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26)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6)화(126/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6)
고오오오.
둥실하고 떠오른 에이미 씨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의 가냘픈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전격의 거창이 골렘 무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쩌저적.
쾅.
기세 좋게 모습을 드러냈던 경비 골렘 무리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데는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눈앞 나뭇가지에 달린 사과를 따 먹는 듯한 간결한 동작으로 골렘 무리를 처치한 에이미 씨는 그 호쾌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규모를 갖춘 마법 연구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지?”
“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연구실을 수호하는 골렘을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살가레스 님이 생존해 있을 무렵부터 존재하던 골렘이 아직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니, 볼수록 놀라울 따름이에요.”
“연구실 중심에 있는 영구 마동 기관을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이거든. 지금은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지만, 보름 정도 지나면 다시 멀쩡하게 재조립되어 연구실을 누비고 다닐걸.”
“이 연구실이 후학들에 의해 사용되리라는 걸 알고 계셨을 텐데 왜 살게라스 님은 이곳에 골렘을 비롯한 방어 시스템을 설치해 놓은 걸까요?”
“학생들이 단련을 게을리하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게 아닐까? 남겨진 기록이나 일화를 따르면 살가레스 님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성품이셨다고 하니까.”
능숙하게 방향을 잡는 걸 보고 짐작하기는 했다만 에이미 씨가 이 연구실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연구실의 중심을 향하는 동안 마주친 장애물들 몸 곳곳에는 ‘파괴 – 재조합’을 반복한 흔적이 엿보였는데 그 선명한 흔적이 만들어지기까지 에이미 씨가 기여한 바도 상당하지 않을까?
“마침 각인 주문을 확인할 시간도 됐으니까 여기서 잠시 휴식.”
연구실에 들어선 지 꼬박 두 시간 만에 에이미 씨는 휴식을 선언했고 차가운 음료가 담긴 병을 흔들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셔, 천공의 눈 특제 비법으로 만들어진 회복 과즙이야. 한 모금만 마셔도 초행길을 걷느라 쌓인 피로가 어느 정도는 풀릴 거야.”
“음료라면 저도 가지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피로라면 저보다는 대부분의 전투를 수행한 에이미 씨 쪽이….”
“인솔자가 마시라면 그냥 마셔. 설마 내가 나 먹을 것도 없이 너한테 퍼 주기라도 할까 봐 그래?”
또다시 찌릿해진 에이미 씨의 눈동자 앞에 난 피로 회복 음료가 든 병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고.
―흐흐흐, 또 혼났대요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북슬이의 흐뭇한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음료 섭취에 열중했다.
꿀꺽.
“음, 생각보다 각인 주문 유지 상태가 좋네. 너, 주문 감응력이 뛰어나구나? 지금처럼만 계속 호흡을 유지하도록 해. 그리고 내가 말 했지, 이 목걸이 덕분에 이 정도 장애물 수준으로 끝나는 거라고. 혹시라도 중간에 각인 주문의 효과가 없어지거든 연구실이 훨씬 더 전투적인 반응을 보일 거야. 그러니 중간중간 목걸이를 살피는 것 잊지 말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바로바로 나한테 말해야 돼. 알겠지?”
―얘도 참 특이해. 평소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걸 보면 페이건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널 챙기는 거 보면 엄마처럼 자상하다는 말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글쎄요, 아마도 저에 대한 개인적인 적개심보다는 인솔자로서의 책임감이 더 앞서고 있는 거 아닐까요?’
내가 라무테 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에이미 씨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 마셨으면 나도 한 모금.”
“잠깐만요, 혹시 모르니 손수건으로 입구를 닦은 후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됐으니까 그냥 줘. 여기가 무슨 한가한 소풍 장소인 줄 알아?”
꼴깍.
거의 낚아채다시피 병을 회수한 후 대번에 마셔 버리는 에이미 씨.
어? 그런데 잠깐?
“185.4.”
뭔가 어색한 장면이 지나간 듯해 눈을 크게 떴지만, 음료 섭취를 끝낸 에이미 씨는 병을 갈무리한 후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타샤드 제국 공식 척도를 기준으로 계산한 네 키야. 국가별로 측정 방식에 차이가 있는 바람에 정확한 신장을 말할 수 없다 그랬지? 그 구체적인 적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경우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게 타샤드 제국 방식이니까 앞으로 다른 사람이 네 신장을 묻거든 185.4라고 하면 돼.”
연구실에 들어온 이래로 앞장서서 가느라 바빴을 텐데 내 키는 또 언제 측정을 한 건지.
“185.4.”
암기라도 할 생각인 걸까?
눈썰미로 도출해 낸 내 정확한 신장을 읊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고 그 단호한 뒷모습에 나 또한 묵묵히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에이미 씨, 방금 병 입구를 닦지도 않고 내가 마신 부분에 그대로 입을 대고 마신 것 같은데. 괜찮은 거겠지?’
* * *
피피피핑.
어지럽게 쏟아지는 빛과 바삐 움직이는 기관들.
“하아!”
푸른 빛의 마법 방어막으로 온몸을 감싼 에이미 씨는 거대한 기관들 사이를 누비며 경계 장치들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지지지징.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운 톱니와 수레바퀴가 보여 주는 움직임은 정교하기 그지없었지만, 양손에 단검과 숏스태프를 나눠 든 채 기관 사이를 누비는 에이미 씨를 잡아내기에는 역부족.
기계 팔과 팔 사이를 넘나드는 에이미 씨를 보고 있자면 기계로 만들어진 숲을 누비는 담비가 떠올랐다.
그리고 빛과 소음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나는 뭘 하고 있냐면, 저 기계 팔을 긴급 작동 정지시킬 수 있는 장치를 손에 든 채 에이미 씨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지고 있다가 혹시라도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이걸 누른 후 나를 데리고 연구실 밖으로 나가. 그럼 한 시간 안에 탑의 인원이 우릴 데리러 올 거야.”
“…에이미 씨 혼자서도 얼마든지 연구실 공략이 가능할 것 같았는데 저를 굳이 왜 데리고 왔나 했더니 제 존재 의의가 여기에 있었군요, 비상 대기조.”
“이게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꼭 이게 아니더라도 너에게 도움을 받은 건 많아. 그러니 이번에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이 대화를 끝으로 에이미 씨가 기계 팔 속으로 뛰어든 지 15분.
기계 장치와 인간의 싸움은 초반 문턱을 넘어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전투 방식이네. 대부분의 마법사가 신중하기는 하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더 신중하게 주문을 운용하고 있어. 덕분에 당할 일은 없어 보이지만 첩첩이 쌓인 방어 장치를 완전히 해제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는걸.’
요 며칠간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에이미 씨는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를 통해 설명하자면 유리안 선배보다는 조금 약하고 ‘시중에 알려진 내 견적’은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이 정도 실력이라면 폴리다고스 학생 전체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능히 들 수 있을 터.
비록 에이미 씨의 진짜 얼굴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소문대로의 사람이라면 왜 그리도 많은 학생들이 유리안과 크리스틴 커플을 그토록 부러워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능, 실력, 배경에 외모까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거의 모든 요소를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니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그런데 안정적인 것도 좋다만 이대로는 너무 오래 걸리겠는데?’
물론 그렇다 하여 단점이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워낙에 정석적인 경로를 통해 단련을 받아 온 탓일까?
주문을 운용하는 능력 자체는 탁월해 보였지만.
감각이랄까… 눈치는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저기 천장 두 시 방향에 있는 교차 지점. 타이밍을 맞춰서 저기만 잘 찌르면 기계 팔 절반 정도는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어. 그런데 아무래도 에이미 씨 눈에는 저게 안 보이는 모양이야.’
내 눈에는 잘 보이다 못해 이제는 지겨워지려고까지 하는 패턴.
하지만 약간의 변주가 가미된 탓인지 에이미 씨는 좀처럼 그 반복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결국 난 티아매트를 뽑아 들고야 말았다.
‘가용 가능한 기계 팔의 3분의 2는 에이미 씨를 향해 있어. 그렇다면 나머지 3분의 1 정도는 비상용, 일단 저놈의 주의를 내 쪽으로 돌리는 일부터 시작해 볼까?’
둥실.
소맷자락을 빠져나온 침.
피슝.
잠시간 공중을 부유하며 피탄 지점을 찾던 침들은 이내 한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고 비상용으로 대기하고 있던 기계 팔의 관절 사이를 파고들었다.
우우우웅.
불의의 습격을 감지한 경비 체계.
기계 팔의 눈 노릇을 하던 수정구의 방향이 나를 향했고 곧 비상용 기계 팔이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애애앵.
멈춰 있던 기계가 작동을 하는 매서운 소리.
“…!”
그런데 갑자기 습격을 받은 기계 팔이야 그렇다 쳐도 왜 에이미 씨는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한 채 날 노려보는 걸까?
콰직.
나는 정수리 위쪽으로 쏟아진 기계 팔을 피한 뒤 관절 사이로 티아매트를 꽂아 넣었다.
두두두둑.
순식간에 뜯겨 나가는 기계 팔.
에이미 씨의 전투를 통해 관절 강도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절단을 위해 티아매트에 불어넣어야 하는 오러의 양을 계산하기는 쉬웠다.
쿵쿵쿵.
대기하고 있던 십여 개가 넘는 기계 팔의 세례가 이어졌지만, 딱히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절반 이상의 팔을 에이미 씨가 상대하고 있던 터라 내 쪽으로 집중되는 습격의 정도라 해 봐야 대단할 게 없었던 것이다.
팅티잉.
허공에 뿌려 놓은 침과 기계 팔의 관절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고막을 강타했다.
부우웅.
머리 위를 스치는 기계 팔.
나는 사선으로 몸을 눕히며 기계 팔의 각도를 살폈다.
결국 이 팔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에 박혀 있는 수정을 부숴야만 했다.
하지만 방어 체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평소의 수정구는 기계 팔들에 의해 칭칭 감긴 채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이미 씨와 나, 두 명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터라 기계 팔의 보호는 무척이나 헐거워진 상태였고.
‘셋, 둘, 하나… 지금!’
한껏 기세를 담아 뻗은 기계 팔 두 개가 각각 내 머리 위와 측면을 스쳐 지나는 바람에 찰나의 순간 수정구의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피유웅.
그 순간 기계 팔의 움직임을 훼방하기 위해 방해꾼으로 위장하고 있던 침들이 오와 열을 맞춰 수정구를 향해 날아갔고.
콰앙.
저저저저적.
오러가 응축된 무쇠 바늘에 직격당한 수정구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우우우우우웅.
치키잉.
피슈우우우.
그리고 수정구가 깨어진 순간 기계 팔 역시 작동이 중지되었다.
‘골렘이 재생되기까지 보름 정도 걸린다 했으니 저 수정구가 재생되려면 최소 석 달은 걸리겠지. 이 기계 팔 경비 장치가 연구실이 준비한 마지막 난관이니까… 이 장소에서의 일은 대충 마무리된 건가?’
…라는 건 나의 어리석은 착각.
기계 팔의 습격은 끝났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너 미쳤어! 내가 가만히 있으라 그랬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장치인 줄 알고 함부로 일을 벌여!”
“그 위험한 장치가 보유하고 있는 전력의 3분의 2는 에이미 씨가 맡고 있었잖아요. 비록 제가 부족한 몸이기는 하나 에이미 씨가 상대하고 있는 것들의 절반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3분의 1이건 절반이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만약에 내 쪽으로 뻗어있던 기계 팔이 갑자기 네 쪽으로 집중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넌 아니잖아!”
“유리안 선배님께서 말씀을 깜빡하신 모양인데 제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기술 중 치료술을 제외한다면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이 다름 아닌 줄행랑입니다. 에이미 씨처럼 의연한 모습으로 기계 팔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지 몰라도 다치는 일 없이 몸을 빼는 정도는 자신 있었습니다.”
사자와 같은 표정을 한 에이미 씨가(단언컨대 기계 팔을 조정하는 수정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내 가슴팍을 움켜잡은 채 소리를 질러 댔던 것이다.
“너… 너 말이야! 네가 무슨 대단한 실력이 있어 내 보좌역으로 선발됐다고 생각하니? 천만에! 착각하지 마. 넌 그냥 비상시를 대비한 역할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만약의 경우에 나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게 전부야. 나도, 국장님도 네가 나 대신에 위험한 역할을 맡아 줄 거란 기대 같은 건 한 적도 없어!”
“물론 그 역할도 빈틈없이 수행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역할만 하는 데 그쳐서야 제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이왕 여기까지 온 마당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됐어! 필요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나서지 말고, 내 앞에 설 생각도 하지 말고, 내 짐을 덜어 주겠다는 생각도 안 돼!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지켜보기만 하란 말이야!”
그야말로 열변을 토하는 에이미 씨.
하지만 나보다 두 뼘 이상 키가 작은 탓에 그 기세가 100% 전달되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명심해! 한 번만 더 내 지시를 어기고 함부로 위험한 행동을 하면 그때는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
“…저를 염려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굳이 그 정도까지 저를 배제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에게도 저 나름의 책임감이라는 게….”
“네 감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고 알고 싶지도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내 지시를 어기고 위험을 감수했다는 거야. 그러다 만약에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나는….”
돌연 푹 하고 숙어지는 에이미 씨의 고개.
“…국장님들께서 나를 믿고 너를 이곳에 보내셨는데 네가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그분들 볼 낯이 없잖아. 마지막 경고야, 다음부터는 조심해.”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들어 올려진 고개.
여전히 총명하기만 한 그 눈동자에는 내가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고.
“알겠어? 다시는 네 마음대로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결국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지요. 다음부터는 특별히 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거거거걱.
“10분이면 끝나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려.”
기계 팔의 숲을 지나자 연구실 최심부로 통하는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고 에이미 씨는 최심층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압축기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거기에 그대로 서 있으면 내가 널 볼 수가 없잖아. 조금 더 오른쪽으로. 그래, 그래야지 네가 혹시라도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나 감시할 수 있지. 거기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똑바로 서 있어.”
내 위치를 꼼꼼하게 지정하는 걸 마친 에이미 씨는 복잡한 문양으로 가득 찬 거대 압축기 이곳저곳을 매만졌다.
우우우우웅.
잠시 후 웅장한 공명음이 울려 퍼졌고.
쪼로로록.
잠시 후 사출구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액체가 유리병을 가득 채웠다.
스스스.
에이미 씨는 미리 준비한 검출지를 용액에 담갔고 잠시 후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검출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저거 페노모산(酸)이잖아? 저 희귀한 용액이 저렇게 가득… 저 추출기 그리고 이 연구실, 이름값을 하네.’
에이미 씨에게는 불행,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 용액의 특성이나 검출지 그리고 검출 반응 모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기에 추출기를 통해 나온 액체의 정체가 페노모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페노모산은 근육이 마비되거나 내장 기관 일부가 결정화(結晶化)되었을 때 사용하는 치료 약으로 그 성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최고급 약재였다.
‘잠깐, 농도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관했다가 추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희석을 해야 할 텐데 저걸 저렇게 보고만 있다니….’
페노모산은 마비 증상을 치료하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평범한’ 인간에게 처방하기에는 성질이 너무 독한 터라 사용 전 필수적으로 희석 절차를 거쳐야 하는 약물이었다.
그리고 상온에 노출될 경우 성분 간의 융합이 강화되는 특성 또한 있는지라 특수 제작한 냉각 용기가 아닌 일반 용기를 이용해 페노모산을 운반할 때에는 10분 이내에 희석 작업을 끝내야 했다.
‘그런데 희석을 하지 않고 저걸 그대로 옮겨 담는다고? 저 유리병 냉각 처리가 딱히 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걸 저렇게 가져가 버리면 평범한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처방이 불가능해.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이런 간단한 사실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뭐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것저것 가능성을 떠올려 봤지만 뚜렷한 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고 수급 작업을 끝낸 에이미 씨는 준비해 온 여분 용기를 추출기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칵.
희석하지 않은 페노모산 원액이 가득 찬 유리병은 결국 에이미 씨의 가방 안에 담겨 있던 (충격 완화 장치는 충분한 것 같지만 보랭 효과는 전무해 보이는)주머니에 자리를 잡았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에이미 씨의 행동 덕분에 의문은 점점 더 커져 갔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 그리고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에 쉽게 입을 열 수는 없었고.
“오래 기다렸지? 다 끝났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선 그녀는 조금 전 기계 팔 때의 동요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 거야. 내일 오전 중에 도착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오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