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19)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9)화(19/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19)
“제가 말씀드린 대로 격리가 이루어진다면 성녀님이 앓고 계시는 풍토병의 완전한 절멸(絶滅)이 가능합니다.”
오르페우스의 기록과 내가 그동안 행한 연구자료를 토대로 도출해 낸 결과를 설명해 나갔다.
“물론 오르페우스 님도 어쩌지 못한 병의 절멸을 저 같은 꼬마가 해낼 수 있다는 말이 미덥지 못하게 들릴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믿어주신다면 분명히 실현 가능한 일입니다. 저에게는 오르페우스 님께서 생전에 만들어 두신 면역제가 있으니까요.”
과거 모데나스의 풍토병을 치료했을 당시, 오르페우스는 병원균을 영구적으로 박멸시킬 수 있는 면역제 또한 만들어 놓은 바 있었다.
하지만 면역제가 실제 사용이 가능하기까지는 수백 년에 달하는 숙성 시간이 필요했기에 영구 면역제를 바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당장에 발병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수백 년이 흘러 내가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는 숙성을 끝낸 영구 면역제가 한 줄로 도열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선물을 본 직후 난 모데나스의 풍토병을 완전 박멸시킬 계획에 착수했다.
“영구 면역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면역제가 주민들의 몸에 충분히 스며들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과 ‘가장 최근에 발생한 변이를 포함하고 있는 병원균 견본’. 이 중 두 번째 조건은 성녀님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면역제가 주민들의 몸속에 스며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공자님께서 이 섬을 계속 오가시면 면역제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운 건가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주시하고만 있던 에스텔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본격적인 계획이 시작되면 모데나스 주요 장소에 면역제가 담긴 용기가 배치될 것입니다. 그럼 바람에 실린 면역제가 섬 전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주입될 것이고, 모든 주민분들은 영구적인 항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 세대 전체에 걸쳐 완성된 면역 인자는 후손들에게도 유전되기 마련, 이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오랫동안 모데나스를 괴롭혀 온 유전병은 영구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계속해서 이 섬을 오간다면 말씀드린 면역체 생성계획에 심대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데나스의 주민과 다른 신체구조를 가진 외부인이 내뿜는 호흡이 대기 중에 섞이면 면역제의 효력이 기준 이하로 저하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그렇게 된다면 병원균의 영구적인 박멸 또한 요원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격리 기간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개인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전 10년에서 15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구 면역체 생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검출 도구를 제작하는 방법은 가르쳐드릴 테니 추후 그 도구를 통해 개별적 생성 여부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10년.”
어떻게든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에스텔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럼 현재 섬에 거주하는 주민 전원의 면역체가 완성되고 나서야 격리가 해제되겠네요?”
“저는 그렇게 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녀님의 경우에는 질환을 앓은 경력이 있으니 면역제의 도움이 없더라도 영구적인 면역체가 생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이곳에 머무는 한 병원균을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물론 에스텔이 완치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남은 과정은 어디까지나 시간의 문제일 뿐.
내 도움이 없더라도 에스텔은 언젠가 건강을 되찾게 될 터.
그렇다면 주민들의 영구적인 안전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내가 섬을 떠나는 게 옳았다.
“이게 바로 제가 가능한 한 빨리 모데나스를 떠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웅성웅성.
설명이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영구 면역제라는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으니 놀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잠깐만요. 다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어요!”
혼란이 가득한 회의실을 추스른 건 에스텔이었다.
“다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은 건 알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클라디우스 공자님께 큰 도움을 받은 입장. 공자님께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셨다면 그걸 존중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순식간에 사제들과 무녀들을 진정시킨 모데나스의 성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정말 잊지 못할 거에요.”
* * *
일주일 후.
“거기 꽉 잡아. 혹시라도 빈틈이 생기면 물이 첨버덩하고 들어오는 거야. 그럼 개고생인 거 알지?”
“알아! 아니까 자네야말로 술식에 신경 써! 무려 십 년을 버텨야 하는 마법인데 처음부터 든든하게 만들어야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들.
모데나스 격리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주민들이 선택한 격리 방법은 섬을 감싸는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 섬을 통째로 수면 아래에 가라앉히는 것.
격리의 철저함이라는 측면에서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방법은 없을 터.
하지만 섬을 통째로 감싸는, 그것도 무려 10년이나 지속되는 거품을 만들어 낼 줄이야.
모데나스 주민들의 마법 능력은 내가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마법적인 역량이 뛰어나다 해도 이 정도 대규모 주문을 전개하려면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풍토병의 절멸이 이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겠지.’
후손들을 병마의 위협에서 구해 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주문을 준비한 모데나스 주민들.
완성을 목전에 둔 마법진이 뿜어내는 빛을 마주한 채 난 이곳에서 얻어 낸 성과를 되새겼다.
‘젊을 적에도 오르페우스는 위대한 치료술사였어. 하지만 노년에 접어들 무렵의 오르페우스는 그 이전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룩했지. 그리고 이 성취를 가능하게 한 건 역시 고대왕국의 지혜겠지?’
안타깝게도 모데나스의 연구실에 남겨진 단서만으로는 오르페우스가 무슨 인연으로 고대왕국의 비밀을 손에 넣었는지, 그리고 오르페우스가 획득한 지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까지는 파악이 어려웠다.
노년의 오르페우스가 이룩한 경지에 비하면 현재 내 수준은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낮았기에 단서만으로는 짐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여 실망을 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을 통해서 오르페우스가 고대왕국의 비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쨌거나 난 아직 여행길의 초입에 서 있는 몸. 조급해하지 말자.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남겨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오르페우스의 남겨진 꿈이 뭔지도 알 수 있게 되겠지.’
절반의, 아니 절반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의 성공.
그 성과를 새기며 점멸하는 빛을 바라보고 있을 그때, 이제는 익숙해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그냥 보고 있어. 이 정도로 큰 마법을 구경할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아하하, 우리 아저씨들이 조금 유난스럽기는 하지.”
“이런 건 유난스럽다기보다는 철저하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이곳 주민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편이 훨씬 더 낫지.”
코끝에 느껴지는 건 향긋한 달안개꽃 내음.
에스텔이 최근 들어 뿌리기 시작한 향수가 그녀의 걸음걸이처럼 은밀하게 주변 공간을 잠식해 들어왔다.
“두 시간 후면 마법이 완성될 텐데 무려 성녀님께서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돼?”
“수석 사제님이 시간을 주셨으니까 괜찮아. 말씀하셨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작별인사를 하고 오라고.”
“혹시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고?”
“아니. 그런 건 없어. 너를 믿으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앞으로의 치료과정이 조금 더뎌질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건 너의 마나량이 너무 풍부해서 그런 거니까 불안해 할 것 없어. 머지않아 완치의 순간이 찾아오거든 너도, 그리고 주민들도 알게 될 거야. 모데나스의 성녀님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너무 큰 재능이 불러온 고통.
그 고통을 끝까지 살피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재능을 가진 소녀에게 그 막대한 재능과 공존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번 진료는 만족스러웠다.
“저기, 그런데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어떤 말?”
“나… 되게 예뻤다는 말.”
“아아. 물론 기억해,”
“저기 내가 완치되면 아직 얼굴에 남은 흉터랑 반점도 다 없어진다는 거잖아. 그럼, 정말로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 만날 때 나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충분한 가능한 일이지.”
내 옆에 털썩하고 주저앉은 에스텔.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달안개꽃의 향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그럼 나는 10년 후에, 그러니까 격리조치가 끝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너, 그리고 이곳의 주민들이 나의 방문을 허락한다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우리, 아니 내가 널 거부할 리가 없잖아!”
찰싹.
아직은 앙상하기만 한 팔목이었지만, 내 손등을 내려치는 에스텔의 손바닥에는 제법 따끔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그때는 진짜 화낼 거야.”
“응. 삼가도록 할게.”
“그래도 이런 말투 평소의 페이건다워서 조금 안심된다. 헤헤.”
정말로 눈앞으로 다가온 이별의 순간.
나의 평소와 같음에 위로를 느낀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심한 동요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거 알아? 내가 페이건의 이름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인 거.”
“어? 그랬나?”
“응. 이번이 처음이야. 그래서 그걸 기념해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허벅지 위에서 올려진 채 꽉 쥐어진 주먹.
무슨 부탁을 하고 싶어서 저렇게 긴장을 하는 걸까?
“내 얼굴, 한번만 봐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가면을 벗은 너를 봐 달라는 거지?”
“응.”
“그게 다야? 다른 건 없고?”
“응. 이게 다야.”
“그럼 당장 벗어. 네가 보여 주겠다는 데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외부인에게 맨얼굴을 보여 준다는 건 파도부족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
더군다나 에스텔은 피부에 발생한 문제 때문에 맨얼굴을 보여 주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있었을 터.
그 망설임의 무게를 잘 알기에 난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에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빛이 뿜어져 오는 방향을 등진 채 섰고 잠시 후 달카닥하는 소리와 함께 항상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푸른 가면이 흘러내렸다.
“…어때? 아직은 흉터가 너무 많지?”
에스텔이 역광을 등지고 선 탓에 그녀의 얼굴이 아주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대담했던 제안치고는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성녀님의 행동.
하지만 잔 떨림을 반복하는 에스텔의 팔다리는 그녀가 가진 모든 용기를 쥐어 짜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직은 보기 흉할 거야. 하지만 페이건의 말처럼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나중에는….”
“흉하지 않아.”
“응?”
“흉하지 않다고. 정말 눈곱만큼도, 그러니까 조금도 흉하지 않아.”
“정… 말?”
“너를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가 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단… 한 번도?”
“응. 단 한 번도.”
“우… 우윽….”
결국 에스텔은 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페이건… 나 정말 미안한데. 괜찮다면, 그러니까 네가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면… 나 한 번만 꼭 안아 주면 안 될까?”
참 신기한 일이다.
웃는 얼굴로 눈물을 쏟아 내는 여자아이의 얼굴은 왜 이리도 애처로워 보이는 걸까?
“웃기지? 헤어지는 날까지 이런 부담이나 주고….”
“웃기다고 생각했다면 웃었겠지. 근데 한번 봐 봐. 내가 지금 웃고 있나.”
“뭐야! 그게…!”
애처로운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던 에스텔의 눈동자가 화들짝 커지고,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 번이면 돼? 원한다면 열 번까지는 가능한데?”
에스텔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경쾌한 동작으로 그녀를 끌어안았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자아이의 몸은 솜사탕처럼 몽글몽글한 기세로 품 안에 들어왔다.
“아니… 괜찮아. 한 번이면… 그러니까 이거면 충분해.”
가면을 쓰지 않은 에스텔의 이마가 내 어깨에 잠시 머물렀고, 이내 그녀는 물러서야 할 자리를 찾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게… 뭐야?”
“생각해 보니까 지난번, 네 생일에 말로만 축하를 하고 선물을 안 준 것 같아서 준비했지.”
다시 멀어진 에스텔의 어깨 위에는 자색 수정을 깎아 만든 ‘반쪽 달맞이꽃’이 다소곳이 올라가 있었다.
“이거 페이건 군이 직접 만든 거야?”
“응. 참고로 나머지 절반은 내 방 서랍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습니다.”
“치사해. 줄 거면 하나를 다 줘야지 왜 반쪽만….”
“네가 그랬잖아? 깜짝 놀랄 만큼 예뻐진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어떡할 거냐고? 그 말을 자꾸 듣다 보니 나도 궁금해졌거든. 다시 만날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또오옥.
결국 에스텔의 눈망울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유달리 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가 정말로 다시 만나게 되거든 나머지 절반은 그때 마저 수여하는 걸로 하지.”
“그럼… 그때 정식으로 수여식 하는 거야?”
“응. 에스텔의 완치를 기념하는 감격의 수여식. 그러니까 나머지 반쪽을 받고 싶거든 지금부터 밥도 잘 먹고 약도 부지런히 먹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못 받는 수가 있거든.”
“쿠쿡! 웃긴다. 무슨 수여식이 그래.”
정말로 임박한 헤어짐의 순간.
다행히도 마지막 순간 에스텔은 미소를 보여 줬고, 덕분에 난 편한 마음으로 섬을 떠날 수 있었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는 내 본명을 말해 주려고 생각했어. 우욱, 그런데 역시 안 할래. 그래야 미래의 수여식 날 나도 페이건 군에게 줄 게 있을 테니까.”
미소와 눈물방울.
평소라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겠지만 달빛 아래 마주한 모데나스의 성녀님에게는 미소도, 눈물도 거짓말처럼 잘 어울렸다.
“나를 기억해 줘. 페이건, 우리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니까.”
“그런데 네가 그랬잖아? 다시 만났을 때는 네가 확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더군다나 나는 너의 이름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내가 너를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괜찮아. 정말 괜찮아. 혹시라도 페이건 군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내가 반드시 볼 거니까. 제발 믿어줘, 페이건. 내가 너를 꼭 기억할 거야.”
“그것참 다행이네.”
손을 뻗어 에스텔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머리통을 통해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며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거든.”
* * *
구구구구.
소용돌이 사이를 누비는 범고래 영수 등판에 버티고 선 채, 물방울에 감싸인 섬이 가라앉는 광경을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그런데 바다 밑으로 저렇게 통째로 가라앉아 버려도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할까요?”
―가능하고말고. 파도부족은 애초에 바다와 워낙에 가까운 사람들인걸. 10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는 않지만 저들이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임무를 무사히 완수한 덕분일까? 왼쪽 어깨에서 들려오는 라무테의 목소리에는 더없이 포근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꼬박 3개월, 그나저나 너도 참 대단하다.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꼬맹이가 거의 매일 밤 에스페타라와 모데나스를 오가는 강행군을 버텨 내다니. 더군다나 피까지 쏟아 내면서. 너 정말 독한 거 하나는 내가 인정.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두 달째부터는 적응이 돼서 그런지 버틸 만하더라고.”
언제 만져도 기분 좋은 북슬이의 머리통.
나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더 높아진 덕분일까? 이제는 내가 머리나 날개를 쓰다듬어도 털 뭉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정산을 해 볼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 3개월.
거의 100일에 달하는 시간을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이제는 멈춰 서 벌여놓은 것들을 정리할 시간.
“라무테 님 혹시 추가적인 검증이 더 필요할까요?”
―아니. 천만에. 페이건 너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험난했던 증명의 시간을 누구보다 용감하게 헤쳐 나갔어. 그런데 내가 여기서 더 확인할 게 뭐가 더 있겠니?
아주아주 만족스러운 듯한 라무테의 목소리.
라무테가 날개를 활짝 펴자 어둠을 가르는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꽃이 절반쯤 잦아들었을 무렵 라무테는 밤바다만큼이나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이건 지금부터 너에게 말해 줄게. 오르페우스의 꿈이 잠들어 있는 약속의 장소가 어디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