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23)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3)화(123/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3)
펄럭.
‘그러니까 일단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루페 산맥 지류에 들어선 다음 일곱 번째 갈래에 있는 폐허로 진입한 후 지하 신전으로 잠입. 그 후 다시 남쪽으로….’
처음에는 이대로 크리스틴 선배를 기다리려 했지만, 그건 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향후 일정이 기록된 지도를 펴 버리고야 말았다.
이동 경로며 순서의 결정권은 크리스틴 선배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나 역시 보좌인으로서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고 있어야 할 테니까.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한두 달 내에 학년 대표로 임용되겠지. 그렇게 되면 교내를 탐방하는 건 쉬워지겠지만 대표로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생길 거고.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바삭.
그렇게 추후 학년 대표로 임명된 이후의 일정을 헤아리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거기 있는 게 페이건 클라디우스, 맞지?”
빙하처럼, 첫눈처럼 청명한 목소리.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피차 번거로운 과정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제이콥 머스탱’, 나와 같이 있는 동안 네가 사용할 이름이야. 폴리다고스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너를 이렇게 부를 거니까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지 않도록 준비해 둬.”
“여정 동안 제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출발하기 전에 대충 이야기는 들었잖아? 그리고 애초에 네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위장 도구를 사용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알겠습니다. 제이콥 머스탱, 숙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너, 지금 ‘굳이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했지?”
거리가 제법 있었음에도 선배의 목소리는 지근거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고막을 울렸다.
“어쩔 수 없어. 이번 일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좋을 게 없고,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내가 사용할 이름은 ‘에이미 블레임’, 폴리다고스로 복귀할 때까지 크리스틴 코델리아나라는 이름은 잠시 잊어 둬.”
“알겠습니다. 에이미… 씨라고 부르는 게 낫겠죠?”
“그래, 그 정도면 좋겠네. 제이콥, 차 마시는 거 좋아하니?”
“딱히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혹시 에이미 씨가 먼 길을 걸어오셨을까 싶어 준비해 봤습니다.”
“난 차 마시는 걸 좋아해.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으니 가급적 빨리 마시고 여기는 마무리하는 걸로 하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준비한 차를 홀짝이기 시작한 크리스틴, 아니 에이미 씨.
허리까지 닿을 듯한 긴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덕분에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에이미 씨를 만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과 행동만으로도 그녀가 공주라는 별명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정확히 5분 후에 출발할 거야. 난 걸음이 빠른 편이니까 제이콥 너도 미리 몸을 풀어 둬.”
다과 정리를 마친 그녀는 나에게 몸을 풀 것을 종용한 후 자신 또한 몸풀기 체조에 돌입했다.
좀처럼 향하기 힘든 방향을 향해 쭉쭉 찢어지는 다리.
전체적인 몸 실루엣이 워낙에 가냘파서 마냥 가늘기만 할 것 같았는데 에이미 씨의 다리에는 날렵한 근육이 맵시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딱히 에이미 씨의 다리를 훔쳐보고자 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녀가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은 채 내 정면에서 다리를 쭉쭉 벌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녀의 눈부신 각선미를 감상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너, 지금 이 여자애 다리 쳐다봤지? 흐흐, 어쩐지 그 아일리 바스티아라는 여자애를 앞에 두고도 이상하게 반응이 없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우리 페이건은 다리가 취향이었던 거야. 흐흐흐, 요 호색한 같으니라고.
‘호색한 같은 아저씨 말투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그리고 당사자가 저런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저러고 있는데 두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안 볼 수가 있냐? 나는 억울해.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귀책 사유를 따지면 나보다는 저쪽의 잘못이 더 크다고.’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 털 뭉치와 입씨름을 하는 와중에도 에이미 씨는 몸풀기를 멈추지 않았고, 난 그제야 그녀의 의상 속에 깃들어 있는 불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릴? 저 정도로 활동성을 강조한 하의와 신발을 착용하고 있으면서 소매며 옷깃이 저렇게 하늘하늘한 셔츠를 입고 왔단 말이야?’
물론 그 기본 옷걸이가 워낙에 좋은 탓에 프릴 소매가 달린 셔츠도, 가죽 바지와 부츠도, 모두 그럴싸하게 어울리기는 했다.
하지만 기능성과 심미성, 두 가지가 야릇하게 혼재된 에이미 씨의 의상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히 마법을 전공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레인저를 부전공으로 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런데 애초에 레인저랑 프릴이 어울리기는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시선은 옅은 하늘색으로 물든 채 하늘거리는 소맷자락에 가닿을 수밖에 없었고.
“왜? 이런 옷 처음 봐?”
“아닙니다, 아무것도. 혹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됐어. 네가 쳐다본다고 닳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기분 나쁠 게 뭐가 있겠니?”
몸풀기를 끝낸 에이미 씨는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 볼까?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찰칵.
몸풀기를 위해 잠시 벗어 놓았던 중소형 단검을 허리와 엉덩이 사이쯤에 비끄러매고 여행자용 로브를 두르는 것으로 출발 준비를 끝낸 에이미 씨는 그대로 출발.
“아, 그리고 오해가 있을까 봐 말해 두는데 이거 내 진짜 얼굴이 아니야. 네가 위장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진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중이니까 혹시라도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내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하지 않고 자리에 멈춰선 채 당부와 명령이 섞인 한마디를 던졌다.
사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던 차였다.
물론 지금의 얼굴도 제법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의 기준을 넘지 않는 수준.
현재 에이미 씨의 얼굴에서 카밀라가 말한 바 있는 ‘카밀라 자신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위장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현실과 카밀라의 증언 사이에서 느껴지던 괴리 또한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난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뭐야? 그 어정쩡한 대답은?”
하지만 이런 내 대답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그녀는 뾰족한 가시가 돋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여기서는 힘들지만 조금 인적이 드문 데로 가거든 내 진짜 얼굴을 보여 줄게. 그때도 그런 표정으로 지금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
“번거로우시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끄러워. 내 진짜 얼굴을 보일지 말지 결정은 내가 해. 넌 그냥 내 결정을 따르면 되는 거야, 알겠어?”
진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유독 까칠한 반응을 보이는 에이미 씨.
워낙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라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인 만큼 지금의, 그러니까 평범하게 예쁘장한 수준의 얼굴로 기억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는 건가?
그 마음을 아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 자존심을 세워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굳이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나?
―억! 화났다! 화났어! 흐흐흐, 페이건이 화나게 만들었대요오.
‘그러게 말이야. 그냥 보여 준다고 할 때 감사하다며 순순히 보고 말 걸, 괜히 한마디 해 가지고 짜증만 나게 만들었네. 그런데 잠깐만….’
한데 에이미 씨의 반응을 둘러싸고 북슬이와 웃기지도 않는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으려니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가면을 쓴 여자가 나를 찾아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 주겠다고 하는 상황,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언제였지?’
떠오를 듯하면서 떠오르지 않는 애매한 기억.
“뭐 해, 따라오지 않고.”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기억의 미궁을 누비고 싶었지만 나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있었기에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에이미 블레임’과 ‘제이콥 머스탱’의 여정은 시작을 알렸다.
* * *
그날 밤.
‘일단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 두고 시작하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전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나도 그래, 페이건.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에이미, 아니 크리스틴이라는 여자애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나 봐.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서 산길을 누빈 후에야 에이미 씨는 오늘 일정을 마무리할 것을 공지했고 우리는 대충 차린 야외 캠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씻고 올 테니 기다려. 저녁 식사는 그 후에 준비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에이미 씨가 위와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 틈을 타 나는 막간 작전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회의 주제는 ‘오후 일정을 통해 확인된 바 있는 에이미 씨의 적대감’, 참가 인원은 페이건 클라디우스 외 두 마리.
‘둘 또한 그리 생각한다면 제가 괜한 착각을 한 건 아닌 모양이네요. 지금 상황에서 저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고까지 단언하는 건 조금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에이미 씨가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있잖아. 나, 오늘 오후 내내 에이미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거든. 그런데 이 여자 혹시라도 너와 몸이 닿지 않도록 엄청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
―응, 내 생각도 그래. 뭐랄까? 아주 영리하고 민첩한 움직임을 통해 접촉이 발생할 여지 자체를 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스코트들.
상황 판단이 끝났으니 이제는 생각의 깊이를 더해야 할 때, 우리 셋은 머리를 맞댄 채 내가 그녀에게 비호감을 사게 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역시 유리안 그 녀석 때문이 아닐까? 유리안 걔는 아주 착한 사람이고 인기도 많지만 넌 이래저래 사람들한테 밉보인 처지잖아. 그런데 그런 유리안과 네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도니까 약혼녀로서 유리안이 걱정되는 거지. 그래서 유리안이 너랑 좀 멀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널 냉담하게 대하는 건지도 몰라.
‘음, 그래. 지금으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야. 롤빵아, 너 치고는 제법이었어.’
―그런데 크리스틴이 너를 정말로 싫어하는 거라면 애초에 페이건 네가 지명되지 않았겠지. 이번 업무의 책임자는 크리스틴이라며? 그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건 또 그렇네요. 굳이 제가 지원 인력으로 선발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당사자의 의중 또한 반영되었을 테니. 굳이 날 불러 놓고 싫은 티를 팍팍 낸다… 뭐 싫어할 땐 싫어하더라도 일단 어떤 놈인지 곁에 두고 지켜보겠다, 뭐 이런 생각인 걸까요?’
―나! 나 생각나는 거 있어! 인간들 중에 나쁜 놈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옆에 앉혀 놓고 손수 갈구는 취미가 있대. 저 여자애도 그런 거 아닐까?
‘갈군다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워 온 거야? 하지만 그래, 그 가설도 나름의 설득력은 있어.’
평소답지 않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북슬이.
생긴 건 풍선처럼 둥글둥글하기만 한 녀석이 의외로 심술에 관한 추론을 할 때는 제법 합리적이었다.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에이미 씨와 아주 친해질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미 어마어마하게 벌어져 버린 심적인 거리를 조금은 좁혀 놔야 남은 여정이 수월해질 텐데.’
―그냥 호된 맛 한번 보여 주고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안 돼? 음흉하기 짝이 없는 수작으로 거슬리는 놈을 골탕 먹이는 건 네 특기잖아?
‘…너 대체 나를 뭘로 보고 있는 거야. 내가 무슨 깡패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든다고 음흉한 수작이 어쩌고 어째?’
―그치만 그 해글러라는 고릴라도 그렇고 건방진 1학년 꼬맹이들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잘만 골탕 먹였잖아?
‘그놈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나쁜 놈들이었잖아. 하지만 에이미 씨는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유리안 선배의 약혼녀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맛을 보여 주라는 거야?’
―우우… 그렇지만 너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데.
‘나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혼을 내줘야 했다면 폴리다고스 학생 3분의 2, 아니 5분의 4는 벌써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어야지. 그런고로 일단 그 제안은 기각.’
세 명, 아니 한 명과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에이미 씨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는 길을 떠나기 전 유리안 선배가 남긴 말이 맴돌 뿐이었다.
“크리스틴과의 관계? 걱정하지 마. 내가 아는 범위에서 가장 인내심이 많고 이해력이 풍부한 사람이 우리 자기야. 더군다나 자기는 페이건 너라면 아주 좋아서… 흐, 흠! 이건 아니고. 아무튼 걱정하지 마! 같이 지내는 내내 우리 자기가 아주 잘 대해 줄 테니까.”
* * *
작전 회가 벌어지고 있는 야영지에서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
또옥또옥.
바위틈 사이로 흐른 물이 고여 만들어진 아담한 웅덩이.
하늘의 별이 뚜렷이 비칠 정도로 맑은 물가의 가장자리에는 단아한 표정의 소녀가 양손을 모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바다의 요정님, 아직은 제 정체를 들키면 안 돼요. 혹시라도 제 일에 말려들었다가는 페이건이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전 페이건에게 이미 너무 많은 걸 받았어요.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아무런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아요.”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야영지를 떠난 것 치고는 그녀의 매무새며 옷차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웅덩이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기원을 올리기 시작한 걸로 보였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로 모아진 양손, 백옥같이 하얗고 수정의 표면처럼 매끈한 손가락에 한껏 힘을 준 채 크리스틴 코델리아나는 다시 한 번 진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페이건을 목격한 이래로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콩닥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부디 제 심장소리가 페이건의 귀에 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 바다의 요정님,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