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75)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75)화(175/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75)
“그러니까 페이건이 열한 번째 생일을 막 지났을 무렵이에요. 당시 페이건은 치료술사가 되기 위한 고등 기술을 막 배워 가고 있었거든요.”
“어, 열한 번째 생일을 갓 보낸 아이가 고등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구요?”
“페이건은… 뭐랄까, 좀 유별날 정도로 진도가 빠른 편이었답니다. 그래서 보통은 성인의 문턱에 들어설 무렵에 받는 교육을 그 나이 때에 시작했어요.”
“와… 어쩐지… 똑똑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군요.”
무심결에 페이건을 칭찬하고 만 유리안.
그 부지불식간의 고백이 기뻤는지 멜리사는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후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순조롭게 교육을 받는 와중에 조금 막히는 부분이 생겼나 봐요. 생각해 보면 막히는 게 당연한 일인데 페이건은 그 상황이 조금 낯설었던 것 같아요. 지금껏 배움의 과정을 밟아 오며 단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었는데 덜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나타나 버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요? 페이건을 지도하던 분들은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별다른 말씀들은 안 하셨어요. 말했다시피 애초에 막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보니 빨리 이 부분을 깨쳐야 한다고 페이건을 나무라거나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외려 이쯤에서 조금 쉬어 가는 편이 더 좋지 않겠냐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었지요. 그이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그 의견을 받아들여 페이건에게 6개월 정도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구요.”
“그랬군요. 하긴 저 같아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더군다나 치료술사의 고등 기술은 체득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고작 열한 살을 막 지난 아이가 그 높은 문턱에 막혀 답답해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정말 안쓰러웠을 거 같아요.”
열두 살의 페이건을 기억하고 있는 크리스틴으로서는 열한 살의 모습이 더욱더 아련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구원해 주기 위해 그토록 힘든 배움의 길(물론 페이건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글쎄,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라는 반응을 보이겠지만)을 걸어와야만 했다니.
방심했다가는 눈가가 발개질 것만 같아 크리스틴은 입술을 꼭 깨물어야만 했다.
“물론 안쓰러웠죠. 그래서 우리는 페이건이 한 템포 정도 쉬어 가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워낙에 배움이 빠른 아이이니만큼 여기서 2, 3년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페이건의 생각은 우리랑 달랐나 봐요. 막힘이 사흘째 이어지던 날, 결국 페이건은 개인 서재에 침구류를 가져다 놓고 본격적인 농성에 들어갔어요.”
“농성이라니, 누구를 상대로 벌이는 농성인가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스스로를 상대로 한 농성이지. 어느새 주방을 담당하는 사용인들에게 부탁까지 했더라구요. 자신이 됐다고 할 때까지는 모든 식사를 서재에 준비해 달라고 말이에요. 페이건이라면 깜빡 죽는 유모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제발 이러지 말라고 울며불며 사정을 했죠. 하지만 평소에는 그토록 유모들의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거기에서만큼은 고집을 부리더군요. 결국, 유모들은 눈물범벅이 된 채 물러났고 페이건의 서재 칩거가 시작됐어요.”
“그럼… 정말로 서재에서 먹고 자고를 다 하며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대부분의 시간은 서재에서 보내면서도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 세 번 시간을 정해 산책을 했어요. 그리고 수면 또한 시간을 정해 규칙적으로 취했구요. 칩거는 하지만 최선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이런 거겠죠?”
“…결정적인 순간에 냉정한 건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네요. 페이건 클라디우스, 정말 지독하다.”
잔뜩 약이 오른 와중에도 최선의 성과를 얻기 위한 준비를 기울이는 걸 멈추지 않는다니.
카밀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하니 벌리며 감탄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몸을 상하게까지 하면서 무리를 한다면 어떻게든 침실에 옮겨 놓았을 텐데. 제 딴에는 몸 관리를 하고 있으니 억지로 데려다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린아이가 저러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고. 그렇게 페이건의 농성은 며칠을 더 이어졌고 칩거 나흘째 되는 이른 아침, 난 조용히 그 아이의 방을 찾아갔어요.”
“드디어 어머님께서 꼬마 페이건을 억지로라도 침대에 옮겨 놓을 결심을 하신 거군요?”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새벽에 서재를 향하면서 내심 생각했어요. 지금쯤 많이 지치고 힘들 텐데도 이 아이가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일 거라고 말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농성을 풀고 싶은데 워낙에 이목을 끌었다 보니 자신의 손으로는 철회를 못 하겠고. 결국, 페이건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고 생각한 거죠.”
“아, 그럼 어머님께서는 페이건을 달래 주러 가신 거군요. 페이건이 못 이기는 척하고 농성을 풀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답이에요, 유리안 공자. 난 일부러 사람의 시선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서재로 갔고 그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려고 했어요. 그럼 페이건이 잔뜩 받친 악을 풀고 내 품에서 엉엉 울 거라고 생각했죠. 원래 아이들은 다 그런 법이니까요. 그렇게 난 조용한 아침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했답니다.”
꿀꺽.
별다를 것도 없는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페이건은 날 보자마자 어머니께서 이 시간에 이곳에는 웬일이냐고 물었고, 난 대답 대신 그 아이를 꼭 끌어안은 후 말했어요. ‘이제 그만해도 괜찮단다. 답답하고 화가 난 네 마음은 알지만, 천천히 가도 괜찮으니 지금은 쉬렴.’ 그리고 내심 엄마 품 안에서 흐물흐물해진 페이건이 눈물을 쏟아낼 줄 알았답니다. 아니면 최소한 화라도 낼 거라고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유리안 공자, 내 품에 안긴 페이건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뭔지 알아요?”
“모, 모르겠어요. 그래서 페이건이 뭐라고 그랬나요?”
“페이건은 ‘어머니, 저는 답답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조용한 공간에서 학업에 몰두하고 싶어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니 어머니께서도 조금만 더 저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답니다. 난 아직도 그때 페이건의 목소리며 표정을 똑똑히 기억해요.”
“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막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하고 있던가요?”
“아뇨, 태풍이 지나고 난 뒤의 바다처럼 평온하고 맑은 표정이었어요. 그리고 일말의 분노도, 답답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 표정을 보고 ‘아, 내가 내 아들을 이리도 몰랐구나.’라는 걸 깨달았답니다. 페이건의 마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굳건했던 거죠.”
평온하고 맑다.
지금의 페이건과는 제법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지만 벽 앞에 선 열한 살짜리 꼬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기에 유리안의 입은 다시금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페이건은 말 그대로 공부에 조금 더 열중하고 싶어 조용한 환경을 만들었을 뿐이었던 거네요? 화가 나거나 답답해한 적도 아예 없고.”
“그런 거죠. 그런데 주변에서는 연신 큰일이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 대니 오히려 페이건은 이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농성 따위로 마모되기에는 그 아이의 마음이 말도 안 되게 단단하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우리가 잘못이지.”
“그래서… 어머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 아이 표정이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한 번 더 꼭 안아 주고 서재를 빠져나왔죠.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의 시간이 더 지난 후 페이건은 마침내 막혔던 부분을 이해하는 데 성공했고, 그제야 농성을 해제했답니다.”
“세상에나… 무슨 꼬마가 그렇죠. 심장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때나 지금이나 무시무시한 건 매한가지였네요.”
목소리를 낸 건 유리안 뿐이었지만 나머지 두 명의 표정 또한 유리안의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꼭 내가 아들 자랑을 하지 못해 안달이 난 팔불출 엄마처럼 보이겠네요. 호호, 하지만 말이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랍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우리 큰아이의 마음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보다 더 단단한 것 같아요.”
“어머님, ‘단단’이 아니라 ‘견고하다’로 수정해 주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단단함이라는 단어는 페이건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우와, 코흘리개 꼬마일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일까? 상상도 안 되네 진짜.”
“그럼 그렇게 할까요? 그래요, 우리 큰아이의 마음은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견고해요. 그럼에도 이 세상에 깨지지 않는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아무리 단단한 마음이라고 해도 약간의 마모는 있기 마련이고 그 마모가 거듭되다 보면 결국은 깨어지기 마련이거든요.”
멜리사는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유리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걱정되는 게 이 지점이에요. 차라리 평소에 깨졌다 붙였다 반복하며 상처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깨지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물론 다소간의 아픔은 있겠지만 깨진 마음을 붙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결국 상처를 극복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도 마음이 깨져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유리안에게 머물렀던 시선은 어느새 크리스틴에게 향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이 생기면 결국 페이건의 마음도 한 번은 부서지고 말 거예요. 그때 내가 곁에 있다면 품에 안아 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당분간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기에, 난 걱정이 아주 많았답니다.”
멜리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카밀라의 얼굴이었고 그제야 3인은 페이건의 모친께서 이런 자리를 굳이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걱정도 이제는 하지 않으려 해요. 페이건 곁에 이토록 믿음직한 친구들이 있는데 내가 걱정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포근한 미소를 여전히 머금은 채 멜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3인의 표정 또한 감격의 빛으로 물들었다.
페이건이 지난 6개월간(누구에게는 5년간) 만들었던 소중한 인연의 주인공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춘 후 멜리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동안 우리 아이 곁에 머물러 줘서 고마워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답니다.”
* * *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물론 넌 어딜 가더라도 항상 잘 먹는 애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해 주는 말 새겨들으렴.”
“네, 뭐… 그렇네요. 제가 밥 하나는 참 잘 먹죠.”
“그리고 너무 열심히 살려고 안간힘 쓰지 말고 쉬엄쉬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베짱이가 보일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 새기도록 할 테니 어머니도 너무 걱정 마시고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그리고… 다시 만날 때까지 항상 행복하렴.”
결국 어머니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으셨다.
3주간의 폴리다고스 체류가 마무리되고 마침내 다가온 작별의 시간.
볼에 닿은 어머니의 뺨은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빨리 첫눈이 와야지 우리 큰아들이 엄마 품으로 다시 와 줄 텐데. 엄마는 섬으로 돌아가서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있으렴.”
“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첫눈이 오기 전에 겨울 방학이 시작될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건 겨울이 가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은 워낙에 씩씩하고 똑똑하니까 겨울까지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드린 뒤 마사 할멈, 에페누 할아범과 시선을 맞췄다.
물론 항구까지 돌아가는 길에도 폴리다고스의 인력이 동행할 예정이지만 어쨌거나 나에게 있어 가장 믿음직스러운 경호원은 이 두 명이었으니까.
“할멈, 할아범. 어머니와 동생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 저희들이 마님과 아가씨, 막내 도련님의 몸에 털끝만 한 상처 하나 생기는 일 없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솔직히 말하면 저는 외려 도련님이 걱정입니다. 파편… 에 관한 일로 꽤나 힘든 여정을 겪으실 것 같은데. 물론 도련님이라면 그 어떤 난관이라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시겠지만요. 허허, 도련님! 이 에페누, 몸은 비록 먼 곳에 있지만 항시 도련님의 건승을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그래요. 할아범도 알다시피 나는 뭘 하든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할아범과 할멈 건강에 신경 써요. 그리고 신경 쓰시는 김에 에스페타라의 안녕도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 도련님, 섬을 떠나 계시더니 잔걱정이 느셨군요. 에스페타라의 안녕이라니, 그건 저와 에페누를 비롯한 친구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일인데 새삼 잘 부탁드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두 분, 우리 도련님을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드려요. 두 분이 도련님 곁에 계시니까 저희가 안심하고 섬에 머물 수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마사 할멈은 목소리를 낮춘 채 내 어깨와 머리 위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응, 페이건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아이니까 아무런 걱정할 것 없어. 그리고 우리 또한 지금까지처럼 최선을 다할 거고.
―맞아, 맞아. 나랑 라무테가 이 녀석을 지켜 주는데 애초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잖아! 하하하!
나는 영수들 간의 작별 인사를 마친 할멈, 할아범을 한 차례씩 끌어안았고.
“도련님, 항상 건강하시길.”
할멈과 할아범이 내 양쪽 손등에 각각 입을 맞추는 걸로 노(老)영수들과의 작별 인사도 마무리되었다.
“그나저나 우리 라나랑 에밀, 아까부터 울지도 않고 이제 다 컸네. 우리 아가들이 이렇게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해 주니까 덕분에 오빠도 기쁜 마음으로 너희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동생들의 여전히 보들보들하기만 한 뺨을 만지고 있으려니 지난 3주간 이 병아리들과 보낸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숲으로 떠난 피크닉, 인공 수영장에서 즐긴 물장구, 상업지구에서 맛본 간식들.
그리고 첨탑 위에서 함께 본 초여름 밤의 불꽃놀이까지.
지난 3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들을 향해 쏟아부어 준 애정이 성장 촉진제 역할을 하기라도 한 걸까?
라나와 에밀은 6개월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무척이나 의젓해진 모습을 보여 줬다.
“오라버니도 참, 그때와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죠. 에스페타라에서 오라버니를 떠나보낼 때는 많이 불안했어요. 혹시라도 오라버님께서 폴리다고스에 가셔서 적응을 못 하거나 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머무는 동안 오라버니께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똑똑히 알게 되었답니다.”
사랑?
라나야, 아무래도 그건 네가 좀 잘못 본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라나의 발언.
하지만 귀여운 여동생께서는 자신의 눈이 틀릴 리 없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오라버니께서는 역시 소녀의, 아니 에스페타라 전체의 자랑이세요. 오라버니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두 눈 가득 확인했는데 제가 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오라버니, 부디 앞으로도 지금처럼 멋진 모습으로 계시다가 겨울이 오거든 소녀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형님의 멋진 모습 잘 봤습니다. 우리 겨울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스커트 양 끝을 살짝 들어 올리는 라나와 한쪽 팔을 비스듬히 내린 채 고개를 숙이는 에밀.
“하하! 그래, 우리 귀여운 병아리들이 얼마나 더 멋지게 자랐을지 기대하며 오빠도 겨울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을게.”
둘이서 연습이라도 한 걸까?
동생들이 준비한 깜찍하고도 멋진 작별 인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 웃음을 끝으로 작별 의식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클라디우스 부인,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저희가 항구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공자님께서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하!”
히이이이잉.
경호 책임자의 호탕한 목소리와 함께 마차는 출발했고 창문 밖으로 내밀린 동생들의 고사리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봤다.
‘그럼 어머니랑 동생들도 가야 할 곳으로 떠나셨으니 우리도 갈 길을 가 볼까?’
―우와! 멜리사가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고 한 게 방금인데 그새 또 엄마 말 안 듣는 것 좀 봐. 내가 나중에 멜리사 만나면 다 일러 줄 거야.
‘어머니의 당부는 존중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도 꼭 가지고 싶은 게 있는데 마냥 놀 수는 없잖아. 원하는 걸 가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내 방으로 복귀하자마자 나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천공의 눈 입장에서는 진즉 출발하고 싶었을 텐데 내 사정을 봐주느라 출발이 늦어진 걸 뻔히 알고도 여기서 더 늑장을 부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똑똑.
“페이건 클라디우스 공자님, 준비 다 끝나셨나요?”
“바로 나갈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약속된 시간이 되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가방을 맨 후 문밖으로 나가자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카밀라가 보였다.
“방학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학기 중에 네가 여기에 왔다면 괜스레 흥분한 남학생들 때문에 시끌시끌 했을 텐데. 이래서 사람이 없는 게 좋다니까.”
“웃겨, 자기는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남의 방앞까지 막 들어온 주제에 이제 와서 소심한 척은.”
통통.
카밀라는 아무런 예고 동작도 없이 손을 뻗어 내 왼쪽 가슴을 두드린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좋아. 오늘도 딴딴하네.”
“…무슨 짓이야. 과년한 아가씨가 어딜 감히 외간 남자 몸에 손을.”
“어허! 다 그런 게 있어. 이 누나가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페이건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리고 이거 받아.”
옆 가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온 카밀라의 손에는 감색 로브가 들려 있었다.
“이거 입어. 방한, 방풍, 방화 효과가 있는 데다 변이 기능까지 추가된 여행 아이템이야. 이것만 있으면 웬만한 복장은 위장할 수 있을 거야. 아 참, 너 키가 어떻게 돼? 대충 내 눈대중으로 주문했는데 맞으려나?”
“타샤드 제국 공식 척도법 기준으로 185.4.”
“뭐야? 그 수상하게 정확한 수치는?”
“내가 재 보거나 한 건 아닌데, 나름 믿을 만한 사람이 말한 거니까 오차는 없을 거야.”
“뭐, 이 정도면 잘 어울리니까 됐어. 그럼 출발.”
내가 입은 것과 똑같은 로브를 옆구리에 낀 채 카밀라는 오염된 숲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고 난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야,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나 조금 전에 네 눈동자가 욕망의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걸 분명히 봤어. 이거, 이거… 그 유물국장이라는 하이엘프한테서 뜯어낼 생각으로 가득하네.
괜스레 신이 나서 쫑알거리는 북슬이를 외면한 채 앞서 걷고 있는 카밀라에 신경을 집중했다.
‘어?’
기분 탓일까?
유독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는 카밀라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감싸고 있는 후드가 꼭 재회해야만 하는 장갑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