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3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30)화(130/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30)
“미안해요, 언니.”
오랜만에 마주한 두 여인.
차마 크리스틴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던 카밀라는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과를 건넸다.
“내가 이곳에 오는 게 언니와 오빠 관계에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언니의 관대함에 줄곧 아량을 부려 왔던 것도 알아요. 전부 다 알면서, 그러면서 이곳에 오는 걸 선택했어요.”
“이것 보세요. 카밀라 엘리시온 양, 잠깐 내 이야기부터….”
“미안해요. 변명처럼 들린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언니.”
카밀라가 폴리다고스에 편입한다는 결정을 내릴 당시 크리스틴은 모처에 은둔한 채 작업을 수행 중이었던 터라 그 선택을 전해 듣지 못했다.
카밀라가 편입을 마친 이후에야 크리스틴은 카밀라의 편입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천공의 눈을 떠난 이래로 카밀라는 존경하고 좋아하는 언니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언니는 착한 사람이니까 나한테 여기를 떠나라는 말 같은 건 못 한다는 거 알아요. 그치만 내가 잘못한 게 사실이니까. 그래서 사과를… 아얏!”
죄책감으로 가득 찬 토로(吐露)를 늘어놓으려니 돌연 이마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촉.
“내가 여러 번 말했지. 카밀라 넌 다 좋은데 흥분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일단 생각하는 거 멈추고 이 언니가 하는 말부터 들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평소답지 않은 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언니가 보였고 카밀라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났어. 물론 너도 판단을 내리기 전 나름의 정보를 모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명색이 네 언니라는 사람인데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나한테 상의도 한번 안 하고 내렸다니. 내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니?”
“언니, 아니에요. 절대 아닌데 만약 내가 언니한테 상의를 했다면 언니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래서 그랬어요. 언니의 허락을 얻었다면 최소한의 면죄부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러기는 싫었어요. 내 맘대로 결정한 거니까 내가 제멋대로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너를 그렇게 보내고 한참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외로움도 많이 타는 애가 낯선 장소에 덜컥 가 버리다니. 나한테 상의라도 했으면 내가 일정을 맞추거나 하다못해 도움이 되는 조언이라도 해 줬을 거 아니니? 그런데 그렇게 가서 언니를 이리 불안하게 만들어! 카밀라 엘리시온, 너 이렇게 제멋대로인 아이였니?”
“언니… 고마워요.”
크리스틴의 입에서 유리안 알렉세예브라는 이름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카밀라에게 똑똑히 전달되었고 결국 카밀라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언니, 저는 정말….”
“그만, 네가 이해했으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뚝! 널 만날 생각에 들떠서 나왔는데 왜 울고 그래? 내가 너 웃는 얼굴 보는 걸 좋아하는 거 알면서.”
크리스틴은 손가락으로 카밀라의 손등을 경쾌하게 두드렸고 그제야 카밀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쌍한 아이. 미안, 사정을 솔직히 말해 줄 수 없는 이 언니를 부디 용서하렴.’
그리고 반쯤은 억지로 미소를 짓는 카밀라를 보며 크리스틴 또한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카밀라가 유리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그럼에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는 크리스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약혼녀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유리안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가련한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과 유리안의 사이는 네가 알고 있는 그것과 다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카밀라의 마음을 기만해 버린 자신과 유리안의 비밀을 생각할 때마다 크리스틴은 죄책감이 가슴을 조여 왔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카밀라를 생각하며 종종 기도를 하고는 했다.
유리안보다 ‘훨씬 더 멋지고 따뜻한 남자’가 나타나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
한데 친언니와 같이 애틋한 표정을 하고 있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끊어졌다.
카밀라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만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 그러니까 정말로 만에 하나 페이건과 카밀라가 잘 된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두 사람을 축복해 줄 수도 있었다.
카밀라 그리고… 페이건의 행복은 크리스틴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둘이 서로에게서 행복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축하해 줄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카밀라의 친언니 같은 사람으로서 과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거잖아?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질문을 되뇌며 크리스틴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카밀라, 듣자 하니 페이건 클라디우스라는 시끄러운 신입생과 친하게 지낸다는 데 사실이니?”
“훌쩍, 그 이야기 언니한테도 들어갔군요.”
“오랜만에 폴리다고스에 왔더니 주위 아이들이 온통 페이건 클라디우스의 이름을 떠드는 통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있어야지.”
“…상급생 분들 사이에서 페이건의 평판은 어떤가요?”
“험담투성이야. 굳이 나누자면 건방지고 예의를 모르는 촌뜨기라는 평이 8할. 그럼에도 괜찮은 자질을 갖췄다는 평이 나머지 2할 정도랄까?”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조금 놀란 참이었다.
카밀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와중에도 페이건에 관한 걸 묻다니.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만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 일은 엄연히 벌어지고 있었고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았던 크리스틴은 슬며시 탐색전에 들어갔다.
“어휴! 정말 그분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페이건은 건방지지도 않고 예의를 모르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오히려 직원분들이나 상업지구 상인분들을 대하는 걸 보면 걔 만큼 정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없는데.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고 멀쩡한 사람을 욕이나 하다니. 정말 너무하네요.”
“어머!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는 네가 그렇게 발끈하는 걸 보니 정말 친하기는… 친한가 보네?”
“네, 친해요. 페이건은 제가 폴리다고스에 와서 만난 가장 좋은 친구 중 한 명이에요.”
“그럼… 평소에 단… 둘이 다니는 거야?”
“아니요. 제라르라고 아주 귀엽고 똑똑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어요.”
“흐으음, 그럼 셋이서 한 쌍이라… 이 말이네.”
“네. 저희 셋은 우리 수업 시간 대부분을 같이 붙어 다녀요. 밥도 항상 같이 먹구요.”
“…대부분을 붙어 다닌다고?”
‘셋’이라는 숫자에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던 크리스틴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카밀라,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렴.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나, 남자들이란 착각을 잘하는 동물이거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좋지만 너무 허물없이 어울리다 보면 혹시 멋대로 너에 대해 착각을 하고 추후 귀찮게 만들 수도 있으니 약간은 거리를 두는 게 조, 좋지 않을까?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너는 여자고 그 아이들은 남자잖아.”
“네? 하하! 아니에요. 언니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적어도 우리들한테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제라르는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는 약혼녀가 있구요. 페이건은… 푸하핫! 페이건 걔는요. 아무튼,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크리스틴의 염려가 어지간히도 재미있었는지 카밀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한 채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페이건 걔는 뭐? 페이건 클라디우스에게는 내가 안심을 해도 될 만한 특이점이라도 있는 거야?”
“말로 설명해드리기는 좀 그렇구요. 언니가 걔를 한번 만나 보면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푸풋!”
마음 같아서는 ‘물론 만나 봤단다. 그것도 카밀라 너보다 오래전에. 그리고 며칠 전에도 보고 오는 길이고.’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페이건과 동행을 했다는 건 비밀유지 사항이었으니까.
“꼭 페이건 그 아이를 두고 말하는 건 아닌데. 카밀라, 적당한 경계심은 가지고 있는 편이 너 스스로를 위해 좋아. 자랑삼아 말할 일은 아니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남자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거든.”
“에이, 그거야 언니 같은 초미인이니까 그런 거죠. 난 언니에 비하면 난쟁이고 하나도 예쁘지도 않고….”
“네가 예쁘지 않으면 내가 이런 걱정을 하지도 않지!”
“…언니?”
“흠흠! 네가 스스로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잠깐 큰 목소리를 낸 거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흠흠!”
눈을 동그랗게 뜬 카밀라의 뺨에 가만히 손을 올리며 크리스틴은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이 언니는 별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이 우리 예쁜 카밀라를 상대로 함부로 흑심을 품고 껄떡대는 건 절대로 용납 못 해요.”
“껄떡이요? 푸하하!”
껄떡이라는 단어가 기폭제가 되어 다시 한 번 터져버린 카밀라의 웃음보.
너무 크게 웃은 탓에 또다시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카밀라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페이건 걔가 그럴 주변머리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무튼, 말도 안 돼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해요. 페이건 걔는 유전자 자체가 여자, 아니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람한테 껄떡대는 걸 못하도록 설계된 애거든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정말 안심하셔도 돼요. 적어도 지금의 페이건은 저를 포함한 그 어떤 여자한테도 관심을 가질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알겠어. 네가 그리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역시 신경이 쓰여. 우리 카밀라 때문이라도 조금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겠는걸.”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낸 핑곗거리가 기뻤던 탓일까?
크리스틴은 처음 질문을 건넸을 때보다는 확연히 밝아진,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지켜봐 줄게.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너랑 어울릴 만큼 좋은 남자인지.”
* * *
“너도 그 이야기 들었지? 케링벤 영지의 남작이 사기를 치다 모든 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했다는 이야기.”
“아아, 당연히 들었지. 케링벤이라면 평민 출신의 상인이 기여금을 납부하고 수여받은 영지잖아.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애초에 ‘근본’이라고는 없는 상인 따위에게 작위를 부여하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
근본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며 나를 힐끗 쳐다보는 갈색 머리의 여인.
단어를 입에 올리는 타이밍하며 굳이 나를 향해 돌려지는 머리의 움직임까지, 날 노리고 한 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시간 더 있다가 오는 건데. 이 정도 느지막이 오면 지루한 꼴은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놈의 수다를 이리도 오래 떠는 거야? 오늘 오전부터 주둥이를 놀려 놓고 입 아프지도 않나?’
현재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저학년용 학생자치회 공관이었고 내 눈앞에서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고상한 척 흉내를 내는 것들은 2~4학년 학생자치회를 담당하고 있는 간부들이었다.
길버트 맥도닐이 전달한 초대.
딱히 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나를 부르는데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찾아온 공관.
하지만 자리에 앉은 지 15분 만에 난 그 선택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곳에 오기 전부터 지루한 자리가 될 거라는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지만, 학생회 공관에서 마주한 지루함은 예상했던 정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머저리들이 뱉어 내는 독 안개를 듣고 있으려니 차라리 연못 속의 물고기들과 눈 맞춤을 하며 녀석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훨씬 더 즐거웠다.
“하아아암!”
결국, 하품을 해 버렸고 그 순간 나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한 채 떠들던 상급생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하품? 미안, 우리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역시 페이건 같이 ‘외진 곳’에서 세월을 보낸 사람한테는 이런 식의 ‘품격’ 있는 대화가 좀 버겁지?”
고베나 라도키아.
눈을 가늘게 뜬 채 샐쭉한 미소를 짓는 이 계집애는 연금술로 유명한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현재 4학년 대표를 담당하고 있는 고위 간부였다.
“굳이 외진 곳이라 돌려 말씀하실 필요 없구요. 그냥 촌구석이라고 말씀하고 싶다면 그리 말해도 됩니다.”
“어머! 비록 이 자리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래. 혹시 오해하고 있다면 분명히 말해 둘게. 내가 이런 자리를 만든 건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듯하니까 페이건과 서로 알아가는 자리를….”
“품격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제가 쓸데없이 모여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을 늘어놓는 취미는 없어서요. 그러니 사람을 부른 용건이 있다면 그냥 바로 말씀을 하시죠.”
“뭐, 쓸데없는 자리? 페이건 클라디우스 너 무슨….”
“그만!”
고베나의 옆에 붙어 개소리를 떠들던 놈이 나서려 했지만 고베나는 손을 들어 곧바로 녀석을 만류했다.
그리고 방긋한 미소를 지은 채 복잡한 숫자가 가득한 종이를 내밀었다.
“…뭡니까 이게? 1학년 대표 괄호 열고 페이건 클라디우스 내정 괄호 닫고 금화 10만 개?”
“페이건한테 배정된 기부금이야. 너도 알다시피 학생들 복지나 시설 유지, 이런 걸 하다 보면 이래저래 필요한 돈이 제법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 비용을 우리 학생회 간부들이 분납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페이건 너도 이제 우리 학생회 식구가 되는 게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니까 이 자랑스러운 의무를 분담할 기쁨을 누리게 해 주고 싶어서 부른 거야.”
“금화 10만 개? 학생들의 찻값으로 쓰기에 좀 과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금액 용처(用處)를 알 수 있습니까?”
“어머! 뭘 구차하게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우리가 어련히 좋은 곳에 쓰지 않았겠어?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페이건이 ‘궁핍’한 가정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10만 개로 깎아 준 거야.”
“궁핍?”
“응. 내가 클라디우스의 재무제표를 확인한 건 아니지만, 비천한 평민들을 상대로 치료약이나 팔아먹고 사는… 어머 미안! 평민들과 거래를 하는 클라디우스가 형편이 아주 넉넉할 것 같지는 않아서.”
“아, 그러셨군요. 이 모든 게 배려의 결과라….”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참기 위해 입가를 가린 손에 조금 더 힘을 줘야만 했다.
어찌나 이리도 한결같은지.
상급생들은 이렇게 나오면 혹시 뭔가 개미 눈곱만큼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한 내가 바보 같잖아?
“이 금액 낼 수 없습니다.”
“왜? 방금 말했잖아. 학생회 간부들이라면 누구나 분담하고 있는 금액이라고. 설마 학생들을 위해서 그 정도 푼돈 쓰는 게 아까워? 아, 혹시 아까운 게 아니라 조달이 어려운 거라면….”
“액수를 떠나서 내 주머니에서 금화 한 개라도 꺼내 가고 싶다면 최근 5년간 기부금 사용처 및 지출 내역이 증빙된 장부부터 제출하세요. 일단 그 장부부터 확인한 후 내든 말든 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그래? 얘들아. 내가 뭐랬어? 이렇게 나올 것 같다 그랬지?”
샐쭉하니 미소를 짓는 고베나.
이 음흉한 계집이 지어 보인 조소는 곧 간부들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하하! 역시 없는 집 자식들은 꼭 티를 낸다니까.”
“킥킥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저런 말은 못 할 텐데. 돈 낼 능력이 없다는 말을 아주 잘도 하네.”
“야, 야!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솔직한 게 어디야. 난 솔직히 여기서는 당연히 내겠다고 한 다음에 약속도 못 지키고 쩔쩔맬 거라 생각했거든.”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터져 나오는 조롱의 목소리.
한데 모여서 합을 맞춘 게 고작 이따위 조롱이라니, 하여간 할 일도 없는 놈들이라니까.
“얘들아 너무 그러지 마. 그렇게 대놓고 얘기하면 페이건이 위축될 수도….”
“아니요, 위축되지 않습니다. 분담금 납부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분들보다는 제가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니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치안국장님이나 규율국장님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굳이 가치를 비교한다면 고작 금화 10만 개 가지고 잘난 척하는 바보들보다 단신으로 페스티라카 유적의 붕괴를 막음으로써 폴리다고스의 명예를 지킨 신입생 쪽이 훨씬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
“아 그리고 늑대 인간을 때려잡은 것도 추가. 여기 모인 전원이 살아오면서 얻은 모든 업적을 한데 모은 뒤 10배 뻥튀기를 해도 제가 지난 3개월간 이뤄 낸 것들에 감히 비할 바도 못 될 텐데. 저보다 못나디못난 ‘것’들을 앞에 두고 제가 위축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너 말 다 했어?”
“아직 다 안 했습니다. 아, 페스티라카 유적에 늑대인간 사냥을 더하고 여기에 해글러 나이투를 두들겨 팬 것도 추가. 해글러 나이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4학년 공동 부대표 자리를 맡고 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순식간에 조용해진 자리.
천박한 조소가 가득하던 자리를 메운 건 숨 막힐 듯한 정적과 칼을 세운 적개심.
“생각해 보면 학생들도 좀 불안하지 않았을까요? 간부랍시고 깝치던 놈이 입학 3개월도 안 된 신입생한테 개처럼 두들겨 맞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니. 저런 머저리들이 우리를 대표한다고? 인내심이 많은 학생이라 해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4학년 부대표를 두들겨 팬 제가 간부 라인에 입성해 줬으니 학생들도 조금은 안심을 할 수 있겠군요.”
조금 더 분명해진 적개심.
한껏 부라린 눈알이 위협적이었다면 반응이라도 보여 줄 텐데 저리도 매가리가 없어서야 원.
“행동거지는 건방져도 언사(言辭)는 선을 지키는 편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었나 보네.”
“행동과 말, 언행 모두 겸손하게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머니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 중 하나니까요. 그런데 뭐랄까요? 폴리다고스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도발에 휘말린 고베나 역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이 녀석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었다.
고베나의 뒤에 병풍처럼 도열해 있던 간부들은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듯한 기세로 씩씩거리고 있었고 녀석들을 향해 내가 지어 보일 수 있는 가장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학년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인데. 그래도 나 정도면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