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5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52)화(15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52)
황제와 재상 사이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 전생의 난 황궁 인근에 잠입한 채 기회를 살폈다.
제아무리 만인의 존경을 받는 명재상이라 한들 미친 황제의 광기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없었고 황제의 역린이 되어 버린 키에르고가 조만간 ‘종언(終焉)의 마차’를 타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기 그지없었다.
다그닥다그닥.
푸르륵.
히이잉.
잠입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은 어느 새벽.
개조 수술을 받은 비행마(馬)들이 내뿜는 투레질 소리,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난 예정된 장소를 향해 은밀히 걸음을 옮겼다.
다그닥다그닥.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턱쯤에 서서 숨을 죽이고 있으려니 조금 전의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커덩덜커엉.
비행마들이 다가올수록 마차 안에 있는 내용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처형집행인들의 인도를 받는 당사자의 덩치가 워낙에 큰 만큼 그를 가둔 강철 관(棺)의 무게 역시 육중할 따름이었다.
히이이잉.
마침내 절벽 끄트머리에 도달한 비행마들은 날개를 펼친 후 날아올랐고 관을 실은 마차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을 시작했다.
애초에 이런 결과를 노리고 그 이음쇠를 워낙 허접하게 만든 마차인 터라 지상에서 바퀴가 빠지자마자 곧바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콰자자작.
마차가 추락한 걸 확인한 비행마들은 그대로 머리를 돌려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황궁을 향했다.
시체를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굳이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이 천길 높이에서, 더군다나 강철 관에 갇힌 채 떨어진 마당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라는 게 존재할 리 없으니까.
‘…선황제 때부터 자신을 아들처럼 보살펴 준 스승을 이렇게 비참한 방식으로 처형시키려 들다니. 갈브레이드 3세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야. 최대한 빨리 처단해야 한다.’
황제의 충실한 처형집행인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난 그림자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내 등 뒤에는 커다란 무쇠 관이 메여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추락하는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 그 안에 있는 관을 짊어진 후 다시 반대쪽 절벽으로 오르는 행위’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난 예정된 계획대로 재상 키에르고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저저적.
관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키에르고의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로브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강철 투구였다.
제국의 선황제는 키에르고가 등용된 첫날부터 그에게 강철 가면과 정체를 숨기는 로브를 두른 채 생활할 것을 명했고 그 명령은 선황제가 붕어한 이후에도 충실이 지켜지고 있었다.
이런 황당한 명령을 내린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았지만, 선황제는 끝내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그 바람에 키에르고는 ‘철 가면의 재상’이라는 아주 유명한 이명(異名)을 얻게 되었다.
“후우.”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난 곧바로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타인의 비밀을 함부로 들쑤시는 게 무례한 행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키에르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가면을 벗길 필요가 있었으니까.
‘드라콘?’
그리고 키에르고의 가면을 벗겼던 그 날 새벽.
난 타샤드의 선황제가 재상에게 그토록 가혹한 명령을 내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정평이 난 타샤드의 재상이 인간이 아닌 드라콘이었단 말이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당사자는 얼마나 큰 위협을 받게 될까?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제국의 운영을 맡길 수 없다는 정치적인 비난부터 더러운 파충류의 손에서 제국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극단주의자들의 준동까지.
키에르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그가 감당해야만 하는 위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
결국, 타샤드의 선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명재상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치고는 지나치게 커다란 덩치가 걸리기는 했지만, 음성변조 기능이 장착된 투구와 시야 왜곡 마법이 각인된 로브를 이용하면 정체를 숨기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인간의 손에 죽음의 위기에 처한 드라콘이라니….’
키에르고가 겪어야만 했던 비극에 잠깐의 애도를 보낸 후.
난 그의 입 사이로 각성제를 흘렸고 타샤드의 드라콘 재상은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난 저 악독한 황제를 처단할 것입니다. 키에르고, 당신이 정말로 제국을 사랑한다면 나를 도와주시오.”
키에르고가 정신을 차리고 난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키에르고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부했다.
비록 황제에게 버림을 받았다 한들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제국에 대한 충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제국이었는지 아니면 저 무도하기 짝이 없는 황제였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시오. 저 미치광이 폭군이 전 대륙을 불사르는 걸 방관하는 게 진정으로 타샤드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내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키에르고는 입을 열었고 난 갈브레이드 3세를 암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작별의 시간.
키에르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폐하께서 이토록 장대한 악업을 쌓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죄가 이토록 크거늘 내 어찌 고개를 들고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난 이제부터 세상을 등지려 하니 귀인께서 부디 뜻하신 바를 성취해 이 대륙을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드라콘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고 그 이후로 다시는 키에르고를 보지 못하였다.
* * *
‘만약 키에르고가 끝내 나를 돕는 걸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암살이 성공했을 확률이 적게 잡아도 5% 정도는 낮아졌겠지.’
언젠가 이 사람, 아니 드라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결단을 내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 하여 이런 식의 만남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좋아, 아주 좋아. 난 인간의 셈법에는 서투른 탓에 정확히 얼마를 받으라고는 말 못 해 주겠지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대금으로 지불한다 해도 손해 보는 일이 없을 거야.”
“호오, 그렇단 말이지?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아무튼, 고맙네. 자네 눈썰미 덕분에 고민을 덜었어.”
인간의 셈법에는 서툴다고?
그럴 리 있나.
제국의 내정을 경영했던 이가 셈법에 서툴다는 거짓말을 믿느니 차라리 물고기가 호수에서 익사했다는 말을 믿고 말지.
철 가면과 함께했던 과거를 숨긴 채, 도구상의 조언자 노릇을 하고 있는 키에르고를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고풍스러운 제국어를 구사하시는군요. 보통 제국 토박이들도 그 정도로 자연스러운 고어(古語)를 구사하지는 못할 텐데.”
“…인간의 말을 익히는 걸 제국어로 시작했다 보니 그 습성이 남아 있을 뿐이오. 젊은 양반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들 드라콘은 워낙에 고리타분한 종족이거든. 오래전 인간의 언어를 처음 배웠을 때의 습관일 따름이니 감탄을 할 일은 아니라오.”
줄곧 줄기 표본에 고정되어 있던 키에르고의 황금빛 눈동자가 내 쪽으로 고정되었다.
“젊은 양반이야말로 식견이 대단하시구려. 내 억양만을 듣고도 그게 제국의 고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다니.”
“가업(家業)의 일환 중에 옛날 서적을 뒤적거려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요. 옛날 책들 태반이 제국의 고어로 기재되어 있다 보니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흐음… 아무튼 대단하시구려. 젊은 분께서 이리도 좋은 줄기를 길러 낸 것만도 대단한데 제국의 고어까지.”
키에르고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린 후 등에 메고 있던 바구니를 다니엘 영감에게 내밀었고.
“어이쿠! 이번 것도 아주 질이 좋네. 내 안쪽에 들어가서 얼른 가져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던 다니엘 영감은 자루로 가득 찬 손수레를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자네가 늘 받아 가던 대로 준비했네. 대금의 반은 현금으로 나머지 반은 식량으로. 자, 혹시 오차가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세어 보시게.”
“괜찮아, 확인은 무슨. 자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지 않나?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보름 후에 다시 오는 걸로 하지.”
“온 김에 밥이라도 먹고 가지 그래?”
“됐어. 난 괜찮으니 자네나 많이 먹게.”
손수레 가득 들어 있던 자루를 대번에 들쳐 멨음에도 그 덩치가 워낙 좋은 덕분에 키에르고의 표정에서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보름 후에 보세.”
쿵쿵.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웅장한 울림을 내며 드라콘은 대로 건너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사람 좋은 얼굴의 도구상은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럼 감정도 끝났으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그래서 물량은 어느 정도까지 확보가 가능한 건가?”
“이 자리에서 확언을 드릴 수는 없지만, 평균적인 수확량 이상을 거두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군자금의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잡을 길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는 기쁨 때문일까?
어느새 내 마음은 청동 바구니를 떠나 비밀을 품고 있는 드라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그날 밤, 상업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숲.
거주자의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담한 오두막에 불이 켜지고 바위를 깎아 만든 굴뚝 사이로 뜨거운 연기가 퍼져 나갔다.
달칵달칵.
무려 100년이 넘는 시간을 혼자서 살아온 덕분일까?
그 미욱하리만치 커 보이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드라콘은 야무진 손놀림으로 저녁 한 상을 솜씨 좋게 차려 냈다.
밥상 중앙의 멧돼지 통 다리 구이와 그 주변에 놓인 채소 위주의 곁들임 찬.
“순리가 내 곁에 머물기를.”
드라콘 특유의 식전 기도를 올린 후 키에르고는 다소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 덩치가 워낙에 우람한 덕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던 접시가 깡그리 비워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허허….”
식사 후 차가운 냉수를 들이켜던 키에르고의 입에서 돌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일 이후로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새삼스레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
아들의 곁을 지켜 달라는 선황제의 부탁을 지키지도 못한 데다 목숨을 바쳐야 하는 주인까지 잃어버린 죄 많은 몸.
그런데 이토록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끼니때가 되면 허기를 느끼다니.
산 자로서 감내해야만 하는 비애(悲哀) 혹은 축복.
자신의 삶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의 외줄 타기라는 점을 다시금 느끼며 키에르고는 낮 동안 해제해 놓았던 경비 장치를 가동시켰다.
우우웅.
잠시 후 드라콘 부족의 기술력이 응집된 경비 장치가 작동됨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려 퍼졌고 그제야 키에르고는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보호구와 무기들을 풀어 놓을 수 있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습격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고 ‘환영받지 못하는 지식’이 위협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았으니까.
“어흠!”
인간이라면 입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입천장이 익어 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찻물을 가득 따른 뒤 키에르고는 정좌를 하고 앉아 오늘의 기록을 남길 채비에 들어갔다.
은거를 깨고 나온 이래로 80년.
그간 키에르고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집.
더없이 위험하며 소중하기도 한 그 기록집의 맨 앞표지에는 〈제국 비사(祕史), 타샤드의 몰락을 초래한 어둠의 존재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 * *
―야, 너 이래도 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안 되지. 명예로운 클라디우스의 후계자이자 폴리다고스의 학년 대표나 되는 분께서 무단 주거침입이라니. 혹시라도 누가 이걸 본다면 아주 큰 추문이 일어날지도.’
―그걸 아는 놈이 표정은 또 왜 그렇게 당당한 건데?
‘이왕 대의를 위해서 대담해지기로 마음먹었으면 망설임 같은 건 버려야 하는 거야. 막말로 내가 여기서 찡찡거리고 있어 봤자 너랑 라무테 님이 불안해하기밖에 더 하겠어?’
오른손으로는 뒤가 켕긴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북슬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고 반대쪽 손으로는 그림자 밧줄을 흩뿌렸다.
챙강챙강.
바늘과 함께 뻗어 나간 밧줄은 일정 간격으로 늘어선 후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을 보내왔다.
이걸로 이 외딴 장소 일대는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불청객은 물론 오두막 주인의 귀환까지 감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후에야 난 담장을 넘었다.
‘라무테 님, 제 어깨에 바짝 붙어 계세요. 경비 장치가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어 주의 깊게 행동해야 합니다.’
일국의 내정을 전담했던 명재상답게 키에르고가 설치한 장치는 제법 촘촘했다.
―너도 참 신기해.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에 앉아 있는 놈이 이럴 때는 빠릿빠릿하게 잘 움직인단 말이야.
‘그게 다 아침마다 하는 체조 덕분이지. 여러 번 말한 것 같지만 한 번 더 말할게. 단련이라는 건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 두면 결국 도움이 되기 마련이야.’
물론 이 방면의 특급 전문가인 나를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타샤드 황궁 방어 시스템의 정수가 담긴 투명 장막을 돌파한 후 텃밭 곳곳에 설치된 지뢰밭을 지나 굴뚝 사이로 잠입을 완료하기까지 제법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발각되는 일 없이 키에르고의 오두막 안쪽에 잠입할 수 있었다.
‘드라콘은 참 재미있는 종족이야. 힘도 강하고 마법에도 능하고 길고 긴 수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도 알지. 북슬아, 드라콘들은 종족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취미가 하나 있거든. 그게 과연 뭘까?’
―몰라.
‘기록이야. 드라콘은 강박관념에 가까운 기록 의지를 지닌 종족이라 자신의 일대기를 세밀하게 기록해 두고는 하는데. 이 특성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드라콘들이 보유하고 있는 공통점이기도 해.’
―…그래서 넌 지금 그 기록을 훔쳐보기 위해 주인 없는 집에 몰래 들어왔다는 거야? 우와, 나쁜 놈!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어도 우리가 만난 이 드라콘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해 온 경력이 있는 아주아주 중요한 인물이거든. 이자가 남긴 기록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솔직히 고백하자면 키에르고와 재회한 그 순간, 난 담장을 넘어서라도 그가 남긴 기록을 읽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전생에서는 경황이 없어 갈브레이드 3세의 타락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생각을 못 했지만, 황제의 갑작스런 성정 변화 과정에는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갈브레이드 3세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해 온 키에르고라면 그 수수께끼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바가 있을 터.
그리하여 무례한 행동임을 알면서도 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닌(솔직히 말하자면 그 내막이 궁금하기는 하다만) 오르페우스 님의 과업을 달성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으니까.
그리고 굳이 생색을 내자면 이래 봬도 내가 키에르고의 생명의 은인인 셈인데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흑흑, 미안해 오르페우스. 나 네 후손이 이런 과격한 성품으로 자라는 걸 막지 못했어.
‘우리, 오르페우스 님도 용서해 주실 거라 믿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드라콘이 남긴 기록은 오르페우스 님의 과업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갈브레이드 3세의 타락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황제가 ‘경호 대장 멤피스’로 대표되는 신규 관료 세력과 접촉을 한 이후 급격하게 난폭해 졌다는 것 정도.
그리고 난 황제의 성정 변화 배경에 혼돈의 여섯 성주(星柱)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딱히 유력한 근거가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혼돈의 기둥들을 제외한다면 감히 ‘타샤드의 황제’를 상대로 수작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한 개새끼들이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오르페우스 님께서는 혼돈의 여섯 성주를 상대로 뜻을 이뤄 내셨고. 난 그분의 후손으로 다시 태어났어. 만약 나를 이곳으로 보낸 광휘가 짓궂은 면이 있다면 전생의 마지막 과업 또한 혼돈의 기둥들과 연관이 있을지도.’
줄곧 나를 괴롭혔지만, 그 사실 여부를 검증할 길이 없어 줄곧 확인을 미뤄 왔던 가설.
키에르고의 기록이라면 과연 내 가설이 맞았는지 아닌지를 검증해 주는 충분한 증거가 될 터.
오른팔을 앞으로 뻗자 라무테 님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끝에 내려앉았고 난 그녀의 날개깃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라무테 님, 꼼꼼히 방안을 살펴 주세요. 이곳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 공간이 있을 텐데, 그 안에 일기장이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낸 후 안쪽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면 오늘 목적은 100% 달성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