록 형이 조곤조곤 안부를 물었다.
아직도 퇴근을 못 했다는 분, 야식 메뉴를 고민하는 분, 뒤늦게 입덕했다고 과격하게 인사를 하는 분….
저 너머에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팬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예고 없이 라이브 켜서 놀라셨죠? 오늘은 코티지 여러분에게 이원이가 선물을 드린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자세한 내용은 이원이가 설명할 거예요.”
무슨 선물이냐고 기대감이 서린 질문들이 쏟아졌다. 기대감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굉장한 선물처럼 포장하면…!
“…별건 아니고, 저와 함께 살게 된 고양이 함현에 관한 곡을 끄적거려봤는데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 현이♥♥♥♥
– 고양이 이름이 함현?
– 함 씨 야무지게 붙여줌ㅋㅋㅋ
“고양이 집사인 초가삼간들은 고양이랑 같이 들어주셨으면 해요. 현이한테 먼저 들려줬는데 잠들더라고요.”
– 초가삼간?!
– 이원이는 우리를 초가삼간이라고 부르넹?
– 고양이 자장가예요?
– 주인님 데려올게요!
곡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팬덤명을 나 혼자만 ‘초가삼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아채고 채팅을 남기는 분들이 있었다.
“원래 초가삼간이잖아요. 초가삼간이라고 불러달라고 투표하신 분들이 많으니까 저는 이렇게 부를 거예요.”
– 이원이 삐졌다!
– 초가삼간이라고 불러준다고? 오히려 좋아!
– 초가삼간에 투표했다고 복수야? ㅋㅋㅋㅋㅋ
– 정보) 저번 생일 라이브에선 코티지라고 불렀음
– 졸귀 뭔데
– 자기가 잘못한 날은 코티지라고 불러주는거구나ㅋㅋㅋ
채팅창으로도 즐거워하는 익살스러운 감정이 전해졌다. 답이 정해진 당연한 질문 같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