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6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62)화(16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62)
철썩철썩.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파도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항구 도시 이델타.
“마님, 목적지에 도착했사옵니다. 아가씨, 도련님! 항구에 도착했사오니 하선할 채비를 하시지요!”
“네에! 라나는 준비 끝났어요!”
“에밀도, 에밀도 다 했어여!”
지금으로부터 약 6개월 전, 페이건이 대륙으로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그 항구에 클라디우스의 문양을 내건 쾌속선 한 척이 도착했다.
“마님, 잘 다녀오시고 큰 도련님께 저희들의 안부도 좀 전해 주십시오!”
“어르신들, 우리 마님이랑 아가씨 그리고 막내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업무를 보면서 마님이 건강히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노인 두 명과 중년 여성 한 명 그리고 인형처럼 귀여운 오누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선 절차는 완료되었고.
에스페타라 사람들 특유의 활력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이걸로 클라디우스 일가 3인방과 그들을 수행하기 위한 인원의 이델타 도착이 마무리된 것이다.
“우와아!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이델타군요. 에밀, 저기 좀 봐! 세상에나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지?”
“누나야! 저기 나무 인형! 저 멍뭉이 인형 엄청 귀여워!”
땡글땡글한 눈동자를 사방으로 돌려 가며 처음 하는 바깥세상 구경에 푹 빠진 라나, 에밀 남매.
고개를 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에밀의 머리통 위로 목소리만큼이나 푸근한 손길이 와 닿았다.
“허허, 막내 도련님. 도시를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출발하기 전 저랑 분명히 약속하셨지요? 도시에 가거든 제 손을 꼭 잡고 다니시겠다고 말입니다.”
“응! 에밀, 할아부지랑 약속했으니까 약속 지킬 거예요. 여기, 손!”
에밀은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고 집사 복장을 한 노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풍잎같이 오동통한 손을 맞잡았다.
“자 그럼, 라나 아가씨는 이 할미 손을 잡는 걸로 할까요?”
“어머! 할멈, 에밀은 아직 철없는 아이니까 손을 잡아야겠지만 난 이미 성숙한 레이디인걸요. 그런데 이, 라나 클라디우스에게 손을 잡으라니. 오라버니께서 이 사실을 아시거든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어머나, 우리 아가씨께서 그새 레이디가 되셨던가요? 이상하다, 분명히 지난달 새벽까지만 해도 오라버니가 보고 싶다며 베개를 흠뻑 적시는 걸 제가 똑똑히….”
“할멈!”
몇 마디의 말로 라나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든 노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웃음을 한 차례 지어 보인 후 ‘성숙한 레이디’의 손등을 매만졌고 라나는 못 이기는 척 노파와 손깍지를 꼈다.
“자, 그럼 이걸로 짝짓기는 완료되었으니 슬슬 출발해 볼까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이 흐뭇한 광경을 지켜보던 중년 여인, 멜리사 클라디우스는 손뼉을 한 차례 치는 것으로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엄마, 우리 어디로 가여? 형아 어디 있어?”
“엄마가 지금 다시 한 번 확인할 테니 잠깐만 기다리렴. 어디 보자, 그러니까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3번 광장에 있는 큰 기둥 아래로 가 있으면….”
일가 세 명과 사용인 두 명.
클라디우스의 명성을 생각하면 단출하다 못해 조촐하기까지한 인원 구성이었지만 길을 나선 이들 중 이 구성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타의 세력가 가문들처럼 으리으리한 행렬 같은 건 없었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천박한 행렬과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대감이 있었기에 클라디우스 일행은 행복한 표정을 한 채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우우…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할아범의 손을 잡은 채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에밀이 돌연 침울한 표정을 했다.
에스페타라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알록달록한 거리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같이 오지 못하고 혼자서 섬을 지키고 있을 아빠 생각이 났던 것이다.
“에밀! 누나도 아버님이 같이 오시지 못한 건 정말 아쉬워. 하지만 출발하기 전 아버님이 말씀하셨잖아. 오라버니를 만나서 아버님 몫까지 재미있게 놀고 오는 게 진짜 아버님을 위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말자.”
“누나야….”
“대신에 우리가 정말 멋진 선물을 사 가면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야. 그러니까 에밀, 고개 푹 숙이지 말고 저기 좀 봐! 저 망토 아버님이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지?”
“응! 아빠랑 파란색 잘 어울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냥 철부지 같기만 했는데 어느새 의젓해진 모습으로 동생을 달래는 장녀를 보는 멜리사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랄랄라, 랄랄라♫.”
그렇게 라나와 에밀은 발걸음에 맞춰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클라디우스 일가가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저기 오셨다! 클라디우스 부인이 도착하셨어. 뭣들 하고 있나! 당장 부인을 뫼시지 않고!”
“명 받들겠습니다!”
멜리사 일행이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닌 듯한, 으리으리하다는 표현으로는 한참 부족하고 어마어마하다는 말은 가져다 붙여야지 겨우 설명이 될 듯한 초대형 마차와 그 마차 주위를 지키고 있는 호위 병력.
마차가 워낙에 크다 보니 호위 병력의 머릿수 또한 상당했는데 그들의 가슴팍에는 폴리다고스 치안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척척척.
“클라디우스 부인과 그 일행을 모시기 위해 치안국에서 파견된 보르만이라 하옵니다. 클라디우스 공자의 모친 되시는 분을 폴리다고스까지 안내해 드리는 영광을 얻었으니 최선을 다해 부인을 모시도록 하겠사옵니다.”
절도 넘치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엄정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는 보르만과 예하 호위 병력들.
이들의 얼굴에 맺힌 결연한 의지를 통해 멜리사는 자신이 말도 안 될 정도로(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어, 보르만 경이라 했나요?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토록 많은 분들이 저와 우리 아이들을 폴리다고스로 데려다준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곳까지 온 게 맞을까요?”
“그렇사옵니다.”
“…물론 폴리다고스 측으로부터 받은 안내장에 마중 인원을 보내 주겠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기는 했죠. 그런데 그 마중이라는 게 이토록 과분할 줄이야….”
“과분하다니요! 클라디우스 공자께서 폴리다고스의 명예를 드높여 주신 걸 감안하면 이 정도 예의는 전혀 과분한 것이 아니오니 부인께서는 그 과분하다는 말씀을 부디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멜리사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과분’이라는 한마디에 줄곧 숙어져 있던 보르만의 고개가 처음으로 들어 올려졌다.
보르만은 ‘클라디우스 부인께서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한 멜리사로서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우리 페이건이 폴리다고스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말씀하셨나요?”
“그렇사옵니다, 부인.”
“페이건이 폴리다고스에 가서 한 일들을 조금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클라디우스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보트만은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공손한 어조로 페이건이 폴리다고스에 도착한 이래로 이룩해 온 성과들을 설명했고.
설명이 끝날 때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호위 병력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그제야 페이건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히 알게 된 멜리사의 입에서는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할멈, 할아범… 이분이 하는 말 들었죠?”
“그럼요, 아주 똑똑히 들었다마다요. 마님, 감축드리옵니다. 가주님과 마님의 곁을 떠나 있는 동안 페이건 도련님께서 아주 큰일을 해내셨군요.”
“역시 우리 도련님. 허허! 가죽이 아무리 두껍다 한들 결국 끝이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오는 법이지요.”
워낙에 배포가 큰 할멈, 할아범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반응을 갈음했고 멜리사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페이건은 언제나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 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하지만 부모 곁을 떠난 지 고작 6개월 만에 이렇게 큰 성과를 이뤄 내다니.
“클라디우스 부인, 저희가 모실 테니 마차에 오르시지요.”
아들의 ‘잘남’을 증명해 주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
그 뜨거운 시선과 마주한 멜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아들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 페이건, 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니?”
* * *
―그 ‘담포루’라는 드라콘이 폴리다고스 인근에 모습을 보인 건 언제?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제4 외곽 초목 지대에 대규모 보수공사가 가해지던 시기에 처음 등장했고 그 공사에서 보여 준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폴리다고스 외곽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
―그럼 담포루 씨가 주로 하고 있는 업무는?
‘약초 채집과 유해조수 퇴치, 간단한 제련부터 아이템 제조까지. 숙련된 연금술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업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그 성격이 워낙에 조용한 탓에 상업부지 내에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탁월한 실력을 갖춘 걸로 이름이 높지.’
―그럼 담포루 씨가 좋아하는 음식은?
‘간을 약하게 한 고기구이와 제철 생과일. 너무 사치스럽지 않다는 전제하에 차도 즐기는 걸로 알려져 있어.’
―음 좋아, 잘 외웠네. 이쯤이면 벼락치기 한 것치고는 제법 잘했어. 이 정도로 잘 외웠으니 그 드라콘을 만나도 실수하는 일은 없을 거야.
키에르고의 오두막으로 가는 길.
언제나처럼 내 머리 위를 점거한 채 뒹굴거리던 북슬이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틀간 난 상업지구 내에서 ‘담포루’라는 가명으로 불리는 키에르고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청동 바구니의 주인인 다니엘 영감의 전폭적인 도움 덕분에 제법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키에르고가 워낙 요주의 인물이기에 오두막을 방문하기 전, 수집한 정보들의 숙지를 위해 난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북슬이표 최종 점검 또한 가뿐하게 통과했다.
―페이건, 그럼 난 이번에도 담포루 씨를 쭉 지켜보고 있으면 되는 거지?
‘네. 그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지난번에 담포루 씨가 하고 있었다는 그 무장(武裝)이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상시적인 것인지 알아 두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구불구불 뻗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기를 1시간여.
저 멀리서 옅은 연기가 올라오는 외딴 오두막집이 보였다.
그 외형 자체는 허름했으나 거주자의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오두막의 면적은 상당했고 난 내 가슴팍에 위치한 문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두드렸다.
“담포루 님! 담포루 님, 계십니까? 다니엘 영감님을 통해 약속을 잡은 바 있는 페이건 클라디우스입니다.”
쿵쿵.
“잘 오셨소. 이런, 이거 모처럼 손님이 오셨는데 복장이 난잡해서….”
정면에 위치한 현관문을 두드렸건만 키에르고의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미안하게도 밭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리시겠소? 내 손만 대충 씻은 뒤 들어가리다.”
텃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키에르고는 모종 흙 범벅이 된 옷차림으로 나를 맞아 줬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아,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허허, 뭘 이런 걸 다.”
드라콘 용으로 특수 제작한 초대형 과일 바구니를 건넨 후 난 오두막 안쪽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휑하다면 휑하고 깔끔하다면 깔끔한 오두막 안.
타샤드의 2인자였던 이가 머무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오두막의 정경을 보며 내가 약간의 애상에 잠겨 있을 무렵 라무테 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이건, 지금 재빨리 훑어봤는데 이번에도 지난번이랑 똑같아. 겉으로 보이는 허름한 옷차림 안에 강철 갑옷이며 보호구를 빈틈없이 갖춰 입고 있어.
지난번 재회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옷차림이라니.
텃밭, 그것도 자신의 보금자리 안쪽에 있는 텃밭에서 완전무장을 한 채 작업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그래, 나한테 고문서의 해석을 의뢰하고 싶다고?”
잠깐의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키에르고가 돌아왔고 다니엘 영감을 통해 사전에 합의된 바 있는 의제가 탁자 위로 올라왔다.
“네, 담포루 씨께서 고어(古語) 해석에 능하다는 말을 다니엘 영감님에게 들은 바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해석을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그쪽 내용에 대한 의뢰를 드리고자 합니다.”
“허허! 내가 조금 오래 살다 보니 고어의 해석을 아주 조금 할 줄 알기는 하다만, 근래 들어 폴리다고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신 분께서 나 같은 아인(亞人)을 찾아와 해석을 맡기겠다니. 참 재미있는 말씀이시구려.”
순식간에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키에르고의 황금빛 눈동자.
저 눈동자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이 의심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운이 따라 약간의 성과를 얻었을 뿐 아직 배워야 할 것투성이인 초보 치료술사일 따름입니다. 특히 고어 쪽은 제가 가장 취약한 분야인지라 담포루 님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이런 자리를 요청한 것이지요.”
“고문서 해석에 능한 분이라면 폴리다고스에도 여러분 계실 것 같은데? 굳이 나를 찾아오기보다는 지도 교수님을 찾아가 요청을 드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소이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의뢰를 드리고 싶은 건 저 개인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은 내용이라서요. 그리고 개인적인 연구라는 건… 교수님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내용이 종종 포함되어 있는 법이지요.”
“허허! 그 명성답게 아주 당돌하시구먼. 좋소이다! 그 의뢰할 내용이라는 걸 꺼내 보시오. 단가는 내용을 확인한 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키에르고는 송곳니가 보이는 미소를 한차례 지어 보인 후 손을 내밀었고 난 그에게 한 다발의 서류뭉치를 건넸다.
“흐음… 뭔가 했더니 곤파랄 양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문서였구먼. 구두점이 찍힌 방식이나 연결사의 조합을 보건대… 제작된 시기는 제7 왕국의 중반, 아니 후반인가?”
키에르고는 최고의 학자로도 이름을 날린 바 있었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실력은 녹슬지 않았는지 눈앞의 드라콘은 아무런 막힘도 없이 서류를 술술 넘겨 나갔다.
“그래서 해석이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거요? 고어의 양식을 유지한 채 그대로 의미만 번역해 줄 수도 있고 아니면 현대어 양식으로 아예 전환을…!”
“아, 그다음 페이지부터는 의뢰 드릴 내용이 아니니 살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렇소이까? 그러니까 여기 접혀 있는 부분까지란 말이지?”
연륜이 묻어나는 대처라고나 할까?
제법 동요가 컸을 텐데 키에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연륜의 장벽이 가려 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준에서의 이야기일 뿐.
‘어떻습니까, 키에르고 경. 조금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손이 닿은 마지막 페이지의 내용을 확인한 그 순간, 키에르고의 황금빛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광경이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흠! 조금 뒤적여 가면서 편하게 확인을 해 보고 싶은데 괜찮겠소이까?”
“네, 얼마든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그거 제가 옮겨 쓴 복사본들이거든요.”
키에르고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진화, 진보 그리고 강림.
우리는 이 자리에 한데 모여 왕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것이며 우리의 검은 날개가 저 하늘 끝에 닿는 날.
왕께서는 영광된 걸음으로 우리 곁에 돌아오시리라.
나는 ‘낙사라의 모켈레’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놈들에게 규율처럼 전해 내려오는 ‘실험 강령(綱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고대어로 옮겨 적은 구절은 모켈레의 실험 강령 초입부에 등장하는 내용이었다.
과거 모켈레의 개조술이 갈브레이드 3세를 망가뜨리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키에르고라면 이 구절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덫을 설치해 뒀는데 아무래도 내 예상은 적중한 듯싶었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드라콘을 찾아다니면서 매달리는 건 공평하지 않아. 수지타산을 따져 봐도 완전히 손해일 따름이고. 내가 찾아갈 게 아니라 이 드라콘이 내 주위를 맴돌게 만들어야 해.’
왜 키에르고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폴리다고스 인근에서 암약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모켈레의 기록을 가지고 온 나를 무시하지는 못할 터.
어느새 돋보기안경까지 꺼내 쓴 채 서류를 살피고 있는 드라콘을 보며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쫓아다녀 볼 생각이 조금은 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