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33)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3)화(33/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33)
“어… 그러니까 페이건 클라디우스라고 했지? 만나서 반가워.”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 난 길버트라고 해.”
하나둘 내 곁으로 다가와 살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신입생들.
조금 전 내 존재를 감지했을 때까지만 해도 녀석들의 얼굴에는 ‘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표정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녀석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이렇게 살갑게 바뀐 건.
“우리는 잠깐 차 마시는 중이었어. 페이건, 너도 여기 앉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아 참, 혹시 팩셰르 교수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가장 먼저 내 곁에 다가와 미소를 흩뿌린 분홍 리본의 여자아이, ‘오벨리언 마르커스’ 때문이겠지.
오벨리언 마르커스,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스트라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마법사.
마르커스 가문은 대륙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상단을 소유한 명문가였다.
오벨리언은 현 마르커스 가주의 막내딸로, 딸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한 손에는 마력, 나머지 한 손에는 금력(金力)을 쥐고 휘둘렀다는 소문이 자자한 유명인사였다.
‘오벨리언이 날 끌어들이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꼬맹이들의 태도가 바뀐 걸 보면 이 녀석이 무리의 리더인 모양이군.’
가문의 위세와 힘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계급 사회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탓인가?
만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녀석들은 어느새 나름의 위계질서를 형성한 듯했다.
“페이건, 너도 여기 와서 앉아.”
그리고 팩셰르의 연구실에서는 날 쭉정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길버트 녀석이 되지도 않는 살가운 연기까지 하는 거 보면 이들 사이에 형성된 위계질서는 제법 튼튼해 보였다.
“우린 여기서 성벽 바깥 녀석들이 뛰어다니는 꼴을 보고 있었거든. 하하! 저 녀석들이 배를 채우겠다고 귀족의 품위며 뭐며 싹 다 잊은 채 뛰어다니는 꼴이 꽤나 재미있어.”
이 돼먹지 못한 꼬마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성벽 너머에 있는 동기들의 노력을 ‘추태’라고 규정지은 그 순간, 이 녀석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나의 방침 또한 정해졌다는 걸.
“뭐 해! 얼른 이리 와. 차도 과자도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 너도 우리랑 같이 놀자.”
오벨리언이 내 손을 덥석 잡자 그녀의 아담한 손등에서 진한 벚꽃 향이 피어올랐다.
사람을 홀리는 향과, 몸짓 하나하나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요염하기 짝이 없는 행동거지.
나와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그 조숙한 술수에 경의를 표하는 심정으로,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왜? 아스트라가 너희들 맘대로 안 움직여 준데?”
“응? 아스트라? 갑자기 걔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동그랗게 치켜뜬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눈동자. 하지만 그 매력적인 동공 안쪽에 숨겨진 떨림과 야비함이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조금 의외이기는 하네. 너희들은 아스트라보다 나를 조금 더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첫 번째 낙오시킬 대상으로 내가 아닌 아스트라를 택한 걸 보면 그 친구가 어지간히 까탈스럽게 굴었나 봐?”
“페이건,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아니면 페르디난드 공작의 진전을 이어받은 천재 검사의 존재가 어지간히도 경계가 되었거나.”
나보다 한발 앞서 팩셰르의 연구실을 빠져나간 신입생은 모두 일곱 명.
그리고 현재 이 자리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건 여섯 명.
올해 신입생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 아스트라.
그리고 갑작스레 달라진 꼬맹이들의 태도.
이 정도까지 단서가 널려 있는 이상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또 여섯 명의 망나니들 사이에서 어떤 협정이 체결되었는지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나머지 일곱 명이 한 데 힘을 모아 아스트라를 학년 대표에서 밀어낸 후 그 뒷일은 그때 가서 다시 정하자, 그러니까 뭐 이런 잠정 결론을 내린 거지?”
“페이건! 너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면 나 정말로 화….”
“멋모르고 너희들의 판에 낀 나를 도려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을 텐데. 최우선 목표를 제거할 때까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형국이니까 일단은 나도 무리에 끼워 주겠다 이건가? 그 인내심은 높게 쳐줄 만하네.”
“….”
속내를 간파당했다는 생각 때문일까?
새끼 강아지의 그것처럼 동글동글하던 오벨리언의 눈동자가 독사의 그것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아마 오벨리언의 당초 계획은 자신이 리더로 인정받은 판에 아스트라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계획이 성공했다면 감히 ‘선택받은 대귀족들의 판’에 멋모르고 끼어든 불순물 같은 존재인 나를 최우선적으로 도려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건대 아스트라는 오벨리언의 소꿉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그 결과 이 깜찍한 계집은 나까지 포섭하여 아스트라를 배척한다는 작전을 세운 것이다.
“아스트라가 저기 있는 녀석들처럼 순순히 헤롱거려 줬다면 이야기가 참 편했을 텐데. 수작에는 넘어올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정공법으로 상대하기는 페르디난드 가문의 검법이 버겁고, 그러니까 일단은 머릿수를 있는 대로 모아서 그걸로 눌러보자, 이거잖아?”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떠드는….”
어느새 이 일당의 행동 대장 격이 된 듯한 길버트가 발끈하여 나섰지만 오벨리언은 왼손을 가볍게 내젓는 것으로 녀석을 진압했다.
물론 그 위세가 드높은 페르디난드의 공작가의 후계자를 배척하는 게 마냥 쉬운 일 일리는 없었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대귀족들의 관점에서 보자면)‘태생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약점을 잘 이용하면 아스트라를 배척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 계획의 목표는 아스트라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게 아니라 학년 대표 후보에서 배척시키는 데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르커스 역시 페르디난드보다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타샤드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 건 마찬가지였기에, 다른 후보들이 힘을 모아 준다면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하다고 오벨리언은 판단한 것이다.
“어쩌나? 나는 그 모임에 끼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페이건 아무래도 우리들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니 우리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뱀의 것을 닮아 가다가 순식간에 강아지의 것으로 바뀌어 버린 눈동자.
“우리 가문들과 클라디우스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문제는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우리는 분명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왜 그런지 알아?”
설마 아직도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
“우리 모두는 품격 있고 고결한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스트라는 그렇지가 못해. 그 녀석은 우리랑 다르다구. 페이건, 너도 알고 있지? 아스트라를 낳아 준 사람이 어떤 신분인지.”
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이래로 여자를 힘껏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스트라는 천하디 천한 하녀의 배에 잉태된 반쪽짜리 귀족이야. 그러니까 우리랑은 달라. 완전히 다르다고.”
“하아….”
제 딴에는 확인 사살을 했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벨리언을 마주하고 있자니 정말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야, 꺼져!”
“…!”
결국 나는 지금의 불쾌함을 전달하는 대신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간절한 한마디를 내뱉기로 했다.
“지금 들은 말들을 입에 담았다 가는 내 혀가 썩어 버릴 것 같으니 너희들이 이런 구역질 나는 헛소리를 떠들고 있었다는 걸 아스트라에게 말하거나 하지는 않겠어.”
“이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하지만 그 더러운 말을 계속 듣고 있을 만큼 내 비위가 좋지는 못하거든. 그러니 너희들 전원 이제 그만 꺼져 주지 않겠어?”
“건방진 새끼! 기껏 호의를 베풀어 줬더니!”
길버트를 비롯한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주위를 감쌌다.
‘그래, 이런 것도 뭐 나쁘지 않지 뭐.’
드잡이질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음박질치는 전개.
아직 정식 입학도 하지 못한 신입생들 간의 주먹다짐?
교육적으로도, 교칙적으로도, 내 원활한 아카데미 생활을 위해서도,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은 행동.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전개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
하지만 오벨리언의 뾰족한 한 마디에 삽시간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길버트, 우리는 정식 입교 절차도 밟지 않았어. 그런데 벌써부터 사고를 칠 셈이야?”
“하지만 오벨, 너도 들었잖아? 이 건방진 새끼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아직 시간은 많아. 그러니 그 분노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도록 해. 지금 그 분노를 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조만간 마련해 줄 테니까.”
“너 이 새끼,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결국 나를 포위했던 녀석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페이건 클라디우스, 딱 하나만 기억해 둬. 너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는 완연한 독사의 눈빛을 한 오벨리언은 독기 서린 엄포를 늘어놓았다.
“…그러시든가.”
나는 노을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성곽 난간에 걸터앉은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천한 배 속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귀족과 섬에서 온 촌뜨기? 잘 어울리네. 두 사람 간의 멋진 우정 앞으로도 기대하고 있을게.”
마지막까지 패륜적인 언사를 끝으로 오벨리언을 위시한 무리는 성곽에서 멀어져 갔다.
―으… 보기에 참 시원하기는 했는데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뭐가 있겠어?”
―아까 그 미치광이 교수에 저 녀석들까지. 오늘 여기 온 첫날인데 이렇게 적만 잔뜩 만들면.
“확실히 팩셰르의 행동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쟤네들은 어차피 별것도 아니니 딱히 신경 쓸 것도 없어.”
롤빵이가 드물게 보여주는 진지한 모습이었으나 난 듣는 둥 마는 둥 한 채 마즈다의 각도 조정에 매진했다.
시끄럽던 불청객이 떠났고, 노을이 완전히 지기까지 남은 시간도 길지 않았기에 서둘러야만 했던 것이다.
―페이건, 혹시 그 아스트라라는 소년과 친해지고 싶어서 저 아이들을 몰아붙인 거니?
“아니요. 앞날은 모르는 거지만 그 친구와 딱히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다만….”
화살표는 서쪽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고 난 가장 새빨갛게 물든 석양이 쏟아지는 자리를 찾아 마즈다를 들어 올렸다.
“기껏 섬을 떠나 여기까지 왔는데 저런 덜떨어진 꼬맹이들의 꼬장에나 어울려 준다고 생각하면 저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요?”
―치, 넌 가끔 꼭 100년은 산 영감 같은 말을 하더라. 그래봤자 저 꼬맹이들이랑 같은 나이면서.
평소에는 동글동글하기만 한 주제에 역시 롤빵이는 의외의 측면에서 날카로웠다.
전생과 이번 생의 삶, 두 개를 모두 더하면 아마 내가 지내 온 시간은 100년을 조금 넘을 터.
“내가 100년을 살았는지 200년을 살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성곽 너머로 보이는, 광활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드넓은 대지.
불쑥 솟아오른 대지의 척추를 밟고 서서 석양이 들이치는 지점에 마즈다를 맞추자 이내 클라디우스의 신물은 선명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오르페우스 클라디우스가 남긴 빛.
노을과 빛이 섞이는 그 신묘한 광경을 두 눈에 새긴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롤빵이에게 답을 들려 줬다.
“중요한 건 저놈들이 수준 이하고 난 그 한심한 놀음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는 거지.”
* * *
결국 나는 별이 총총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성곽을 내려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요. 하긴 별빛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꼬박꼬박 채워 넣으려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네. 그래도 역시 오르페우스는 오르페우스야. 걔는 아주 어릴 때부터 별을 보는 걸 좋아했거든. 그리고 자주 말하고는 했어. 클라디우스를 잇는 아이들은 밤하늘을 보는 멋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이번 준비에도 역시 그런 마음이 담겨 있을 거야.
성곽을 오를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손에 유독 두꺼운 책이 한 권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족히 수백 장은 넘을 듯한 페이지가 빽빽하게 꽂힌, 검은 벨벳 표지의 서책.
그 표지에는 〈오르페우스 클라디우스〉라는 이름이 선명한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습니다. 노을빛으로 만들어진 표지와 별빛으로 만든 페이지라니. 선조께서는 과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길래 이런 방법을 사용하신 걸까요?”
지금도 조금 전의 광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데 뭉치기 시작한 노을빛이 검은색의 벨벳 표지를 완성했을 때 해가 지기 시작했고 이내 쏟아져 내린 별빛이 각각의 기억이 되어 표지를 채우던 그 모습.
장담컨대 타샤드 제국의 황궁 수석 마법사를 데려다 놓아도 그 정도로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뜻을 빼앗기지 않고 전달하려면 이편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오르페우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가 궁금하면 지금 당장 그 일기장을 펼쳐 보면 되잖아?
오르페우스의 흔적을 오랜만에 접했기 때문일까? 언제나처럼 내 머리 위에 올라탄 북슬이는 유독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얼른 펴 봐, 얼른. 그 깍쟁이가 뭐라고 써 놨는지 나도 구경 좀 하자.
―응. 일기장이지만 사실상 보라고 만든 거나 마찬가지니까 펼쳐도 돼. 페이건, 얼른!
폴리다고스에 도착한 첫날, 첫 번째로 획득한 오르페우스의 유산은 다름 아닌 그가 남긴 일기장이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오르페우스의 10년이 어지간히도 궁금했는지 둘은 위아래에서 나를 재촉했고, 나는 별빛이 쏟아지는 별밤을 배경 삼아 기억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어, 미안. 기대가 컸을 텐데. 어쩌지? 지금 당장은 못 보여줘.
하지만 일기장 1페이지에는 우리들의 기대를 단번에 깨 버리는 문장이 덩그러니 적혀 있었고.
―이 자식이 지금 뭐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오르페우스의 역습에 얻어맞은 털 뭉치는 소리를 지른 채 내 머리를 움켜잡았다.
“야, 아파.”
―이 망할 놈의 자식이. 지가 여기로 데려오라고 해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여기에 왔더니. 당장은 못 보여 준다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화가 나는 네 맘은 이해를 한다만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 것 같은 내 입장도 좀 생각해 주면 어떨까? 남의 머리에 붙어서 화를 내려거든 최소한 발톱에 힘은 빼.”
달아오른 찐빵이 된 북슬이를 억지로 머리에서 떼 낸 후 다시 한 번 일기장을 살폈으나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거라고는 지금은 못 보여 준다는 뻔뻔한 문장이 전부.
―페, 페이건 혹시 맨 마지막 장 한번 펼쳐 봐. 그곳에는 뭐라고 써 있니?
“백지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첫 번째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백지입니다.”
―세상에… 오르페우스 너,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언제나 침착했던 라무테 님도 이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는지 연신 헛바람을 내 쉴 뿐이었다.
―으아아! 이거 놔! 내가 저거 다 찢어 버릴 거야!
―안 돼! 벨제키엘, 참아!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북슬이는 내 손에 들린 일기장을 향해 돌격을 시도했고,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라무테 님은 부리로 북슬이의 꼬리를 잡은 채 안간힘을 썼다.
―으아아 못 참아! 아니 안 참아!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어!
―오르페우스도 나름 생각이 있겠지. 우리 조금만 기다려 보자. 응?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너 오르페우스가 어떤 놈인지 몰라? 그 녀석이 이런 장난을 쳐 놓고서 우리 둘이 당황해하고 있으면 나중에 나타나서 ‘으하하하 속았지!’라며 웃어 제끼던 거 기억 안 나냐고!
―물론 오르페우스가 생긴 것과는 달리 장난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난 더 안 참아! 저거 내가 다 찢어버릴… 어푸!
터질 듯이 달아오른 털 뭉치를 달래 주기 위해 난 비상용 간식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비스킷을 꺼내 털 뭉치의 입에 쑤셔 넣었다.
―헤이거 저이 비겨 내아 저노므 채글 그냐!
“이번에는 라무테 님이 옳은 것 같은데?”
“어머!”
오른손으로는 북슬이를 잡은 채 왼손으로는 일기장을 둘의 눈앞에 들이밀었고, 일기장 첫 번째 페이지에서 펼쳐진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한 라무테님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하 지금쯤 벨제키엘은 길길이 날뛰고 있을 테고 라무테는 그걸 말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 흐흐 일단 화 풀고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 아예 보여 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다만 준비가 필요하다는 거지.
마치 이 광경을 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그 모양을 바꾸는 글자들.
―이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준비되어 있어야 할 필요도 있어. 너희 둘과 이곳의 클라디우스 아이 모두가 말이야.
―준비?
―준비라니? 그게 뭔데?
거의 동시에 입을 떡하니 벌리는 둘.
난 손을 뻗어 둘의 콧등을 한 차례씩 가볍게 두드려 줬고 그제야 둘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해야 되는 준비라는 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만, 필요한 준비물이라는 건 이걸 말하는 게 아닐까요?”
우우웅.
목에 자리를 잡은 채 다시 한 번 선명한 빛을 뿜어내는 마즈다.
마즈다의 중심에 자리한 수정에는 내가 얻어야 하는 물건,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가야 할 교내의 장소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