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23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30)화(230/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230)
―지그문트 경, 그간 격조했사온데 어떻게 편히 지내셨는지요?
“허허! 외딴곳에 머물고 있는 늙은이에게 편히 지내지 못할 이유랄 게 뭐 있겠습니까? 다만 요즘 들어 일상이 지나치게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던 차였는데 반가운 분께서 연락을 주시는 덕분에 그것도 옛일이 되었습니다.”
마탑 ‘천공의 눈’의 마스터이자 유리안과 크리스틴의 스승이기도 한 지그문트의 입가에 합죽한 미소가 지어졌다.
좀처럼 만남을 청해오는 법이 없는 노(老)드라콘으로부터 온 교신 요청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것이다.
―학기 말이 다가옴에 따라 일부 교수들 사이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사온데 이 부분에 대한 언질을 드리기 위해 만남을 청했습니다.
“흐음… 그래요? 안 그래도 그치들이 뭔가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습니다. 원래 폭이 좁은 사람들일수록 ‘끝’이라는 단어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니까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듯한 키에르고의 발언에 지그문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물론 수상한 교수들의 동향을 파악한 문건은 ‘요아힘’이나 ‘팩셰르’를 통해서도 주기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국장들의 보고가 품고 있는 가치와는 별개로 키에르고를 통해 올라오는 동향 파악은 무척이나 유용했다.
요아힘이나 팩셰르의 감이 제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폴리다고스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왕들이었고.
그렇다 보니 취할 수 있는 시선의 높이 또한 한정되기 마련이었다.
반면 키에르고는 벌써 수십 년째 ‘폴리다고스의 밑바닥’을 거닐며 자신만의 첩보망을 구축해 왔으니.
그 풍부한 정보망을 통해 입수되는 보고서는 언제나 요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 차시를 통해 전달해 주시는 정보는 그 양이나 정보가 유독 풍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혼자서 이 정도의 정보를 수집하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주 장한 일을 해내셨습니다그려.”
키에르고가 입수한 정보를 듣고 있는 내내 지그문트의 고개는 연신 위아래로 끄덕여지기를 반복했다.
지그문트를 포함한 천공의 눈 수뇌부 전원은 키에르고가 지난 수십 년간 보여 준 헌신에 대하여 더없이 만족하며 항시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키에르고의 행동 중에 불만스러운 점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이 드라콘이 철저하게 개인행동만을 고집한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정보 활동이라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지라.
지그문트는 키에르고에게 이미 여러 차례 자신들의 도움을 받을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자신들의 도움을 받으면 활동의 효율 또한 높아질 것이고 신변의 안전 또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그문트의 제안이 숱하게 있었지만.
그때마다 키에르고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이건 제가 반드시 치러야 하는 속죄의 일환입니다. 죄를 씻어 내고자 걷는 길에 약간의 위험이 있다 한들 어찌 감히 죄인이 몸을 사릴 수 있겠습니까.”
키에르고는 꼿꼿한 소나무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도움을 마다해 왔고.
오롯이 혼자서 폴리다고스 인근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긁어모아 온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 만남을 통해 전달된 키에르고의 정보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이전보다 훨씬 더 풍부했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수혜자인 지그문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 들어 귀인을 만나 새로이 사업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그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온 덕분에는 요즘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생긴 여유를 정보 활동에 투자하다 보니 평소보다 세밀한 사항을 알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귀인이라 하셨습니까? 흐음… 이 사람이 드리고자 하는 도움은 번번이 거절하시던 분께서 귀인을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다니. 축하드려야 마땅할 일이지만 어째 기분이 묘해지려고 하는군요….”
지그문트의 입에서 짐짓 짓궂은 농담이 터져 나왔다.
물론 절반 이상은 농의 의미가 담긴 발언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진심이 아예 담겨 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키에르고가 주변을 경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도 지그문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주겠다는 도움은 한사코 거절하던 친구가 다른 사람의 손을 덥석 잡아 버렸다니.
천공의 눈 마스터의 입장에서는 이 자존심 높은 드라콘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려 버린 수수께끼의 인물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굽니까? 키에르고 경과 손을 잡는 영광을 누렸다는 그 귀인의 정체는?”
―사실 탑주께 교신을 청한 이유 중에는 귀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그문트 경께서는 인재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신 분 아닙니까? 경께서 인재를 선별하는 기준이 엄격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 학생이라면 틀림없이 경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 그러니까 경과 손을 잡은 사업 동지가 학생이라는 말이군요.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길래 그 어린 나이에 경과 동업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워낙 유명한 학생인지라 지그문트 경께서도 그 이름 정도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경의 다른 제자 분들과 비교하면 흠흠… 다소 과격하고 난폭한 점은 있으나 그 재능과 실력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성품 또한 다소 날카로운 면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올곧고 예의 바른 학생입니다.
‘학생’ 그리고 ‘난폭과 과격’.
참으로 익숙한 이 말을 듣는 순간 지그문트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의 이름이 불쑥 솟아올랐다.
[어떤 사람이냐면요. 착해요! 물론 생긴 거는 전혀 안 착하게 생겼지만… 아무튼 진짜 착해요. 말투가 좀 쌀쌀맞아서 그렇지 걔는 노력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항상 존중을 보이거든요. 스승님께서 그러셨잖아요. 그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거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면 된다고.] [그런데… 처음에는 스승님께서 걔를 좀 싫어하실지도 몰라요. 애가 좀 막무가내인 데가 있어서…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일단 박살부터 내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지 뭐’ 이런 모습도 종종 보이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런 모습이 참 마음에 들지만 히히!]교신할 때마다 제자가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통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많은 정보를 알게 된 소문의 신입생.
다소 과격하고 까칠한 면모가 있지만 올곧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실력만큼은 더없이 확실하다는 친구.
키에르고가 귀인을 설명하는 방식과 제자가 그 친구를 설명하는 방법이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그문트는 합죽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흐음… 경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귀인 말입니다. 저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혹시 모르니 말씀해 보시지요.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 *
‘약간의 소란은 발생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옳은 방향이니만큼 나도 협조하는 수밖에.’
서신에 담긴 내용은 묵직했지만 ‘데일 애틀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폴리다고스에 머무르며 쌓아 온 경력이 있었기에 자신 앞으로 도착한 서신이 협조 요청서의 탈을 쓴 개수작이라는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신에 범벅이 되어 있는 악의와 탐욕에도 불구하고 데일은 자신의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이곳 폴리다고스를 ‘고귀하고 품격 있는 귀족 중심의 세상으로 유지한다는 지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불결함은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전부 다 알크페인 그자 때문이야. 그 건방진 놈이 본인의 역할만 제대로 수행했어도 내가 이런 짓까지 하며 손에 진흙을 묻힐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규율국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애틀리의 얄팍한 턱 아래에 매달린 염소수염이 파르르 떨려 왔다.
마음 같아서는 뼛속까지 ‘올곧은 귀족 의식’으로 가득 찬 자신이 ‘귀족주의파’의 수장 역할을 맡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실력부터 위상, 하다못해 가문의 무게까지 자신은 알크페인 무라노어보다 앞서는 점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알크페인이 귀족파의 대표로 활동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깐깐하고 결벽증적인 성향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과의 격차가 워낙에 현격했기에 애틀리는 지난 십수 년간 불만을 억누른 채 알크페인의 활동을 지켜봐 왔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개잡종’ 같은 놈이 1학년 대표로 임명되는 참극을 목격한 순간 애틀리의 분노는 그야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신성한 폴리다고스가 그런 천박한 잡종 놈의 손에 의해 더럽혀지고 있는데 귀족파의 대표라는 자가 그 천인공노할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다니.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 일인가!’
비록 그 개잡종을 지지하는 요아힘 벤제르센과 팩셰르 에우리디케의 기세가 심상치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족파의 수장이라면 그 자리에 드러눕는 한이 있더라도 그 끔찍한 결정은 막았어야 했거늘.
[페이건 클라디우스는 본인이 다른 후보자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월등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수차례 증명한 바 있습니다. 저도 클라디우스의 후예가 학년 대표로 임명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지만, 억지까지 부려 가며 정당한 후보자를 막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하고 물러서시지요.]알크페인은 위의 말을 끝으로 자신을 비롯한 열혈 귀족주의자들의 항의 방문을 내쳤고.
1학년 대표라는 숭고한 자리는 결국 근본도 없는 개잡종의 발길질에 더럽혀지고 말았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변질되고 있어. 이번 일을 계기로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간다.’
바짝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데일 애틀리는 다시금 각오를 되새겼다.
비록 요아힘 벤제르센의 기세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폴리다고스 내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건 자신을 포함한 귀족주의자들이었다.
올곧은 정신과 기백을 간직한 순혈 귀족주의자들이 자신의 기치(旗幟)하에 모여든다면 이미 벌어진 과오를 다잡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
‘페르디난드는 소중한 귀족 정신이 이룩한 고귀한 가문이자 우리의 숭고한 정신을 지켜 나갈 보루 중 하나. 그런 보루가 천한 평민의 피가 섞인 잡종의 손에 들어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이번 일을 시작으로 잘못되어 가는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것이다!’
전달받은 서신을 한껏 움켜잡으며 데일 애틀리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어쨌거나 페르디난드 공작의 피가 절반 정도 섞인 소년이 피투성이가 된다는 게 아주 조금 안타깝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의를 달성하기 위한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아스트라 페르디난드가 죽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을 억누르기 위해 데일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을 다시금 중얼거렸다.
‘기껏해야 한쪽 팔과 눈을 도려내고 마나 회로를 망가뜨리는 게 전부야. 만신창이 폐인이 된 아스트라를 후계자 자리에 계속 앉혀 놓을 수는 없으니 페르디난드는 다시금 후계자를 정하게 되겠지?’
테시온 쟁탈전 당시 목격한 바 있는 ‘순혈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소녀’를 떠올린 데일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후계자 자리는 조로스터의 딸이라는 그 아이가 차지하게 될 테고 그럼 그걸로 페르디난드의 오염은 막을 수 있어. 그래, 서두르지 말자. 일단은 페르디난드를 지키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
* * *
“클라디우스 공자,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국장님으로부터의 호출인가요? 이상하네… 호출령이 있었다면 우리가 먼저 알았을 텐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호출령 같은 건 없었구요. 그저 제가 국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찾아온 겁니다. 국장님을 만나 뵙고 의논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는데 안쪽에 계실까요?”
실험국장실 앞에 도착하자 몇 번의 방문 덕분에 제법 익숙해진 비서실 직원들이 알은체를 하며 손을 흔들어 줬다.
“어머! 호출령이 아니라 공자께서 먼저 국장님을 찾아온 거라구요? 이게 웬일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호호, 그런데 어쩌죠? 국장님께서는 지금 중차대한 실험 중이시거든요. 그리고 국장님은 실험 중에 타인의 방문을 굉장히 꺼리시는지라….”
“아, 그래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갈 테니 국장님께 제가 찾아왔었더라고 말씀 좀 전해 주시겠어요?”
“네, 그렇게 할게요.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응답이 있을 테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비서실 창구를 지키던 직원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찰나.
“잠깐! 클라디우스 공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창구 직원의 선배로 보이는 직원이 나를 붙잡았다.
“지금 안쪽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선배, 지금 국장님은 실험 중이신 터라 외부 방문은….”
“알아, 그건 나도 아는데 방문해 주신 분이 클라디우스 공자잖아. 국장님께서 실험을 방해받는 걸 싫어하시는 건 맞지만 그것도 방문 나름인 법이니까. 공자, 괜찮으시다면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 예상대로라면 10분 이내로 공자님을 안쪽으로 들이라는 명이 떨어질 거예요.”
선배 직원은 베테랑의 풍모가 물씬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 보인 채 나를 안내했고.
“허브티 한잔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요. 공자님께서 한번 다녀가 주시면 최소 1주일간은 실험국 분위기가 좋아지거든요. 감사는 오히려 저희가 드려야죠. 호호!”
푹신한 소파에 앉은 내 앞에는 유달리 고급스러운 향을 내뿜는 허브티가 놓였다.
후룩.
찻잔에 입을 대자 팩셰르의 고약한 성질머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향긋한 내음이 입안을 적셔 왔다.
‘데일 애틀리, 아소토 왕국의 수도. 여기에 아일리 바스티아까지. 그야말로 개판이군.’
하지만 향긋하기만 한 내음과 달리 팩셰르의 응답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늪지의 밑바닥처럼 축축하기 그지없었다.
초대장을 받은 지 일주일.
아소토 왕국의 수도로 파견될 사절단의 총규모며 그 구성원은 점점 더 명확해졌는데.
그 명확성이 높아질수록 내 가슴 속에 드리운 의문 또한 짙어져만 갔다.
‘꽤나 오랫동안 학사 업무에 빠져 있던 데일 애틀리라는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 인솔을 맡은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루드비히 안피노 놈이 지배하고 있는 땅으로 가기까지 해야 한다? 거기에 아일리 바스티아라는 혹까지 붙여서?’
데일 애틀리라는 놈이 총인솔을 맡고 있다는 점.
그리고 루드비히가 운영하고 있는 의문의 암살자 집단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한층 더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아일리 바스티아의 사절단 합류였다.
사절단은 저학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게 원칙이기는 하다만 아일리 바스티아는 지난해 가장 우수한 연구 성과를 거둔 학회의 수장.
그런 그녀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수상쩍은 징조로 가득한 이번 사절단에 아일리 바스티아라는 변수가 추가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었기에 나 또한 곧바로 움직임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놈들의 수상쩍은 거동에 대한 대응 방안을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팩셰르의 연구실이었던 것이다.
‘놈들이 예상하고 있는 궤도 내에서, 더군다나 놈들과 같이 움직여서는 승산이 너무 낮아.’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뻗자 아직까지도 빳빳하기만 한 초대장이 만져졌다.
‘자신들이 준비한 축제에 참여해 달라는 호의’로 가득 찬 것 치고는 지나치게 서늘한 감촉.
꾸깃.
정체 모를 한기를 발하고 있는 초대장을 그대로 구겨 버리며 다시금 다짐했다.
‘내가 먼저 현장을 찾아가서 상황을 살핀다. 그리고 개별 활동을 하면서 놈들의 틈을 찔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