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58)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58)화(58/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58)
“어? 그럼 견학 안 가게?”
“응,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인데.”
“왜? 이건 가는 게 무조건 좋은데!”
아일리 바스티아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는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걸까?
제라르는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인 채 되물었다.
“세상에 무조건 좋은 게 있기는 해?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해. 이번 초대는 내 눈에 번거로운 단점이 유독 크게 보여서 굳이 가고 싶지가 않네.”
“그치만 푸른 달은… 이건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횐데….”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와 달리 제라르는 학회와 관련해서 빠삭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난 내가 모르고 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푸른 달이 교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실적을 가진 학회라든가.
그리고 아일리 바스티아가 속한 ‘바스티아’ 가문이 대륙 동남부에서는 그야말로 짱짱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상업 명가라든가, 뭐 이런 사실들 말이다.
“상세한 설명은 참 고맙다만 딱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거나 하지는 않네. 그래서 안 갈 거야.”
“…진짜? 으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진짜 너무 아까운 기회지만 페이건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학회 가입 같은 걸 할 마음이 없다만 혹시 네가 원한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학회실까지 같이 가 줄 수 있어.”
“아, 아니야! 난 연금술사고 지금 당장은 내가 혼자 진행하던 연구를 공부하기에 바빠서 학회 활동 같은 거 할 시간이 없어.”
제라르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는데, 이번 사양은 ‘내 몸이 나아질 거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고 있어.’와는 달리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연구?”
“응, 최근에 구매한 장비를 이용해서 이것저것 해 보고 있는 중이거든. 그래서 나도 당분간은 다른 학회에 가입 못 할 것 같아.”
“그럼 결론 났네, 너나 나나 가입할 마음이 있지 않으니 푸른 달인지 뭐시기인지는 가지 않는 걸로.”
“응… 그런데 아일리 선배님이 서운해하시기는 하겠다. 페이건 너를 정말 욕심내는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을걸. 어차피 나 같은 걸 대신할 입회 희망자는 얼마든지 나올 테니까.”
진료가 시작된 지 1시간.
오늘분의 치료는 중반을 훌쩍 넘어 종반을 향하고 있었고, 제라르의 팔목에 아홉 개째의 침을 꽂아 넣었을 무렵.
“헤헤.”
녀석이 돌연 어울리지 않는 히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아니, 별 건 아니고 아일리 선배님이랑 밥 먹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선배님이 맛있는 걸 사 준다고 강의동 바깥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를 했는데 강의동에서 외부 식당으로 가는 그 10분 동안에 아일리 선배한테 말을 건 남자가 자그마치 열 명이 넘었거든.”
“뭐 그 내면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모습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사람이니까 남자들이 그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그때마다 선배가 오늘은 선약이 있다며 야멸차게 거절을 하더라구. 아일리 선배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거절을 하시는데 그때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던 남자 선배님들 표정이 딱딱해지는 게. 흐흐 후배가 돼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되게 웃겼어.”
“아하! 그래서 우리 제라르 마페이언 군이 아주 뿌듯하셨겠네. ‘이놈들아 여기 계시는 이 아리따운 아가씨는 이미 나랑 선약이 있거든!’ 하면서.”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실없이 던진 농담이었는데 제라르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아일리 선배님은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데다가 무엇보다 나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는 걸.”
“장래? 뭐야? 너 약혼 했었냐?”
“어? 내가 아직 페이건에게 말 안 해 줬나? 응, 나 3년 전에 약혼했어.”
예상치 못한 발언에 깜짝 놀랐지만 제라르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상대는 누군데?”
“고향에 있는 친구. 나한테는 정말 과분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행복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는 제라르.
이 표정만으로 그 사람이 제라르에게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제라르 나이대의 귀족이 약혼을 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다만 평소 녀석의 행동거지며 표정이 워낙에 앳되고 순진했기에 놀라움이 배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 아무튼 늦었지만 축하한다. 우리 제라르 알고 봤더니 다 큰 어른이었네.”
“아니야, 어른은 무슨. 한 사람 몫을 하려면 앞으로 한참은 더 연습해야 되는걸.”
“그리고 기회가 닿거든 소개도 좀 시켜 주고, 어떤 분일지 무척 궁금하네.”
“응, 제냐도 틀림없이 페이건을 보고 싶어 할 거야. 내가 편지에 페이건 이야기를 많이 써놨거든. 아, 그건 그렇고 아일리 선배님한테 미안하네. 선배님이 페이건한테 말 좀 잘해 달라면서 밥도 제일 비싼 걸로 사 줬는데….”
“냅둬 보아하니 돈도 많은 사람 같은데, 자기 발로 찾아와 괜찮다는 널 억지로 끌고 가서 쓴 밥값을 네가 왜 걱정하냐?”
스르륵.
여기까지 말을 했을 때 제라르의 팔목에 꽂혀 있던 침이 스스로 피부 밖으로 빠져나왔고, 줄곧 푸른빛을 띠던 오러 역시 녹빛으로 색을 바꿨다.
오늘분의 치료가 모두 끝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고작 한 번이지만 일단 경과가 나쁘지 않아. 그리고 치료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건강상태니까 잠은 될 수 있는 한 많이 자고.”
“페이건, 정말 고마워. 정말 클라디우스 가주님도 그렇고 페이건 너도 그렇고 이 은혜는 내가 나중에서라도….”
문밖으로 나서려는 내 뒤통수에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고맙다는 말.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녀석의 어깨를 짝 소리가 나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 말은 치료가 모두 끝난 뒤에 하는 걸로 하자. 그 전에 이런 말 들어 봤자 피차 민망할 뿐이니까.”
* * *
다음 날.
오전 수업을 마친 나는 재빨리 점심을 해치우고 강의동 외곽에 있는 고서(古書)관에 와서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들을 들춰 보고 있었다.
참 다행스럽게도 폴리다고스는 깐깐하고 엄격한 학사 규칙을 가진 것에 비해 수업 과정 자체는 제법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꼭 들어야 할 필수 과목을 이수하고 학기 말에 있을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기만 한다면 학생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학사 당국은 일체 관여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필수 과목 대부분을 오전에 몰아넣는다는 현명한 선택을 한 덕분에 대부분의 오후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제라르 같은 경우는 듣고 싶은 수업이 워낙에 많다며 이것저것 신청을 해 놓은 터라 더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락.
들리는 거라고는 묵직한 고서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전부.
고서관은 그 웅장한 이름에 걸맞은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이 널찍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고 덕분에 난 주위의 눈치를 살필 일 없이 필요한 자료를 탐독할 수 있었다.
살랑살랑.
물론 주위에 ‘사람’이 없다 하여 집중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내 미간을 간질이는 통실통실한 꼬리라든가.
―으가가가, 이번에는 여기 끝에서 저기 끝까지 굴러가 봐야지.
텅 빈 책상을 무대로 펼쳐지는 황금 롤빵의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공연이라든가.
―페이건 그 책 재미있어? 여기 있는 책들은 다 옛날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들이라며, 너는 다 큰 어른이 옛날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보냐? 아! 아직 어른이 아니라 애기라서 그런가, 애기 페이건 쿠쿠쿡.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키득거리는 털 뭉치라든가.
―으아아! 너 왜 그래! 말로 해! 말로!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 난 녀석의 머리통을 번쩍 들어 올린 후 읽고 있던 책의 목차에 처박아 버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봐, 거기 5-3장에 뭐라고 써 있는지.’
―으갹! 에… 그러니까 ‘폴리다고스의 기원 그리고 비밀, 5인의 영웅에 부쳐. 그림자 검이 쓰러뜨린 사기(死氣)덩어리 괴물의 최후는?’ …이게 뭔데? 중요한 얘기야?
‘너 우리가 어제 어디 갔다 왔는지 벌써 다 잊어버렸지?’
―호에?
―어디 보자. ‘그림자 검 오펜하이머 경이 폴리다고스 외곽 미궁에서 마주한, 죽음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괴물은… 발악을 했으나 결국 위대한 그림자 검을 당해 낼 수 없었고….’ 그리고 또.
귀여운 표정으로 당장의 위기를 넘기려 드는 북슬이와 달리 라무테 님은 내가 왜, 오후 내내 이 고리타분한 장소에 처박혀 있는지 감을 잡은 듯했다.
―‘결국 괴물은 치명상을 입은 채 달아나 버렸고, 서쪽 외곽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인 점은 오펜하이머 경께서 괴물의 최후를 증명할 어떠한 증거도 가져오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낭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바….’ 페이건! 혹시 여기 나오는 이 죽음의 기운을 흩뿌린다는 괴물이….
‘라무테 님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습니다. 그 죽음의 괴물이 박쥐 무덤의 원주인이에요. 애초에 북극단 미궁이 박쥐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유도 괴물이 박쥐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럼 오르페우스가 이 박쥐 괴물을 쓰러뜨린 거네?
‘네, 오르페우스 님께서 북극단에 거주하는 미궁 주인의 퇴치를 시도했고 그로 인해 치명상을 입은 박쥐 괴물이 서쪽으로 달아나 그 근방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여기까지 교차 검증으로 확인된 사실이 맞습니다. 문제는 이다음이죠.’
다시 한 번 급격하게 개체 수를 늘리기 시작한 마석 박쥐.
죽음의 기운을 흡수해 생명의 기운으로 바꾸는 황금목.
오르페우스에게 치명상을 입은 후 자색 수림으로 허겁지겁 달아난 ‘죽음의 기운을 폴폴 풍기는 괴물’.
그리고 어딘지 석연치 않은 괴물의 최후까지.
물론 오르페우스의 무용담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 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을 확인하고자 고서관을 찾았고 꼬박 한나절을 투자한 끝에 흐릿하기만 하던 사건의 가닥들은 서서히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림자 검 오펜하이머는 5인의 영웅들 중에서도 빈틈이 없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괴물 관련한 일은 학생들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특별히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괴물을 추적했던 오펜하이머는 꼬박 하룻밤이 지난 후에야, 그것도 괴물의 최후를 입증할 어떠한 물적 증거도 없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죠, 괴물은 처리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그럼 사람들이 너무 불안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펜하이머가 한 말이었고 실제로 그 이후로 박쥐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 또한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물증의 부재(不在)는 흐지부지 넘어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겁니다.’
―왜 그랬을까? 오르페우스는 에스페타라에 있을 때에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하고는 했는데.
‘저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기는 한데요. 그 가설을 설명하기 전 라무테 님에게 소개해 드릴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상의 안주머니에서 줄곧 잠들어 있던 그림 카드 한 장이 탁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알록달록한 그림은 뭐야?
‘5인의 영웅 중 한 명인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담은 종이 카드입니다. 제라르가 가지고 있는 걸 잠깐 빌렸죠.’
―아! 이 여기사님이 에스메랄다구나. 오르페우스와 힘을 합쳐 이곳을 만들었다는, 어마마! 예쁘기도 하지.
‘아무래도 가장 인기 있는 건 오펜하이머와 살가레스지만 나머지 3인의 인기도 어마어마하기는 매한가지이니 이런 물건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 카드에는 커다란 대검을 양손에 쥔 채 전방을 응시하는 용맹한 여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의 눈동자.
카드에 그려진 그림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성기사로 손꼽히는 ‘에스메랄다 뷔가르텔’이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에스메랄다의 거룩한 이름 뒤에 붙는 이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중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 하나를 찾자면 ‘성스러운 불꽃의 에스메랄다’입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투철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그녀의 정의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이명은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불꽃?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도 붉은색이네? 잘 어울려!
‘그런데 말이지요. 가장 잘 어울리는 이명은 성화(聖火)의 에스메랄다가 맞지만, 그녀를 따라다니는 가장 재미있는 이명은 또 따로 있거든요.’
또 한 장의 카드가 제라르의 것과 나란히 놓였다.
먼저 꺼낸 물건이 제라르에게 빌려 온 것이라면 이번에 꺼낸 카드는 내가 오래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개인 소장품이었다.
물론 제라르가 이걸 본다면 ‘페이건! 어떻게 이런 불경스러운 물건을! 안 돼! 큰일 나!’라고 소리를 지르겠지만 삐뚤어진 구석 탓인지 난 이런 식의 불경한 물건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어마나! 이건 또 뭐람? 생김새나 복장을 보면 이것도 에스메랄다 님 같기는 한데, 인상이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잖아. 먼젓번 그림이 성녀 같다면 이 그림은 천하의 악녀 같은 분위기야.
라무테 님의 말마따나 두 번째 카드 속의 에스메랄다는 꽤나 지독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동자와 표독스럽게 다물어진 입술, 그리고 두 눈을 과하게 부릅뜬 탓에 확연히 드러난 눈가의 주름까지.
그 원판 바탕이 워낙에 아름다운 탓에 추하거나 흉하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두 번째 그림의 에스메랄다는 성녀보다 악녀가 더 어울리는 모양새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똑같은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니 참 재미있죠?’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지만 그림 당사자의 기분은 좋지 못할 것 같아.
‘에스메랄다 뷔가르텔은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뜨거운 정의감의 소유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지나치게 완고하고 고집불통적인 면모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협을 모르는 그녀의 성품은 때때로 다른 영웅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 성격으로 인해 애꿎은 피해를 보는 사람 또한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음… 뭐,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니까.
‘에스메랄다가 이룬 눈부신 업적 때문에 잘못을 탓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적지 않은 수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건 분명한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반영된 게 이 두 번째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여기까지 얘기를 듣고 나니까 페이건이 가장 재미있게 생각한다는 그 이명이 뭐일지 정말 궁금해지네, 뭐야?
‘지독하고 악독한 에스메랄다, 신의 성검을 든 강철 마녀. 전 이거 두 개가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
라무테 님도 흥미를 보이는 듯했고 아직 해 줄 이야기 또한 많이 남아 있었지만 설명회는 이쯤에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각또각.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자아내는 발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난 불손한 그림이 그려진 애장품을 재빨리 감춘 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라무테 님 역시 자연스럽게 어깨에 자리를 잡은 후 털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낸 침묵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페이건 군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어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제라르에게 물어볼걸.”
문 사이로 언제나처럼 화사한, 폴리다고스의 왕자님께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