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7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72)화(17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72)
똑똑.
페이건이 동생들의 손을 잡고 상업지구 구경을 떠난 터라 줄곧 조용하기만 한 클라디우스 일가의 숙소.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창밖의 분수를 바라보던 멜리사는 숄을 걸친 후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 저… 혹시 페이건 클라디우스 군의… 어머님 되시는….”
“응, 맞아요. 내가 페이건의 엄마. 그런데 우리 예쁜 아가씨는 누구? 혹시 페이건의 손님일까?”
문을 열자 검은색 예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보였고 멜리사는 평소의 미소로 손님을 반겨 줬다.
“음… 그런데 어떡하지. 페이건은 지금 여기에 없는데. 아, 그럴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일단 안에서 기다려 보고 혹시 페이건이 늦어지면 내가 말을 전해 줄게요.”
“아, 아니에요. 페이건 군이 없다면 제가 그냥 나중에….”
“아니야, 귀한 손님을 이렇게 돌려보내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들어와 앉아요. 그런데 혹시 아가씨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요?”
“크리스틴, 크리스틴 코델리아나라고 합니다. 클라디우스 부인.”
크리스틴이 쭈뼛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순간.
멜리사는 덥석 팔을 뻗어 크리스틴의 하얀 손을 움켜잡았다.
“크리스틴? 세상에, 아가씨가 그 크리스틴 양이었어요? 준비한 선물 너무 잘 받았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찌나 좋아했는지 몰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클라디우스 부인 그럼 전 이만….”
“가긴 어딜 가! 그러지 말고 들어와서 나랑 얘기라도 좀 하고 가요. 세상에나, 페이건이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길래 얼마나 예쁜 사람일지 궁금했는데. 정말… 어휴!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를 정도네.”
“페, 페이건이 그런 말을 했다구요?”
“응, 크리스틴 양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더니 대뜸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던걸? 역시 우리 아들, 보는 눈이 있어. 걔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해서 그렇지 거짓말은 절대로 안 한다니까.”
페이건의 부재를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미끄러져 나가려던 크리스틴의 발걸음이 ‘미인’이라는 한마디에 덜컥 멈춰서 버리고 말았고.
“자, 얼른 들어와요. 어휴, 안 그래도 페이건 그 녀석이 엄마만 쏙 빼놓고 놀러 나가서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크리스틴 양이 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 아직 점심 안 먹었죠? 잘됐네, 온 김에 나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페이건 그 아이 이야기도 해 주고 그래요. 네?”
멜리사는 그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크리스틴을 한껏 잡아당겼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혹시 실례가 된다면….”
“아니, 아들의 친구가 놀러 왔는데 실례는 무슨 실례. 얼른 들어와요.”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이건도 없는데 괜한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바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페이건의 어머님 되시는 분의 권유(그리고 어쩌면 페이건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앞에 크리스틴의 결심은 격하게 흔들렸고.
“그,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부인.”
결국 크리스틴은 발그레한 얼굴을 한 채 멜리사의 초대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 * *
“어떻게, 밥은 입에 좀 맞나요?”
“아, 네! 어머님, 정말 맛있어요. 특히 이 소스 향이 너무 좋아서 두 그릇이고 세 그릇이고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다행이다. 사실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자신의 질문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크리스틴을 보며 멜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많은 선물을 받아 놓고 감사 인사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페이건에게 크리스틴 양을 불러 정식으로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 애가 ‘선배는 워낙에 바쁜 사람이니 괜히 초대를 하는 건 실례일 수도 있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 보니 감사 인사가 늦어져 버렸어요.”
어느새 비어 버린 접시를 채워 주며 멜리사는 크리스틴의 미려한 어깨선 위쪽으로 한 손을 올렸다.
“그런데 크리스틴 양이 이렇게 직접 방문해 주다니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아휴, 그나저나 식사가 너무 부실해서 어쩌지. 이런 귀한 손님이 올 줄 알았다면 진즉에 준비를 많이 해 뒀을 텐데.”
“어머! 아니에요, 어머님. 그런 말씀 마세요. 이렇게나 훌륭한 상을 준비해 주셨는데 부실하다니요. 정말, 정말 맛있게 또 감사히 먹고 있습니다.”
“크리스틴 양이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나야 다행이죠. 그나저나 어머님이라니, 참 좋네. 페이건 그 아이가 불러 주는 거랑은 느낌이 확 달라.”
크리스틴이 갑작스럽게 방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솜씨가 좋은 멜리사였기에 어렵지 않게 푸짐한 상을 차려 낼 수 있었고 덕분에 크리스틴은 풍족하고 행복한 식사 시간을 보냈다.
“어머님, 저도 치우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꼼짝 말고 거기 앉아 있어요.”
“그치만 어머님께서 정리를 하시는데….”
“괜찮다니까, 얼른 정리 끝내고 맛있는 차 타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알겠죠?”
귀빈관에 배치된 시종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대접부터 정리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끝마치는 멜리사의 모습을 보며 크리스틴은 클라디우스의 사람들이 여타의 귀족들과 다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솜씨 좋게 정리를 마무리한 멜리사는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든 채 크리스틴과 마주 앉았고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서는 꽃처럼 화기애애한 정담이 오갔다.
“어머! 정말? 우리 페이건이 거기서 그런 말을 했다구요?”
“네, 사실은 저도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답니다.”
대화가 너무나도 즐거웠던 탓일까?
어느새 크리스틴의 가슴속에는 차라리 페이건이 부재중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페이건의 얼굴을 보는 건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었지만 만약 이 자리에 그 아이가 있었다면 이토록 편안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을 터.
때로는 어머니 같고, 때로는 친언니 같은 멜리사의 미소 덕분에 크리스틴은 고향 섬으로 돌아간 듯한 푸근함에 잠긴 채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크리스틴 양은 약혼을 했다고 그랬죠? 그 상대는 유리안 알렉세예브 군이라고 그랬던가?”
“네, 맞습니다. 저와 같은 5학년이에요.”
“그럼 두 사람 다 올해로 스물한 살?”
“네, 어머님.”
멜리사의 입에서 약혼이라는 말이 나온 그 순간.
대화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화사했던 크리스틴의 얼굴에 처음으로 묘한 긴장감이 맺혔다.
“어마나! 스물한 살이면 한참 좋을 때네. 정말 축하해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정인을 만든다는 건 항상 행복한 일이죠.”
“…감사합니다.”
“어디 보자, 스물한 살이면… 내가 우리 그이랑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결심한 그 나이 때네. 후훗, 그래… 다시 생각해도 정말 좋은 시절이에요.”
하지만 그 기색은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사라져 버렸기에 멜리사는 크리스틴의 미간 사이에 맺힌 아쉬움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유리안 군도 다음 주에 있을 저녁 식사 초대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잖아. 아 참, 크리스틴 양도 알고 있죠? 다음 주 나와 우리 아이들이 섬으로 돌아가기 전전날 우리랑 같이 저녁 먹기로 한 거. 페이건이 크리스틴 선배는 바쁜 사람이니까, 하면서 이것까지 전달 안 하고 그런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어머님께서 보내 주신 초대장 감사히 받았습니다. 저, 유리안, 카밀라 이렇게 셋이 초대받았다고 들었어요.”
크리스틴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날이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오늘 방문을 한 이유도 초대장의 식사가 있기 전에 안면을 트기 위함이었다.
오늘 미리 식사의 주최자와 얼굴을 익혀 놓아야 고대하고 고대하는 ‘클라디우스 식구’들과의 저녁 식사를 100%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응, 다행이네. 나도 그날 기억하고 있으니까 잊지 말고 꼭 방문해 줘야 해요. 알겠지?”
“저, 어머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응? 뭔데?”
“혹시… 어머님께서 추후 다시 폴리다고스를 방문해 주신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어머님을 찾아봬도 괜찮을까요?”
페이건을 연모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크지만, 결코 그에게 편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없는 크리스틴으로서는 큰맘 먹고 던진 질문.
누군가에게는 답이 뻔히 보이는 바보 같은 물음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크리스틴으로서는 정말이지 간절한 질문이었기에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멜리사의 답을 기다렸고.
와락.
“…어머님!”
멜리사는 대답보다 빠른 행동으로 물음에 답해 주었다.
크리스틴의 눈동자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눈썰미 좋게 감지해 낸 멜리사가 팔을 뻗어 크리스틴을 끌어안은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대범함에 깜짝 놀란 듯한 크리스틴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괜찮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머님!”
“오늘 이렇게 약속했으니까 앞으로도 나랑 만날 기회가 있거든 종종 만나서 놀아 주기예요. 알겠지? 약속 안 지키면 나쁜 사람.”
약속.
크리스틴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그 한마디.
멜리사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더없이 분명하게 느끼며 크리스틴은 진심을 담아 응했다.
“네, 약속 꼭 지킬게요. 감사합니다, 클라디우스 부… 아니 어머님.”
* * *
터벅터벅.
유물국 건물을 지나면 나오는 어둠이 내린 숲길을 따라 걷기를 잠시간.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니 야광 이끼가 발하는 형형색색 불빛에 둘러싸인 거목이 보였다.
일전에 방문해 본 적이 있는 유물국장 아리안느 플레뵐라의 개인 서재 겸 박물관.
낮에 왔을 때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였는데 별빛과 이끼가 내뿜는 빛에 휘감긴 야경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몽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하이엘프 노파가 갑자기 왜 너를 부르는 걸까?
‘글쎄요. 어쩌면 맡겨 놓은 일의 진행이 너무 더디다며 책망을 하기 위해 호출한 걸지도 모르죠.’
―으음…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만 봐서는 그렇게 성격이 급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동생들과 상업지구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니 유물국장의 직인이 찍힌 서신이 도착해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시간이 괜찮거든 한번 방문해 주셨으면 해요.
난 방학이 시작된 이래로 쭉 개인 서재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곳으로 와 주면 된답니다.
귀를 기울이면 ‘호호’하는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유려한 서신.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방문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병아리들이 같이 가겠다며 매달릴 것이 뻔했기에 저녁 식사 후 동생들을 재우고 나서야 유물국장의 거처로 당도했다.
똑똑.
어둠이 워낙 꼼꼼하게 깔린 탓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평소보다 짙은 반향을 일으키며 퍼져 나갔고.
“국장님, 페이건 클라디우스입니다.”
“아! 어서 들어와요.”
잠시 후 밤의 어둠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어서 와요. 너무 갑자기, 그것도 늦은 시간에 청한 건 아닌가 걱정이 컸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신속하게 초대에 응해 주다니 고마워요.”
“아닙니다. 사실 저도 이맘때가 더 편합니다. 요즘 들어 강아지들과 부대끼고 있는 터라 녀석들이 잠드는 지금 시간대가 아니면 몸을 빼기가 힘들거든요.”
“강아지? 아! …페이건 군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표현이네요. 그래서 가족분들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네, 여러분들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재미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참 다행인 일이네요. 가족이라는 건 언제나 좋은 법이니까요.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은 인간들의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호호! 자, 이쪽으로 앉아요.”
달각.
“국장님, 다기의 위치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준비를….”
“어머! 아니에요. 손님을 청했으면 당연히 주인이 준비를 해야죠. 그리고 사실 난 손님 대접하는 걸 제법 좋아한답니다. 평소에는 나를 도와주는 분들이 너무 부지런해서 내가 직접 대접할 기회가 없으니 이럴 때라도 내 욕심을 채워야죠.”
유물국장은 솔잎 향처럼 포근한 웃음을 흩뿌려 가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고.
잠시 후 내 앞에는 소박하지만 풍성한 다과상이 차려졌다.
“저를 청하면서 걱정이 크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사실 저 역시 오는 내내 고민이 많았습니다. 국장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셨는데 그 기대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실망시켜 드리고 있는 점,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음? 성과라니 그게 무슨… 아! 설마… 아니에요. 난 페이건 군이 보여 주는 능력에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실망이라니.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페이건 군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돼요.”
혹시나 싶어 선수를 쳐 봤건만 유물국장은 손까지 격렬하게 내저어 가며 ‘씨앗의 성장 속도 건’으로 나를 탓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거듭 밝혔다.
“그리고 그 정도면 정말 빨리 자라고 있는 건데 왜 스스로를 탓하고 그래요. 그 아이가 지금 추세로만 자라 준다면 향후 10년 안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일 것 같은데. 내가 지금껏 기다려 온 세월을 생각하면 10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아! 10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나? 미안해요. 호호!”
저 담백한 표정을 보건대 책망하기 위해 부른 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노파가 나를 찾은 진짜 이유는 뭘까?
“그리고 페이건 군이 그런 말을 해 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진단 말이에요. 국장이라는 사람이 학생에게 오랜 소망을 의탁하고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여기서 짐 하나를 더 맡기려 들다니. 말하고 나니 나도 참 뻔뻔한 엘프네요.”
“혹,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하시면 됩니다. 저 스스로에게 지나친 부담이 될 때는 제가 사양을 할 터이니 국장님께서는 거기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음… 그럼 페이건 군이 그렇게 말해 주는 걸 믿고 이야기를 꺼내 볼까요? 페이건 군, 사실은 말이지요. 그게….”
유물국장은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나를 호출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잔에 가득 차 있던 차가 절반쯤 비워졌을 무렵 그녀의 설명 또한 막을 내렸다.
“음,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폴리다고스와 접경지역에 위치한 아소토 왕국 내부에서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고 그 상황 파악을 위해 카밀라가 출장을 갈 예정이라는 거군요. 그런데 아무래도 카밀라 혼자 보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제가 동반했으면 한다는 게 국장님의 뜻이구요.”
“아주 간결하게 정리하면 그렇죠.”
그다지 복잡할 건 없는 의뢰 내용.
이미 이것과 비슷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딱히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진행되는 배경은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공의 눈과 폴리다고스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이번 임무를 주관하는 게 폴리다고스인지 아니면 천공의 눈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표 선수로 카밀라가 파견되고 그 여정을 폴리다고스가 적극 지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막강한 기관은 긴밀한 유대감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을 터.
“아소토 왕국에서 관측된 위험 증상이라는 게 어떤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카밀라는 그곳에 가서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천공의 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이다 보니 지금 당장은….”
“역시, 그럴 것 같기는 했습니다. 뭐, 괜찮아요. 어차피 자세한 행동이며 결정은 카밀라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죠.”
유물국장은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 줬고 난 한쪽 눈을 감은 채 아소토 왕국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렸다.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공작인데….’
신흥 강국 아소토의 실권 대부분을 장악한 붉은 머리카락의 외무대신.
그 미남 공작이 지배하는 땅에 발을 들이는 건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그 전에 꼭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에 나는 유물국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조금 뒤로 미뤘다.
“국장님, 제가 이런 조언을 드리는 게 건방져 보일 수 있겠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카밀라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실력으로 보나, 카밀라와의 친밀도로 보나 저보다는 유리안 선배 쪽이 훨씬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유리안은 안 돼요. 그 아이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됐잖아요.”
유물국장은 유리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단호히 고개를 저었고 그 반응을 통해 난 이번 임무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은밀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페이건, 이 엘프 할머니 왜 그렇게 단호한 표정으로 유리안은 안 된다고 하는 거야. 혹시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은 아소토 왕국에 출입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혹시라도 일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겠지. 만약 이번 일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지고 그로 인해 아소토 왕국과의 갈등이 생긴다 해도 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미성년이라면 어떻게든 뭉개고 갈 여지가 있어.’
―그럼 당사자가 성년이라면?
‘그때는 일이 엄청 복잡해지는 거지. 경우에 따라서는 아소토 왕국이 내정 간섭이라며 강하게 반발할 수도 있고, 일이 그리되면 폴리다고스의 위세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적잖은 상처를 입을 가능성도 있어.’
―어? 뭐야! 그럼 카밀라가 맡은 임무라는 게 자칫하면 심각한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는 아주 예민한 일이라는 거잖아?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 노파께서 굳이 나를 불러다 카밀라 옆에 붙여 놔야겠다는 마음을 먹으신 걸 테고. 그건 그렇고 카밀라 녀석 뭘 그렇게 바리바리 사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모처럼 날카로운 추리력을 발휘한 북슬이는 눈을 반짝이며 유물국장을 주시했고.
나는 나대로 이 엘프 노파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설령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해도 유리안은 힘들었을 거예요. 그 아이는…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 유명세를 얻은 덕분에 이런 임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됐거든요.”
“아,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후우… 사실은 말이죠 ‘난 이거 줄 테니 너도 내 부탁을 들어줘.’ 같은 말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현실에서 이런 어법이 사용되는 경우, 제안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강요로 흐르는 게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네요. 아무런 대가도 약속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건 너무 뻔뻔한 일이니….”
여기까지는 일의 개요를 듣자마자 예상했던 전개였기에 별다른 동요 없이 유물국장의 발언을 경청할 수 있었다.
“페이건 군, 씨앗을 꽃피우는 데 성공하면 내가 이곳에 있는 유물 중 하나를 선물로 주기로 했잖아요?”
“네, 그렇게 말씀하신 바 있으시죠.”
“그것과 비슷한 내용의 제안을 이번에도 하고 싶은데, 어때요? 들어줄 마음이 있나요?”
하지만 뒤이어 유물국장의 깜짝 제안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 버렸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던 건데.’
세상에나, 올해가 가기 전에 장갑을 손에 넣으려면 꼼짝없이 북극단에 다녀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풀린다고?
혹시나 내 속을 떠보는가 싶어 유물국장의 눈동자를 살폈지만, 고결한 하이엘프 노파는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그 투명한 눈동자 어느 곳에서도 거짓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