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3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32)화(13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32)
“공자께서 무척이나 영민하신 분이라는 말은 들었다만, 역시 소문은 진짜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법인가 보군요. 이제 보니 영민하다는 흔한 말로는 재단이 불가능한 분이셨네요.”
흔들림도 잠시, 소피아 씨는 곧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뛰어난 치료술사는 환자의 사소한 행동거지만을 보고 병명과 증상을 꿰뚫어 본다지만 사실 절반쯤은 허풍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분을 직접 목격했으니 이제 꼼짝없이 믿는 수밖에 없겠네요.”
소피아 씨의 오른쪽 손이 왼쪽 손을 덮었고 곧 하얀 실크 장갑에 가려져 있던 손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나 다른 곳이 아닌 손목을 보고 싶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피아 씨가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얼굴을 가린 베일에도 주름이 잡혔다.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베일로 가려진 얼굴 역시 왼쪽 손등과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겠지.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도 괜찮을까요?”
“공자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세요. 이미 장갑을 벗은 마당에 문제될 게 뭐가 있겠어요?”
고개를 숙여 자세히 살피자 화상의 흔적으로 뒤덮인 손등이 뚜렷이 보였다.
‘…역시 레몬과 낙엽으로 짐작은 했다만 평범한 화상으로 생긴 흉터가 아니야. 자연적인 불과 마법적인 불이 결합된 것으로 인한 상처. 얼굴에도 이것과 비슷한 흔적이 있다면… 물리적인 고통과 심적인 고통 모두 상당했겠어.’
마법적인 불로 발생한 화상을 다스리는 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연고의 이름은 ‘델모’였는데 해당 연고는 레몬과 비슷한, 미세한 향내를 풍긴다는 특성이 있었다.
그리고 델모가 사용자의 체내로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 피부 표면을 겉도는 상황에서 재스민류의 허브차 향기와 섞일 경우 낙엽 타는 듯한 냄새가 피어오르고는 했다.
오래전에 탐독해 둔 〈화상 치료 교본〉 덕분에 소피아 씨의 증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피부의 상태와 화상의 흔적으로 판단건대 소피아 씨는 최소 5년 이상 이 고통을 앓아온 것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확인이 끝났으니 장갑 끼셔도 돼요.”
“혹시 공자께서 필요하시다면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아뇨, 정말 괜찮으니 소피아 씨 편한 대로 하면 됩니다.”
한데 소피아 씨의 말과 행동 어디에서도 상처를 입은 자 특유의 소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 초연한 모습을 통해 그녀가 평균은 훌쩍 넘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상처를 다스리기 위해 약을 복용하거나 피부 연고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네, 두 가지 방법 모두 사용하고 있어요. 약은 하루에 한 차례씩 피부 연고는 하루 두 번, 아침저녁으로 바르고 있답니다.”
“…혹시 하루에 두 번씩 사용한다는 그 연고 ‘북쪽 고개 치료술사 연합’에서 독점으로 제작하는 그 연고 맞습니까? 왜, 그 이렇게 생긴 까만 유리병에 담긴 그 제품 말이에요.”
“맞아요. 화상에는 그 제품이 가장 효과가 탁월하다 하여 몇 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설명은 그다음에 마저 해 드리죠.”
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속에 정리해 둔 시약 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또옥또옥.
냉(冷)한 속성을 가진 시약을 기본으로 해서 그 위에 해독 효과를 가진 약초를 배합한 후 손상된 피부 조직 재생에 도움이 되는 성분을 추가하면… 완성.
“소피아 씨, 괜찮다면 손등에 한번 발라 보시겠어요?”
“지금 바로요?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소피아 씨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채 흉터가 가득한 손등 위에 시약을 펴 발랐다.
“어머! 요 몇 달간 피부에서 후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통증이 느껴져 애를 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금세 통증이 가시다니. 공자님, 혹시 무슨 마법이라도….”
“역시 그게 맞았네요. 소피아 씨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고 당장 사용 중단하시고, 정 피부 연고를 쓰셔야겠다면 케플 잎이 포함되지 않은 다른 연고를 찾아보세요. 소피아 씨를 괴롭히던 통증의 원인이 바로 그 연고에 포함되어 있던 케플 잎입니다.”
“…!”
자신을 오랫동안 도와주던 연고가 통증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소피아 씨.
그리고 그 표정을 통해 북쪽 고개 치료술사 연합 놈들이 주의점을 제대로 기재하지 않은 채 델모를 팔아 치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륙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케플 잎은 보마르 대수림 인근의 군락지에서 독점 생산됩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 하니 3년 전쯤에 대수림 인근에서 큰 수해가 발생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수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케플 잎이 손상을 입었고 그 때문에 부작용이 발생한 겁니다.”
“공자님의 고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이 연고를 사용한 지는 3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런데 3년 전에 발생한 수해의 여파가 왜 지금….”
“모든 케플 잎은 출하되기 전 3년의 건조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3년 전 건조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케플 잎을 전량 폐기하지 않고 출하하는 바람에 수해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문제가 발생한 거죠. 아마 당분간은 피부 연고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어마, 그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연고가 대량으로….”
“아마 그 연고를 구매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문제 없이 사용하고 있을 거예요. 변질된 케플 잎으로 인한 피해는 일부 ‘민감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발현될 테니 말입니다.”
부디 민감한 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회복이 어려운 중증 피부 질환을 앓고 있는’이라는 것을 소피아 씨가 눈치채지 못했기를.
“그럼 공자님께서 제작해 주신 약품은….”
“변질된 케플 잎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독기를 중화하는 중화제입니다. 괜찮다면 가져가서 바르세요. 일주일 정도 사용하면 연고 때문에 발생한 상처는 대부분 완화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공자님의 선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러 와 놓고 오히려 더 신세만 지고 가는군요. 공자께서 미천한 저에게 베풀어 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연고 오남용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고통의 원인을 뒤늦게 알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 적지 않을 텐데도 소피아 씨는 의연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소피아 씨,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걸 아스트라한테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그랬잖아요. 정정하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아스트라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논의를 해 보세요. 그리고 그 친구가 괜찮다고 한다면 제가 주기적으로 소피아 씨의 상처를 좀 봤으면 하는데요.”
“어머! 공자님께서요? 아니에요, 이미 큰 도움을 받았는데 그렇게 번거롭게까지….”
“번거롭지 않습니다. 정말 번거로웠다면 애초에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죠.”
“그렇지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사람을 치료하는 건 제 업입니다. 제 본분에 충실하겠다는 것뿐인데 번거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드는 소피아 씨.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되도록 빨리 아스트라와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말을 해 준 후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이곳에서 내보내야지 소피아 씨가 오늘이 가기 전에 아스트라와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으음… 수상해, 뭔가 수상해. 저 여자랑 그 아스트라라는 꼬맹이 사이에 분명히 뭔가 있어. 그리고 그 뭔가는 얼레리꼴레리일 가능성이 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정말인 걸까?
소피아 씨가 방을 나서자마자 정수리 위의 북슬이가 입을 열었다.
‘역시 네 눈에도 그렇게 보여?’
―응. 그리고 그게 맞다면 저 아가씨도 참 고심이 깊겠다. 신분 차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고역인데 상처까지. 어휴, 불쌍해라.
‘네가 소피아 씨를 불쌍히 여길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표정 봤잖아, 스스로를 비관하는 사람은 저렇게 당당한 눈을 하지 못해. 그리고 아스트라 그놈도 소피아 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통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신분의 차이가….
‘두 사람의 마음만 굳건하다면야 그까짓 세간의 눈 따위야. 그리고 내가 그간 지켜봐 온 아스트라라면 그 정도 장애물에 구애받을 것 같지는 않아.’
―헤에, 너 그 흰머리 꼬마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그 녀석 정도면 나쁘지는 않지. 여기가 온통 쓰레기 천지다 보니 더욱 돋보이는 것도 있고.’
―그럼 소피아라는 여자를 치료해 주겠다는 것도 아스트라 때문인 거야?
‘두 사람에 대한 호감이 반, 소피아 씨를 치료하는 과정이 종국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반.’
날 이곳에 보내 준 광휘가 부여한 ‘치료로써 구원을 행하라.’라는 사명을 차치하고서라도 소피아 씨를 진료하는 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
―페이건, 너 제라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드루이드 오러의 사용법을 깨달은 것과 비슷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구나?
‘맞습니다. 제라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제가 가장 절실하게 느낀 생각이 뭔지 아세요? 제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다양한 환자를 접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티베리가 네 나이 때 대륙을 떠돌면서 치료 수행을 쌓은 것처럼?
‘네. 치료술사를 탄생시키는 건 재능만으로도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 치료술사를 완성시키는 건 경험입니다. 아버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에 대륙을 주유하며 경험을 쌓는 걸 선택하신 거죠. 하지만 전 아버님과 다른 선택을 한 터라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게 되었구요.’
―그래서 저 소피아라는 아가씨를 통해 경험을 쌓겠다는 거구나. 흐음, 네 말처럼 된다면 너와 저 아가씨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네.
‘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그리되겠죠.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복합 화상을 입은 소피아 씨를 주기적으로 진찰하고 살필 수 있다면, 그 경험은 저에게 큰 자산이 될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있니?
‘일단 녹록지 않은 일인 건 분명해요. 피부는 가장 민감한 신체 부위 중 하나거든요. 그리고 소피아 씨의 경우 마법적 화기(火氣)로 인해 부분적으로 오염된 세포 조직을 아주 섬세하게 돌봐야 하기에 어려움의 정도로만 따지면 절단된 사지(四肢)를 재생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난이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저 화상으로 인한 독기는 내장 기관까지 침투한 터라 최악의 경우 화상을 입은 팔을 잘라 내고 재생시킨다 해도 다시 돋아난 팔의 피부는 그대로일 겁니다.’
―어머나! 설명만 들어도 힘들 것 같아.
‘애초에 쉬운 일이었다면 아스트라부터 소피아 씨가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그 어려움의 정도가 높기에 더욱더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여기서 제가 소피아 씨를 치료할 수 있다면 제 치료술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되어 줄 거에요.’
아스트라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소피아 씨를 치료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디난드의 가주가 아닌 후계자(그것도 출생의 약점을 안고 있는) 수준에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넌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일단 해 봐야지. 하지만 전망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아. 나한테는 이게 있잖아.’
마즈다를 매만지던 손가락에 힘을 주자 녹색 빛이 토옹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제라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증명됐듯이 드루이드 오러는 인체가 가진 근원적인 생명력과 치유력을 북돋우는 데에 정말이지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이번에도 이 녀석이 힘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해 봐야지.’
서로를 정말이지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련님과 하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 탓인지 승부욕이 불끈 피어올랐고 그 열기가 묻어나는 손바닥으로 북슬이의 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클라디우스의 의료 교본 1장 3절을 보면 나오잖아. ‘치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말고, 내가 아니면 이 환자의 고통은 그 누구도 덜어 줄 수 없다.’라는 각오로 치료에 임하라고.’
* * *
“이상으로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1학년 대표로 임명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짝짝짝.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치안국장의 목소리와 마지못해 치는 기색이 역력한 박수 소리.
퍼엉퍼엉.
그리고 각양각색으로 물든 채 휘날리는 축하용 포연(砲煙).
임명식이 시작되기 전 치안국장은 ‘자네가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는 듯하니 축하 의식은 최대한 간략하게 준비했네.’라고 말을 했지만 준비된 것들을 보고 있자니 내 기준으로 충분히 화려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생각보다 표정이 밝다. 흐흐, 이런 거 엄청 싫어해서 끝날 때까지 인상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북슬아, 저기 연단 아래 좀 봐. 박수 치고 있는 학생들 표정 보이지?’
―응 누가 봐도 억지로 치고 있다는 표정이 훤히 보여.
‘네 말대로 난 이런 화려한 절차를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당장이라도 분통 터져 죽을 것 같은 상을 하고 있는 저놈들을 보고 있자니,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드네.’
―나도 그건 좋기는 한데 대신 너도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하잖아?
‘야, 내가 한 번 지루한 걸 감수하면 저놈들 수백 명이 불려 나와서 죽을상을 하고 있는 걸 실컷 볼 수 있어. 이 정도면 완전 남는 장사 아냐?’
―우와, 나쁜 놈! 역시 페이건은 나쁜 놈이야.
정수리 위의 수다쟁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으려니 어찌저찌 시간이 흘러갔고.
“그동안 수고 많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내 명의로 보내는 축하 선물과 임명장 사본을 자네 본가로 보냈네. 아들을 이토록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자네 부모님도 이 기쁨을 같이 누려야 하지 않겠나?”
어깨에 묵직하게 와닿은 요아힘의 손.
“학년 대표의 책무 중에는 학생들을 대표해 교무위원회와 소통을 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이걸로 네놈을 불러낼 구실이 조금 더 늘어난 셈이구나.”
예의 그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이는 팩셰르.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올랐으니 행실 또한 바람직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처럼 싸늘한 알크페인의 눈동자.
일곱 명의 국장들에게 나란히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임명식은 끝.
―마련된 연회는 금일 23:00까지 진행될 예정이니 참석해 주신 학생분들은 그 시간까지 자유롭게 연회를 즐겨주시기를 바랍니다.
대형 수정구를 통해 안내 방송이 나오자 교수진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이내 임명식이 거행된 회관은 온전히 학생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자리는 더럽지만 그래도 이왕 모였으니까 마시자. 너도 한잔해.”
“그래, 일단은 건배.”
나는 밉지만 모처럼 주어진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다는 걸까?
고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학생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페이건, 여기!”
“빨리 와, 오래 서 있느라고 힘들었지. 우리가 널 위해서 맛있는 걸로만 골라 놨어.”
한 상 가득 탁자 위를 채워 놓은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두 사람.
그렇게 내가 제라르와 카밀라 곁으로 막 다가선 그때.
쾅.
“전원 주목, 신입생 여러분들 잠시만 이쪽을 봐 주겠어.”
교수들이 모습을 감췄던 문이 열리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은 내가 누군지 알겠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소개할게. 내 이름은 고베나 라도키아, 현재 4학년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이야.”
고베나를 비롯한 4학년 간부들이 등장하자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눈에야 고베나 패거리가 우습게 보일 뿐이지만 다른 1학년들에게 있어 고베나는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되는 무서운 선배였으니까.
“어머, 저 언니. 지난번에 봤을 때는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저렇게 하고 왔을까? 머리며 의상이며 너무 힘을 준 게 보여서 부담스럽잖아.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아는 거야?”
물론 내 옆에서 카나페를 아그작거리고 있는 청발 아가씨는 이번에도 색다른 반응을 보여 줄 뿐이었으니까.
“우선 너희들이 새로운 대표를 맞이한 걸 축하해. 유능한 걸로 소문이 자자한 학생이 대표가 된 만큼 너희들도 기쁘지? 그런데 이 일을 어째, 아무래도 나는 조금 서운한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고베나는 오만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동자를 한 채 좌중을 살핀 후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상업지구에서 운영되고 있는 ‘불꽃 울음’이 무슨 장소인지는 알지?”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저, 저도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울음은 ‘로데파인’ 드워프 부족이 운영하는 공방(工房)으로 ‘전용 대장장이’를 고용할 여력이 안 되는 학생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 중 상당수는 지금까지 아주 자유롭게 불꽃 울음을 이용해 왔을 거야. 아주아주 적은 금액에 불과한 수수료만 납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어쩌지? 다음 달부터 그렇지 못할 것 같은데?”
“…!”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1학년들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고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고베나는 독사 같은 눈동자를 내 쪽으로 향한 채 말했다.
“이게 너희들이 너무너무 훌륭한 대표를 둔 탓이니 어쩌겠어. 다들 받아들여야지. 자, 모두의 축복 속에 학년 대표로 취임한 페이건 클라디우스 군을 향해 우리 모두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