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84)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84)화(184/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84)
타다다닥.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낙엽은 새카맣게 그슬려 있었고 목구멍 너머로 파고드는 공기에는 매캐한 그을음의 맛이 느껴졌다.
“이리도 갑작스러운 화재라니….”
“각하, 불길이 번지는 속도를 보시옵소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길이라고 하기에는 그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옵니다.”
“자연스러운 불길이 아니라니? 그럼 누가 그 괴식물들의 군락지를 태워 버리기 위해 일부러 불을 붙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대공 일행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의견을 한데 모았지만 뚜렷한 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숲에 들어온 이래로 우리가 마주한 외부인이라고 해 봐야 그 암살자가 전부 아니었던가? 그럼 설마 그놈이 군락지에 불을?’
숲에 들어오기 전 외무부의 병사들이 철통같은 통제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한 바 있었다.
그 통제선이 허물어진 게 아닌 이상 민간인들이 숲에 들어왔을 리 만무하니 결국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 암살자 놈은 자신의 손으로 괴식물의 군락지에 불을 놓았단 말인가?
‘놈은 괴식물 무리와 같은 편이고 우리가 그 괴물들에게 접근하는 걸 막기 위해 습격을 해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늘… 그게 아니었다고?’
뚜렷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월베니 일행은 내심 자신들을 습격한 자객이 괴식물을 배양해 낸 무리들과 같은 편일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새벽 갑자기 피어오른 불로 인해 그들의 생각은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월베니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동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우리도 이동하도록 하세. 지금 상황에서 화재 현장으로 접근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일이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장에 가 보는 수밖에.”
“알겠사옵니다, 전원 이동한다. 경계 대형을 취한 상태로 이동할 터이니 약속된 장소에 위치하도록!”
* * *
푸욱.
아무렇게나 주워 든 단검이 놈의 심장을 가르는 순간, 창백한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네가 마지막인 것 같은데 정보를 대가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는 거겠지?”
“쿨룩!”
“오는 길에 마주한 놈들을 족치니까 놈들이 루드비히 안피노라는 이름을 댔거든. 그런데 그놈들은 워낙 잔챙이들이라 자신들의 주인이 공작이라는 것까지만 알고 그가 자신들을 키워 낸 이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더라고.”
푸그극.
놈의 심장에 꽂아 넣은 단검을 회전시키자 심장과 연결된 혈관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너는 나름 계급이 있어 보여서 어느 정도 기대를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입을 꾹 다문 채 뒈져 버리는 걸 선택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야.”
“커거억….”
“네가 이렇게 죽어 버리면 결국 내가 알아낸 사실이라고는 너희들의 배후에 루드비히 안피노가 있다는 게 전부잖아. 안피노 공작이 무슨 목적으로 저 쓰레기들을 양성했으며 그놈들을 이곳에 쏟아부은 구체적인 이유가 뭔지 궁금했는데 여러모로 아쉽네.”
심장이 갈려 나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암살자들의 지휘관은 입을 앙다문 채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차피 나 역시 이놈이 입을 열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기에 지휘관을 뻥 하니 걷어찼고 놈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시체 더미 속으로 파묻혔다.
“커… 커헉….”
벌레처럼 바닥을 나뒹구는 와중에도 놈은 너덜거리는 한쪽 팔을 품 안으로 쑤셔 넣는 걸 잊지 않았다.
“안 되지.”
하지만 놈의 발버둥보다는 내 단검이 조금 더 빨랐고 품속을 파고들던 녀석의 손목은 그대로 잘려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런,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수정구를 움켜쥘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수정구에 손만 댈 수 있었다면 루드비히 공작 각하께 아주 중요한 사실을 전해 올릴 수 있었을 테고 말이야.”
놈의 목울대를 지르밟은 채 주위로 시선을 돌리자 피 칠갑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암살자들의 시체가 보였다.
내가 지른 불을 목격한 암살자 놈들은 다급한 표정으로 이곳에 몰려들었고(아마 지금 당장 화재의 발생지로 가 괴식물을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을 것이다) 도착한 순서대로 송장이 되었다.
차라리 이놈들이 암살자가 아닌 다른 직군이었다면 압도적인 머릿수를 이용해 어느 정도의 발악은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황급히 달려온 암살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놈들의 완벽한 상위호환이라 할 수 있는 나였고 그 절대적인 격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놈들은 오래지 않아 핏덩이로 화해 버리고 만 것이다.
“공작 각하, 공작 각하! 큰일이옵니다! 완벽하게 잘못 계산했습니다. 그간 우리를 방해했던 건 월베니 대공 일행이 아닌 제3의 인물이었사옵니다. 우리가 발견 못 한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말이옵니다!”
“끄륵….”
“이렇게 보고를 올린 후에 죽을 수 있으면 조금은 덜 원통할 걸 어쩌나? 이대로 죽어 버리면 루드비히 공작 각하께서는 숲에 숨어 있던 나라는 존재를 꿈에도 모르실 텐데.”
“…!”
내 조롱이 어지간히도 분했던 걸까?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탁하고 암울한 눈동자가 불길한 광채를 발하며 번득였다.
“네가 그렇게 꼬나보면 어쩔 건데?”
“아악!”
하지만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안구를 밟아 버렸고 녀석의 주둥이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짓을 오래 하다 보면 척하고 보이는 게 있는 법이거든. 그런데 네놈의 눈동자를 본 순간 ‘아, 이놈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정말 많이 죽여 본 놈이구나.’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이런 꼴이 되었다 해도 딱히 억울할 건 없는 게 맞잖아, 그치?”
꽤나 오랜만에 해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지르밟은 채 조롱을 쏟아 내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은 다시 들어올까 말까 조금 망설였는데.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이렇게 나뒹구는 걸 보고 있자니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난 놈의 목울대를 짓밟은 발에 조금 더 힘을 줬고.
드드득.
“커커컥!”
놈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최고조를 향해 치닫는 바로 그때 단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투욱.
아주 손쉽게 잘려 버린 지휘관의 목.
나는 목이 잘리고도 두 눈을 부릅뜬 놈의 머리통을 주워 든 후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따로 챙겨뒀다.
이 머리카락을 가져가 라무테 님과 북슬이에게 냄새를 맡게 하면 꽤나 재미있는 반응이 나올 것만 같다는 예감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유상(有償)으로 사람의 생명을 취하던 놈들이니만큼 무상(無償)으로 뒈져 버린다 해도 억울할 건 없겠지.’
주위를 둘러보자 괴식물을 양분 삼아 장대하게 타오르고 있는 불길이 보였고 난 암살자들의 시체를 대충 긁어모은 후 불의 먹이로 던져 줬다.
피잉.
지휘관이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던 수정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표면 위로 마나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지휘관 놈이 마지막까지 과묵한 충신 놀이를 하는 바람에 결국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 내지 못했어. 이 수정구를 작동시키면 아마도 안피노 공작과 연결되겠지.’
암살자 놈들의 배후에 안피노 공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에게는 별 볼 일 없는 물건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수정구.
‘…역시 그렇게 쓰는 편이 가장 좋겠지? 의심의 씨앗이라는 건 수가 많을수록 효과가 증폭되는 법이니 말이야.’
수정구에 남은 내 흔적을 깔끔하게 지워 낸 후 언제라도 흘릴 수 있게 소매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어느새 잿더미가 되어 버린 쓰레기들의 시신을 뒤로 한 채 불길 건너편을 향해 은밀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피이잉.
챙강.
“습격이다! 적의 습격이 있으니 전 인원은 자리에 멈춰 주위를 경계하도록!”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표창을 쳐내자마자 월베니는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고 뒤를 따르던 수행 기사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주변을 살폈다.
화르르륵.
“좌측면!”
불행 중 다행이랄까?
화재 현장 인근까지 접근한 터라 주변은 대낮처럼 환했고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이 토해 내는 빛 덕분에 월베니 일행은 어렵지 않게 암살자의 존재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피잉.
그 모습이 확인되자마자 베티나가 반사적으로 시위를 당겼으나 암살자는 여유 있는 동작으로 화살을 피해 버렸고.
부웅.
각각 상반신과 하반신을 노리고 휘두른 토드와 이삭의 검도 그대로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사제님께 접근한다! 막아!”
암살자는 지금까지와 달리 무척이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줬고 그 사실에 깜짝 놀란 길핀이 경비 대형을 갖출 것을 지시했으나 이번에도 파고드는 암살자의 걸음이 조금 더 빨랐다.
카앙.
“헛차!”
흑광을 내뿜는 암살자의 검과 월베니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그래, 오늘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 놀아 볼 생각이 들기라도 한 건가! 응? 암살자 나으리!”
전투의 흥분으로 몸이 달아오른 월베니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한껏 높인 그 순간.
카아앙.
“양지바른 풀숲에서 나고 자란 조개껍질 훈제 스테이크.”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던 암살자의 입에서 의미 불명의 말이 냉큼 튀어나와 버렸다.
“뭐?”
상상도 못 했던 전개가 펼쳐진 바람에 월베니는 검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양지바른 풀숲에서 자란 조개껍질 훈제 스테이크라니?
도무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깜짝 놀란 월베니는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하아아!”
하지만 자신에게서 암살자를 떼어 놓기 위해 달려드는 기사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기운들만이 가득할 뿐.
월베니 본인이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당황스러움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이놈이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쓰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콰앙.
길핀의 검은 바닥을 강타하는 데 그쳤지만, 그 일격이 암살자의 균형을 위태롭게 만든 덕분에 월베니는 놈을 밀어낼 수 있었다.
다시금 훌쩍 벌어진 거리.
하지만 월베니 주위를 둘러싼 기사들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검을 잡은 손에 최대한의 힘을 줬다.
암살자가 평소와 달리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만큼 다시 한 번 습격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타다닷.
하지만 암살자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라도 하듯이 그대로 몸을 내뺐고.
톡.
데구르르.
암살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가 실수로 빠뜨리고 간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흘리고 간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수정구가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저건… 교신용 수정구 아닌가? 길핀!”
“명 받들겠사옵니다, 사제님.”
길핀은 꼼꼼한 동작으로 수정구를 살폈고 독이 묻어 있지 않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수정구를 집어 들어 월베니에게 건넸다.
‘상당량의 마력이 충전되어 있어. 그렇다는 건 얼마 전까지도 사용되었던 수정구라는 소리인데….’
수정구를 받아 든 월베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수정구를 이용한 교신을 하기 위해서는 좌표 입력이 필수적이었기에 한 번이라도 사용된 바 있는 모든 수정구에는 필연적으로 기록이 남기 마련이었다.
암살자가 떨어뜨리고 간, 이 수정구에도 좌표는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그 좌표를 추적하다 보면 교신이 일어난 장소를 대강 유추하는 것도 가능했다.
‘세세한 지역까지는 파악이 힘들겠지만, 좌표를 잘만 딴다면 교신이 발생한 도시가 어디인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정보가 담겨 있는 단서를 그냥 흘리고 갔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연속.
암살자, 아니 이제는 자신을 암살하는 게 진짜 목적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수수께끼의 복면인.
복면인이 지난 며칠 동안 보여 준 행동이 너무나도 괴랄했던 탓에 월베니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사제님!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있사옵니다. 이동하지 않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무르다가는 자칫 불길 속에 고립될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아! 미안하네. 그래, 이동해야지. 이동해야 하고말고.”
길핀의 재촉에 겨우 정신을 차린 월베니는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불길 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워 버린 의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대공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못생긴 식물도 그렇고 복면도 그렇고, 이 숲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투성이로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 *
쾅쾅쾅.
“샌슨 오라버니! 그만 일어나세요!”
쿵쿵.
“오라버니의 귀여운 여동생 앤이 오라버님을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자고 일어나서 그 얼굴 좀 보이란 말이야!”
다시 찾아온 아침.
어제, 아니 오늘 새벽 자로 대부분의 일이 일단락된 터라 오늘 오전은 평안하게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소박한 기대는 문 너머로 들려온 노크 소리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달락.
“아하함, 지금 몇 시야?”
“오전 9시 40분.”
“어젯밤 헤어지기 전에 우리 대장님께서 본인 입으로 직접 ‘내일은 늦잠을 자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 느긋하게 출발하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하기에 9시 40분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졸린 눈을 비벼 가며 문을 여니 카밀라, 아니 ‘주근깨 소녀 앤’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불났어!”
“…뭐?”
“불이 났다고, 불! 어제 우리가 빠져나온 숲,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상한 식물이 잔뜩 뭉쳐 있던 자리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단 말이야!”
한껏 목소리를 낮춘 대답을 한 앤은 주위를 살핀 후, 내 가슴을 떠밀며 방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뭐야? 남녀가 유별한데 과년한 아가씨가 남의 방에는 왜 막 들어오고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고 한 주제에 다짜고짜 안으로 나를 떠미는 카밀라를 만류해 봤지만, 그녀는 나를 미는 걸 멈추지 않았고.
달칵.
다시금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양손으로 내 셔츠 깃을 움켜잡은 채 물었다.
“…이 누나한테 솔직히 말해. 너 어젯밤에 뭐 했어?”
“뭐하기는? 침대에서 잤잖아.”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니까.”
“도대체 뭘 솔직히 말하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 손부터 놔. 아가씨, 아가씨께서 야릇한 부위를 꽉 움켜잡고 계신 덕분에 제 속살이 보이려고 하잖아요.”
“그깟 속살 좀 보이는 게 뭐 대수라고! 아무튼, 너 어젯밤에 진짜 여기서 잠만 잔 거 맞아?”
“이 아가씨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속살이 보이는 게 대수가 아니면 대체 뭐가 대순데?”
난 정말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카밀라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한 채 지난 밤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우리가 잠든 사이에 숲 안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말이지. 자칫하면 대형 화재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거센 불길이었지만 다행히도 숲의 경계에 외무부 소속 병사들이 다소 포진해 있었던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불길을 잡는 데 성공했고. 참 다행인 일이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표정 좀 봐! 아우, 얄미워!”
“어쨌거나 진화에 성공했다는 건 이곳 주민분들한테는 참 다행인 일이고 이곳에 출진해 있던 병사들 입장에서도 잘된 일 아닐까? 어쨌거나 이곳까지 와서 주둔해 있던 보람이 생겼으니 말이야.”
“….”
“아니, 나는 어젯밤 내내 쿨쿨 잤다니까.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데? 난 말이지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도 불장난을 좋아해 본 적이 없어.”
팔짱을 낀 채 째리는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는 카밀라.
표정이며 자세를 보건대 어젯밤 있었던 화재와 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카밀라가 제아무리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한들, 나는 그녀 앞에서 떳떳할 자신이 있었다.
어젯밤 카밀라의 동정은 북슬이를 통해 몇 번이나 확인한 바 있고 화재 현장에도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았으니까.
제아무리 심증이 짙어도 물증이 없는 이상 나를 마구잡이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노릇.
“….”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카밀라, 아니 앤은 주근깨가 선명하게 돋아난 콧등을 찡긋거리며 눈초리를 가늘게 뜨고만 있을 뿐 나를 이 이상 몰아세우지는 못했다.
“…진짜 아니야?”
“애초에 잠만 잤으니까 진짜고 가짜고 할 건 없다만… 네가 정 원한다면 진짜 아닌 걸로 해 두지 뭐.”
거듭된 잡아떼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카밀라의 눈초리가 조금은 누그러졌고 난 다시 한 번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하함! 나는 일찍 일어난 김에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아침 먹고 천천히 돌아갈 준비를 하면 정오를 지나서는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 * *
폴리다고스로 복귀하는 여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물론 끝내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카밀라가 주기적으로 나를 째려보며 ‘흐으응.’이라는 소리를 내뱉는 거라든가 ‘아하앙,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살짝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물증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난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고 큰 문제 없이 폴리다고스로 복귀했다.
“…아무튼, 고생했어. 물론 끝까지 서로에게 솔직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쩌겠어. 우리 페이건 클라디우스 공자님께서는 워낙에 비밀이 많은 분이니 내가 그러려니 해야지.”
“있지도 않은 비밀을 자꾸 있는 것처럼 우겨 대니 나도 참 곤란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 비밀이라도 하나 만들어 둘걸. 그럼 이렇게 매도당하는 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어흠! 아무튼, 저는 출장 보고를 드리러 가야 해서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사와요. 페이건 공자께서도 고생하신 만큼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하세요. 그리고 내일이나 모레쯤 소녀가 아주 크게 한턱 대접해 올릴 터이니 시간 꼭 비워 두시구요.”
조금은 부담스러운 작별 인사를 남긴 채 카밀라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고 난 나만의 휴식처인 기숙사 방으로 복귀했다.
“북슬아, 일단 좀 씻고 난 다음에 저녁 먹을 때까지 한숨 자고 싶거든. 약속한 케이크는 내일 오전에 사러 가는 걸로 해도 괜찮지?”
―그럼, 당연히 괜찮지. 난 네가 약속한 개수만 채워 주면 내일이 아니라 모레라도 괜찮아.
“하! 웬일로 그런 기특한 반응을? 그 사이에 철이 들기라도 한 건가?”
밀가루 반죽 같은 북슬이의 뺨따귀를 조몰락거리며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막 화장실용 슬리퍼에 발을 올린 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할 말이 남아서 그 새를 못 참고 찾아오셨을까?’
문을 두드리는 게 당연히 카밀라일 거라고 생각한 탓에(애초에 그녀를 제외하면 내가 폴리다고스에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사람도 없었으니까) 난 비교적 편한 복장으로 문을 열었다.
“한턱 쏘는 건 내일이나 모레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턱?”
“…코델리아나 선배님!”
“안녕.”
하지만 문 너머에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언제나처럼 새침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고 난 살짝 풀어져 있던 셔츠 윗 단추를 빛과 같은 속도로 여며야만 했다.
“카밀라랑 여행, 아니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왔다며?”
다짜고짜 내 일정을 물어 오는 선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던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녀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
크리스틴 선배는 지난 며칠간 내가 꽤나 자주 봤던 것과 비슷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흐으응….”
어김없이 새어 나오는 그 소리.
또 ‘흐으응.’이라니 이상하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 모든 여자들이 나를 보면 흐으응 하는 소리를 내기로 협정을 맺기라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