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31)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1)화(31/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1)
마침내 도착한 석문.
나에게 이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 하여 석문이 통째로 열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우웅.
듣기 좋은 진동음과 함께, 사람과 말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이 석벽에 뚫렸고 난 망설임 없이 안쪽으로 진입했다.
―폴리다고스, 영원한 배움의 장에 첫발을 내딛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두터운 석벽을 절반 정도 통과했을 무렵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어느새 나를 태운 흑마는 교내로 진입해 있었다.
다그닥.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직각으로 뻗어있는 푸른 대리석 바닥.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좌우로 배열해 있는 각종 나무들이었다.
‘배플러 나무, 어린 종다리 화목, 저기에는 하늘 껍질 관목까지.’
그 하나하나가 상당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나무들이 평범한 정원수(庭園樹)처럼 배열된 광경.
폴리다고스 특유의 넘치도록 풍부한 부(富)의 향연을 시야에 새겨 둔 채 난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조용하군. 이상하리만치 조용해.’
가멸차기만 한 광경에 두텁게 드리워져 있는 건 다름 아닌 적막이었다.
안내인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요.
사람을 불러 놓고 의도적으로 박대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 테니 이 낯선 적막은 나를 이곳으로 호출한 이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게 옳을 듯했다.
‘팩셰르, 아무도 만나지 말고 교내로 진입하는 즉시 자신에게 오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다시 한 번 서신을 꺼내 든 후 발신인의 이름을 천천히 되새겼다.
팩셰르. 마법의 길을 걷기 위해 자신의 성마저 버린, 폴리다고스 내에서 가장 괴팍한 성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실험국의 국장.
“그동안 수고했어.”
히이이잉!
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작별인사를 하자 녀석은 한차례 울음을 터뜨린 후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 아카데미 소유인 흑마를 떠나보낸 후 난 약속된 장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대리석 바닥이 점멸하며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는 덕분에 길을 잃거나 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팩셰르라는 사람이 널 이곳으로 바로 부른 거지? 네가 성 밖의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바로 성벽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람이 손을 써 준 덕분이고?
‘응.’
―헤에, 이런 특별대우를 자기 맘대로 하는 걸 보면 이 팩셰르라는 사람 되게 높은 사람인가 보다.
‘높지. 폴리다고스의 지상을 관장하는 7명의 국장 중에 한 명이니까.’
―그럼 이 팩셰르라는 사람이 여기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거야?
‘그건 아냐. 진짜 높으신 분들은 지상이 아니라 저기 하늘에 머물고 계시니까.’
손가락을 뻗어 저 아득한 상공에 둥실 떠 있는 고성을 가리키자 롤빵이가 휘둥그레한 눈동자를 하고 그쪽을 바라봤다.
‘결국 폴리다고스의 큰 방침은 저곳에 있는 각종 위원회, 그리고 위원회의 위원장들로 구성된 수석 의회에서 결정돼. 일곱 명의 국장들은 그 위원회의 위임을 받아서 지상을 운영하는 거야.’
―흐음, 그럼 그 수석 의회라는 건 어떤 사람들이 있는 건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폴리다고스는 공중 고성에서 벌어지는 일은 철저하게 대외비로 취급하니까. 물론 정황을 통해 어떤 사람이 영입되었고 그 사람이 어떤 직을 수행하고 있구나 정도를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거든.’
―으음, 알겠다! 그러니까 진짜 큰일을 처리하는 높은 사람들은 저기 공중 고성에서 둥둥 떠 있는 거네. 그리고 그 높은 사람들로부터 위임을 받은 국장이라는 사람들이 이곳 지상의 일을 관장한다는 말이지?
‘100점까지는 아니지만 대충 정답.’
롤빵이에게 쉽게 이해를 시켜 주기 위해 국장을 수석 의회의 부하처럼 표현하기는 했다만 사실 7인의 국장은 위원회의 단순 하수인 격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중대한 일이 아닌 이상 수석 의회는 관망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폴리다고스는 국장들의 뜻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권력 또한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건 그럼 너를 오라고 한, 이 팩셰르라는 사람은 어떤 국을 담당하고 있는 거니?
‘실험국입니다. 일곱 개의 국 중에서도 가장 학술적이고 폐쇄적인 것으로 알려진 국이지요.’
―어머! 가장 폐쇄적인 국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직은 신입생인 너를, 그것도 특별대우까지 해 가면서 호출했다고? 무슨 이유일까?
‘그거야…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겠죠.’
점멸하는 대리석을 따라 걸음을 옮긴 지 삼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침내 외로운 여정 또한 끝을 맞이했다.
창공을 향해 우뚝하니 솟은 첨탑.
첨탑의 입구에는 실험국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 아래에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이건 클라디우스 맞지? 팩셰르 교수님께 너를 안내하라는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어.”
갸름한 턱선과 호리호리한 체구.
하지만 소년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올바른 검의 길을 걷는 기사들 특유의 강인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백발과 강인한 눈동자가 유독 인상적인 소년.
그리고 소년의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검을 입에 문 채 날개를 활짝 핀 그리폰을 형상화한 적색 문양.
이 정도까지 단서가 주어진 이상 소년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하는 게 더 어색한 일.
나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건넸다.
“설마 페르디난드 공작가의 후계자께서 나를 맞이하러 와 주실 줄은 몰랐는걸. 아무튼 반가워, 페이건 클라디우스라고 해.”
“페르디난드의 ‘아스트라’야 만나서 반가워, 그런데 내가 교수님의 명을 받아 네 마중을 나온 게 이상한 일인가? 어차피 너나 나나 이곳에 온 이상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는 입장인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야.”
“네가 아닌 다른 친구가 나를 맞이하러 나와 그런 말을 했다면 나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거야. 하지만 너 같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지. 누가 뭐래도 넌 페르디난드 공작 각하의 진전을 이어받고 있는 몸이니까.”
실물을 본 건 처음이지만 워낙에 유명한 녀석이었기에 난 눈앞의 소년, ‘아스트라 페르디난드’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채 스물이 되기도 전에 ‘대륙 5대 명검 알폰스 페르디난드’의 진전 대부분을 이어받은 검의 천재가 올해 폴리다고스에 입학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워낙에 짜했던 탓에 도저히 모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 신입생인 아스트라가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녀석 역시 특별대우를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질시와 분노에 찬 시선을 다발로 받아야만 했던 나와는 달리 이 녀석이 석문을 통과할 당시 고까운 시선을 던진 신입생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아스트라 페르디난드’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어쨌거나 나는 교수님들의 지도를 전력으로 따라야 하는 신입생이니까. 그리고 이상함의 정도로 따지자면….”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스트라의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보다는 늑대인간을 단칼에 베어 낸 치료술사 신입생 쪽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벌써 알았어? 소문 참 빠르네.”
“불쾌했다면 사과하도록 하지. 동기의 개인사에 대해 딱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워낙에 시끄러운 사건인지라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
아스트라의 입가에 페르디난드 공작가의 도련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의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그럴까? 무척이나 오랜만의 일이야.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사과할 것 없어. 검성의 후계자께서 나를 알고 있다면 나야말로 영광일 따름이니까.”
그 미소에 답해 주기 위해 나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조금 전 말을 끝으로 아스트라는 등을 돌려 버렸다.
“따라와. 교수님과 다른 동기들이 너를 기다리고 계셔.”
“다른 동기?”
아스트라는 대답 대신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고, 난 그 깊고도 고요한 발걸음을 따라 팩셰르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교수님, 페이건 클라디우스를 데려왔습니다.”
팩셰르 교수의 연구실은 꽤나 깊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지만 직선형 통로가 뚫려 있었기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와.”
팩셰르 교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바깥세상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연구실 풍경이 한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페이건 클라디우스까지 여덟 명, 이걸로 전부 도착한 셈이군.”
역시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이 공간의 주인 팩셰르 교수였다.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꼿꼿한 허리.
신경질적인 눈동자 아래에 자리 잡은 외알 안경.
그리고 안을 채울 내용물이 텅 빈 채 허리띠에 쑤셔 박혀 있는 왼쪽 소매까지.
지상에 남겨진 폴리다고스의 7분의 1을 지배하는 노교수는, 세간에 알려진 모습 그대로의 형상을 한 채 나를 주시했다.
“페이건 클라디우스라고 합니다. 이렇듯 교수님을 뵙게 되어….”
“인사는 그쯤이면 되었으니 너도 저기 옆에 가서 서도록.”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까닥이는 교수의 턱.
그 눈동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스트라를 포함한 7명의 신입생이 각자의 표정을 한 채 도열해 있었다.
‘오벨리언, 마쿠라… 그리고 저기 가장 끝에 서 있는 건 길버트?’
팩셰르의 지시를 따라 이동을 하는 와중에도 난 신입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늘어서 있는 신입생들 중 몇몇은 상당한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얼굴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너희들은 이번 학기를 기해 폴리다고스에 적을 두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너희들 전원은 향후 수년간 이곳을 배움의 터전으로 삼아 각자 재능을 개화해 나갈 의무를 가진 몸이라는 뜻이지.”
내가 끝자리에 서기 무섭게 팩셰르는 우리를 이곳에 소집한 이유를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뜻을 둔 놈들이라면 우리 폴리다고스가 매해 각 학년을 대표할 수 있는 학년 대표를 선발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
팩셰르의 입에서 ‘학년 대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몇몇 신입생들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다른 학년들은 학기 초에 학년 대표를 선발하지만 신입생들은 그 절차가 조금 달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는 학교와 주변을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기에 신입생 학년 대표 선발은 6개월 후에 이뤄질 예정이다.”
학년 대표 선발 일정까지 공개되자 신입생들을 휘감은 흥분이 한층 더 기세를 더했다.
“그리고 학년 대표 후보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발하는 게 원칙이다만 위와 동일한 사유로 이번 신입생들의 경우 추후 본 선거에 입후보할 예비 후보들을 교무위원회에서 선발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주먹을 움켜쥐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모양새를 보건대 학년 대표 후보를 노리고 있는 건 한 두 명이 아닌듯했다.
“이쯤 되면 다들 눈치를 챘겠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너희 여덟 명은 신입생 학년 대표 예비 후보로 선발되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상시 숙지한 채 학업에 매진하도록. 알겠나?”
“알겠습니다. 교수님!”
쩌렁쩌렁한 대답 소리.
그리고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신입생들은 재빨리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향후 6개월간 숨 가쁘게 펼쳐질 학년 대표 선발 레이스에서 과연 어떤 놈들이 자신과 경쟁을 하게 될지 조사에 나선 것이다.
“….”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시선은 한 곳, 정확히 말하면 내 얼굴로 모아졌는데 한데 모인 시선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야? 우리 같은 대귀족의 자제들이 어울려 경쟁하는 판에 왜 저런 미꾸라지 한 마리가 껴 있는 거지?’
딱히 그 경박한 의도를 숨길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이는 노골적인 시선.
나를 향해 불편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는 건 오직 한 명, 아스트라뿐이었다.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뭐지?”
결국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건 껑충한 키를 가진 근육질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길버트 맥도닐’.
뛰어난 무투가를 배출하는 것으로 이름 높은 권법 명가 ‘맥도닐 공작가’의 2순위 후계자쯤 되는 녀석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예비 후보를 선발하는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게 궁금한 이유는?”
“저는 물론 교무위원회의 혜안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적합하지 않은 예비 후보자가 끼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그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한 질문.
“길버트 맥도닐.”
“네, 넵. 교수님.”
“네놈이 먼저 내 질문에 답을 한다면 나도 그 질문에 답을 주도록 하지.”
팩셰르 교수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들어 외알 안경을 밀어 올린 후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그, 그게 아니라 교수님.”
“대답해라. 길버트, 우리의 결정에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게 무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교무위원회가 결정한 일에 감히 네 놈 따위가 추가 설명을 요구해?”
“교, 교수님.”
팩셰르 교수의 나지막한 질책 앞에 건장하기 짝이 없던 길버트의 체구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멍청한 놈, 내가 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든가 했어야지. 보아하니 맥도닐 가문의 위세에 취해 팩셰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망각한 모양이군.’
물론 길버트가 가지고 있는 맥도닐 가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맥도닐 가문은 아스타 왕국의 중추를 이루는 명문가였고, 길버트에게는 산하 기관을 통해 폴리다고스에 입학한 이후 지금도 고학년에 재학 중인 친형 또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좋지 않았다.
팩셰르는 폴리다고스의 지상을 지배하는 일곱 명의 왕 중 하나였고, 적어도 폴리다고스 내에서 맥도닐이 가지는 위상은 팩셰르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원 해산하도록.”
결국 길버트는 울상이 된 얼굴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경박했던 주둥이 놀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팩셰르는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괜찮아. 너무 신경쓰지 마.”
“그래. 처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뭐.”
해산 명령에 따라 신입생 무리는 세 갈래로 나뉘어 걸음을 옮겼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서 나가는 아스트라.
의기소침해진 길버트를 위로해주는 신입생 무리.
그리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나, 페이건 클라디우스.
“잠깐.”
한데 해산 명령 이후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던 팩셰르가 돌연 입을 열었다.
“페이건 클라디우스, 너는 자리에 남아.”
팩셰르가 던진 의외의 한 마디에 신입생들은 모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는데, 이는 아스트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놀라는 일이 없을 것만 같던 아스트라 페르디난드에게도, 나 홀로 이 자리에 대기할 것을 명한 팩셰르의 명령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층 더 커다래진 신입생들의 동공 사이로 팩셰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페이건 클라디우스를 제외한 인원은 즉각 해산하라고 했다. 내 말이 안 들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