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216)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6)화(216/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6)
…사방 천지에 모래투성이인 장소에 와 있다 보니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모래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 같지만, 시선을 멀리 돌리면 시시각각으로 모양을 달리하는 사구(砂丘)들이 뚜렷이 보이거든요.
먼 곳의 모래를 하염없이 바라본다는 게 참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당분간은 계속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럼 전 또 모래를 보러 갈 예정이라 오늘은 이만.
선배님께서도 향기로운 하루를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추신 : 다시 생각해 봐도 엽서를 굳이 전송 편에 실어 보내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배님과 코델리아나 선배님께서 굳이 이 방식을 원하신다니 계속 보내기는 하겠다만 아직도 아리송할 따름입니다.
저도 선배님들처럼 연륜이 쌓이면 두 분께서 굳이 이런 방식을 고집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걸로 오늘 치랑 내일 치는 끝.’
작성을 끝낸 엽서를 네 개의 봉투에 나눠 담은 후 봉인 절차까지 마쳤다.
이제 이 봉투를 여관 주인에게 건넨 후.
하루 간격으로 나눠서 발송해 달라는 당부를 하면 오늘과 내일의 할당량은 마무리되는 셈이었다.
‘늦어도 내일 안쪽으로는 입질이 올 테니 미리미리 마무리해 놔야지.’
장터 구석구석을 누비며 ‘치료술 전시회’를 펼친 지, 만으로 하루가 지났다.
지금쯤이면 ‘용한 솜씨를 가진 치료술사’가 바바루크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문이 아라반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
오늘 하루는 창밖으로 보이는 모래 구경이나 하면서 아라반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릴 예정이었기에 두껍게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걷어 낸 후 차가운 탄산수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퐁당.
그런데 탄산수가 담긴 컵에 막 얼음과 라임을 쪼개 넣는 작업을 완료한 바로 그때.
똑똑똑.
“계십니까?”
내가 머무르고 있는 방의 문 앞에서 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리는 진동의 기세나 무척이나 일정한 발걸음 간격으로 추측건대 나를 찾아 준 손님께서는 검사.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일류 검사인 듯싶었다.
‘빨라도 오늘 오후는 되어야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대응이 훨씬 더 빠르군. 딸아이를 생각하는 아라반의 마음이 그토록 절절하다는 뜻이겠지?’
“네, 지금 나갑니다.”
상큼한 과즙을 내뿜는다는 임무를 아직 다 마치지 못한 라임 조각을 쟁반 위에 내려놓은 후 방문을 열었고.
복도에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생김새를 한 중년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제 오후 동남쪽 공터에서 환자들을 치료해 줬던 분이 맞으실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전 상마르 협회에서 일하고 있는 ‘아카노’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저를 따라 이동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저희 상단의 지부장님께서 귀하를 뵙고자 하십니다.”
상마르 협회라… 그러니까 교역 상단의 지부장 정도로 위장을 하고 계신다 이 말이지?
“제가 견문이 짧은 터라 상마르 교역 협회와는 별 인연이 없는데 무슨 용무로 저를 보자고 하시는 걸까요?”
“그게 말입니다, 사실은….”
경호원의 입에서는 적당히 가공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난 들어 주는 척하며 만들다 만 라임 탄산수를 마저 조제했다.
“…이런 연유로 뵙고자 하십니다. 어떻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을는지요?”
이야기를 마친 경호원은 평정을 가장한(하지만 초조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애초에 적당히 속아 넘어가 주기로 마음을 먹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니 방문을 하도록 하지요. 다만….”
“다만?”
그리고 긴장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경호원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바로 가기에는 만들어 놓은 탄산수가 너무 아까우니 기왕 만들어 놓은 건 다 마시고 가는 걸로 하죠, 우리. 어떻게 제법 시원하게 잘 만들어졌는데 한 잔 맛보시겠습니까?”
* * *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30여 분간 이동한 끝에 도착한 아라반의 저택, 베일로 얼굴을 가린 하녀들의 뒤를 따라 도착한 저택 귀빈실에는 ‘상마르 교역 협회의 지부장’으로 위장한 아라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서 이런 이유로 귀하의 방문을 요청한 것이니 부디 정성을 다해 딸아이를 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물론 귀하가 기울여 주는 정성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할 생각이니 이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실 필요가 없소이다.”
출발하기 전 경호원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물론 그 전달 방식은 훨씬 더 고풍스러웠지만) 다시 한 번 아라반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고 난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지부장님, 따님에 대한 치료를 시작하기 전 드려야 할 말씀이 있는데 주위를 물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치료를 시작하기 전 보호자로부터 꼭 확인받아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알게 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 있는 일이라 그러니 주위를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당장이라도 환자를 보러 가자는 말을 할 줄 알았던 치료술사의 입에서 주위를 물려 달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던 걸까?
아라반은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턱을 감싸 쥐었고 그의 등 뒤로 늘어선 경호원들은 의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번쩍이며 나를 노려봤다.
“알겠소이다. 그리해 드리지. 뭣들 하는가? 손님께서 물러나라고 하지 않나? 다들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시게.”
“…그리하겠습니다, 나리.”
하지만 아라반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결국 귀빈실을 채우고 있던 하녀들과 경호원들은 자리에서 물러섰다(나를 향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이내 넓디넓은 귀빈실에는 아라반과 나를 포함한 단 세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하산이오. 수십 년 전부터 나를 도와준 내 분신과도 같은 친구이니 귀하께서는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소이다. 그러니 하실 말씀이 있거든 이제 편히 말씀을 해 보시오.”
“하산이라 합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지부장님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산이라 불린 사내는 아라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숙여 왔다.
‘경호 책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는 게 못마땅할 법도 한데 저리도 순순히 고개를 숙이다니. 검술 수양만큼이나 인내심의 수양 또한 깊어 보이는 남자로군.’
후룩.
아라반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가볍게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입안을 아련하게 채운 재스민차의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그 명성을 나날이 높여 가는 상마르 교역 협회의 지부장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폴리다고스에 재학 중인 페이건 클라디우스라고 합니다.”
“…!”
“…포, 폴리다고스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 전 저희 직원한테는 수행을 위해 여행 중인 수습 치료술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성함 또한 허드슨 머시기라고….”
두 눈을 부릅뜬 아라반과 수염을 일그러뜨린 채 따지고 들어오는 하산.
이런, 어차피 거짓말을 한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뭘 그리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그러실까?
“그야 당연히 거짓말이지요.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 있지 않습니까?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확인을 받아야 할 일이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알면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그럼 그 곤란하다는 게 우리가 아니라… 귀, 귀하께서….”
“네, 저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지라 제가 여기 와 있다는 걸 가급적이면 알리고 싶지 않거든요.”
달칵.
눈동자에 끼우고 있던 인공 각막을 벗고 얼굴 이곳저곳에 붙여 두었던 간이 위장 도구를 떼어 낸 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몇 가지 사소한 일들로 인해 제 인상착의가 이곳저곳에 알려진 터라 이런 도구를 사용한 것이니 부디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이보시오! 치료술사 양반, 아무리 사정이 있다 한들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는 건 너무한 일….”
“그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생각한 하산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라반은 손짓 한 번으로 그의 경호대장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놀란 건 사실이라오. 하지만 테시온을 지켜 낸 장본인께서 딸아이를 살펴 주신다고 하면 우리로서야 더욱더 반가운 일이지. 페이건 클라디우스 공자, 내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드리리다. 상마르 교역 협회의 서부 지부를 맡고 있는 ‘무하드’라고 하오. 테시온의 수호자로 명성이 자자한 공자를 모시게 된 점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외다.”
“…테시온의 수호자라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니요. 내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공자께서 이뤄 내신 눈부신 성과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들은 바가 많다오. 공자를 테시온의 수호자라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를 수호자라 부를 수 있겠소?”
과연 대륙 제일가는 교역 부족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인 2인자답다고나 할까?
아라반은 지난 7개월간의 내 행적을 줄줄 꿰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보여 줬고.
덕분에 나 역시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나름의 사정’ 때문에 정체를 가급적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셨던 공자께서 굳이 본인의 진짜 정체를 밝힌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도 괜찮겠소이까?”
“물론 괜찮습니다. 다만 그 전에 제가 보여 드릴 게 하나 더 남아 있는 터라… 어디에 뒀더라? 아, 여기 있구나. 지부장님, 혹시 이게 뭔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품 안에 들어갔다 나온 내 오른손에는 흑색으로 물든 상아 위에 번개를 새겨 넣은 명패가 들려 있었고.
그 물건을 확인한 아라반의 눈동자가 더욱더 확대되었다.
“그건… 폴리다고스에 계시는 에우리디케 경을 상징하는 명패가 아니오?”
“맞습니다. 사실 제가 말씀드린 바 있는 사정이라는 게 이 명패와 제법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요.”
솔직히 말하면 이건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팩셰르가 챙겨 준 꾸러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던 이 명패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그냥 반납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 왔던 이 상아 명패는 사막 한복판에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폴리다고스 실험국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명패까지 보여 준 이상 ‘나름의 사정’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실하다 해도 아라반이 꼬장꼬장하게 나오지는 못할 터.
“왜 이 타이밍에 제 정체를 밝혔느냐 물으셨죠? 사실 지부장님께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 부탁이라는 게 따님의 치료와는 무관해 보일 수도 있는 터라 이 명패로 사정에 대한 설명을 갈음한 것입니다. 이걸 보여 드리는 편이 지부장님께서도 더 편하게 수긍하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흐음, 어디 한번 속 시원히 말씀해 보시구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지부장님을 다시금 찾아뵙고 제안을 드리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 제가 드리는 제안을 한번 진지하게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전부요?”
“그렇습니다.”
“그때가 오거든 공자의 부탁을 무조건 들어준다는 확답이 아닌, 단순 고려로 괜찮겠소이까?”
“네, 진지한 고려면 충분합니다. 이래 봬도 저는 저와 상대방,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제안이 아니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는 사람이니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약속이 나와 상마르 협회의 서부 지부장 간에 맺어진 것처럼 보일 터.
하지만 아라반이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오늘의 약속은 ‘페이건 클라디우스와 마라카비탄의 2인자’ 간의 협정이 되는 것이다.
이 타이밍에 굳이 확약을 들이밀어 아라반의 가슴에 더 큰 부담을 안겨 줄 필요는 없었다.
아라반의 강직한 성품은 사막 전역에 정평이 나 있었고 그 인물평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진짜 신분을 숨긴 채 맺은 협정’이라 하여 나와의 약속을 나 몰라라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비록 다른 목적을 가진 채 이곳에 왔다지만 어쨌거나 무상으로 이 정도 호의를 베푸는데 나도 최소한의 인건비 정도는 건져서 나와야지.’
갑작스럽게 밝혀진 나의 정체.
그리고 더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팩셰르의 명패가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라반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봐. 왜 내가 이곳에 있는지 이유가 궁금해지기라도 했나? 그럼 나 말고 거기 당신 눈앞에 있는 팩셰르의 명패에다 물어보면 될 거야.’
갈등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라반.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연장자를 너무 내버려 두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 난 그의 결심을 도와줄 수 있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물론 제가 드린 부탁은 제가 지부장님의 따님을 성공적으로 치료했을 경우를 상정(想定)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흐음….”
내 입에서 따님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갈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아라반의 눈동자에 다시금 총기가 돌아왔고.
“알겠소, 그 제안 받아들이지. 내 공자의 말씀대로 하리다.”
‘마라카비탄의 2인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힘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아빠’를 향해.
나는 방긋한 미소를 보여 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따님을 만나 뵈러 가볼까요?”
* * *
똑똑.
“…누구예요?”
“아빠란다, 하하! 우리 공주님, 오늘 몸은 좀 어떠신가?”
길게 뻗은 내실 복도를 지나 도착한 아이의 방.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내 청을 아라반이 전폭적으로 수용해 준 덕분에 사용인들과 일절 마주하지 않은 채 아이의 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가 오늘은 우리 공주님이랑 같이 재미있게 놀아 줄 오빠를 한 명 데리고 왔단다. 자, 우리 공주님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아라반은 애정이 묻어나다 못해 뚝뚝 흘러넘치는 눈동자를 한 채 파리한 안색을 한 여자아이를 안아 올렸고.
그제야 내 존재를 감지한 여자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내 쪽으로 향하고는 첫인사를 건넸다.
“어! 되게 되게 잘생긴 오빠야다!”
앓아누운 지 보름이 넘은 터라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을 텐데도 여자아이는 싹싹한 인사를 건넸고.
그 귀여운 모습을 통해 이 아이가 평소에 무척이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은 가, 아니 코라예요.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페이건, 오빠는 페이건 클라디우스라고 한단다. 코라라니, 우리 아가씨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네.”
“아빠, 들었어요? 이 잘생긴 오빠가 나보고 아가씨래요! 히히, 잘생긴 오빠한테 예쁘다고 칭찬받았어!”
코라라는 이름도 가명이겠지.
가만있자, 아라반의 막내딸 이름이 ‘가넷’이었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우리 코라, 도대체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었을까?”
“아, 이거요! 이건 내 보물. 히히, 오빠도 같이 볼래요?”
우리가 막 방문을 열었을 때 가넷은 침상 위에 엎드린 채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든 화첩(畫帖)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아이가 저리도 열심히 들여다보는 화첩이라니.
그 정체가 궁금해진 나는 침대 한편에 엉덩이를 붙인 채 가넷을 향해 손을 뻗었고.
아이는 아픈 와중에도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화첩을 내밀었다.
“하하! 우리 아이의 장래 희망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검객이 되는 거라서 말이지. 몇 년 전부터 그 화첩을 아주 끼고 산다오. 클라디우스 공자, 혹시 이곳 바바루크 투기장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여검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소이까?”
“아… 네, 뭐 대충은요.”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한 채 화첩을 활짝 펼쳐 든 가넷.
병색이 완연한 고사리손 사이로 ‘색색의 가면을 뒤집어쓴 여검사’가 자아내는 활약상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가넷은 그 창백한 안색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검사님이 누구냐면요, 근처에 있는 콜로세움에서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불멸의 기록을 세운 아주아주 멋진 언니예요. 나는요, 어른이 되면 꼭 이 언니처럼 훌륭한 기사가 될 거예요!”
그리고 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공무가 바빠 어머니의 과거와는 잠시 거리를 두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군요. 어머니가 바바루크에 남겨 놓으신 흔적을 과소평가한 이 못난 아들을 부디 용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