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24)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4)화(124/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4)
쿵쿵쿵쿵.
페이건이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을 뿐인데 안 그래도 거세게 뛰던 심장이 숫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페이건의 발소리, 지근거리에서 찰랑이는 페이건의 머리카락,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마주할 수 있는 새까만 눈동자까지.
그 모든 것들을 새기고 싶고, 보고 싶고, 품에 안고 싶었음에도 혹시나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다가서지 못하고 멀어져야만 했던 오늘 하루.
또록.
지독한 갈증 탓에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크리스틴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 보고 싶었다고, 그날 모데나스에서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단 한순간도 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정체를 밝힌다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섬을 떠나 이곳에 와 있는 이유 또한 설명을 해야 할 텐데 그랬다가는 페이건도 위험해질 수 있었으니까.
오늘 하루, 마음에도 없는 차가운 연기를 한 건 크리스틴 본인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페이건의 품에 뛰어든 채
‘페이건, 나야! 나, 기억해? 보고 싶었어! 매일 밤마다 너의 꿈을 꾸고 낮에는 네 생각을 하면서 지난 5년을 보냈어. 너도 내가 보고 싶었지?’
라고 외칠 것만 같았으니까.
“후우우.”
도무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낸 후 크리스틴은 아주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들숨과 날숨을 몇 번 반복해 봐도 가슴 한편에 도사린 채 심장을 쉬지 않고 두드리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도무지 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페이건을 다시 만난 그 순간 크리스틴은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모데나스의 어린 소녀로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페이건 클라디우스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그 파도를 견뎌 내기에는 ‘모데나스의 에스텔’도 ‘크리스틴 코델리아나’도 ‘에이미 블레임’도 모두 무력할 뿐이었다.
[흉하지 않아.] [흉하지 않다고. 정말, 눈곱만큼도, 그러니까 조금도 흉하지 않아.] [너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가 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불쑥 고개를 쳐든 기억 앞에 결국 크리스틴은 또 한 번 가슴을 움켜잡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신이 그날의 에스텔임을 밝힐 수 없는 데서 기인한 갈증은 타는 듯이 그녀의 가슴을 조여 왔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짐 같은 독백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페이건,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줘.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이번에는 진짜 네 곁으로 돌아갈게.”
* * *
보글보글.
치이익.
“…이건 뭐니?”
“에이미 씨의 세면이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아 일단 제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너무 늦어져 내일 일정에 지장이 생기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이걸 전부 네가 만들었다고?”
“네. 저도 어릴 때부터 노숙을 자주 했던 터라 간단한 식사 준비 정도는 가능하거든요.”
큰 모닥불에 걸린 채 익어가는 스튜 냄비와 작은 모닥불 위에서 익어가는 햄.
대접에 담긴 샐러드와 납작한 접시를 가득 채운 토마토 설탕 절임.
그리고 차가운 크림 옆에 나란히 놓인 크래커까지.
내 딴에는 맛의 밸런스를 제법 잘 고려했다고 자신하는 식단이었건만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촉촉한 피부를 한 채 돌아온 에이미 씨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저녁 메뉴를 살필 뿐이었다.
“저녁이라면 내가 돌아와서 만들겠다고 했을 텐데?”
“저 또한 에이미 씨가 만들어 주는 식사를 즐기고 싶었다만 보시다시피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물론 제 솜씨는 부족하겠지만 오늘 저녁 한 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네 말대로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그렇게 하도록 할게. 하지만 다음부터 내 허락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건 그만둬. 이번 여행 중에 모든 식사는 내가 준비할 테니 넌 그냥 내가 준비한 밥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돼. 알겠니?”
“알겠습니다. 내일부터는 그리하도록 하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려고 하니 힘이 들었던 걸까?
‘맛있게’라는 말을 입에 담는 에이미 씨의 목소리는 적잖게 갈라져 있었다.
―거봐! 벨제키엘, 내가 그랬지? 달고 짠 음식이 너무 많다고. 네가 이상한 식단을 억지로 강요하는 바람에 괜히 우리 페이건만 더 미움을 샀잖아.
―어? 이상하다. 한 끼 식사에 햄이랑 크림이랑 크래커에 설탕 토마토까지 나오는데 그걸 싫어한다고? 이건 뭔가 말이 안 되는데?
‘됐어, 됐어. 어쨌거나 한 끼 때우면 되는 문제니까 이거 가지고 괜한 고민하지 마. 라무테 님, 전 괜찮습니다. 혹시 맘에 안 든다고 밥상이라도 엎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 정도면 예상보다 훨씬 더 양호한 반응이니 북슬이한테 너무 그러실 것 없어요.’
―그런데 이 여자애 네가 정말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다. 이번 여행 내내 그 귀찮은 식사 준비를 혼자서 다 해내겠다니. 치, 네 손이 닿은 식재료로 만든 밥은 먹기 싫다 이건가.
‘그러게 말이야. 설마 이 콧대 높은 아가씨께서 자신이 손수 만든 밥을 내가 먹어 줬으면 하는 마음에 저런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 테고. 뭐, 아직은 우리 사이에 있는 마음의 거리가 더없이 멀기만 하다는 방증이겠지.’
바스락.
마스코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곧게 세운 양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내 맞은편에 주저앉는 에이미 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노숙을 자주 했다고?”
“네.”
“스튜가 다 익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 그동안 그 이야기나 좀 해 보렴. 클라디우스 가문의 후계자께서는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어.”
잠시간 모닥불을 바라보던 에이미 씨는 예의 그 이지적인 목소리로 요청을 해 왔다.
“뭐 대단한 사정이 있었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처음으로 노숙을 한 게….”
보골보골.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난 그녀의 요청을 수용했고, 곧 스튜 냄비가 끓어오르는 소리 위로 내 시시콜콜한 ‘노숙 체험기’가 덧씌워졌다.
“…여기까지가 제가 물개 바위에서 안개 버섯을 찾기 위해 헤맸던 방랑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은? 조금 전에 말했잖아, 14살 생일을 맞이한 지 보름 후에도 야산을 헤매고 있었다고. 왜 그 이야기는 안 해? 흐름상 바로 이어져야 하는 부분 같은데?”
“…에이미 씨. 지루한 이야기라 생각하신다면 굳이 더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지루하다고 한 적 있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아까부터 한마디 말씀도 없이 그냥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계시길래 지루한 이야기를 억지로 듣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10분이 넘어갔는데도 에이미 씨는 정말로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추임새 한번 보여 주는 일이 없었다.
‘혹시 이렇게 거칠게 자란 내가 유리안 선배랑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저런 표정으로 날.’
또 한 번 멀어지고 만 우리 사이에 약간의 답답함을 느낀 내가 이야기를 중단하려는 찰나.
“배려는 고맙지만 재미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게. 설마 오늘 처음 만난 네가 내 취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알면 됐어. 뭐해? 계속 이야기하지 않고?”
에이미 씨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다음 이야기를 재촉해 왔다.
우리 사이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녀가 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한 진지한 표정.
결국 그 표정의 압박 앞에 난 꼬박 20여 분 이상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했다.
“그래서 열여섯 살이 된 다음부터는 원해(遠海)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단 말이지. 그래서 그다음에는….”
삐이익.
“스튜가 다 익었습니다. 그럼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슬슬 식사를 시작하실까요.”
“…그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어진 노숙 체험기.
체험기가 열여섯 살 무렵까지 거슬러 왔을 무렵 스튜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이야기를 멈춘 채 식사 준비에 돌입했다.
“…치잇!”
제법 맛있게 만들어진 스튜라고 생각했는데 그 익은 정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식사 준비를 하는 에이미 씨의 얼굴에는 아쉬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달각달각.
식전 대화가 너무 길었던 탓인지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크래커랑 잼을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네, 어제저녁 머물렀던 숙소에 오븐을 비롯한 제빵 기기가 완비되어 있길래 오늘 오전에 심심풀이 삼아 구워 봤습니다. 오랜만에 해 보는 일인지라 반죽이 터지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잘 구워져서 다행이에요.”
식사 중에 오간 대화라고는 후식으로 준비한 크래커의 기원(起源)에 관한 짤막한 사담이 전부.
“…덕분에 잘 먹었어.”
“천만에요.”
식사가 끝이 난 후 에이미 씨는 뒷정리 및 잠자리 준비에 들어갔고 난 사용한 식기를 세척하기 위해 인근의 냇가로 향했다.
첨버덩.
―있잖아. 저 여자애, 네가 나눠 준 과자를 가방 속에 몰래 보관하는 걸 내가 똑똑히 봤어!
식기를 물에 담근 후 수세미 질에 들어가려는 찰나 정수리 위의 북슬이가 날개를 부산스럽게도 파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수상한 거 없나 하고 저 여자애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너랑 라무테가 뒤돌아서자마자 저 여자애가 후식으로 나온 크래커를 입에 넣는 척하다가 가방에 슬쩍 집어넣는 걸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어머, 정말? 왜 그랬을까? 물론 크래커는 수분이 없는 과자니까 하루 이틀 정도 보관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폴리다고스로 복귀한 후 성분 분석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죠. 사실은 저도 제가 직접 만든 수제 크래커와 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에이미 씨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습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제과점에서 판매하는 과자라면 불만 없이 먹겠지만 제가 직접 만든 과자를 먹기에는 좀 그랬나 봐요.’
―너무해! 우리 페이건을 뭘로 보고!
―혹시 얼마 없으니까 아껴서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닐까?
‘아까워서 그런 거였다면 진즉에 더 달라고 했겠지.’
―그럼 가게에서 파는 게 아니라 네가 직접 만든 과자라는 말을 듣고 나니 먹기 아까워서 따로 챙겨 둔 걸 수도… 으, 역시 이건 말이 좀 안 되나.
‘응.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비록 지금은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우리 눈앞에 있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천공의 눈 마탑주의 비호를 받는 아가씨야. 그런 사람이 내가 구운 과자를 먹는 게 아까워서 못 먹고 보관용으로 챙겨 둔다고?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흐흐 그래, 확실히 말도 안 돼. 응, 정말 말도 안 돼.
멋쩍은 표정을 짓는 롤빵이와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라무테 님.
난 둘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본격적인 세척 작업에 들어갔다.
‘나도 참 어지간히 막돼먹은 놈으로 소문이 나 버렸구나.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뽀도독뽀도독.
손가락에 힘을 주자 접시며 식기 위에 달라붙은 기름이 말끔히 벗겨져 나갔다.
하지만 쉽사리 벗겨지는 식사의 흔적과는 달리 나를 향한 에이미 씨의 불신은 점점 더 두터워지는 것만 같았다.
대놓고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나에 대한 불신의 의사표시를 강하게 드러내는 유리안 선배의 약혼녀.
졸졸졸.
기분 탓일까? 손가락 사이로 와 닿는 물의 온도가 유난히 차갑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 * *
짜아악.
“멍청한 것! 감히 너 따위가 경거망동을 해!”
“…죄송합니다.”
“직접적으로 폴리다고스를 공략하는 건 내 소관임을 섭정께서 여러 번 말씀 하신 바 있어. 그런데 감히 천한 네년 따위가 분에 넘는 짓을 저질러 일을 그르치려 하다니!”
짜아악.
분홍과 흰색을 테마로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
한데 침실에서는 그 아기자기함과 어울리지 않는 뺨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동이 벌어지는 장소는 폴리다고스 인근에 위치한 고급 휴양지 마을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정평이 난 숙소의 꼭대기 층.
따귀를 때리고 있는 건 화사한 로브를 두른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의 마법사였고.
짜악.
묵묵부답 입을 다문 채 따귀 세례를 받아들이고 있는 건 단출한 차림을 한 껑충한 단발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만! 여기까지만 해.”
“놔.”
“…우리는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교내로 복귀해야 해.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아. 그런데 넌 언제까지 이따위 화풀이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셈이지?”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훌쩍한 키의 전사 무스카 벨타지온은 아일리 바스티아의 손목을 붙잡은 후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 또한 건방진 행동으로 대계에 지장을 초래한 이 ‘뱀파이어 어쌔신’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로덴토 광산 인근에서 발생한 ‘팬텀 하운드 탈주 사건’으로 인해 문제가 복잡해졌고, 오늘의 만남은 그에 따른 대처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기에 지금으로서는 사태를 수습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무스카는 평소답지 않은 냉정함을 발휘한 채 ‘마녀’의 팔을 붙잡았고 그 약간의 여유 덕분에 ‘아일리 바스티아’는 겨우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일리의 거듭되는 매질이 마침내 잦아든 그 순간 ‘루드비히 안피노’를 모시는 뱀파이어 암살자 ‘엘리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 왔다.
“여쭐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안피노 공작 각하께서 두 분께 직접 답을 들어 오라 하신 질문입니다. 현재 폴리다고스 1학년에 재학 중인 ‘페이건 클라디우스’는 어떤 인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