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99
여행을 떠나자 (1)
서혼 형의 본가는 여수.
바닷바람이나 쐬고 돌아오는 의미였던 초록 형의 발언은 2박 3일간의 여행으로 뒤바뀌었다.
여수는 서울에서부터 가긴 멀지만 여행 간다고 생각하면 4시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외여행까지 생각하기엔 짧은 휴가지만, 멤버들과 함께 KTX를 타고 여수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여행 기분은 확실히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가도 돼?”
“우리 집이 넓진 않아서 숙소는 따로 잡아야 하겠지만, 내가 안내는 해줄 수 있어.”
“와! 무료 가이드! 현지인의 맛집 추천!”
“그건 좀 끌리는데?”
초록 형은 ‘맛집’이라는 단어에 솔깃해서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모두가 동의한 마당이라 여수 여행 계획은 착착 짜였다.
여름 방학인 서혼 형은 휴가가 시작되면 미리 본가에 내려가 있다가 사흘 뒤에 우리가 여수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마침 주말이 끼어서 날짜도 적절했다. 나에게 멤버들과 여행을 가라고 떠밀 듯이.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서 학교 빠지기가 난처했는데 딱 좋았다.
“그럼 그때까지 각자 휴가 건강히 잘 보내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알았지?”
리더의 당부를 끝으로 우리는 본격적인 휴가에 돌입했다.
* * *
휴가 동안 꼬박꼬박 학교에 나갔다. 아이돌 활동을 출석으로 인정해주긴 하지만 스케줄이 빌 때마다 틈틈이 학교에 나왔던 터라 데뷔 전과 달라진 재학생들의 시선이 낯설지는 않았다.
아이돌로 데뷔하고 난 후에 처음 등교한 날이 떠올랐다. 그땐 진짜 난감했는데….
클래식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학교라서 TV에 나오는 현직 배우나 가수가 드물었는데, 아이돌은 더 특이한 진로였다.
그래서 초록 형이 졸업하고 난 후, 모든 관심이 내게 쏠렸다.
원래부터 내게 시선이 모일 때가 종종 있어서 우리 학교 학생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눈길이 따갑고 노골적이었다.
“…이원아. 혹시 사인해줄 수 있을까?”
반 친구 한 명이 한참 망설이다가 사인 요청을 하기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내 책상 옆에는 테오라 앨범이 쌓이게 됐다. 내 키만 한 높이의 앨범 탑이.
아무리 같은 학교에서 아이돌이 나왔다고 해도 앨범까지 사줄 필요는 없는데. 성의를 봐서라도 전부 사인을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도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 부족해서 얼마 찍어주지 못했다.
결국은 쉬는 시간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바쁘다는 티를 팍팍 내는 방법을 써야 했다.
사인이나 사진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학교에 왔을 때 그간 못했던 공부를 해둬야 했다.
졸업도 졸업이지만, 나는 수능을 치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이돌 활동을 하느라 공부에 소홀해졌으니 성적은 형편없을 수 있어도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와 같이 수능을 치르는 코티지들에게 조금이나마 응원이 되길 바라는 부분도 있고.
“선생님, 진로 상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3학년이 된 나의 담임은 공교롭게도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
교무실을 찾아가 담임 선생님께 진로 상담을 부탁드렸을 때, 선생님은 화들짝 놀라셨다.
아이돌이라는 진로를 정했으면서 ‘진로 상담’을 하고 싶다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진로 상담…? 이원아, 일단 상담실 가서 얘기할까?”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서 차근히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돌 그만둘 건 아니지…? 선생님은 이원이 네가 진로를 정해서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됐으니 진로 상담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부르지 않았는데….”
“대학, 까지는 아직 결정 못 했는데 일단 수능은 보고 따지려고요.”
“하긴. 이원이 네 성적이 아깝긴 하지. 성적이 떨어졌어도 어디든 거뜬하니까. 이원이 원하는 대학 있니?”
담임 선생님은 음대 기준으로 말씀하신 것 같지만, 나는 음대에 갈 생각이 없었다.
아이돌인 내게 필요한 건 연주 실력이나 음악적 지식이 아니라 대중음악에 대한 경험이니까.
실제 필드에서 부딪치고 깨져가면서 배우는 게 효율적이었다.
“법대 쪽으로 가면 어떨까요?”
“…법대? 정말로? 이원이 네가?”
“네.”
“수능 성적이 모의고사 정도로만 나와도 웬만한 대학 법학과는 다 갈 수 있겠지만, 왜 갑자기 법대를?”
“굳이 대학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만, 혹시나 아이돌 지망생과 아이돌, 한때 아이돌이었던 사람들에게 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이원아, 혹시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
“아니에요.”
소속사의 부당한 행위에 피해자가 되었다던가, 소송에 휘말리거나 그런 험한 상상을 하셨나?
딱 잘라 말하자 그제야 밝아지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면 그런 듯했다.
이건 ‘망돌’인 현오 형과 만남으로써 가지게 된 생각이다.
망돌이었던 형에게 법적인 조언을 줄 동료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하는 상상에서.
“거창한 건 아니에요. 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불미스러운 일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요.”
법학도가 된다고 해서 전문적인 도움을 주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때 아이돌이라는 꿈을 꿨던 이들에게 조언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이원이가 생각이 깊구나. 그런 의도라면 선생님은 무조건 찬성이다. 우선 대학 팸플릿부터….”
“감사합니다.”
“아이돌로 데뷔해서 활동하느라 바쁠 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부까지 하겠다는데, 선생으로서 마땅히 도와야지.”
같이 사진을 찍어드리기로 한 것뿐인데. 담임 선생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전부터 호의적인 분이셨는데 이제 내가 뭘 하든 다 좋게 해석해주실 기세였다.
선생님은 대학 입시 요강을 따로 정리해서 주신다고 했다. 관련 자료는 차차 받기로 했다.
예고 선생님으로 있으면서 인문계열 법학과를 지망하는 학생을 맡아본 경험은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아이돌이 되겠다고 말씀드린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일을 자주 저지르는 것 같다.
선생님께 별난 애로 찍힌 거 아닐까? 나는 지극히 평범한데….
* * *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에 붙어있는 쪽지를 읽어보니 내가 학교에 다녀오는 사이 지온과 아빠가 함께 쇼핑을 나갔단다.
우리 아빠랑 둘이서 쇼핑을…? 고개가 절로 갸우뚱거려졌다.
쪽지만 덩그러니 남은 집에 들어왔더니 고양이 두 마리가 나를 반겼다.
한 마리는 당연히 함현이고, 한 마리는 아빠, 엄마가 유기묘 보호 센터에서 데려와서 임시 보호 중인 치즈태비였다.
현이와 달리 암컷 성묘인 치즈태비는 아직 임시 보호 기간이지만 입양이 정해졌다.
아빠는 미리 엄마 성을 써서 ‘연주황’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툭툭?
소파에 앉아서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두 번 쳤더니 벌처럼 날아온 현이가 어깨에 올라탔다.
“주황아, 너도 이리 올래?”
허벅지까지 올라오긴 이른 듯해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더니 주황이 머뭇거리면서 조금씩 다가왔다. 나는 움직임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주황이 내 발치에 와서 웅크렸다. 아직 소파 위까지 올라오긴 싫은가.
이번에 집에 돌아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고양이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특이한 경우인 현이를 제외하더라도, 주황이도 나를 유별나게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아빠가 서운해하고, 엄마도 어이없어했다.
나한테 고양이가 좋아하는 향이라도 나나?
소파에 앉은 채로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잠깐 졸았다가 깼더니 지온과 아빠가 돌아와 있었다.
거실에 쇼핑백이 한가득이었다.
“잘 다녀왔어, 지온? 아빠, 둘이서 재밌었어요?”
“너희 여행 간다며? 그래서 옷이랑 래시가드랑 여러 가지 샀지.”
다 집에 있는 건데 뭘 또 사 오셨지?
쇼핑에 따라갔다 온 지온은 한층 피부가 맨들맨들해져 있었다.
그렇게 즐거웠나? 쇼핑은 질색할 이미진데 반전이다.
“아버지랑 쇼핑, 재밌었어. open minded여서 좋아.”
둘이 죽이 잘 맞는다니, 기분은 썩 좋았다.
어째 아들인 나보다 멤버들이 더 아들 노릇을 잘하는 것 같다. 아빠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끊이질 않는 것만 봐도 알겠다.
“현이도 주황이도 우리 아들을 너무 좋아하네…. 아빠도 좋아해 주지. 이원이 여행가는 틈에 열심히 친해져야겠구나.”
낮잠에 빠졌던 동안, 고양이 두 마리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단다.
그나마 주황이가 아빠의 진심을 알아주는지 손은 허용했지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 현이를 집에 맡기기로 했는데 아빠는 그 기회를 노리시는 모양이다.
나는 고양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도 일방적인 호감을 주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현이와 주황이가 나를 좋아해 주는 만큼 나도 예뻐해 주기로 했다.
“동류를 알아보는 걸지도.”
지온의 해석을 들은 아빠가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동류…? 아무래도 지온이 아직 한국어가 서툰 것 같다.
근데, 아빠는 왜 숨넘어가게 웃으시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퇴근하고 돌아오신 엄마와 저녁을 먹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담소를 마칠 즈음엔 엄마가 지온에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다.
“지온이 명예 함 씨로 임명하자. 함지온, 어감도 괜찮지 않니?”
“명예 연 씨가 더 괜찮지 않겠어요? 연지온.”
아빠까지. 지온이 작정하지 않고도 무심결에 상대를 심쿵하게 하는 편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상대를 홀릴 수 있을 줄이야.
테오라 멤버들과의 일상을 언급할 땐 표현이 사실적이면서도 재치 넘쳐서 몰입하게 됐다.
부모님께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명대사였다. 우리 부모님을 꼬시려고 하나 싶을 만큼.
이 정도는 되어야 래퍼를 하는구나 싶었다. 본능적인 센스를 타고난 것 같다.
단어 하나하나에 심오한 의미를 담는 서혼 형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지온이 자기 능력을 랩이나 팬들에게만 사용해야 할 텐데…. 아니면 난장판이 벌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빠가 나가서 차고에서 차 빼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오렴. 우리 슈퍼스타들.”
주로 내가 이야기 주제가 되는 바람에 먼저 드라이브 가자고 제안했다. 물론 차 안에서도 나를 씹고 뜯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녹화 영상을 반복 시청하거나 아빠가 직접 만든 스크랩북을 구경하진 않아도 되겠지!
“못 말려. 이원이 아빠가 팔불출이라 부끄럽네.”
“사랑이 깊다고 부끄러울 이유가 있을까요? 멋있는데.”
“어머.”
나가기 전에 두 손으로 고양이 두 마리를 동시에 쓱쓱 쓰다듬으면서 둘의 얘기를 흘려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무서울 정도였다.
“어머니랑 아버지 두 분 제 롤모델이에요.”
“에이, 롤모델이라니. 빈말이라도 고마워, 지온아.”
“빈말 아니에요. 어머니, 아버지 같은 가족 가지고 싶거든요. 저희 부모님은 워낙 바쁘신 분들이셔서.”
“지온이가 외로웠구나.”
엄마는 지온과 함께 밖으로 나가면서 등을 툭툭 두드렸다.
지온의 고개가 엄마가 있는 방향으로 기울자 엄마는 팔을 올려 지온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지온이 외로움을 탄다고? 이상하다. 전에 외로움은 왜 느끼냐고, 고독 좋지 않냐던 사람은 어디 갔지?
지온 맞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