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32)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2)화(32/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2)
“정신 나간, 완전히 미쳐 버린 외팔이 영감! 성격이 저렇게 지랄 맞으니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갔지. 소문은 익히 들었다만 정말 지랄 같은 성격의 노인네잖아.”
연구실을 빠져나온 직후, 길버트의 입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의 뾰족한 눈동자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했던 울분을 풀겠다는 듯, 팩셰르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길버트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냥 그러려니 해. 실험국장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
“물론 알고는 있었지. 그래도 팩셰르는 요아힘 벤제르센 그 미치광이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우리 같은 대귀족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팩셰르도 요아힘이랑 다를 게 없었나봐.”
지상의 폴리다고스를 분점(分占)하는 일곱 명의 국장 개개인에 대한 성향 파악은 이미 끝난 지 오래.
대귀족에 대한 친화도를 기준으로 분류를 할 경우 팩셰르는 중립 정도에 해당하는 인물, 그 중립 성향을 믿고 깝치다가 모진 꼴을 당한 길버트로서는 작금의 상황이 짜증 날 수밖에 없었다.
“자, 짜증 나는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 같이 차라도 마시러 갈까? 우리도 이제 어엿한 폴리다고스의 학생들인데 그 훌륭하다는 커피 맛 좀 봐야지?”
“그래, 거기 가자. 나 언니랑 오빠들한테 얘기 들을 때마다 꼭 가고 싶었어.”
“나도, 나도 갈래!”
분홍빛 리본이 인상적인 여학생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북돋우자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리 카페테라스 안에서 마시지 말고 저기 성벽 위로 올라가서 마시자. 아까 보니까 아직도 교내로 못 들어온 놈들은 숲에서 먹고 자고 하던데, 위에서 그걸 내려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오오! 좋은 생각!”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만함을 뽐내며 신입생들은 의기투합을 했다.
그렇게 6인의 신입생이 깔깔거리며 카페테라스를 향할 때.
“어! 아스트라? 너는 같이 안 가?”
“응.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끼리 다녀와.”
아스트라는 무리에서 멀어져 숙소를 향했다.
“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나 기분도 안 좋은데 같이 좀 놀아줘.”
“미안, 좀 피곤하네.”
길버트가 합류를 청했으나 아스트라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는 게 어떨까? 우리들 앞으로 지겹도록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친하게 지내는 게 좋잖아?”
“싫다고 세 번째 말하고 있어.”
분위기를 주도한 소녀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스트라의 태도는 요지부동.
“흐응… 그래, 싫다는 말이지.”
소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걸 본 길버트가 결국 아스트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힘을 줬다.
“야, 적당히 빼고 웬만하면 같이 가. 나랑 오벨이 벌써 몇 번씩이나 말하는데 비싼 척 그만….”
“놔.”
하지만 아스트라가 뱉어낸 싸늘한 한마디에 길버트는 뻘쭘한 표정으로 손을 떼고 말았다.
오벨리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섰지만 아스트라의 예리한 기도를 감당하기에는 길버트가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이다.
“후우….”
짜증을 억지로 참는 듯한 한숨을 토해 낸 후 아스트라는 일행에게서 멀어져 갔고.
“어머나! 까칠하기는.”
그 뒷모습을 샐쭉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분홍리본 소녀, 오벨리언은 다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천한 뱃속에서 태어난 티가 여기서 확 나네. 저런 반쪽짜리를 후계자로 믿고 계시는 페르디난드 공작 각하만 불쌍하게 됐지 뭐.”
* * *
쪼로록.
“어떻게 부친께서는 잘 지내시나?”
마주 앉은 지 15분, 일언반구도 없이 찻잔만 기울이던 팩셰르가 제일 먼저 물어온 건 아버지의 안부였다.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번 맞춰 볼까? ‘난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이상한 놈들이 지들 멋대로 사람을 학년 대표 후보니 뭐니로 만들어 놓고. 웃기지도 않네.’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 생각은….”
“미리 말해 두지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넌 원래 학년 대표 후보자가 아니었어. 원래 예정된 신입생 학년 대표 후보는 일곱 명. 하지만 내가 강력히 주장을 하는 바람에 네가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아버지의 안부’에서 ‘내 심리에 대한 추측’, 여기에 ‘후보 선정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대화의 주제가 너무 빨리 튀는 바람에 그 변화를 따라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부친이 폴리다고스에 특별 입학을 할 수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기회를 만들어 준 게 나라는 것도 알고 있나?”
돌고 돌아 다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온 화제. 하지만 도무지 대중이 잡히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게 그러니까 30년쯤 전이던가. 티베리가 특별 입학 제의를 받았을 무렵 나는 막 폴리다고스의 고위 관리직에 입성한 참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위직에 들어온 이후 가장 먼저, 의욕적으로 추진한 과제가 바로 현 클라디우스 가주에게 특별 입학 기회를 주는 거였어. 이전에 있었던 몇 차례 인연 덕분에 나는 너의 부친이 가진 막대한 잠재력을 알아챈 상태였거든.”
그 연령대가 각기 다양한 일곱 명의 국장들 중 최연장자는 팩셰르였다.
팩셰르의 올해 나이는 여든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30년 전의 팩셰르가 특별 입학을 추진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티베리 그 녀석이라면 이곳에서 더 많은 가르침을 얻고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대륙의 치료술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클라디우스 역시 내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 하하! 그런데 한 달 뒤 클라디우스에서 보내온 서신에는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써 있더군.”
과거의 인연을 떠올린 건지 팩셰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티베리’가 되어있었다.
“클라디우스가 내 제안을 거절한 결정적 이유가 티베리의 선택에 있었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어. 페이건 클라디우스, 알고 있나? 내가 만들어준 기회를 거절한 건 네 아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걸?”
팩셰르를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그 강퍅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단호한 거절 이후 30년쯤 지났을 무렵, 대뜸 클라디우스에서 공문 한 통이 날아오더군. 그 티베리의 아들이 폴리다고스 입학을 원하니 입교에 필요한 조건을 설명해 달라고 말이야. 흐흐,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던 놈이 자신의 맏아들을 이곳에 입학시키려 한다는 걸 알고 나니 절로 웃음이 나오더군. 그래서 그 아들이 대체 어떤 놈인가 하고 한번 알아봤지.”
마치 장식처럼 찻잔에 붙어 있던,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팩셰르의 손이 얼굴 위로 올라가 입가를 휘어 감았다.
“내 나름대로 조사를 했고 기대를 해볼 만한 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그렇게 티베리의 아들놈이 내 눈앞에 도착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찰나 정말이지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오더구나. 클라디우스의 후계자가 깃털처럼 사소한 단서를 이용해 허깨비 같은 놈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이델타에 출몰한 늑대인간의 배를 갈랐다는 소식.”
“운이 좋아 얻은 자그마한 성과일 뿐입니다.”
“크크 겸손한 것까지 어쩜 그리 부친을 빼닮았을꼬? 아들의 무용담을 전해 들은 후 너의 부친께서도 기뻐하셨겠지만 마음이 들뜬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검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티베리의 아들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팔딱거리는 놈임이 입증되었으니 내가 어찌 아니 들뜰 수 있겠느냐?”
커튼처럼 하관을 가리고 있던 손이 걷혔고, 훤히 드러난 팩셰르의 입가에는 히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를 학년 대표 후보생으로 추천한 건 나야. 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그토록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내가 널 학년 대표 후보생으로 만든 셈이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대표 후보로 선발된 데에는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니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여나 나를 실망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티베리의 아들놈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가 사뭇 크거늘, 나 같은 늙은이를 실망시키는 건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로서 못할 짓이 아니겠느냐?”
문답을 주고받고 있기는 하다만 딱히 이야기가 통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해묵은 감정의 파도.
통상적인 대화가 썰물과 밀물이 오고 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면 팩셰르와의 대화는 마치 바닷가로 쏟아져 들어오는 해일을 닮아 있었다.
“이만 나가 보거라.”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까닥이는 앙상한 손가락.
팩셰르는 일방적으로 축객령을 내렸고, 그가 딱히 인사를 받고 싶어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목례를 끝으로 연구실을 빠져나오려 했다.
“…조만간 나를 또 볼 일이 있을 것이다.”
연구실을 빠져나오는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팩셰르의 깡마른 목소리.
―우와 진짜 지독한 영감이네. 나 저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쫌 이상한 사람 같아.
팩셰르가 뿜어내는 기운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연구실 건물을 빠져나오자 북슬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사람 같아가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 맞아. 그냥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거야.’
여전히 주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지만 혹시 몰라 위 발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괴팍스럽고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노괴물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울 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팩셰르의 허세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실험국장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아! 교무처 같은 데 가서 지낼 숙소를 알아보려고 그러는구나?
‘그것도 알아보기는 해야 하는데 지금은 다른 거 먼저.’
목으로 팔을 뻗어, 후계자로 임명된 이후 줄곧 나와 함께 했던 클라디우스의 신물을 꺼내 들었다.
―어! 마즈다가 반짝이네.
‘아까 전부터 반짝거리고 있었어. 정확히 얘기하면 석벽을 통과한 그 순간부터 쭉 이 상태였거든.’
―어머! 페이건, 그렇다는 건….
‘네. 아무래도 오르페우스 님이 이곳에 남겨 놓으셨다는 단서와 마즈다가 공명을 하는 거라고 봐야겠지요.’
각각 클라디우스 가주와 후계자를 상징하는 한 쌍의 목걸이 ‘아후라’와 ‘마즈다’.
기록에 따르면 오르페우스는 숨을 거두기 5년 전, 아후라와 마즈다를 손수 제작한 후 가문의 신물로 삼은 바 있다.
즉, 오르페우스가 언젠가는 자신의 의지를 이어갈 후손이 나타날 것이라 믿었고, 그들에게 뜻을 남기고 싶었다면 아후라와 마즈다는 그야말로 최고의 기록보관소인 셈.
우우웅.
그리고 이 추측이 맞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마즈다는 푸른 빛을 뿜으며 특정 장소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잠깐만! 마즈다가 빛을 뿜으며 너한테 뭔가 말해 주려 하는 건 인정! 그치만 목적지를 정해 놓고 움직여야지 생각 없이 아무 데나 가면 어떡해!
‘생각 없이…?’
―페이건, 내 생각도 벨제키엘과 같아. 보아하니 이곳은 꽤나 넓은 것 같은데 확실한 방침을 정하고 움직이는 게 어떨까?
‘털 뭉치 뿐만 아니라 라무테 님의 눈에도 이 화살표가 보이지 않나요?“
―화살표?
‘네. 조금 전에 마즈다를 잡은 채 앙겔루스를 운용했더니 푸른색 화살표가 솟아 나왔고, 전 그 화살표를 따라 움직이는 중이었습니다.’
―아! 뭐야! 그런 게 있었어? 오르페우스 녀석 쫌생이 같이 자기 후손들 눈에만 보이는 장치를 만들어 놨나 보네. 치! 나빴어.
‘영감님,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이런 거 가지고 삐지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와 봐, 여기 써 있는 이 글자는 보여?’
―그것도 안 보여!
오르페우스가 남긴 장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는지 앵돌아져 버린 털 뭉치를 머리 위에 올린 채 마즈다를 들이밀었다.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야!
‘노을의 입김이 가장 먼저 머무는 곳.’
토라진 북슬이가 발버둥을 칠 때마다 유독 보들보들한 뱃살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고, 난 녀석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마즈다 표면에 떠오른 룬어를 읽어 줬다.
―노을이 가장 먼저…? 페이건 여기는 혹시….
‘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곳을 가리키는 것 같죠?’
아무래도 라무테 님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와 라무테 님은 우측을 향해 크게 몸을 틀었고 우리 둘의 시선이 동시에 향한 그곳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기세로 서 있는 폴리다고스 최외곽의 성벽이 있었다.
* * *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늦은 오후.
“거기 잡아! 그쪽으로 도망친다!”
“잡았다! 이야! 오늘 저녁은 고기 먹겠네!”
“나는 여기서 반죽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저기 가서 마늘이랑 야채 좀 씻어와.”
이 시각에 이 길을 걷는 건 나 혼자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곽 정상을 향하는 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온 소음으로 가득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벌써 열흘 정도 노숙을 해 가며 석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신입생들이 외쳐 대는 ‘생활의 기운이 듬뿍 배어있는 목소리’.
‘그래도 생각보다는 잘하고 있네.’
잡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도련님, 아가씨들만 잔뜩 모여있는 터라 숲속에서 굶어 죽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지만 신입생 무리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야영에 적응을 하고 있는 듯했다.
‘역시 사람을 굶기면 움직이게 되어 있다니까.’
폴리다고스에 입학할 정도면 육체적, 마법적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
‘어딜 감히 우리 손에 물을 묻히려 들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와 같은 헛된 자존심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생명력이 가득한 이 숲에서 열흘 정도를 버티는 건 애초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숲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신입생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허세를 버리고 스스로의 팔과 다리로 움직여야 한다.’라는 생존 원칙 제 1조를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저기 위에 있는 높으신 양반들이 막 발을 들인 신입생들을 저 숲에서 굴리는 이유도 이걸 확실히 가르쳐 주기 위함이겠지?’
하늘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붉게 물든 고성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성곽 정상에 도달했다.
이제 저 모퉁이 하나만 돌면 외곽 성벽 최상단에 다다르려는 찰나.
“하하하! 야! 저기 부리나케 달려가는 저 꼬라지 좀 봐! 저놈은 기사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전직을 하는 편이 낫겠는데?”
“누가 아니라니. 호호, 쟤는 밥하느라고 얼굴에 검댕이 가득해.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입안으로 쑤셔 넣는 꼴이라니. 저 꼴을 하고도 밥이 넘어갈까?”
듣고 싶지 않은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팩셰르의 실험실에서 들은 바 있는, 대귀족 특유의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목소리.
스스로의 천박함을 감추려 들지 않는 선객(先客)들의 존재감에 무심코 걸음을 멈춘 바로 그때.
“어머! 이게 누구야!”
시끄러운 일행의 중심에 있는, 분홍 리본이 유독 인상적인 소녀가 나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페이건!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우리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