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218)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8)화(218/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18)
채앵.
검을 쥔 팔을 길게 뻗자 새파랗게 물든 달빛이 티아매트 위로 내려앉았다.
푸른 달빛과 흑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고깃덩이를 세 덩어리째 흡입하고 있는 아카이드가 보였다.
―우걱우걱… 아, 잘 먹었다! 배불러, 히히히! 맛있는 걸 잔뜩 먹었으니까 오늘 밤이 새도록 날아다녀도 끄떡없어요!
―그럼 오늘 하루 잘 부탁해, 아카이드.
―제자야! 잘할 수 있지?
―네! 두 분 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스승님이랑 라무테 님을 아주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마침내 찾아온 미친 달의 시각.
그리폰은 강철보다 단단한 부리를 딱딱이며 각오를 다졌고 아카이드의 머리 위에 올라탄 마스코트들 또한 결의에 찬 눈동자를 반짝였다.
“라무테 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작전의 최우선 순위는 저택과 도시의 안전입니다. 제가 전언을 보내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 즉시 아카이드를 저택 근처에 착륙시키시면 됩니다.”
―응, 잘 알았어! 안전제일, 안전제일!
“모래 쥐들이 저택 안쪽으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래 쥐들이 제아무리 광증(狂症) 상태에 빠져 있다 해도 그리폰의 피어를 극복하지는 못해요.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 내에 아카이드를 착륙시키기만 하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걸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응! 만약의 경우가 발생한다 해도 전언이 도착하는 그 즉시 아카이드를 착륙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카이드, 만약에 지상에 착륙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거든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최대한의 피어를 발하도록 해. 겁에 질려서 쓰러지는 사람이나 가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상관없어. 최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건 모래 쥐가 저택으로 접근하는 걸 막는 거니까,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카이드를 보고 있자니 절로 가슴이 든든해졌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폭탄을 짊어진 모래 쥐’들이 아라반의 저택으로 달려가는 상황이 발생하는 일은 없겠지만.
보험이라는 건 든든할수록 좋은 법이니까.
―있잖아, 페이건. 작전 실패, 그러니까 네가 모래 쥐들의 유도에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나 돼?
“지금으로서 실패할 가능성은 1% 미만이야.”
―에이, 뭐야! 난 네가 하도 여러 번 당부하길래 실패할 가능성도 꽤 되는 줄 알았는데 고작 1%면 긴장할 필요는 없겠네.
“너한테까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뭐든지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솔직히 말하면 실패할 가능성은 1%가 아니라 0.1% 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몇 번에 걸쳐 비상시 행동 지침을 하달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아니 백만 분에 하나라도 ‘내가 손수 치료해 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저택’이 불바다가 되는 광경만큼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펄럭.
―그럼 우리는 이만 저택 상공으로 가 볼게. 페이건, 힘내!
―페이건 님, 힘내세용! 그럼 이따 봐요옹!
고작 한 번의 날갯짓으로 강력한 상승기류를 만들어 낸 아카이드는 곧바로 창공을 향한 도약을 시작했고.
이내 세 마리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새파란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나도 마무리 준비를 해 볼까?’
새카만 야행복을 걸친 후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는 복면을 뒤집어썼다.
미리 준비해 둔 투척용 단검 손잡이에 고리를(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이번에는 가급적 바늘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연결하고 티아매트의 손잡이에 천을 감는 걸로 준비는 끝.
고개를 돌리자 고지대에 우뚝하니 솟은 아타카크의 은신처가 보였고.
악의가 꿈틀거리는 복마전(伏魔殿)을 시야에 담은 채 오늘의 야행을 위한 축사를 읊조렸다.
‘암살의 기본은 자신의 등 뒤를 살피는 데 있다고 스승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지. 아타카크 중계소 분들, 지금쯤 꽤나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텐데… 어떻게 등 뒤는 잘 살피고들 계십니까?’
* * *
미쳐 버린 달빛으로 가득한 어느 저택.
“시작해.”
“알겠습니다, 조장님.”
푸른 달의 궤도가 절정에 다다른 걸 확인한 아타카크의 조장은 모래 쥐 우리를 개방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명을 받은 조원은 수천 마리의 쥐들로 가득 찬 우리를 향해 다가섰다.
쿵쿵쿵.
찌익찍.
“쿨룩!”
철제 우리가 개방되는 소리 사이로 조장이 토해 내는 둔탁한 기침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이놈의 사막 공기는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군.’
모래가 섞여 불어오는 혼탁한 바람에 새삼 짜증을 느낀 조장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조금만 참자. 오늘로 이 엿 같은 사막 생활도 끝이야.’
쿵쿵.
연달아 개방되는 모래 쥐 우리를 목격한 조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며칠에 걸쳐 자극제를 뿌려 준 데다 푸른 달까지 활짝 떠올랐으니 지금쯤 저 모래 쥐들은 미칠 듯이 흥분한 상태일 터.
우리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즉시 쥐새끼들은 아라반이 머무는 저택으로 달려갈 것이고.
놈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냄새를 뿜어 대는 야자수와 정면으로 충돌하겠지.
그리고 그 충돌의 여파로 쥐새끼들의 등 뒤에 매어 놓은 폭약에 불이 붙는다면?
폭발은 곧바로 연쇄 폭발로 번져 나갈 것이고 그리된다면 아라반의 저택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라반 놈이 제아무리 쓸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자신들의 공세를 막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즉, 모래 쥐가 아라반의 저택에 도착하는 것만으로 사실상 상황은 종료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찌익.
“응?”
그런데 당장이라도 목표를 달성한 듯이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구겨져 버렸다.
우리가 개방되자마자 야자수를 향해 내달려야 할 쥐새끼들이 꼼작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뭐야?”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바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장은 험악한 표정을 한 채 조원을 노려봤지만, 우리를 개방한 조원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결국, 조장은 자신의 오른쪽에 부복해 있던 조원을 향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너, 지금 당장 지하로 가서 모래 쥐의 포획을 담당한 놈을 데려와.”
“….”
“내 말이 안 들리나!”
거듭되는 답답한 상황에 짜증을 느낀 조장은 조원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 소리를 높였다.
“끄륵….”
“…!”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버린 조원… 아니, 조원이었던 송장의 목젖에는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단검’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비… 비!”
비상 상황이려고 외치려 한 바로 그때.
“컥!”
모래 쥐 우리를 개방했던 조원의 목이 잘려 나가는 모습이 조장의 눈에 들어왔고.
“…!”
그 모습이 조장이 이 세상에서 목격한 마지막 광경이 되었다.
우드득.
조장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가시가 잔뜩 돋은 밧줄이 그대로 조장의 목뼈를 으스러뜨려 버린 것이다.
“세 놈 잡았으니 이제 47명 남은 건가?”
세 갈래의 죽음이 순식간에 피어나 버린 저택 마당.
밤의 그림자만큼이나 은밀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사신’의 입술 사이에서는 참으로 계산적인 한마디가 툭 하니 튀어나왔다.
“20~25명 정도는 아라반의 저택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고 나머지 놈들은 바바루크 곳곳에 잠복한 채 상황을 살피고 있겠지. 총인원이 50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본부에 머무르고 있을 인원은 기껏해야 다섯 미만.”
마치 아타카크의 작전 계획서를 눈앞에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만 같은 정확한 분석.
“그럼 지하에 숨어 있을 두 명 정도만 잡으면 본거지는 완전히 접수하는 셈인가?”
암살 음모 그 자체는 얼마든지 사전에 분쇄할 수 있었음에도 페이건이 굳이 오늘을 기다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놈들의 목을 따는 것 자체는 어려울 게 없지만, 습격을 눈치챈 놈들이 기밀문서를 소각이라도 해 버리면 그건 곤란하지. 비밀문서가 사라진다면 이놈들에게 일을 맡긴 의뢰인을 찾아낼 방법이 요원해질 테니 말이야.’
만약 이 자리에 대부분의 조원들이 버티고 있었다면 페이건의 습격을 막아 내지는 못하더라도 보관 중인 비밀 자료를 소각하려는 시도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본부를 지키고 있는 인원은 기껏해야 다섯 명.
더군다나 세 명이 순식간에 당해 버린 마당에 기밀문서를 지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페이건은 느긋한 걸음으로 지하를 향했다.
“아! 깜빡할 뻔했네. 지하로 가기 전에 쟤들 먼저 풀어 줘야지.”
샤샤삭.
찌익.
페이건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수천 가닥의 그림자 밧줄이 모래 쥐와 화약을 연결하고 있던 끈을 순식간에 잘라 버렸다.
찍찍.
섬뜩한 그림자의 칼날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찍찍거리기에 여념이 없는 모래 쥐들.
목뼈가 으스러져 나간 조장의 코를 간질였던 모래바람.
만약 조장이 그 모래바람에 섞여 있는 매캐한 향내를 감지했다면 그의 마무리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섬세하지 못했고 모래 쥐들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이유를 끝내 파악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분 전.
은밀한 걸음으로 아타카크 중계소의 은식처에 도착한 페이건은 아타카크 가 사용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 약물을 담벼락에 발라 놓은 바 있었다.
은신처의 담벼락과 아라반의 저택.
서로 다른 방향에서 자신들을 흥분시키는 냄새가 동시에 풍겨 나왔으니 모래 쥐들이 갈팡질팡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지.”
쨍그랑.
페이건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유리병이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이 깨져 나갔고.
이내 은신처 앞마당은 청량한 향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찌익?
찌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한 채 콧구멍을 벌렁거리기 바쁘던 모래 쥐들이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페이건이 깨뜨린 병 안쪽에 들어 있던 진정제 덕분에 극도로 흥분한 모래 쥐들 또한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찌직찍.
잠시 후 모래 쥐로 가득했던 은신처의 앞마당은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평소의 모습을 되찾자마자 자신들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장소에, 그것도 떼거리로 몰려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래 쥐들이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쳐 버렸던 것이다.
‘이걸로 아마추어, 구경꾼들은 전부 퇴장.’
폭약을 아라반의 저택까지 날라 줘야 할 짐꾼들이 줄행랑을 쳐 버렸으니 폭약만이 남은 셈.
페이건은 매캐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폭약을 집어 든 후 기밀문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저택 지하를 향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선수들끼리만 한번 재밌게들 놀아 봅시다.’
* * *
타다다다닷.
푸른 달빛이 짙게 드리운 새벽.
한 무리의 남자들이 바바루크의 지붕 위를 부지런히 내달리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왜 쥐새끼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지? 은신처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은밀하지만 날카로운 발걸음으로 내달리는 남자들의 정체는 아타카크의 암살자들.
이중 절반 정도는 아라반의 저택 근처에서 매복 중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약속된 불길이 피어오르면 흩어져 있던 인원들이 살육전을 벌여 도시의 치안을 마비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저택 매복조가 아라반의 숨통을 끊는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길은 솟아오르지 않았고.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대원들은 허겁지겁 은신처로 복귀 시도 중이었다.
“2, 3조는 좌우 측면을 엄호하고 1조는 내 뒤를 따라 정문으로 진입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밤거리를 내달린 끝에 은신처에 복귀한 암살자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싸늘한 주검이 된 동료의 시선’과 ‘한데 모인 채 덩그러니 쌓여 있는 폭약’이었다.
“변수의 발생에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곧바로 원대 복귀를 선택하다니. 제법 괜찮은 임기응변이네.”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복면 남자.
“그런데 어쩌나, 조금 늦어 버렸네? 후우.”
복면 남자는 정말이지 멋들어진 실루엣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내뿜었고.
도깨비불처럼 점멸하는 남자의 파이프를 본 대원들의 낯빛은 창백하게 변했다.
파이프 담뱃불 따위야 알 바 아니었지만, 문제는 저 불빛이 점멸하는 장소였다.
복면 남자는 산더미처럼 쌓인 폭약 위에 올라탄 채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불이 붙다 만 담배 가루가 바람을 타고 휘날릴 때마다 대원들은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저… 저, 저 정도로 쌓인 폭약 위에 불이 붙기라도 한다면 이 저택은 물론 이미 폭발범위 안쪽으로 들어온 우리까지 무사하지 못할 거야!’
애초에 아타카크의 은신처보다 몇 배는 더 큰 아라반의 저택을 날려 버리기 위해 준비한 폭약이니만큼 그 양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었다.
“웨, 웬 놈….”
암살자 전원이 패닉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급박한 상황.
가장 용기 있는 단원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교섭을 시작하려고 한 바로 그때.
“피차 얼굴 마주한다고 반가울 사이도 아닌 데다 시간도 늦었고 하니 이만 끝냅시다, 우리.”
복면인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술 사이에 끼우고 있던 물부리를 놓아 버렸다.
“…!”
고열로 달아오른 데다 후끈한 불씨를 품고 있는 파이프 담배가 낙하하는 광경을 목격한 암살자들은 서둘러 담배를 향해 내달렸다.
투욱.
하지만 암살자들의 발걸음보다는 「엑셀」의 권능으로 끌어당긴 파이프의 낙하 속도가 조금 더 빨랐고.
“안 돼!”
암살자들과 상아 파이프 간의 거리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을 무렵.
콰아아아앙.
바바루크를 가득 메운 달빛을 순식간에 지워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 * *
“에구머니나!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그러게 말이야,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저택이 어떻게 단 하룻밤 사이에….”
본격적인 동이 터 오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남은 새벽.
불길에 휩싸인 채 전소되어 가는 저택 주변은 불구경을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물러나시오! 위험하니 물러나란 말이오!”
“현장 조사관들이 이동 중이니 당장 안전선 바깥으로 물러서시오. 이 시각 이후로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다면 화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니 다들 물러서시오!”
잠시 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치안 요원들이 도착했고 저택 주위를 빽빽하게 채우던 구경꾼들은 저택 주위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리, 화재 현장 안쪽에서 수십여 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시신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자들의 정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사막을 무대로 활동하는 암살자 클랜의 자취가 보이기는 하옵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지 않은지라 자세한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할 듯하옵니다.”
그런데 여타 구경꾼들과 달리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라반과 하산이었다.
“나리, 상황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일단은 빨리 대족장님이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셔야 하옵니다. 나리의 거처와 화재 현장이 제법 떨어져 있기는 하다만… 심상치 않사옵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한 하산은 지금 당장 바바루크를 떠날 것을 권유해 왔다.
“마침 아가씨께서도 완전히 기운을 회복하셨으니 나리께서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날이 밝기 전에 이동할 채비를 마칠 수 있사옵니다.”
“….”
“나리!”
“그래, 알겠네. 자네 뜻대로 하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보기에도 이 화재는 심상치 않아. 마음 같아서는 이 화재에 숨겨진 내막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하산의 거듭되는 재촉 앞에 결국 아라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곳에 자신 혼자 와 있었더라면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 더 도시에 머물며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고 아직 어린 가넷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하산, 나에게 30분만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무슨 용무라도 있으신지요?”
사정이 이렇다 하여 쫓겨 가는 패잔병과 같은 몰골로 바바루크를 떠날 수는 없는 일.
도무지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그리고 어쩌면 오늘의 화재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치료술사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고.
아라반은 황금 부족 2인자로서의 위엄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와 내 딸아이는 이곳에서 큰 은혜를 입은 바 있다네. 갈 때는 가더라도 그 은혜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