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28)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8)화(128/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8)
치료술사가 되기로 한 이유가 뭐냐고?
누군가 나라는 사람을 탐구 혹은 판단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던져야 하는 질문임에 틀림없다만 지금껏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한 명도 없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이 질문도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나에 대한 적개심의 모닥불’ 속 열기를 더하기 위한 장작의 하나인 걸까?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여쭤도 괜찮을까요?”
“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니. 흐음, 그렇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려울 건 없다만… 혹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기저에 알렉세예브 선배님에 대한 염려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유리안? 여기서 걔가 왜 나와?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내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기인한 질문이야.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유리안과 아무런 상관없는 물음이었다는 건 알아 둬.”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많이 놀랐다.
크리스틴 코델리아나가 페이건 클라디우스를 상대로 가지고 있는 거라고 해 봤자 적개심과 의심 그리고 형식뿐인 정중함이 전부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답변이 나올 줄이야.
‘…전생에서 죽었다 깨어났더니 날 여기로 보낸 놈이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은 못 하지.
그렇다고 ‘가업(家業)이라서요.’라는 판에 박힌 대답을 하면 굉장히 무서운 눈으로 째려볼 것 같은데.
무슨 대답이 좋을까?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진실 중 절반 정도를 덜어 낸 대답을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이 사람은 유리안 선배의 약혼녀이니만큼 이미 ‘최악’으로 치달아 버린 우리 사이의 관계를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나쁨’ 정도로는 회복시키고 싶었으니까.
“…혹시 제가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던가요?”
“네가 말해 준 적은 없지만 전해 들은 게 있어서 알고는 있어.”
“저에게는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저를 먹여 주고 챙겨 준 유모가 한 명 있었어요. 지금도 그 따스한 품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후끈해지는, 저한테 참 고맙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유모의 취미가 분재(盆栽)였거든요. 그 덕분에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꽃꽂이라든가, 화단 가꾸기라든가, 분갈이라든가 하는 이런 재식(裁植) 활동의 즐거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귓가에 선명히 들려온다.
[도련님! 또 새로운 계절 님이 오셨네요. 그럼 우리 둘이서 손을 꼭 잡고 화단을 예쁘게 꾸며 볼까요!]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직은 어린 나를 품에 꼬옥 안은 채 화단을 향해 뛰어가던 유모가 내지르는 활기찬 목소리가.
“분재… 어쩐지 손놀림이 섬세하더라니… 흐흠! 그래서, 화분을 열심히 가꾼 다음에 뭐 어쨌는데?”
“아주 어렸을 때는 푹신푹신한 흙과 예쁜 꽃이 가득한 화단에서 흙장난하고 노는 게 마냥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게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요.”
“생명을 싹틔우는 보람 같은 걸 말하는 거야?”
“생명의 잉태, 계절의 변화, 자연의 신비. 이 모든 걸 함축하는 포괄적인 의미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유모는 아직 어린 저에게 이런 기쁨을 알게 해 주려고 그리도 부지런히 저를 안고 화단을 들락날락거렸는지도 모르죠.”
비록 다시 태어났다고는 하나 아직은 전생에서 흘린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어린 나의 기억들.
만약 유모와 함께 화단에서 보낸 따스하고도 신비로운 시간들이 없었다면 치료술사라는 과업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명을 이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아가던 도중, 다섯 살이 되던 해 생일을 기해 아버지께 치료술사로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던 해 마침내 알아 버린 겁니다.”
“열두 살? 너 지금 열두 살이라 그랬니?”
“네.”
“그, 그래. 그래서 계속해 봐.”
열두 살이라는 말에 긴박한 반응을 보이는 크리스틴 선배.
혹시 내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꽃과 나무를 키우고 가꾸는 것도 충분히 멋지고 즐거운 일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이어 나가고 상처를 치료하는 건 그것보다 조금 더 멋진 일이라는 걸 말이죠.”
“하필 그 시기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어?”
“제가 생애 첫 환자를 맡은 게 열두 살 때였거든요.”
“…!”
“제가 처음으로 치료를 주관한 환자는 저보다도 더 어린 꼬마 남자애였어요. 자기보다 더 어린 동생 앞에서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팔에 부상을 입었었죠.”
“그, 그래.”
첫 환자라는 말에 급격하게 커졌다가 다시금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진 선배의 눈동자.
그해에 크리스틴 선배에게도 치료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있기라도 했던 걸까?
“침을 이용한 간단한 치료를 마친 후 주의를 주고 돌려보냈습니다. 기념비적인 첫 환자였죠.”
“그래서, 그 아이 때문에 사람을 치료하는 보람을 알았다는 거구나.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기분 탓일까? 선배의 목소리에서 뭔가 다른 게 있었으면 한다는 간절함이 느껴졌다.
“다른 게 있죠.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저에게는 하나의 큰 이정표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죄송합니다. 이건 말씀 못 드릴 것 같아요. 저는 괜찮은데 환자에게 조금 예민할 수 있는 문제인지라 입에 담기가 조심스럽네요.”
“…이익!”
전에는 보인 적 없는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는 선배.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에스텔과 모데나스에 대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내 개인의 감정에 대해서만 말해 주기로 했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한테는 참 고맙고 보람 있는 사건이었어요. 첫 번째 환자를 통해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면 이 사건을 통해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거든요.”
날 이곳으로 보낸 광휘는 내게 말한 바 있었다.
그곳으로 가 너 스스로와 가련한 이들을 구원하라고.
만약 지금 당장 광휘가 눈앞에 나타나서 ‘그래, 그래서 넌 그동안 누구를 구원할 수 있었지?’라고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모데나스의 에스텔’이라는 이름을 댈 자신이 있었다.
“구원이라… 멋진 말이네, 다행이다. 나는 네가 만난 두 번째 환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지금도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거야.”
“글쎄요. 그건 또 모를 일이죠. 저 딴에는 제법 대단한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또 어떨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흠, 그건 그렇고 그 두 번째 환자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그 사람에 관한 정보까지는 아니어도 네가 느낀 감정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한층 더 차분해진 선배의 목소리.
선배의 말을 듣고 나니 에스텔에 대한 내 감정을 말하는 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련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사람이었냐면요, 착한 사람이었어요. 환경 탓에 다소 솔직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성이 상냥한 사람이었죠. 어떻게 지금은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나 봐?”
“네, 사정이 있어서.”
“꽤나 오래전 일인 것 같은데 그런 표정을 하는 거 보면 꽤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나 보네?”
“제 표정이… 이상한가요?”
“이상한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조금 아련해 보여서.”
“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리됐나 보네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치료술사는 됐을 겁니다. 하지만 이쪽에 각오라든가 마음가짐 같은 건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죠.”
“…그랬구나. 고마워, 대답해 줘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빛을 내며 반짝이는 선배의 눈동자.
내 얼굴을 향해 고정된 그 눈동자를 마주하기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어 모닥불에 집어넣을 삭정이를 뒤적이고 있으려니 내 정수리를 짓누르는 북슬이의 앞발이 느껴졌다.
―야야! 페이건. 에이미, 아니 크리스틴이라는 여자애의 눈동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네가 옛날이야기를 시작한 다음부터 이 꼬마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데 아무리 봐도 저 눈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야.
‘난 잘 모르겠는데.’
―라무테, 너도 대답 좀 해 봐! 그치? 네가 생각해도 저 눈동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글쎄, 네 말을 듣고 나니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저 아이를 같이 만난 적이 있다면 눈썰미 좋은 페이건이 너보다 더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페이건, 네 생각은 어떠니?
‘딱히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아니야! 저 반짝거리는 눈동자. 어디서 분명히 봤단 말이야. 아우우… 어디서 봤지?
‘네가 보름 전에 먹은 필링 마카롱이랑 눈동자를 헷갈린 거 아냐? 넌 사람 얼굴보다는 과자 모양을 더 기억 잘하잖아.’
―아니야, 분명히 봤어. 으으… 두고 봐. 내가 반드시 생각해 낼 테니.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생각에 잠긴 북슬이.
녀석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선배의 눈을 살폈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애초에 눈동자만 보고 누군가를 기억해 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너는, 너한테 큰 영향을 준 그 두 번째 환자를 보고 싶은 거구나?”
“네, 한 번쯤은 꼭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를 진짜 치료술사로 만들어 준 사람인데 당연한 일 아닐까요?”
“응, 두 사람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아니 그렇게 될 거야. 분명히 그 사람도 페이건을 보고 싶어 하고 있을 테니까. 아! 그런데 혹시 무섭거나 하지는 않아? 어쩌면 그 사람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지금의 페이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낯선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요? 어디서 뭘 하건 그 사람은 결국 제가 좋아할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는 거야?”
“말씀드렸잖아요. 마음이 예쁜 사람이었다고.”
“페이건, 너처럼?”
“아니요, 저 같은 사람이 됐으면 큰일이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야 비극일 뿐이잖아요? 장담컨대 저 같은 것보다는 훨씬 더 따스하고 친절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아주… 확신하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네가 이렇게 믿어 주니까 그 사람은 참 좋겠네.”
미세하게 떨리는 선배의 눈썹.
내 과거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담요를 끌어올려 얼굴 절반을 가리는 선배의 눈동자가 모닥불의 빛을 받아 영롱한 빛으로 반짝였다.
“뭐, 선배님처럼 외면적인 아름다움이 넘쳐흘러 굳이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갈고닦을 필요가 없는 분들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요.”
“너, 넌 뭐 아닌 줄 알아! 기가 막혀서 정말. 그리고 미, 믿음이라니 무슨 동화 속 소꿉놀이도 아니고.”
마지막에 던진 농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선배는 그대로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후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 움직임이 워낙에 거센 탓인지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선배의 흉부며 어깨 근육이 담요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다.
“선배님, 어깨가 들썩이는 각도가 심상치 않은데 혹시 팔 근육에 통증이라도….”
“통증은 무슨, 미리 말해 두는데 지금부터 푹 잘 거니까 이쪽으로 오지 마!”
통증을 느끼는 환자가 내지른 것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활기찬 목소리.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기에 나 역시 주섬주섬 잠자리 정리에 돌입했다.
그리고 따스한 모포를 두른 후 눈을 감았다.
“후우, 후우, 후우….”
눈을 감자 더욱더 선명하게 들리는 선배의 숨소리.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즐겁고 가빠 보이는 숨소리들 사이로 숲의 밤이 깊어져만 갔다.
* * *
“…여기서부터 따로 움직이고 싶다고?”
“네, 선배님은 장장 7개월 만의 폴리다고스 복귀잖아요. 그런데 정문을 통과하는 선배 곁에 제가 나란히 서 있다면 괜스레 이목만 집중될 것 같아서요.”
“이런 관심을 받는 걸 즐기는 사람도 꽤 많은데, 넌 아닌가 보네?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
폴리다고스 정문을 수 킬로미터 정도 앞둔 자리.
이쯤에서 흩어지자는 내 제안을 선배가 받아들여 준 덕분에 우리의 동행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아무튼, 수고했고 필요한 보고 절차는 내가 다 마무리할 테니 넌 복귀한 후에 푹 쉬도록 해. 일정 중에 네가 보여 준 성실한 모습은 내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문에 담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사랑하는 약혼자를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라도 한 걸까?
크리스틴 선배는 제법 기뻐 보이는 얼굴로 나와의 헤어짐을 자축했다.
“그럼, 이만. 아 참! 그런데 너 소문을 듣자 하니 유리안이랑 제법 친하다며?”
그런데 이대로 순탄하게 멀어질 것만 같던 선배가 돌연 몸을 돌려 다시금 접근을 해 왔다.
“선배님께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흐음… 그렇구나, 잘됐네.”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채 빙긋 미소를 짓는 선배.
생각해 보면 첫 만남 이래로 그녀의 입에서 ‘잘됐다.’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리안이랑 친하게 지낸다면 나랑도 마주칠 일이 제법 많겠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겠죠.”
“흐음,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이기도 하고 그래도 일주일 이상 동고동락한 사이인데 이 정도 스킨십은 괜찮겠지.”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녀와의 거리.
팔을 뻗어 나를 살짝 끌어안은 선배는 내 귓가에 분홍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 채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테니 기대하고 있으렴.”
이 말을 끝으로 선배는 발걸음을 돌렸고 하얀 손바닥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선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북슬이가 한마디를 툭 하니 내뱉었다.
―지금 기대하고 있으라고 한 거 맞지? 우와, 지독한 여자 같으니라고. 대체 뭘 기대하라는 걸까?
‘그러게, 기대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기대가 안 되는 건 처음이야.’
―흐흐, 내 안방으로 돌아왔으니 유리안이랑 친해질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이제부터 아주 본격적으로 괴롭혀 주겠어! 설마 이런 건 아니겠지?
‘그런 의미의 기대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거나 유리안 선배의 약혼녀이니만큼 선만 지켜 주면 나도 모질게 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뭐, 일단은 두고 봐야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의 동행은 항상 피곤한 법,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이 정도면 크리스틴 선배와의 시간차가 충분히 벌어졌다고 생각될 무렵이 되어서야 난 천천히 정문을 향했고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내 방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워 이제 본격적으로 여독을 풀어 볼까?’라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똑똑.
“클라디우스 공자님,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유달리 정중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교직원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그동안 보여 주셨던 출중한 모습이 보답을 받는다 생각하니 저 또한 기쁠 따름입니다.”
곱게 접힌 공문 봉투의 전달을 마친 후 함박웃음을 지으며 멀어져 간 직원.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봉투에는 폴리다고스 지상을 총괄하는 일곱 국장의 직인이 나란히 찍혀 있었고.
―우와! 드디어 임명 확정됐구나! 혹시 이번에도 다른 이야기를 하면 어쩌나 했는데. 흐흐, 이번에는 약속을 지켰네!
―축하해 페이건. 이 사실을 티베리와 멜리사가 알게 되면 정말 기뻐할 거야!
호기롭게 찢은 봉투.
그 봉투 안쪽에는 다음 달 보름, 중앙 회랑에서 내 학년 대표 임명식이 거행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공문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