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211)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1)화(211/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1)
“…당신, 내가 애들 앞에서 그 이야기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했죠?”
“아니 라나는 아직 어리고 페이건은 잠든지라 어차피….”
“당신도 참,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인데 그렇게 쉽게 쉽게 말을 해 버리면 어떡해요. 더군다나 내가 과거에 대해서는 입. 도. 뻥. 긋. 하. 지. 말라고 그렇게 여러 번 말을 했는데.”
“으응, 분명히 당신이 그랬지. 내가 또 속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네.”
어린 날의 나는 이쯤에서 실눈을 살짝 뜬 채 두 분의 표정을 살폈는데 어머니는 평소처럼 방긋거리고 계시는 반면.
아버지께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멋쩍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큰일이네요. 우리 자기,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깜빡깜빡하지? 흐음, 한 가문의 가주라는 분이 이래서야 가문의 일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텐데.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당신, 몸에 좋은 거라도 좀 챙겨 먹여야 할 것 같아요.”
“아, 아니야! 나야 당신의 마음을 매일 먹고 있는데 몸에 좋은 걸 먹을 필요가 뭐가 있겠소, 허허허….”
“어머! 당신도 참, 내 마음으로도 충분하다니….”
그날 밤을 통해 난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첫째, 대외적으로 알려진 클라디우스의 최고 권력자는 아버지이지만 아무리 봐도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조금, 아니 훨씬 더 강하다.
둘째, 어머니께는 나와 동생들은 모르는 찬란한 과거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드러난 단서로 판단컨대.
바바루크는 어머니의 과거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아주아주 농후한 장소.
다른 곳도 아닌 이런 장소를, 더군다나 팩셰르의 여비 지원까지 받아 가면서 갈 수 있는데.
고작 아타카크 놈들의 행패가 염려되어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
‘라무테 님, 혹시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을까요? 북슬이 너도 아는 거 없어?’
―흐음, 글쎄. 멜리사도 그렇고, 티베리도 그렇고… 과거에 대해서는 통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잘 모르겠네.
―나도 잘은 몰라. 가끔씩 멜리사가 보여 주는 기세나 티베리가 무심코 흘리는 말들을 보면 왕년에 좀 많이 날렸던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건 잘 몰라.
바바루크로 향할 결심을 다시금 굳히며 마스코트들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두 마리 또한 뭔가 있기는 하다는 답을 내놓을 뿐, 뚜렷한 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오래도록 지켜본 두 마리도 잘 모른다면 답은 하나야.’
베일에 싸여 있는 어머니의 과거는 현장 답사를 통해 파헤치는 수밖에.
짤그랑.
품속에 손을 집어넣자 금화 주머니의 묵직함이 다시금 느껴졌고 난 넉넉한 여비가 주는 안락함에 사로잡힌 채 먼 곳에 계시는 어머니를 향해 전언을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이 아들이 과거의 당신을 만나고자 지금 곧 출발합니다.’
* * *
“후우우.”
히죽.
연구실에 홀로 남은 팩셰르의 얼굴에 독하디독한 담배와 어울리지 않는 달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몇 번을 반복해도 저놈을 상대하는 건 재미있었다.
다른 놈들 같았으면 말대꾸는커녕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텐데 한마디 할 때마다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해 오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정보가 주어질 때마다 재빨리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그렇고.
권태롭거나 혹은 위태롭거나.
둘 중 하나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팩셰르에게 있어 페이건 클라디우스는 아주 훌륭한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바바루크는 성장기에 접어든 마법사에게 있어 큰 양분이 되어 주는 장소. 적당한 핑계를 대서 보내 두었으니 그곳에 가서 뭐라도 배워 오겠지. 그리된다면 저놈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더욱 깊어질 테고 말이야.’
워낙에 통이 큰 놈인 터라 바바루크를 다녀온 대가로 뭘 요구해 올지 모른다는 점이 아주 살짝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저놈에게 과제를 주고 그 응답을 기다리는 즐거움’에 비하면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었기에 팩셰르는 아주 달콤한 기분으로 담배를 베어 물 수 있었다.
페이건이 더욱더 가파른 속도로 성장해 주기만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설령 그 당사자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팩셰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페이건이 지금 같은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게 가장 좋았다.
실험국의 괴물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자신이 그토록 바래 왔던 진보의 끝을 보여 줄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해 주는 것뿐.
페이건과 간질간질한 사제지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지금처럼 독설을 주고받는 사이가 고착된다 해도 팩셰르는 조금도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다.
‘그 근방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감지되었기는 했다만 저놈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 흉흉함 정도야 가뿐히 넘어갈 수 있겠지.’
만약 바바루크에 불어닥치는 태풍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탓에.
그 일을 예측 못 한 페이건이 큰 곤란을 겪게 된다면?
‘어쩔 수 있나? 그것 또한 제 놈의 팔자인 법이지.’
일이 그리된다면 그것대로 즐거운 일이었기에 팩셰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물고 있던 담배를 정말이지 맛있게 태운 이후에 치안국에서 보내온 ‘극비 문서’를 꺼내 들었다.
“흐음….”
〈기둥의 발흥(發興)과 그 자취에 관한 추적 기록서〉
―요아힘 벤제르센.
1. 본 문서는 치안국 외 국장급 이상의 열람을 기본으로 기밀을 유지한다.
……
…
팩셰르는 아직 채 타지 않은 담배를 서둘러 비벼 껐다.
그리고 좀처럼 쓰지 않는 외알 안경까지 착용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 *
“나 이번 주말을 기해서 한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어디를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어, 진짜?”
“어디 가는데? 왜 우리한테는 미리 말 안 했어?”
제라르, 카밀라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갑작스레 정해진 외부 방문일정을 말했더니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봤다.
그나저나 이 두 사람, 반응도 참 호흡이 잘 맞네.
누가 보면 진짜 친남매인 줄 알겠어.
“오늘 오후에 급히 정해진 일정이거든. 그래서 너네 두 사람한테 제일 먼저 말해 주는 거야.”
“어딘데? 페이건, 어디를 가는 건데? 막 위험하고 그런 데는 아니지?”
“바바루크 대장터. 뭐 사람이 워낙 몰리는 장소이니만큼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조금 많이 복잡하기는 하겠지.”
“아… 다행이다. 난 또 페이건이 혼자서 위험한 데를 갔다 온다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잖아.”
연어 완자가 꽂힌 포크를 손에 든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제라르.
그런데 내 행선지가 밝혀지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남동생과 달리.
누나는 이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치켜뜨며 식판을 찍어 댔다.
“제라르 이 바보야! 페이건이 우리만 빼놓고 혼자서 재미있는 데를 간다는데 다행은 뭐가 다행이야! 너 진짜 나빴다! 이번에도 우리 둘만 따돌리려고!”
“저기… 여기에 남는 건 너희 둘이고 떠나는 건 나 혼자잖아. 그럼 인원 구조상 나 혼자서 너희 둘을 모두 따돌린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몰라! 아무튼, 나빴어.”
카밀라가 이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라는 건 이미 한참 전에 예상했던 터라.
난 당황하는 일 없이 미리 준비해 둔 메모지를 꺼내 들 수 있었다.
“여기다가 각자 받고 싶은 선물 적어. 아카이드랑 같이 갈 거니까 부피 신경 쓸 필요 없고 가용 예산은 이 정도니까 가급적 금액을 꽉 채워서 적어 줬으면 좋겠어.”
“…선물?”
“명색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에 다녀올 예정인데 선물 정도는 당연히 준비해야지.”
“흐흥…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쪼끔은 착해진 것 같기도 하고….”
선물이라는 말에 조금은 태도가 누그러진 듯한 누나.
하지만 이번에는 동생 쪽에서 제동을 걸어 왔다.
“그, 금액이 너무 많아. 안 돼! 평소에도 맨날 도움만 받는데 이렇게 많은 선물까지는 못 받아.”
“괜찮아. 누구 씨께서 여비를 아주 넉넉히 준비해 주신 덕분에 그 정도는 아무런 부담 없이 지출할 수 있으니까 예산 꽉꽉 채워서 쓰기나 해.”
“그, 그치만… 고생은 페이건이 혼자 하는데….”
“여행 선물이 부담스러우면 축하 선물인 걸로 해 두지 뭐. 너 지난주에 1서클 마스터하는 데 성공했다며. 그 선물로 하자.”
“그걸 페이건이 어떻게….”
“어떻게 알기는 네 과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알지.”
“카밀라! 내가 페이건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페이건 쟤가 눈치가 워낙에 빠르니까 알아맞힌 거지 난 아무 말 안 했다 뭐.”
허둥지둥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사제지간.
“혹시 고작 1서클 가지고 무슨 선물이냐는 생각에 그러는 거라면 그러지 마.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건 카밀라지만 그럴 수 있도록 그 기반을 깔아 주고 다듬어 주는 건 나야. 1서클을 마스터했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걸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페, 페이건….”
“친구로서 네가 오랜 노력 끝에 내디딘 한 걸음을 축하해 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꽉꽉 채워서 적어. 알겠지?”
“…으, 흐윽.”
이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결국 제라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우리 둘을 바라보던 카밀라가 살짝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페이건 너 말이야, 여자한테는 사정없이 까칠하게만 굴면서 남자한테는 참 다정하더라.”
“모두한테 까칠한 것보다는 한쪽에라도 다정한 게 낫잖아?”
“뭐, 뭐야? 너… 설마!”
“설마는 무슨, 남자한테 다정한 게 아니라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합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뿐이야.”
“흥! 그럼 나도 그 자격이 있는 사람 명단에 들어가는 걸로 믿고 꽉꽉 채워서 적는다. 그래도 되지?”
“당연히 되지.”
“좋아, 그럼 난 선물은 됐고 네가 꾸리는 짐 바구니에 빈틈 한 칸만 만들어 주면 돼. 난 몸이 유연하니까 잘 수그리면 감쪽같이 들어갈 수도 있을 거야.”
“….”
“나도 바바루크 가고 싶단 말이야!”
“너는 향수 세트, 뭐 이런 거면 되지? 그냥 내가 거기서 파는 향수란 향수는 죄다 맡아 보고 적당한걸로 골라 올게.”
“아아! 농담, 농담! 농담이니까 ‘뭐야? 이 바보는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날 보지 마! 그리고 빨리 그 메모지 내놔.”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어이가 없어서 메모지를 회수했더니 카밀라는 앙칼진 손놀림으로 메모지를 도로 낚아채 갔다.
“흐흥, 일단 ‘솜사탕 구름’ 본점에서 만드는 봉제 인형이랑 ‘향기로운 손’에서 파는 신상 향수랑 또….”
“흐흑… 고마워, 페이건.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쿨쩍, 네 마음은 언제까지고 기억할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종이를 작성해 가는 두 사람.
빈칸을 채우는 기세며 태도를 보건대 30분 정도 후에는 희망 선물 목록을 제출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쪼오옥.
후식으로 나온 바닐라 쉐이크의 거품을 휘저으며 추후 일정을 다시금 확인했다.
‘출발까지 이틀, 내일 두 분 선배님들에게 희망 선물 목록을 받으면 출발 준비는 다 끝난 건가?’
* * *
채앵채앵채앵.
푸르스름한 오러에 감싸인 장검이 달빛 아래 춤을 췄고.
검이 일으킨 풍압과 어우러진 밤바람이 바닥에 쌓인 꽃잎들을 휘감아 올렸다.
“하아!”
질끈 묶은 머리채를 흩날리며 검무(劍舞)를 추는 고혹적인 여인.
여인의 얼굴이며 표정에서는 감출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나왔지만.
스커트 자락 아래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팔목이며 발목의 움직임은 소녀와도 같은 경쾌함을 머금고 있었다.
“후우…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죠. 클라디우스 가주 나리.”
한바탕 검무를 마친 여인은 어둠이 드리운 덤불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고.
“허허, 나름 은밀하게 접근한다고 노력을 했는데 역시 당신 눈은 못 속이겠어.”
“설마 그 커다란 덩치가 가려질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참나! 내가 요즘 들어 좀 무뎌진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까지 둔하지는 않거든요.”
“하하! 그렇지. 둔한 건 나고 당신은 여전히 꽃잎처럼 경쾌하지.”
숨죽인 채 멜리사의 검무를 지켜보고 있던 티베리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야간 회의가 있다며 저녁을 먹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나간 사람이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응, 회의가 예상보다 일찍 끝났거든. 집에 갔더니 당신이 밤 산책을 나갔다고 하길래 나도 나와 봤지. 오랜만에 당신의 솜씨가 보고 싶었거든.”
“다 늙은 아줌마 칼부림을 보고 솜씨는 무슨… 그냥 저녁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 잠깐 몸 좀 풀어 본 것뿐이에요.”
멜리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티베리는 ‘아줌마 칼부림’이라는 겸손한 단어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전문적인 검술을 배운 적이 없음에도 워낙 경험이 풍부한 탓에 티베리의 눈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그런 그가 보기에 멜리사의 솜씨는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아….”
“갑자기 웬 한숨이람?”
“아니, 이렇게 여전한 당신의 솜씨를 보고 있자니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만약 그때 당신이 바바루크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글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날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의 당신은 어느 유력한 왕국의 근위대장이나 총기사단장 정도는 하고 있었겠지? 일이 잘 풀렸다면 타샤드의 기사단장 또한 될 수 있었을 테고.”
빙긋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하는 바람에 진중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평행 세계의 멜리사를 겨냥한 티베리의 예측은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냉정한 분석이었다.
“당신, 어디 아파요? 저녁까지 맛있게 잘 드신 양반이 갑자기 왜 엉뚱한 소리를 하고 그러실까?”
“당신이 얼굴이며 정체를 꼭꼭 숨긴 채 활동하는 바람에 유명세가 아주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 당시 각국 기사단 본부가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아마 당신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공작이며 후작이며 하는 작위를 받아 내는 것도 일은 아니었겠지.”
“듣자 듣자 하니 점점….”
“물론 당신이, 그들이 아닌 날 선택해 준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말이지, 여전한 당신의 솜씨를 보고 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부웅.
티베리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듣고 있던 멜리사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수직으로 바닥을 딛고 서 있던 세검(細劍)이 수평으로 방향을 바꿔 어깨에 걸쳐졌다.
“그날 우리가 바바루크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내가 이 섬으로 당신을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첫째, 천사 같은 둘째,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우리 막내. 그리고 에스페타라를 비롯한 모든 섬들의 소중한 사람들, 여기에다 이 티베리 클라디우스까지….”
이대로 있다가는 티베리의 푸념이 세상모르고 길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멜리사가 남편의 발언을 끊은 후, 시를 낭독하는 어조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당신을 선택한 덕분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이에요. 왕국의 기사단장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이 보물들과는 바꿀 생각이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일랑 그쯤 해두시죠, 가주님.”
콕.
멜리사의 매끈한 손가락이 북슬북슬 구레나룻으로 뒤덮인 티베리의 뺨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이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라 내가 에스페타라를 선택한 거예요. 내 전부를 당신에게 주고 당신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
“나랑 20년을 살아 놓고 아직도 그걸 몰라요?”
콕.
이번에는 반대쪽 뺨을 찌른 손가락.
이걸로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고.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여려진다던데 당신도 예외는 아닌가 보네요.”
“그러게 말이야, 페이건과 에밀이 내 이런 점은 닮으면 안 될 텐데.”
티베리의 얼굴에서도 멜리사의 것과 비슷한 미소가 맺혔다.
“막내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첫째에 관해서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걔는 오히려 단단한 게 너무 과해서 조금은 부드러워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하하! 그 녀석, 여기에 와 있을 때랑 그대로라고 했지?”
“그대로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게요. 애가 우리 품을 떠나 혼자 살더니 그사이에 더 딴딴해진 것 같지 뭐예요.”
“그 녀석이 더 단단해질 구석이 있기는 한가… 이미 한계치로 단단한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요. 어휴, 그나마 옆에 좋은 친구들이 있어 주는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좋아질 것도 같은데… 페이건이 멋이라고는 워낙에 없는 성품이다 보니 엄마로서는 걱정이 되네요.”
걱정이 된다는 사람치고는 멜리사의 표정은 너무나 밝아 보였고.
투정 사이에 품은 그녀의 본심을 파악한 티베리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미 충분히 단단한데 거기에 자상함까지 더하면 너무한 거 아닌가? 그 정도면 거의 반칙이잖아.”
“반칙이어도 어쩔 수 없죠. 어쩌겠어요?”
부웅.
멜리사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던 검이 다시금 방향을 바꿔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고.
“우리 첫째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렇게 되는 수밖에.”
투명한 검신을 투과해 들어오는 달빛을 마주한 채.
멜리사는 더 이상 담아 낼 수 없을 정도의 자부심과 믿음이 듬뿍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잖아요?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누구네 아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