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21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2)화(21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2)
“그럼 유리안 선배님은 ‘사금파리 나침반’에서 새로 발매한 ‘자개석 다기(茶器) 세트’면 되는 거죠?”
“응, 난 예전부터 다기 세트를 모아 왔거든. 그런데 사금파리 나침반에서 나온 세트는 항상 품질이 좋았어. 이번에 신상이 나왔다길래 어떻게 구해 올까 고민 중이었는데 페이건 군이 마침 그곳에 간다니 다행이지 뭐야.”
“다기 세트 수집이라… 선배랑 잘 어울리는 아주 고풍스러운 취미네요.”
“그치?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고풍스럽기는 해. 하하하! 페이건 군이 이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알아 가는 것 같아 뿌듯하네.”
이런, 절반 정도는 빈말이었는데 당신이 그렇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 내가 민망해지잖아.
아무튼, 유리안 선배님은 다기 세트로 확인 완료.
개학 이래로 쭈욱 이어져 온 ‘슬기로운 학년 대표 생활을 위한 학사 생활 강의’ 현장.
마침 오늘은 특별 강사로 유리안 선배까지 초빙되어 온 터였기에.
난 두 사람을 대상으로 ‘희망 기념품 목록’을 청취 중이었다.
“코델리아나 선배님께서는 생각해 둔 물건이 있으실까요?”
“으음, 글쎄… 잠깐만, 조금 생각한 후에 말해 줘도 괜찮지?”
“물론입니다.”
단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선물을 받을 용의가 있음을 냉큼 밝히는 크리스틴 선배.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의외였다.
유리안 선배라면 몰라도 이 사람은 ‘그런 거 필요 없으니 괜한데 신경 쓰지 말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오기나 하렴.’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흐으음… 뭐가 좋을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아 가며 생각에 잠긴 선배.
선배를 처음 만난 이래로 이 사람이 이 정도로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이었다면 뭘 받아도 상관없었을 텐데 페이건이 나한테 무려 두 번째로 주는 선물인데 아무거나 받을 수는 없잖아.”
두 번째?
내가 이 사람한테 선물을 줬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것보다 애초에 기념품 선물을 정하는 게 이 정도까지 고민할 문제였던가?
“엽서.”
“…엽서라면 편지를 보낼 때 사용하는 그 네모난 종이 카드를 말씀하시는 게 맞을까요?”
“응, 맞아. 난 엽서로 할게.”
제법 긴 고민 끝에 선배의 대답.
그런데 그 대답이 내 예상 범주를 벗어나 있는 물건이었기에 난 다시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명물 엽서라 해도 결국은 종이 쪼가리.
애초에 엽서가 아무리 비싸 봤자 그 가격대라는 게 정해져 있을 텐데 고작 이걸로 만족하는 건가?
혹시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서 일부러 이런 선물을 말하기라도 한 걸까?
“바바루크의 명물 중에는 근방의 풍경을 그려서 판매하는 그림엽서가 있다고 들었어. 난 그걸로 부탁할게. 그거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그럼 선배님은 그림엽서, 부피도 거의 얼마 안 나가는 물건이고 하니 판매하는 모든 엽서를 종류별로 모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선배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고 나 역시 그 답변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바바루크를 품은 신비로운 풍경이 담긴 그림엽서’와 ‘크리스틴 코델리아나’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모든 종류를 다 가져다줄 필요는 없어. 네가 그곳에 머무른 날들만큼만 있으면 충분해. 그리고 엽서는 네가 사다 주어서는 안 돼.”
“네? 그럼 어떻게….”
“그곳에 도착하거든 엽서를 매일매일 사. 그리고 나한테 편지를 쓰는 거야. 편지의 내용은 복잡할 필요 없어. 한 문장도 좋고 한마디라도 좋아. 단지 네가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한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칠 때, 그날 쓴 엽서를 나한테 보내 주면 돼.”
“어… 선배님, 바바루크와 폴리다고스 사이에 서신 교환선이 개설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낸 엽서가 이곳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요.”
“괜찮아. 난 기다리는 건 잘하니까.”
“그곳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보낸 엽서의 도착보다 제가 돌아오는 게 더 빠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가 가지고 돌아오는….”
“아니, 그래서는 안 돼. 반드시 네가 써서 보내 줘야만 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편지를 부치는 방식 외에는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듯한 기세로 말했다.
“너보다 엽서가 더 늦게 도착해도 괜찮아. 아니, 오히려 그편이 더 좋아. 그러니까, 가져오지 말고 송부하는 걸로 해 줘. 알겠지?”
오늘따라 유난히 초롱초롱한 선배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불편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선배의 요구 조건대로 엽서를 보내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첫날에 여러 장을 한꺼번에 구매 후 그날그날의 느낌을 생각나는 대로 적고는 약간의 수수료와 함께 여관 주인에게 맡기면 주인이 알아서 송부까지 해 줄 테니까.
‘문제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상대로 매일같이 서신을 보내는 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느냐인데….’
크리스틴 선배도 조금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이에서 뭔가 불손한 기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무에 가깝고.
두 사람의 믿음이 제아무리 두텁다고 해도 약혼자 앞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
저절로 유리안 선배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고 크리스틴 선배를 향해 눈을 흘기는 유리안 선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아무리 믿음이 두터운 두 사람이라 해도 이건 불쾌할 수밖에 없지. 아무래도 이 제안은 거절하고 다른걸….’
“좋아, 그럼 나도 다기 세트에 엽서 추가.”
‘네? 선배님 지금 뭐라고….’
“크리스틴한테 엽서 보낼 때마다 나한테도 똑같이 한 장씩 보내야 해. 페이건, 할 수 있지?”
잠깐만요, 선배님.
선배님 입장에서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백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질투의 방향이 잘못됐잖아요.
여기서 저를 놓고 경쟁심을 발휘하는 건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넌 엽서 같은 거 좋아하지도 않잖아?”
“이번 달부터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어.”
“그 좋아하기로 한 거 다음으로 미뤄.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만도 바쁠 텐데 여기에 너한테까지 어떻게 신경을 쓰니?”
“웃겨, 하루도 빼놓지 말고 편지 보내라며 부담 준 사람이 누군데? 애초에 처음 보내는 게 힘들지 이왕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면 한 장이냐, 두 장이냐는 별 차이도 안 나거든.”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소용돌이.
평소 보지 못한 표정을 한 채 아웅다웅하는 두 선배님을 보고 있자니 돌연 머리가 아파 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에게 매일같이 엽서 한 장씩 보내는 걸로 하죠.”
내 다짐이 있고 나서야 두 사람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듯했다.
“히히!”
“…어휴, 정말 괜한 욕심 부리기는.”
“괜한 욕심 아닌데? 힝.”
하지만 두 사람을 달궈 놓은 정체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듯싶었고.
그 기이한 기운에 휩쓸려 있으려니 내일 새벽으로 예정된 출발 시각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 * *
펄럭.
―페이건 님! 바람 좋죠? 이왕 좋은 기류를 탔으니 조금 더 속도를 내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나야 언제라도 좋지. 그럼 더 신나게 달려 볼까!”
―넵! 꼭 잡으세요. 초고속 비행으로 모십니다아아.
아카이드가 허공에서 발장구를 칠 때마다 지상의 풍경이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아카이드의 등에 오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지금과도 같은 ‘가속의 순간’은 특히 더 유쾌했다.
중력의 속박을 완전히 끊어 버린 채 우주 바깥에서 날아오는 유성과도 같은 기세로 허공을 박차는 이 기분이라니….
“야호!”
난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형형색색 구름바다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소리를 질렀고.
아카이드는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한층 더 날카로운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페이건 님, 저기 아래쪽을 좀 보세요. 강을 사이에 두고 숲과 사막이 나란히 늘어선 지형이 보여요. 페이건 님이 말한 장소가 저기 맞죠?
“응, 저기가 맞아. 출발할 때 한 번 말해 준 게 전부인데 그걸 기억한 거야? 역시 우리 아카이드는 참 똑똑하다니까.”
―히히.
폴리다고스를 출발한 게 그제 새벽이었으니 꼬박 이틀을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이드의 목소리에서는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숲 아무 데나 내려 주면 돼.”
―네! 그럼, 저기 보이는 가장 큰 나무 옆으로 갈 테니까 꼭 잡으세요.
활짝 벌렸던 날개의 폭을 좁힌 아카이드는 별똥별과도 같은 기세로 지면을 향해 내리꽃혔고.
그 과정에서 강 건너편에 위치한 사막 도시의 전경이 시야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착!
“그래그래, 수고 많았어. 난 잠깐 나무 위에 올라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네에!
아카이드가 좋은 위치에 착지해 준 덕분에 곧바로 주변 거목에 올라 강 건너편을 살필 수 있었다.
‘오늘로 장터가 개최된 지 일주일. 슬슬 몰려드는 모양이네.’
구불구불 뻗은 강을 따라 줄지어 몰려드는 선박들과 굼실굼실 모래 사구 너머로 연달아 등장하는 낙타 무리들.
아직 조용하기만 한 숲과 달리 사막 도시의 혼잡도는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한번 열린 바바루크는 3개월에 걸쳐 지속되는 만큼 사막 도시를 방문하는 상단 수는 계속해서 상승 곡선을 그릴 터.
인파와 돈의 향기 그리고 생명력과 탐욕으로 약동하는 도시의 전경을 두 눈에 똑똑히 새긴 채 나무에서 내려왔다.
―근데, 디게 신기하다. 고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여기는 푸르딩딩한 숲이고 저기는 바짝 마른 사막이네.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는데 이 지반 근처를 흐르는 마나의 성질이 굉장히 불안정하다나 뭐라나? 그러다 보니 이런 이질적인 풍경이 만들어지게 된 거래.”
―그런데 사람들도 참 이상해. 어차피 장사를 할 거면 숲보다는 여기서 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아? 그늘이 많아서 시원한 데다 물 뜨기도 편하고.
“세상일이라는 게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거든. 장사를 하기에는 이쪽이 더 편하지만 이 숲에는 독충이랑 몬스터들이 득시글득시글하거든. 독충과 몬스터를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느니 사막의 땡볕을 감수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엑! 여기, 몬스터들이 그렇게 많아? 그런데 왜 우리 앞에는 한 마리도 없어? 우리 털북숭이 덩치가 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려앉았으니 그 소리를 들은 괴물이 한둘이 아닐 텐데?
“왜긴 왜야? 그 털북숭이 덩치님이 우리 곁에 계셔 주는 덕분이지. 이 숲에 몬스터가 제아무리 많다 한들 감히 그리폰을 상대로 기 싸움을 벌일 정도의 배짱을 가진 놈이 있을 리 없잖아.”
―히히히, 에헴! 스승님, 페이건 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죠? 제가 이 정도나 되는 사나이랍니다. 엣헴!
뿌듯한 표정을 하는 아카이드의 턱밑을 쓰다듬어 준 후 녀석의 등 뒤에 비끄러매어 놨던 고기 주머니를 끌러서 날개 옆에 내려놔 주었다.
“네가 먹을 밥은 매일 저녁 8시마다 내가 이 근처로 가져다줄게. 혹시 중간중간에 배고프면 여기 안에 있는 훈제 생선이랑 고기를 먹어. 비워지는 대로 채워 줄 테니까 아껴 먹지 말고 팍팍 먹어도 돼. 알겠지?”
―네! 그럼 저는 이 숲에서 놀면서 페이건 님이 일을 마치기를 기다릴게요. 히히! 맛있는 냄새, 이 숲에는 어떤 재미있는 친구들이 살고 있을까?
거의 자신의 몸집만 한 고기 주머니를 끌어안은 채 눈을 반짝이는 아카이드.
워낙에 호기심이 왕성한 녀석이다 보니 처음 와 보는 숲을 둘러볼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듯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숲은 결코 만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카이드는 모든 마수의 제왕인 그리폰.
이 숲 안쪽에 아카이드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난 안심하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럼 잘 놀고 있어. 내일 저녁에 보자!”
―네, 페이건 님! 내일 봐용. 라무테 님도 잘 다녀오시공 스승님은 너무 과자만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시끄러! 칫, 저 녀석 점점 건방져지는 게 꼭 페이건 너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숲을 가로질러 강가에 도착하자 행선지가 사막 도시로 고정된 ‘자동 운항 나룻배’가 있었고.
삐거더덕.
내가 손때로 반질반질한 배 위에 몸을 싣자 나룻배는 둔탁한 몸을 움직이며 항해를 시작했다.
―일단 바바루크에 도착하면 뭐부터 할 거니? 실험국장이 부탁한 마도구 구입?
“아니요, 아직은 장터 초반인지라 준비 안 된 물건이 많아서요. 오늘은 이것저것 맛있는 걸 먹으며 도시 전반을 살펴볼 겁니다. 그… 선배님들이 부탁한 엽서도 사야 하니까요.”
―방금 말한 그 맛있는 거, 너만 먹을 생각은 아니지? 그치? 페이건.
“그래그래, 당연히 네 것도 사야지. 하지만 사람이 워낙에 많은 장소니까 돌아다니면서 먹는 건 안 되고 이따가 숙소에서.”
―그때까지 참을게. 오홍!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다.
통통통.
기껏해야 간식을 참는 게 전부인 주제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팍을 두드리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 롤빵이.
롤빵이의 가슴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나룻배는 강 건너편에 도착했고.
마침내 사막 도시에 입성한 나는 가장 향긋한 냄새가 나는 야외 주점에 들어가 앉았다.
“어섭셔! 흐흐, 아주 젊은 사장님이 오셨네. 그래, 뭘로 준비해서 내어 드릴까?”
“차가운 흑맥주 한 잔 그리고 고기완자랑 감자칩도 주세요.”
“우리 흑맥주는 독한 걸로 유명한데 젊은 친구가 괜찮으려나?”
“시원하기만 하다면 도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안심하고 내주셔도 좋습니다.”
“크! 우리 젊은 사장님이 아주 시원시원하네. 그럼 내가 사장님만큼이나 차게 얼린 흑맥주 한 잔 대령해 올릴 테니 잠깐만 기다리고 계셔!”
달그락.
잠시 후, 술과 안주가 담긴 쟁반이 앞에 놓였고 난 유달리 큼지막한 잔에 담긴 흑맥주를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꿀꺽꿀꺽.
탁!
“후우… 좋네. 그래, 맥주는 이 맛에 마시는 거지.”
맥주는 주인장이 공언한 것처럼 차가웠고 딸려 나온 안주는 먹음직스러웠다.
우적우적.
사막의 음식답게 고기완자 볶음에는 진한 양념이 배어 있었고.
다소 과할 정도로 진한 소금기와 향신료 덕분에 온몸이 활력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폴리다고스 생활도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이런 쪽이 더 편한 건 어쩔 수 없네.’
이렇게 야외 주점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먹고 있으려니 전생의 날들이 생각났고.
모처럼 느껴 보는 익숙한 기분 덕에 즐거운 기분으로 술과 안주를 비워 낼 수 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많이 파세요.”
“감사함다! 젊은 양반께서도 좋은 하루 보내십쇼!”
천막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햇볕이 이마에 그대로 와닿았고.
난 미리 준비해 둔 터번을 머리 위로 둘둘 감은 후 사람들로 가득한 골목 속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놈은 얼치기들의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 같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노인은 정체를 숨긴 경호원쯤 되는 모양이군. 노인이 경호하고자 하는 대상은 앞쪽의 여자인가? 모처럼 바깥 구경을 나온 아가씨를 비밀 경호라도 하고 있나 보네.’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 걸까?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아내는 특유의 행동거지가 그대로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각자의 의도를 가진 채 붐비는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
그 인파에 섞여 무심히 걷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흥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로세움이 개방되는 게 내일모레부터였지? 이야,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출전할까?”
“뭐, 매번 오는 사람들은 이번에도 참여할 테고. 상금의 규모가 배로 늘어난 만큼 참가하는 사람 수도 많아지지 않겠어?”
“하긴, 정식으로 왕국에 고용되지 않은 용병들이나 떠돌이 무사들에게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콜로세움이야말로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테니 기를 쓰고 참여하려 들겠지.”
목소리의 진원지는 서쪽 골목이었는데 골목 가득 운집한 사람들의 정면에는 커다란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콜로세움이라면… 투기장?’
흘려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왔기에 난 소리가 웅성이는 쪽을 향했고.
온갖 종류의 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대형 전단이 나를 반겨 줬다.
―콜로세움? 열정과 정열의 강철 투기장… 이게 뭐야?
‘뭐, 일종의 사설 결투장 같은 거겠지. 관객들은 시합에 나서는 투사들에게 돈을 걸고 투사들은 승리의 대가로 상금을 받는… 뭐 그런 거 있잖아?’
피 그리고 싸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가 결집되어 있는 장소를 홍보하는 전단이 붙어 있는 장소이니만큼 골목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 투기장에서는 최고 기록이 6연승이었든가?”
“그렇지. 그리고 그 전 대회 최고 연승 기록은 8연승이었어. 그 전전은 4연승이 최고였고.”
“아니, 이왕 싸움을 할 거면 10연승 정도는 해야지. 고작 8연승밖에 못 하는 것들이 무슨 용맹이니 열정이니 떠드는 거야.”
“이 친구, 뭣도 모르면서 말 함부로 하네. 이 사람아, 어디 연승이 말처럼 그리 쉬운 줄 알아. 자네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게 연승이면 17연승의 여기사가 이렇게까지 오래 기억될 일도 없어.”
17연승의 여기사라니!
안 그래도 적잖이 달아올라 있었던 흥미를 한층 더 자극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고.
내 귀를 쫑긋 서게 한 아저씨는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난 말이지 24년 전에 17연승을 하고 간 그 여기사를 내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야. 이렇게 거친 무대에서, 그것도 그렇게 젊은 여자가 17연승이라니! 이게 어디 믿을 수 있는 일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