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67)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67)화(167/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67)
“어마마! 오라버니가 아시는 분인가요? 아! 혹시 이분이 오라버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는 그 미인이라는….”
“아니야, 라나야. 카밀라도… 미인인 건 맞지만 그 사람은 따로 있어.”
“카밀라? 아! 아리따운 언니의 성함인가 보네요. 세상에나, 언니의 눈동자만큼이나 예쁜 이름이에요.”
카밀라의 첫인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라나는 간식을 먹던 것도 멈춘 채 눈동자를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여동생님께서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보는 걸 참 좋아하셨지.
“그나저나 이렇게 아리따운 친구분 말고도 또 다른 미인을 알고 계시다니! 역시 오라버니, 대단하세요! 전 오라버니를 믿고 있었답니다!”
라나야, 부족하기만 한 오빠를 좋게 봐 주는 건 고마운데 네가 그렇게 말해 버리면 꼭 내가 무슨 희대의 호색한 같잖아.
물론 카밀라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동자를 반짝이는 라나의 모습은 퍽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그 귀여움과 별개로 라나가 생각하고 있는 ‘대단’에 대해서는 조만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기… 파랑 머리 누나는 공주님인가요?”
카밀라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에밀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우리 막내, 얼굴은 왜 저리도 빨개졌을까?
“응? 공주 아닌데. 왜 누나가 공주처럼 보이니?”
“네! 누나 엄청, 엄청 예뻐요. 엄마가 읽어 준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 같아!”
“어머, 우리 아가 사람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네. 형이라는 사람은 365일 내내 목석같기만 한데 우리 동생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우리 아가, 이름이 뭐야?”
“에밀, 에밀 클라디우스예요! 누나.”
“만나서 반가워. 누나 이름은 카밀라 엘리시온이야. 그냥 편하게 카밀라라고 부르면 돼. 으응, 아가 냄새!”
카밀라는 에밀을 번쩍 안아 올린 후 아직 말랑말랑하기만 한 뺨에 연신 콧등을 비벼 댔다.
“저기 페이건,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얘, 나 주면 안 돼?”
“안 돼.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체, 쩨쩨하기는. 그런데 어머님은 어디 계셔? 듣자 하니 어머님도 같이 오셨다며. 아무래도 우리 사이가 보통 각별한 게 아닌 만큼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허겁지겁 뛰어왔는데, 통 안 보이시네?”
“치안국장님을 뵈러 가셨어. 어머니가 오시는 길을 국장님께서 이것저것 편의 봐주셨거든.”
“흐응, 그렇구나. 그럼 어머님에 대한 인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리 아가들은 이 예쁜 언니랑 잠깐 이야기나 나눌까?”
“네! 언니 저도 자기 소개할게요. 라나, 라나 클라디우스라고 해요. 페이건 오라버니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랍니다.”
“저는 흉아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에요.”
“어머나, 그랬어? 이거 아주 귀하신 분들이셨네. 웃차!”
카밀라는 솜씨 좋게 에밀을 무릎 위로 안아 올린 후, 라나와 눈을 맞춘 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녀석의 매력은 아이들을 상대로도 가감 없이 발현되었고 라나와 에밀은 낯가림 같은 건 모른다는 표정으로 웃고 떠들었다.
“조금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이 있기는 했어. 혹시 다음 주나 다다음 주 중으로 하루만 시간을 내어 줄 수 있을까?”
“시간? 잠깐만.”
여전히 에밀을 품에 안은 채, 카밀라는 손가방 속에서 수첩을 꺼내 든 후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xx년 x월 x일,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처음으로 나한테 데이트를 신청한 날.”
“어마나, 오라버니! 이토록 보는 눈이 많은데 공개 데이트 신청이라니. 대담하시기도 하시지!”
“흉아! 데이트!”
“…저기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해도 되는데 애들이 있을 때는 좀 삼가 줘. 교육상 좋지 않단 말이야.”
“농담, 농담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흐흐, 그래서 갑자기 시간이라니. 무슨 일인데?”
“…어머니께서 친구들 얼굴을 좀 보고 싶다고 하시네. 귀빈관으로 친구들을 불러서 식사도 대접하고 따로 또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 봐. 그래서 너만 괜찮다면 시간을 좀 내어 줬으면 하는데.”
“우우… 어머님도 참. 다 큰 아들이 그렇게까지 걱정되실까?”
“그러게 말이야. 안타깝지만 난 그렇게까지 신뢰받는 아들은 아닌가 봐. 내가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고 있는지 영 못 미더우신 거겠지.”
잠시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카밀라는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나 말고 또 누가 초대받을 예정인데?”
“너밖에 없어. 알잖아? 제라르는 고향에 다녀오겠다면서 그저께 기숙사를 떠난 거.”
아스트라를 초대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녀석을 단란한 우리 가정 속으로 초대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스트라는 나중에 따로 조용한 자리를 만들어서 어머니께 소개해 드리기로 하고 일단은 카밀라를 소개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럼 유리안 오빠는? 오빠는 그냥 냅둘 거야?”
“선배야 항상 바쁜 사람인데 내가 냅두고 말고 할 게 어딨어. 괜히 청해 봤자 바쁜 사람한테 부담만 될 뿐이지.”
“…너 정말… 어휴! 라나야, 네 오빠 도대체 사람이 왜 그런다니? 싸울 때나 수읽기 할 때는 머리가 그렇게 핑핑 돌아가면서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지?”
어… 저거랑 비슷한 말을 예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됐고, 알았어. 어머님의 초대 감사히 받아들일게. 그리고 나는 아무 때고 괜찮으니까 시간 날 때 오빠한테 가서 물어보고 약속 잡아. 너 유리안 오빠가 예상외로 엄청 섬세한 사람인 거 모르지?”
“삐진다고? 선배가?”
“그래, 오빠가 마냥 웃고 다니니까 그냥… 아휴! 아니야, 됐어! 더 말 안 할래. 아무튼, 오빠한테도 그 초대장 꼭 보내. 알겠지? 너 오빠 한번 삐지면 의외로 되게 오래 간다.”
뭐가 그리도 답답한 건지 카밀라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카밀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괜찮으면 크리스틴 언니도 초대해 줘. 네가 하는 초대라면 기쁘게 받아들여 줄 거야.”
“크리스틴 선배까지?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기는 뭐가 아니야! 너는 이런 분야에 한해서는 스스로가 엄청 둔감한 사람인 걸 인정할 필요가 있어.”
“뭐… 네 말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바야. 하지만….”
“부분적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럴 때는 이 누나가 하는 말 들으라니까. 어휴! 라나야, 아무리 봐도 네 오빠 두 얼굴의 사나이인 것 같아. 평소에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치밀한 사람인데 오늘 같은 때는 꼭… 에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음, 오라버니께서 조금 서툰 면이 있으시기는 하죠. 하지만 전 그게 오라버니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 시각에 따라서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인정. 하지만 오늘 같은 때는 좀 심했어. 그치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시선을 맞추는 두 여인.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자세한 설명을 해 주면 좋으련만.
카밀라와 라나는 눈을 맞춘 채 키득거리기만 할 뿐 가련한 나를 위해 설명해 줄 의지 따위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 * *
“일단 인사부터 드리는 게 예의겠지. 폴리다고스 실험국을 책임지고 있는 팩셰르 에우리디케라 하오. 클라디우스 부인, 이렇게 먼 길을 와 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바이외다.”
“감사라니, 천만에요. 오히려 이렇게 초청을 해 주시니 제가 감사할 따름이죠.”
팩셰르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한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지금으로부터 15분 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요아힘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멜리사 앞에 실험국 소속 교직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팩셰르의 초대장을 가지고 나타난 교직원은 무척이나 정중한 자세로 실험국 방문을 요청했고 멜리사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예정에 없던 면담이 성사되었다.
“치안국장과의 면담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바로 만남을 청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내가 원체 기다리는 걸 잘 못 하는 성격이라 이렇게 바로 부인을 모신 것이니 너무 부담을 느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부담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있으니 염려하실 필요 없답니다. 다만 실험국장님과 담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았더라면 페이건을 데려왔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제가 실험이나 학술이나 이쪽에는 조예가 깊지 않아서요.”
“저런, 귀한 분을 모셔 놓고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으니 그 점에 관해서는 안심하셔도 된다오. 그리고 페이건을 데려오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셨소. 그 녀석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페이건이 이 자리에 있었다 한들 하는 일이라고는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는 게 전부였겠지.”
“어머! 그럴까요? 흐음, 확실히 우리 아이가 감정을 숨기는 건 많이 미숙한 편이라, 호호!”
요아힘과의 면담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어진 팩셰르와의 2차 면담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거물을 앞에 둔 멜리사의 표정이며 행동에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래, 어떻게 부군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
“국장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주 건강히 지내고 있답니다.”
“두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을 하고 말았어. 내가 이곳에 있지만 않았다면 부군께서도 아들의 얼굴을 보러 방문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금슬 좋은 부부를 생이별시킨 건 나의 부덕 탓이니 부인께는 사과드리리다.”
숨 쉬듯이 내뱉는 독기는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멜리사를 앞에 둔 팩셰르는 제법 정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멋모르는 놈들은 팩셰르가 막무가내로 무례할 뿐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었지만 그건 어리석은 자들의 오해.
팩셰르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자 앞에서는 제법 정중한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멜리사는 별다른 불쾌함 없이 면담을 이어 나갔다.
“호탕하고 호쾌한 데다 대범하기까지 한 변방의 실력자. 대륙의 정가(政街)에 떠도는 클라디우스 가주에 대한 평이라오. 하지만 허튼소리일 뿐이야. 겉으로는 마냥 대범한 호인(好人)인 척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한 껍데기일 뿐. 클라디우스 가주께서 얼마나 영악하신 분인지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어머! 우리 남편이 그런 사람이었나요. 흠,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정도로 용의주도한 클라디우스 가주께서 부인이 폴리다고스에 가신다는데 그냥 보냈을 리는 없고, 몇 마디 조언 정도는 해 줬겠지. 그래서 부군께서 뭐라고 하셨소이까? 혹시 내가 만남을 청하거든 전하라 한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듣기에 따라 칭찬으로도, 무례한 발언으로도 들릴 수 있는 팩셰르의 질문.
잠시 입가를 가린 채 미소를 짓던 멜리사는 곧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실험국장의 추측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전언을 들려주었다.
“어머 말씀하신 대로랍니다. 그이가 ‘팩셰르 님께서 보여 주신 관심에는 지금도 감사하는 바이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하여도 제 선택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는 답을 전해 주라더군요. 그럼 전부 다 이해하실 거라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쓴웃음과 함께 무심코 튀어나온 씁쓸한 본심.
폴리다고스 실험국장 입에서 덜컥 튀어나와 버린 비속어에 위축이 될 법도 하건만 멜리사는 전혀 움츠러드는 기미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아직도 나를 용서 못 하셨겠지. 그러니 부인께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오.’라는 말도 덧붙였어요. 국장님, 우리 남편을 용서하는 게 아직도 그리 힘드신가요?”
“참 신기하지. 사실 처음에 화를 낼 때만 해도 그 분노가 이 정도로 오래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 그런데 그 후로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용서가 안 되더군. 아무래도 티베리 그 녀석에 대한 내 기대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컸던 모양이야. 분노라는 건 원체 기대에 비례하는 법이니 말이오.”
화를 내는 건지 탄식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어려운 표정을 한 채 팩셰르는 멜리사를 자리에 청한 용건을 밝혔다.
“부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머지않아, 아마도 수년 안쪽으로 페이건 그 녀석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오. 안주하느냐,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느냐를 결정 짓는 아주 중대한 선택의 기로 말이오. 부디 그 녀석이 그때 현명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부인께서 많이 도와주시길 바랄 따름이지.”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 저를 찾으신 걸까요?”
“그렇소이다. 무릇 재능이란 그에 맞는 의무가 따르는 법이라오. 그러니 페이건 그 녀석이 그 의무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도록 부디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리는 바이외다.”
말을 마친 팩셰르는 멜리사를 향해 무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금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팩셰르 에우리디케의 허리가.
그것도 고작 한 사람만을 위해 굽혀지다니.
만약 교직원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깜짝 놀라다 못해 기절초풍을 했을 터.
“부족한 제 아들을 그리도 높이 평가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쩌죠? 실험국장님의 당부를 준수하겠다고 확언은 드리지 못할 것 같은데. 국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페이건 그 아이가 특정 부분에 한해서는 워낙에 고집, 아니 소신이 강해서요. 제가 국장님 말씀 그대로 당부를 한다 한들 그 아이가 제 말을 곧이곧대로 듣거나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멜리사는 놀라거나 허둥대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여전히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밝힐 뿐이었다.
“국장님께서 페이건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신다면 그 방향이 가리키는 곳에 정당한 결과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페이건은 고집이 세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합리적인 아이거든요. 교수님께서 합당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신다면 그 아이가 굳이 교수님의 뜻을 외면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게, 페이건의 엄마인 저의 의견입니다.”
“…부창부수라더니. 클라디우스 부인, 이렇게 보니 꼭 티베리 그 녀석을 닮으셨구려.”
“그 말씀,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후훗.”
“솔직히 말하자면, 부인께서 내 부탁을 대번에 들어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애초에 하지 않았다오. 나 같은 늙은이가 한 마디 청을 했다고 바로 내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기대하기에는 부인께서 품고 계시는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하니까.”
“어머나! 부끄러운 시절의 이야기를…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호호!”
우아한 미소를 짓는 멜리사의 얼굴에서는 20년 전 그녀가 가지고 있던 그 ‘찬란하고도 무시무시한 칭호’의 흔적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클라디우스 안주인의 찬란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전성기 무렵의 멜리사는 정체를 숨긴 채 활동했고 티베리와의 결혼 이후에는 공식적인 대외 활동을 완전히 접다시피 했던 터라 예사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를 기억하려야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팩셰르는 예사 사람이 아니었고 멜리사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부터 상당한 고위직을 역임하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에 깜짝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오. 그 명성이 자자한 삭풍의… 아, 이미 오래전에 잊으신 그 호칭을 다시 들려드리는 건 실례가 되려나?”
“어머! 아니에요. 물론 지금의 삶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지만 제 과거를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외려 그때 그 시절에 감사하고 있어요. 그때의 제가 없었다면 그이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 시절의 기억에 감사한다니… 듣기에 따라서는 섬뜩할 수도 있는 말씀을 참 쉽게도 하시는구려.”
“제가 누려 왔던 모든 삶의 은혜에는 항상 감사하고 있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다시 현역으로 복귀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전 지금의 삶과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하거든요.”
“아무튼, 부인께서 활동을 중단하시고 에스페타라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는 나조차도 많이 놀랐다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개중에는 저의 은퇴가 눈속임을 위한 연극일 뿐이라고 추측하는 이들 또한 상당수 있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그리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오. 그토록 대단한 위명을 가졌던 ‘삭풍’께서 그 따분한 섬 생활에 그토록 잘 적응하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호호.”
가타부타 더 이상의 번거로운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멜리사는 따사로운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그녀가 지난 20여 년간 가꿔 온 소중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결국 팩셰르는 허탈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종종 방문해 주시구려. 내가 페이건 그 녀석을 어떤 곳으로 이끌고 싶은지 직접 확인하신다면 부인께서도 결국에는 내 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테니.”
달칵.
입안에 맴도는 향긋한 허브티 향.
그야말로 품격이 넘치는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멜리사는 클라디우스의 대부인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럼 그럴까요? 초대를 해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