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29)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9)화(129/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29)
“누나, 누나아! 빨리!”
“헥헥, 알았어. 힘내서 더 빨리 뛸 테니까 동생아, 누나 꼭 잡아!”
시리도록 푸른 바다 위로 솟아난 녹색의 섬, 절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고도(孤島) 에스페타라.
에스페타라의 중앙을 지키는 산 중턱에서 시작되어 항구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해안 가도.
그 가도 위를 내달리는 한 쌍의 오누이가 있었다.
앙증맞은 리본을 묶은 채 바삐 내달리는 누나와 그런 누나의 등에 코알라처럼 달라붙은 남동생.
“어! 저기 배가 보인다! 에밀, 저거 보여? 오라버니께서 보내신 배야!”
“응! 누나아, 보여! 흉아야가 보낸 배애애애!”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다다른 오누이는 손가락으로 항구 중앙을 가리키며 펄쩍펄쩍 뛰었다.
한 번쯤 멈춰 서서 지친 다리를 달랠 법도 하건만 라나 클라디우스는 동생의 아담한 엉덩이를 받쳐 든 채 다시 한 번 달음박질을 시작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클라디우스의 문양이 새겨진 중형 선박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버님! 엄마아! 오라버니가 편지랑 선물을 보내셨다면서요!”
“라나 왔구나. 어머나! 그런데 라나야 너 저기 중턱에 있는 화원에서부터 쭉 에밀을 안고 달려온 거니? 세상에, 이 땀 좀 봐. 어휴 이 미련퉁이야, 동생을 데리고 올 거면 천천히 걸어오든가 하지. 그 먼 거리를 아가를 업고 뛰어오면 어떡하니!”
“헥헥, 에밀은 걸음이 느리잖아요. 저도, 에밀도 최대한 빨리 오라버니가 보낸 배를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어휴, 그치만 네가 너무 힘들잖니? 엄마가 땀 닦아 줄 테니까 이리 오렴.”
“헤헤, 괜찮아요. 난 에밀의 누나잖아요. 오라버니가 안 계시는 동안은 누나인 내가 에밀을 지켜 줄 거예요!”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도 방긋한 미소를 짓는 라나 클라디우스.
페이건이 섬을 떠난 이후 오누이 간의 관계는 부쩍 살가워져 있었다.
페이건이 있을 때는 서로 오빠와 형을 차지하겠다며 다투기 일쑤였는데 막상 오빠가 떠나자 라나는 자신이 오라버니 대신이라며 에밀을 부쩍 예뻐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살갑기 그지없는 오누이가 되어 있었다.
“누나, 누나! 흉아가 보낸 배 되게 커. 그리고 선물도 잔뜩!”
“응, 내가 뭐랬어! 오라버니께서 분명히 선물을 보내 주실 거라고 했지. 엄마, 저기 있는 저 상자들 전부 오라버니께서 보내신 물건 맞죠?”
“그럼, 다 우리 페이건이 보낸 선물들이지. 저기 좌측 벽에 있는 건 본관에서 일하는 하녀들 선물이고 우측 벽에 있는 건 본관을 제외한 별관에서 근무하는 사용인들을 위한 선물. 그리고 뒤쪽에 있는 것들은 경비병들 몫. 그리고 저기 가운데 있는 예쁜 꾸러미가….”
“네 오빠라는 녀석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과 유모를 생각해서 보낸 선물이란다. 허헛, 녀석 낯선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쁠 텐데 저택에서 근무하는 모든 인원을 이토록 꼼꼼하게 챙기다니. 이렇게 세세하게 마음을 쓰는 거 보면 참 기특하단 말이지.”
“거봐요, 내가 항상 말했죠. 우리 페이건이 평소에 잘 웃지를 않아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아주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나저나 어휴 이 녀석, 따로 용돈도 안 받는 애가 무슨 선물을 이렇게 푸짐하게 실어 보냈담.”
타지에 떠나 있지만, 여전히 자랑스럽기만 한 맏아들을 떠올리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 클라디우스 부부.
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두 사람과 달리 아직 어린 오누이는 조바심이 들었는지 엄마,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요! 나 오라버니가 보낸 선물이 뭔지 빨리 보고 싶단 말이에요!”
“엄마, 에밀두요! 에밀도 흉아 선물 볼래요!”
“그래그래, 알았어요. 우리 공주님, 사실 엄마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니까 얼른 저 선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자.”
“흐잉, 그냥 여기서 열어 보면 안 돼요?”
“안 돼.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데서 포장을 뜯었다가는 오빠가 정성 들여 고른 선물이 상처 입을 수도 있잖니. 우리, 엄마랑 손 꼭 잡고 집에 가서 열어 보자. 오빠가 보낸 편지도 그곳에서 열어 보고.”
“오라버니께서 편지도 써 주셨나요!”
“그럼, 우리 라나 보라고 편지도 아주 길게 썼지. 웃차, 아빠가 안아 줄 테니까 얼른 집으로 가자꾸나.”
라나와 에밀은 각각 티베리와 멜리사의 품에 안겨 클라디우스 저택으로 향했고.
“우와! 오라버님, 역시 감각이 대단하셔! 세상에나, 이렇게나 귀여운 인형과 거울이라니. 에밀, 너는 뭘 받았어?”
“용사님 투구! 짜잔, 난 이제부터 용사님이야!”
잠시 후, 저택 거실은 클라디우스 일가가 내지르는 기쁨의 탄성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자필로 눌러 쓴 편지가 개봉되는 순간.
“우, 우우욱… 오라버니 너무 멋지세요. 폴리다고스에 있는 그 많은 학생들을 제치고 학년 대표로 선발되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이 라나 클라디우스, 오라버니의 동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흉아… 뭇져! 근데 1등한 흉아도 보고 싶어요. 누나, 나 흉아 보고 싶어. 우아아앙.”
“어머나! 라나, 에밀. 오빠가 아카데미 생활을 씩씩하게 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왜 울고 그러니. 뚝, 너희들이 자꾸 울면 오빠가 슬퍼해요. 쿨쩍.”
“허허, 눈물범벅이 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치만, 그치만 내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운걸요. 분명히 폴리다고스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학년 대표라니. 훌쩍… 페이건, 엄마는 항상 너를 믿고 있었단다.”
“허허 참, 사람하고는.”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감개가 무량한 건 티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이건이 잘 해낼 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쟁쟁한 명문 신입생들을 제치고 학년 대표로 선발되었다니.
폴리다고스의 주류를 차지하는 대귀족들이 클라디우스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더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허허, 그런데 이 일을 어쩌지. 아무래도 페이건이 여름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데….”
“네? 여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에에! 왜요? 왜 오라버니가 집에 못 와요?”
“흉아 안 와요? 우아앙.”
“학년 대표 선발된 이상 여름방학 때 있을 아카데미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터라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고 하는구나.”
“세상에….”
“페이건이 보내온 내용을 보니 폴리다고스가 신입생들을 꽤나 엄격하게 통제하는 모양이야. 원칙대로 하면 1학년은 가족에게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데 페이건의 경우 대표로 선발돼서 예외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는구려. 아무래도 올여름 내내 페이건은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후, 훌쩍.”
“으으… 그럼 오라버니, 못 보는 거예요?”
“시러어! 아부지, 흉아 못 보는 거 싫어요!”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해진 세 사람.
한데 그런 가족들을 바라보는 클라디우스 가주의 입가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맺혔다.
“그 대신 올여름 페이건이 3주의 기간을 정해 우리들을 폴리다고스로 초대하겠다고 하는군.”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지만 폴리다고스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는 걸로….”
“원래는 안 되는데 페이건이 행정 부서를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고 하는구려. 그 담판 덕분에 초대가 가능하다 하니 지금부터 여행 준비를 해 두라고 써 놓았어. 허허,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와아! 만세!”
“누나, 그럼 흉아 볼 수 있어?”
“응! 볼 수 있어. 그것도 그냥 오빠만 보는 게 아니라 오빠가 어떻게 사는지도 전부 다 볼 수 있어. 에밀, 너도 기쁘지?”
“응, 와아! 형아 만세!”
티베리가 익살스럽게 보여 준 뒤집기 한판에 라나와 에밀은 환호성을 터뜨렸고 멜리사는 생긴 것과는 달리 장난기가 넘치는 남편의 팔목을 꼬집었다.
“당신, 다 알면서 일부러 그랬죠? 나랑 아이들의 반응을 보려고 페이건이 우리를 초대했다는 말은 일부러 나중에 한 거잖아요!”
“하하 미안, 미안. 하지만 당신과 아이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너무 궁금했거든, 하하.”
티베리는 큼지막한 웃음을 지으며 가족들을 끌어안았고 엄마와 아빠의 따뜻한 품에 쏘옥 안긴 채 라나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오라버니를 보러 가자! 여름이 되면 오라버니를 만나러 갈 거야! 여름 님, 부디 빨리빨리 와주세요!”
* * *
피잉.
수직으로 뻗은 낚싯바늘이 수면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미세한 소음.
평범한 사람의 귀에는 들릴 리가 없는 소음이었지만 그곳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그 은밀한 파동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하아아암! 지루해. 야! 낚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내가 낚을지 못 낚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낚시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곧은 바늘을 매단 낚싯대를 백날 던져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는 것쯤은 알아!
‘괜찮아, 물고기 좀 낚지 못하면 어때. 어차피 내가 낚아채고자 하는 건 다른 건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북슬이의 몸부림이 정수리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낚싯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바늘을 이용한 낚시는 내 오랜 취미 중 하나였는데 내가 낚시 삼매경에 빠져들 때마다 북슬이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리고는 했다.
―고기가 아니면 뭘 낚으려는 건데?
‘세월, 마냥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낚싯대를 드리우는 거야. 이렇게 낚시를 이용해 내 마음에 닻을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유수와 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버틸 수 있거든.’
―너 뭐 잘못 먹었어? 있잖아, 난 네가 이런 식으로 헛소리를 할 때마다 네 나이가 종종 의심스러워져. 너 정말 열일곱 살 맞지?
‘…라는 건 거짓말이고, 동체 시력 훈련 중이었어. 봐, 내가 바늘을 흔들 때마다 예상 못 한 파동이 발생하잖아. 그 파동에 직격당한 물고기의 다음 움직임을 예상해 보는 거야. 그리고 실제 물고기가 취한 움직임과 내 예상을 비교해 보는 거지.’
―물고기의 움직임을 읽어서 뭐하게?
‘혹시 알아? 물고기의 다음 움직임을 맞출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다면 인간의 움직임도 예상할 수 있을지.’
―물고기랑 인간이 같냐!
‘글쎄, 아주 같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닮은 구석도 꽤 많은 것 같은데. 특히 일정한 틀을 지어 주면 그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벅저벅.
내가 걸터앉아 있는 나뭇가지 쪽으로 접근해 오는 둔탁한 발걸음.
‘내가 말했지. 오늘, 내일 즈음에 상급생 간부 위원회에서 나를 찾을 거라고.’
난 그 발걸음의 주인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가락을 까닥였고 털 뭉치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때.
“페이건 클라디우스, 근 시일 중으로 상급생 자치회에서 연락이 갈 테니 가급적 기숙사에 머물라는 전언을 받았을 텐데.”
화를 꾹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발밑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저녁쯤에 그런 내용이 담긴 서신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내용을 인지했으면서 이런 외딴곳에 숨어 낚시 따위를 하고 있었다고!”
“뭐, 어때? 결과적으로 네가 나를 무사히 찾아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다 괜찮은 거 아냐?”
푸욱푸욱.
분을 이기지 못한 녀석이 뿜어내는 콧김이 나뭇가지 쪽으로 슬금슬금 올라왔다.
곰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체구와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뺨따귀.
거기에 짧게 깎은 머리까지.
쟤가 그러니까….
―페이건, 지금 너를 부르고 있는 저 아이 걔 맞지? 왜, 네가 폴리다고스에 온 첫날 팩셰르의 연구실에서 함부로 말을 꺼냈다가 된통 깨졌던 그 애 말이야.
‘네, 맞습니다. 오벨리언 마르커스의 뒤를 붕어똥처럼 따라다녔던 그러니까… 쟤가….’
쿵.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한 탓일까?
상급생 자치위원회의 명을 받아 나를 찾아온 떡대는 힘껏 발을 굴렀고 녀석의 발에 짓눌린 땅에는 오목한 구멍이 생겨나고 말았다.
저런, 두 달 전이었다면 땅에다 화풀이를 할 게 아니라 저 발길질이 나를 향했을 텐데. 그럴 용기는 없는 걸까?
“4학년 학생 대표를 맡고 계시는 라도키아 선배님의 전언이야. 지금 2, 3학년 자치회 간부들이 모여 다과회를 벌이고 있으니 너도 참석할 준비를 하도록 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내 말, 아니 라도키아 선배님의 말씀 못 들었어! 다과회장으로 너를 불렀잖아.”
“분명히 이해했으니까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돼. 그 다과회인지 뭔지 어차피 최소 서너 시간은 흥청망청 벌어질 거 아냐. 끝나기 전에는 갈 테니까 너도 그렇게 전해.”
“…건방진.”
“아! 그리고 너, 이름이 뭐였냐?”
쾅.
다시 한 번 짓이겨진 땅바닥.
“난 분명히 전했어.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전부 네 책임이야.”
하지만 이번에도 녀석의 발은 나를 향하지 못했고 이름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덩어리 떡대는 그렇게 씩씩거리며 숲을 빠져나갔다.
―길버트 맥도닐. 페이건, 너 그새 저 아이의 이름을 잊어버렸어?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죠. 예전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근래 들어 생각할 게 많다 보니 깜빡했네요.’
―그런데 페이건, 다과회 초대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돼? 학년 대표 임명식이 다음 주로 다가왔는데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했잖아?
‘준비야 저를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지, 제가 할 게 뭐가 있겠어요? 괜찮습니다. 따로 해야 할 건 없으니까 느긋하게 있어도 돼요.’
―준비를 그렇다 치고, 내가 너라면 지금 당장 그 다과회장으로 뛰어갈 텐데. 맛있는 과자가 잔뜩 있을 거잖아? 그것도 엄청 비싼 것들로다가.
‘과자야 맛있겠지. 문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꼬라지며 하는 말들이 멋이 없다는 거 아니겠어?’
임명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2~4학년 간부들이 나를 호출하는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부터 자주 부딪치게 될 테니 그 전에 얼굴이나 익혀 두자는 거겠지. 떼거지로 모인 머릿수를 이용해 기를 눌러둘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아직은 물고기들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고픈 생각이 없었기에 다시 한 번 곧은 바늘의 낚싯대를 던졌다.
그리고 갈수록 말랑말랑해지는 롤빵이의 턱을 긁어 주며 말했다.
‘거봐, 가만히 앉아서 세월을 낚고 있으니까 인간 물고기들이 알아서 파닥거려 주잖아.’
* * *
사라라락.
무심코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있던 손에 힘을 빼자 한 갈래로 뭉쳐 있던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비단결 같은 폭포를 만들었다.
‘오늘은 페이건을 볼 일이 없으니까 굳이 묶을 필요는 없겠네.’
지난 일주일간 습관처럼 머리를 틀어 올려 묶다 보니 습관이 된 포니테일.
하지만 이제는 그 머리 모양을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틴은 머리 손질을 대충 마무리한 채 옷장 문을 열었다.
슥슥.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옷을 고르다 보니 의상을 정하고 착용을 마치는 데까지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얀색 셔츠와 어깨를 가려 주는 숄, 발목을 덮는 플레어스커트에 가느다란 은팔찌 하나.
날렵하면서도 우아함을 겸비한 레인저를 연상케 했던 지난 일주일간의 의상과는 확연히 달라진 코디.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굳이 다리맵시를 강조해야 할 필요 또한 없어졌기에 크리스틴은 늘 자신이 입던 편한 복장으로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럼, 나가기 전 ‘의식’을 치러 볼까?”
우우웅.
드르륵.
마법 장치로 잠긴 서랍에 마나를 불어넣자 굳게 닫혀 있던 서랍이 열렸다.
“음, 좋아. 모양도 멀쩡하고 향도 아직 향긋해!”
서랍 속에 담겨 있는 물건의 상태를 확인한 크리스틴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맺혔다.
어느새 양손에 들린 소형 분무기와 붓.
칙칙.
“라라라♪.”
물건의 표면 위에 직접 제작한 보존액을 펴 바르는 크리스틴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비록 인체에 무해하다고 해도 어쨌거나 보존액을 음식 위에 바르는 건 이상한 일이라며 고개를 내젓겠지만 크리스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게 있어 이 ‘크래커’는 ‘관상용’ 혹은 ‘보존용’의 용도를 가지고 있을 뿐 애초에 취식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이 아까운 걸 먹으라고? 말도 안 돼.’
쪽.
도톰한 입술이 크래커의 표면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드르륵.
부지런한 소리를 내며 서랍은 잠겼고 이걸로 오늘의 의식을 모두 끝낸 크리스틴은 본격적으로 외출할 채비에 들어갔다.
[난 말이지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카밀라 엘리시온’ 양과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누가 보면 꼭 두 사람이 은밀한 사이인 것 같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유리안 선배님은 카밀라 양을 안 챙기고 뭐 하는 거야? 저러다 둘 사이에 수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그게 무슨 불명예냐고! 내가 유리안 선배님이었다면 그 두 사람이 ‘틈만 나면 붙어 다니는 거’ 절대로 가만 안 놔둬!]그대로 문손잡이를 잡고 외출을 나설 것만 같았던 크리스틴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어제 오후, 잠시 들린 카페에서 들었던 ‘불경한’ 수군거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
분명히 스스로에게 수백 번 다짐한 바 있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지금은 그냥… 이렇게 옆에서 지켜보고 가끔씩 말을 걸 수 있는 사이로 만족해야 돼. 난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불안함은 슬며시 몸을 키워 그녀의 다짐을 조금씩 침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
그리고 너무 늦어 버린 자신.
‘아니야! 아닐 거야! 아직 나한테도 기회는 충분히 있어, 후우.’
자꾸만 몸집을 키워 나가는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한숨을 내쉰 후 크리스틴은 그대로 기숙사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
이제 곧 만나게 될 아이의 표정만큼이나 밝고 화사한 햇살.
그녀가 ‘목숨처럼 아끼는 여동생’이자 어쩌면 ‘잠재적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경쾌하면서도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