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08)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08)화(108/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08)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루드비히는 아직도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앞까지 다가왔다고 믿었던 꿈이 물거품처럼 흩어진 날.
당시 루드비히는 원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관 역할을 맡고 있었고 덕분에 원대한 꿈이 완성에 다가가는 주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대륙인들이여, 자비로운 짐은 그대들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선택하거라, 내 발 앞에 엎드릴 것인지 아니면 내 손에 죽을 것인지.”
마침내 타샤드 제국의 광(狂)군주 ‘갈브레이드 3세’의 입에서 정신 나간 선전포고가 터져 나왔을 때 루드비히를 비롯한 원의 유망주들은 온몸의 혈관이 타오르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정신 나간 갈브레이드 3세가 전 대륙을 향해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이상, 이제 전란의 불꽃이 대지를 뒤덮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아무리 폴리다고스의 벽이 견고하다 해도 전 대륙을 뒤덮을 전란의 불꽃을 피해 갈 수는 없어! 결국 놈들의 벽 또한 허물어질 것이고 그리되면 우리는 마침내 ‘엘 페도’를 지상에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억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들을 억눌러 왔던 엘 페도가 사라진다면,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젊은 루드비히는 갈브레이드 3세의 출정식 광경을 기록하기 위해 감격의 눈물로 젖은 두 눈을 부릅떴고 마침내 미치광이 황제가 막 국경선을 넘어선 그 순간.
“자객이다!”
“자객이 폐하를 습격하려 든다! 막아!”
그토록 현명하고 사려 깊은 섭정까지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폐하,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검은 야행복으로 몸을 감싼, 백발의 암살자 한 명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은 갈브레이드 3세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예상치 못한 시간, 꿈에도 상상치 못한 장소에서 자객을 맞닥뜨린 경비병들은 혼비백산하여 황제의 앞을 막아섰다.
“몸을 피하라니? 이제 곧 온 세상의 주인이 될 이 몸께서 한낱 자객 따위의 칼을 피해 달아나라는 말이냐?”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자객을 앞두고 허세를 보이는 황제의 모습이 못 미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루드비히는 별일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암살자와 황제 사이의 거리는 족히 1000미터는 되어 보였고, 그 사이에 있는 제국의 최정예병들이 어렵지 않게 암살자를 막아 내리라 생각했으니까.
“컥!”
하지만 상황은 루드비히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암살자의 검이 번득일 때마다 갈브레이드 3세가 손수 키워 낸 정예병들의 목이 잘려 나갔고, 절대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황제와 암살자 간의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페, 폐하! 폐하를 모셔… 크륵!”
타 왕국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백성들을 학살할 때는 무적일 것만 같았던 병사들이 허수아비처럼 썰려 나가기 바빴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의 노년 암살자는 혼자서 다른 시공간을 걷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비현실적인 움직임 앞에서는 1000미터의 거리도, 타샤드 제국의 최정예 병사들도 모두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폐… 컥!”
700미터, 500미터,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50미터, 10미터, 3미터.
최초의 첫걸음을 내디딘 이래로, 암살자는 단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황제를 행해 쇄도해 왔고, 암살자의 검이 황제의 목젖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이놈!”
신분을 숨긴 채 황실 근위대장으로 잠입해 최측근 경호라는 명목하에 갈브레이드 3세의 탐욕을 자극하던 ‘늑대인간 멤피스’가 대검을 뽑아 든 채 암살자를 막아섰다.
“크르르륵….”
하지만 태산 같은 기세로 적군을 깔아뭉개던 멤피스 역시 암살자 앞에서는 한낱 하룻강아지에 불과했고.
촤르르륵.
결국 멤피스의 반들반들한 대머리는 심장에서 터져 나온 피 분수로 인해 따끈따끈하게 물들어 버렸다.
“네, 네놈이 감히 대륙을 지배할 짐에게….”
1000미터의 간격을 1미터까지 줄이는 동안 암살자는 오른쪽 다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지고 안구 역시 뽑혀 나가고 말았음에도 결코 전진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짐은, 짐은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서걱.
그리고 황제가 발작적으로 휘두른 검이 암살자의 왼팔을 잘라 낸 그 순간.
토옥.
미치광이 황제의 목 또한 잘려 나가고 말았다.
데구르르르.
“폐하!”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던 탓에 황제의 목이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살아남은 대신들과 경비병들은 비명을 내지를 수 있었고, 기적과도 같은 살인을 연출해 낸 장본인은 넝마가 된 몸을 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주르륵.
루드비히는 그제야 자신이 바지에 오줌을 흠뻑 지렸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빙긋.
한 발로 버티고 선 채 황제의 시선을 내리깔아 보는 암살자의 입가에는 ‘열등한 인간의 규격을 아득하니 뛰어넘은 초인’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미소가 걸려 있었고.
“부디… 내 죽음이 가취가 있기를….”
이 말을 끝으로 암살의 신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꾸… 꿈이… 일족의… 원의… 꿈이… 엘 페도… 주, 주인님….”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짓눌린 루드비히는 바지를 적신 채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몸을 떨었다.
그렇게 대계(大計)는 시작과 동시에 허망하게 끝이 나 버렸고.
황제가 암살되는 와중에도 자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감정의 정체가 ‘공포’라는 걸 인정하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우….”
그 후로 11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암살의 신 앞에서 오줌을 지렸던 ‘젊은 뱀파이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루드비히가 느꼈던 절망은 조금도 가시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목을 짓눌러 왔다.
―각하!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괜찮아, 잠깐 옛일이 떠올랐을 뿐이야.”
지금도 루드비히는 종종 생각하고는 한다.
그날 갈브레이드 3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엘 페도는 지상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자신들을 옭아매 왔던 족쇄 또한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랬다면, 그리만 되었더라면….
‘얄궂어. 원의 역사를 통틀어 우리의 꿈이 사정권 안에 들어온 건 모두 두 번. 한데 그 두 번의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 놈들의 정체를 아직까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니. 주인님께서 우리의 못난 모습을 보시게 되거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언젠가 ‘강림하실 주인님’의 영광을 훔친 걸로도 모자라, 그 영광을 제련해 자신들을 옭아맬 족쇄로 만든 ‘강탈자 오펜하이머’.
117년 전, 대륙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것만 같았던 불꽃을 그것도 단신으로 진압해 버린 ‘암살의 신’.
영원히 저주받아 마땅한 두 명의 대적(大賊)이 저지른 악행을 되새기자니 뇌가 하얗게 익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들의 계획을 번번이 훼방 놓는 요아힘 벤제르센이나 팩셰르 에우리디케도 증오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저 둘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비주죽.
끝내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탓에 루드비히의 송곳니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고, 그 송곳니 끝에 서린 냉기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로 뱀파이어는 말했다.
“엘리제, 지금부터 멍청이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자고. 다가올 약속의 날, 최선두에 서서 주인님을 영접하는 영광을 누리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밤의 귀족이라는 걸 말이야.”
* * *
히이이잉.
꾸에엑.
야트막하게 솟아난 언덕 아래로 쭉 뻗은 오솔길과 길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폐허.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4박 5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각자의 주인을 태우고 온 말과 마수들의 입에서는 거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페스티라카, 압도적인 크기는 여전하네.’
거대한 유적이 주는 압박감에 억눌린 마수들이 발작적으로 토해 내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내가 알고 있는 고대 유적에 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페스티라카.
‘고대 왕국의 제3 몰락기에 매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유적.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 메상 박사에 의해 발굴이 되었으며 잔존 유적의 규모로 따지자면 모든 고대 유적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것으로 알려진 초거대 유적.
“우와… 크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보이는 광경. 그리고 저 너머까지가 전부 다 페스티라카 유적이라는 말이지.”
“진짜 대단하다. 거대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페스티라카는 단독 유적이잖아? 그런데 성에, 숲에, 호수에, 상업지구에, 미궁까지 보유하고 있는 폴리다고스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니. 고대왕국 사람들은 이 넓은 유적에서 도대체 뭘 하고 살았을까?”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말과 마수뿐만이 아니었다.
마침내 유적을 목격한 햇병아리들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연신 감탄을 쏟아 내기에 바빴다.
이동수업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이유가 학생들을 감격시켜 그들의 학습 의욕을 고취시키는 데 있었다면 교수들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은 듯했다.
교만한 표정을 한 채 하루의 대부분을 흐리멍덩하게 보내고 있던 대부분의 철부지들도 지금만큼은 눈을 반짝이며 감상을 토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흐으음….”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꼭 네 표정을 보니 꼭 ‘짜식들,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다들 엄청 기뻐하네. 그럼 나도 적당히 감격스러운 척 표정 연기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물론 모든 학생이 교수진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네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는 중이었어. 너는 감격에 젖어있는 게 분명한데 내가 괜한 억측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되잖아.”
개중에는 보라는 유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당돌한 질문을 투척하는 아가씨 또한 있었으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딱히 감격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은 그래. 이곳 페스티라카는 처음이지만 고대 유적이라면 몇 번 와 봤으니까.”
“하긴, 고대 유적은 접근이 어려운 장소이기는 하다만 천공의 눈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너라면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은 해 봤겠지.”
“그래서 말인데 살짝 고민이 돼. 교수님들이 그러셨잖아. 유적에 도착하는 즉시 평가에 돌입하겠다고. 아무래도 너랑 나 둘 중 한 명이 감격을 받은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시큰둥한 모습을 본 교수님의 마음이 상하면 안 되잖아.”
“그건 괜찮을 것 같아. 우리는 3인 1조로 이뤄진 한 팀이고, 세 명 중에 두 명이 심심한 반응을 보여 주고 있지만, 나머지 한 명이 우리 몫까지 감격스러워하고 있으니까.”
후우우우.
귀를 기울이거나 하지 않아도 감격스럽다 못해 감동에 파묻혀 버린 이가 내뱉는 격한 호흡이 들렸다.
“우우와와아아아! 우와아아! 우와!”
어느새 말에서 내린 제라르는 양 무릎을 땅에 댄 채 온몸으로 감명 깊음을 표하고 있었다.
제라르는 이 자리에 도착한 것만으로 감격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친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일단 내려가거든 짐 풀 장소부터 찾자. 여기서부터는 자급자족이니까 우리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 * *
또각또각.
“아야! 나 손 베었어!”
뚝딱뚝딱.
“아이 씨, 또 진창이네. 기껏 천막을 쳤는데 다시 다 옮겨야 하잖아!”
사각사각.
“밑 재료 손질은 내가 했으니까 나머지는 너네가 해라. 난 지금부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누가 너보고 밑 재료 손질하라 그랬냐! 이게 어디서 얌체같이 제일 쉬운 일만 하려고!”
페스티라카에 도착한 지 한 시간.
쥐죽은 듯 조용했던 유적 인근은 폴리다고스의 병아리들이 뿜어내는 온갖 종류의 함성으로 인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유적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내려온 직후 총 인솔을 담당하는 맥데브 교수는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식사 준비부터 잠자리 확보까지 모두 자급자족해야 함을 천명했고 그 바람에 학생들은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걸로 끝. 제라르, 그쪽에 단단히 묶였는지 확인 한 번만 해 줘.”
“알았어, 잠깐만! 응, 아무런 이상도 없어. 지반도 단단하고 이렇게 든든한 천막을 쳤으니 며칠간은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거야.”
물론 나, 제라르, 카밀라로 구성된 3인 1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숙영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에게, 우리 3인이 며칠간 머무를 임시 거처를 만드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에(물론 옆에서 성실하게 내 지시 사항을 이행해 준 제라르의 도움도 쏠쏠했고)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페이건,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어. 헤헤, 페이건은 나보다 훨씬 더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라 노숙 같은 건 많이 안 해 봤을 것 같은데.”
“내가 또 섬 출신이잖아. 에스페타라에 있는 섬의 절반은 무인도거든. 그런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자라는 약재가 있다는 말이지. 무인도에 가서 약재를 채취하다 보니 노숙은 익숙해졌어.”
“그럼 무인도 채취는 몇 살 때 처음으로 한 거야?”
“열세 살. 아니 열두 살 때였던가.”
“지, 진짜? 우와, 클라디우스 가주님께서도 진짜 대단하시다! 귀한 아들을 열두 살에 혼자 노숙을 시켰다니.”
“‘클라디우스의 사나이는 가능한 한 강하게 키운다.’가 아버님의 교육 방침이셨거든.”
땡땡땡.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제라르의 머리 뒤에서 국자로 놋쇠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동 주목! 에헴, 지금부터 이 누나가 여러분들에게 업무를 배분해 주겠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짐 정리를 하고 있던 카밀라의 머리에는 어느새 삼각 수건이 질끈 둘려 있었다.
“우선 나는, 요리 담당!”
“어! 요리는 내가 하려고 했는데.”
우리 조의 식단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카밀라의 당찬 선언에 제라르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안 돼. 요리는 내가 할 거야. 나 제일 자신 있는 게 이거란 말이야. 제라르, 네가 제법 솜씨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안 될걸.”
“하지만 카밀라처럼 귀한 아가씨에게 요리 같은 걸….”
“응? 아가씨가 뭐 어쨌다고? 제라르 마페이언 군, 혹시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니야.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 표정을 보건대 우리 3인의 식사 준비는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던 모양.
하지만 카밀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의 영역을 사수했고, 카밀라가 (나와 제라르의 입에서 나오는)아가씨니 뭐니 하는 소리를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제라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라르 마페이언 군은 재료 손질 및 내 보조 담당. 제라르 군, 우리 앞으로 이곳에 있는 동안 잘해 봐요. 호호!”
“으, 응 잘 부탁해.”
어느새 자신들의 임무가 덜커덕 정해진 두 사람.
기민한 두 사람을 본받고자 나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럼 나는 농땡이 담당.”
“웃기고 있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페이건은 이거. 자, 얼른 다녀와!”
내 앞에 불쑥 내밀린 바구니.
“오는 길에 숲도 있고 강줄기도 있었잖아. 가서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걸 찾아와. 페이건은 채집 담당.”
“식량이라면 가져온 게 있잖아.”
“안 돼! 물론 교수님들께서 준비해 온 식자재를 사용하는 것까지 허용해 주신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우린 모처럼 먼 길을 온 거잖아. 그럼 현지 식재료를 조달해서 맛있는 걸 먹어야지. 그게 여행의 재미야. 내가 맛있는 걸로 해 줄 테니까 얼른 다녀와.”
“…방금 그 말 교수님들이 들으면 언짢아하실 거야. 우리가 캠핑을 온 게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교수님들은 못 들었으니까. 아 참, 행여나 이런 거 할 줄 모른다는 말은 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폴카산 정상에서 네가 여기저기 뽀짝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잘만 채취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호호호!”
어느새 앞치마까지 두른 채 활짝 웃으며 나를 떠나보내는 카밀라.
결국 나는 한 손에는 나무 바구니, 한 손에는 다목적 소도(小刀)를 든 채 천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카밀라 녀석, 혹시 눈치채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천막을 떠나 숲길을 걷기를 십여 분,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멈춰 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밀라가 채집 담당이라는 임무를 배정해 주지 않았다 해도 적당한 시점에 핑계를 대고 숲속을 향할 참이었다.
며칠 전부터 영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고, 숲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최적의 장소였으니까.
멈춰 선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며칠 전부터 줄곧 우리를 쫓아온 자들의 기척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결국 여기까지 쫓아왔다 이거지. 어디 얼마나 대단하신 분들인지 그 얼굴이나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