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71)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71)화(71/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71)
“이거 한 묶음에 얼마죠?”
“두 묶음에 동화 하나, 다섯 묶음 가져가면 동화 두 개에 내어 드리고.”
“그럼 그렇게 할까요. 일단 이거 다섯 개 주시고….”
건자두와 건포도가 중심이 된 말린 과일 다섯 묶음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은 후 나는 부지런히 주변을 살폈다.
‘말린 양고기랑 소고기 육포는 샀고, 건량도 샀고, 예비용 로프랑 나이프도 집어넣었고… 이제 뭘 더 사야 할까?’
폴카산 인근 마을에 도착한 직후, 나는 곧바로 잡화점에 가 2박 3일간 야영에 필요한 물품들을 살폈다.
마도구를 제외한 다른 물품들은 폴리다고스 내 도구점이 아닌 인근의 잡화점에서 구입하기로 한 선택은 역시 옳았다.
마도구의 품질 자체는 폴리다고스의 도구점과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대신 이곳 잡화점은 폴리다고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용성이 넘쳐흘렀고, 덕분에 난 비교적 수월하게 야영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전부 다 해서 은화 두 개랑 동화 일곱 개 반인데, 그냥 동화 반 개는 넣어 두시구랴. 많이 사셨으니 이 정도는 깎아드려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못 보던 얼굴인데 폴카산의 얼음 정령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순례객이신가?”
한 꾸러미는 족히 넘는 물품들을 살뜰하게 포장하는 와중에도 주인은 내 표정이며 복장을 살피는 건 잊지 않았다.
“순례객은 아니지만 뭐 그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복장을 보아하니 견습 마법사 뭐 그런 거 같은데, 에이그 순례를 온 거라면 시기를 잘 맞추셨어야지. 올해는 정령님의 축제가 예년보다 더 빨라서 앞으로 일주일간은 폴카산 근처에 얼씬도 못 할 텐데. 귀한 시간을 날려서 어째?”
이 마을 사람들은 7년마다 찾아오는 냉기의 폭주를 얼음 정령이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냥 느긋하게 있다가 가는 수밖에.”
“흐흐, 젊은 양반이 아주 느긋하고 속도 좋으시네. 그래, 이렇게 된 거 이 근처에서 푹 쉬었다 가고 그래. 여기가 마을은 그리 크지 않아도 얼음 정령님의 은총 덕분에 볼거리는 제법 있거든.”
이쯤에서 내가 폴리다고스 소속, 그것도 무려 폴리다고스 실험국장의 명을 받고 온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이 잡화점은 당장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환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환대를 받을 수 있겠지.
“여기 관광지도 하나 드릴 테니까 재주껏 둘러보시구랴. 그런데 여기 위험하다고 써 있는 장소에 절대 가면 안 돼. 안 그래도 위험한 장소인데 올해는 눈 괴물들이 유달리 지랄들을 하는 바람에 한층 더 위험해졌거든.”
“눈 괴물이요? 혹시 놈들에게 마을이 습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아니, 아직 마을이 습격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다우. 이 근방의 산악 수비대는 아주 용맹하니까. 하지만 산악 수비대가 제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이 넓은 폴카산 전역을 모두 책임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수? 그러다 보니 산악 수비대가 책임지기 애매한 지역에서 눈 괴물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거지.”
하지만 그렇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내 정체를 덜컥 밝혔다가 사람 좋고 수다스러운 잡화점 주인이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생활 밀착형 정보를 얻지 못할 테니까.
“아무래도 얼음 정령님이 머무르는 곳의 근방이다 보니 눈 괴물 놈들의 난동이 잦은 편이겠지요?”
“아이구 물론 그렇기는 한데 최근 들어 괴물 놈들 발광이 한층 더 심해졌다니까! 아 글쎄, 지난주에는 그 경계지에서 눈트롤 놈들의 발자국이 발견됐지 뭐유? 마법사 양반도 똑똑하니까 잘 아시잖아. 눈트롤 놈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아… 눈트롤이라니… 그렇죠. 확실히 무시무시한 놈들이죠.”
수다스러운 잡화점 주인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날 붙잡은 채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하하! 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많이 파세요!”
“청년도 꼭 몸조심해! 위험한 데는 절대로 가지 말고!”
필요한 정보를 모두 입수한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잡화점을 빠져나왔다.
―치, 과자 좀 더 사라니까.
‘네가 먹을 과자라면 이미 아카이드의 등에 큰 자루로 두 개나 있잖아. 애초에 우리 중에 과자를 먹는 건 너밖에 없는데 여기서 더 사라고? 폴카산 정상에 과자 가게라도 차릴 셈이야?’
―그래도 혹시 산속에서 조난을 당하거나 그러면 비상식량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절대로 조난 안 돼. 너 그리폰이 눈과 추위에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 아카이드의 등에 타고 가는 우리가 조난을 당할 가능성보다는 네가 채식주의로 식습관을 바꿀 가능성이 훨씬 더 커.’
잡화점을 빠져나와 마을 바깥에 대기시켜 놓은 아카이드를 향해 가는 길 내내 털 뭉치는 비상식량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툴툴거렸지만 난 그 투정을 깡그리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잡화점 주인으로부터 들은 정보에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산악 수비대가 경계를 서고 있는 지역이라고 해봤자 산 중턱도 되지 않을 텐데 눈트롤들이 그 인근까지 내려왔다는 말이지. 산꼭대기 동굴에 처박혀 이끼나 핥아 먹고 사는 놈들이 왜 그리 부지런을 떨었을까?’
눈트롤이 수비대 영역까지 내려왔다는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건 제법 심각한 문제였다.
산에 사는 괴물들, 특히 설산처럼 고립된 지역에 머무르는 괴물들은 웬만해서 그 생활 반경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산 정상에 처박혀 있어야 할 눈트롤이 산 중턱 이하까지 내려왔다니. 이 근방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잡화점 주인이 저토록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이건 반복되어 온 냉기의 폭주와는 완전히 무관한, 별개의 원인으로 발생한 현상이라고 봐야 할 텐데….’
산꼭대기의 생태계에 뭔가 심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기운을 폴폴 풍기는 폴카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법한 지역까지 이동한 후 난 곧바로 뿔피리를 불어 상공에서 대기 중인 아카이드를 호출했다.
―후계자님, 볼 일은 다 보셨어요?
“응. 그리고 이건 선물, 너 바질로 밑간을 한 양고기를 좋아한다고 그랬지?”
―우와앙! 그것까지 다 기억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히히힛!
자루에서 꺼내 준 양고기를 꿀떡꿀떡 삼킨 파트너는 기운찬 동작으로 날개를 활짝 펴며 물었다.
―자 타세요, 후계자님. 저기 보이는 산 정상까지 휘잉 하고 날아가면 되는 거죠?
“아니, 목적지가 바뀌었어. 산 중턱쯤으로 부탁해.”
―어? 왜요? 마을에 들어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산 정상으로 바로 이동할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곳으로 이동해 산이 빨갛게 물들기를 기다리실 거라고.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서. 어차피 시간도 남고 하니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
―알겠어요. 그럼 중턱으로 목적지 변경! 어차피 난 후계자님이 가시고 싶은 장소이기만 하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히힛.
나를 태운 채 아카이드는 다시금 둥실 하고 몸을 띄웠다.
폴카산 인근까지 접근한 터라 높은 고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척이나 거셌지만 아카이드의 튼튼한 날개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역할을 다 했다.
―페이건, 그 눈트롤이 신경 쓰여서 중턱으로 가겠다는 거니?
‘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산정상으로 올라가 들쑤셔 보고 싶다만 역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아래쪽부터 훑고 가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부지런하기도 하지. 후훗, 엄밀히 말하면 페이건이 이곳에서 발생하는 사건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기특해.
내 노고를 알아주는 이 없음에도 문제를 살피려 드는 내 모습이 기특했는지 라무테 님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개로 뺨을 쓰다듬었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발생한 문제가 제 채집 활동에 지장을 주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요. 일 처리가 미흡해 그 노인네한테 비웃음이라도 산다면 밤에 잠도 자지 못할 것 같거든요.’
라무테 님의 칭찬을 받아넘기며 아카이드에게 신호를 줬고, 이내 그리폰은 화살과 같은 기세로 폴카산 중턱을 향해 쏘아져 갔다.
* * *
쿵쿵쿵.
“그르륵, 가우아우아!”
팔뚝에 털이 숭덩숭덩한 회백색 괴물이 달려들자 땅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우아아아!”
이미 주변에는 괴물의 동료로 보이는 눈트롤 여러 마리가 차디찬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기에 놈은 말 그대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휘리리릭.
“까우까우아!”
놈의 분노에 가득 찬 돌진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눈 쌓인 응달 한구석에서 솟아오른 ‘그림자 밧줄’이 놈의 발목을 휘어 감았고, 분노에 몸을 맡긴 탓에 치명적인 올가미를 발견하지 못한 놈은 그대로 눈 바닥에 흉측한 낯짝을 처박고 말았다.
“까우아악!”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놈이 내지르는 분노에 찬 괴성.
꽈드드드득.
그리고 그 괴성이 비교적 멀쩡한 상태에서 내지른 놈의 단말마가 되고 말았다.
놈의 영혼을 육신과 분리시켜 버린 사인은 교살(絞殺),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놈의 발목을 휘어 감고 있던 그림자 밧줄은 순식간에 자리를 이동해 놈의 목을 그대로 조여 버렸고.
“끄… 끄륵… 르륵….”
그림자 밧줄이 ‘아르카’의 가호를 받아 발산하는 압도적인 악력을 견디지 못한 눈트롤의 모가지는 그대로 꺾여 나가고 말았다.
모든 힘을 잃고 덜렁거리는 모가지와 가슴팍까지 축 하고 내민 보랏빛 혓바닥.
폴카산 정상을 본거지 삼아 무법천지로 날뛰던 눈트롤 패거리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지금 단계에서 운용할 수 있는 건 세 가닥이 한계. 그리고 가능한 사정거리는 100미터 정도인 건가. 아르카 3단계에 100미터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눈트롤 다섯 마리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티아매트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모처럼 이목이 드문 곳에 들어왔으니 최근 들어 ‘되찾은’ 힘을 사용해 보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티아매트를 봉인하게 된 것이다.
전생의 날, 암살의 신으로 만들어 준 ‘그림자’는 이번 생에에서도 그 탁월한 성능을 다시 한 번 증명했으나, 그 탁월한 성능은 약간의 생각할 거리도 던져 줬다.
물론 힘이 강해지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아르카에 비해 그림자 밧줄의 효능은 지나치게 뛰어났고 전, 현생을 통틀어 처음 겪어 보는 불균형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양 자체가 절대적으로 커진 게 맞아. 3단계 그림자 밧줄의 길이가 늘어난 것도 이것때문일 테고. 그럼 역시 아르카 자체에 변화가….’
에스페타라때부터 나를 괴롭혀 온 의문점 하나가 조금은 명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생의 내가 익힌 아르카는 전생의 내가 익힌 아르카에 비해 진일보 한 듯했다.
‘현재로써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이 녀석인데.’
가슴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자 눈발 속에서 선명한 빛을 내뿜는 마즈다가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마즈다에 잠들어 있는 드루이드 오러는 아르카를 사용할 때마다 공명을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직도 많이 있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녹빛은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어쩌면?’
사라락.
내 명을 받은 밧줄이 다시 한 번 뻗어 나갔고.
비주주죽.
내가 자연스럽게, 별다른 기대 없이 드루이드 오러를 운용한 순간 밧줄의 몸통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났다.
과거 마룡을 휘어 감았다는 가시 넝쿨을 연상케 하는 그림자는 트롤의 발길질에 상처를 입은 나무줄기를 감쌌고.
스스스스.
돋아난 가시 사이로 스며 나온 녹빛이 나무줄기에 깃들자마자 상처로 얼룩졌던 줄기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매끈해졌다.
‘이건 제법 쓸만하겠어.’
그림자 밧줄에 드루이드의 오러를 싣는 게 가능하다면 그 가용 범위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넓어질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
비록 그 정확한 매커니즘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제 발로 찾아온 복을 의심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기에 난 마즈다가 선사한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아직은 모르는 게 많지만 우리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 보자고. 사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렇게 내가 익숙하다고 믿었던 친구의 새로운 면모를 깨우치는 재미에 젖어있을 그때.
―저기, 저기 있잖아! 페이건, 저거 뭐야? 왜 네 그림자가 꿀렁거리면서 화악 하고 솟아나서 저 트롤 놈들을 덮친 거야.
폴짝하고 정수리 위로 날아든 롤빵이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화악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이기는! 방금 네가 한 거 있잖아. 나 분명히 봤어. 네 그림자 일부가 응달로 후다닥하고 달려갔다가 잠시 후 그물 형태로 모습을 바꿔 저 괴물들을 덮친 거.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나도 가르쳐 주라!
‘아! 이런 거?’
나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고 아르카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속박을 벗어난 그림자가 순식간에 북슬이의 겨드랑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응응! 그거. 그런데 잠깐! 간지러, 간지럽단 말이야. 아하하 그만해, 그만하라고 우헤헤헤.
―페이건, 너 이런 건 또 언제, 어디서 배운 거니? 세상에나 그림자를 잘라서 무기로 사용하다니, 오르페우스도 이런 생각은 못 했을 거야.
‘어쩌다 보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열심히 하는 체조 있잖아요. 그거의 부록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겨드랑이 공습에 정신을 못 차리는 털 뭉치 대신 라무테 님이 질문을 던져 왔고 난 진실과 거짓이 절반씩 섞인 답을 들려 줬다.
―진짜? 요즘 체조는 그런 것도 가르쳐 주니, 뭐 어쨌거나 괜찮아. 난 우리 페이건이 강해지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니까.
―우헤 우헤헤 야 라무테, 잠깐만 넌 뭘 그렇게 우헤헤 슬쩍 넘기려는 거야! 후헤헤 나는 으히히 아직 납득을 우하하하!
이번에도 내 부족한 설명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들어주는 라무테 님과 언제나 그랬듯 입으로만 툴툴거릴 뿐 결국은 나를 믿어 주고 마는 북슬이.
북슬이가 보여 주는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그림자에 아주 살짝 드루이드 오러를 실어 보냈고.
―하으으으응.
녀석은 잘 구운 밤식빵이 되어 축하니 늘어져 버렸다.
나는 말랑말랑해진 녀석을 돌돌 말아 품속에 갈무리한 후 이제는 냉동육이 된 채 널브러진 눈트롤의 시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텅텅.
우르르.
해어진 옷자락, 녹슨 갑옷, 깨어진 무기 파편, 그리고 이제는 하얗게 세어버린 뼛조각 등.
손에 힘을 주어 놈들의 무기를 두드리자 그곳에 매달려 있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이 산을 넘다가 트롤 무리에게 당하고 만 희생자들의 흔적들.
난 희생자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잔해를 하나도 빠짐없이 한데 모은 후 불을 질렀다.
‘부디 마음 편히 가시기를….’
바람이 거센 탓에 불길은 빠르게 일어났고, 잔해가 재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걸로 쓸쓸한 진혼제는 끝.
같은 산을 오르는 머나먼 동료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 나는 나름 엄숙한 표정으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봐 준 일행들에게 말했다.
“가시죠. 이놈들이 이 근처에서 알짱거리는 걸 보면 저 위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조금 더 명확한 답이 나올 것도 같으니 지금으로서는 조금 더 가 보는 수밖에요.”
* * *
“후우웁.”
두툼한 안감을 덧댄 방한용 모자를 눌러쓰고 샐러맨더의 비늘로 누빔 처리가 된 털 코트를 입었다.
손에는 발열 처리가 된 장갑이, 등에는 경량화 마법 처리가 된 가방이.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워낙 조심성 많은 아저씨들이 직접 물건들을 챙겼으니 혼자 사용하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의 물자가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쿠쿡!”
어둑어둑한 새벽, 길을 나설 준비를 한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어젯밤, 자신이 폴카산에는 혼자 오를 것이라 뜻을 밝혔을 때 아저씨들이 지은 표정이 떠오른 것이다.
“아, 아니 아가씨! 그게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까. 저 험한 설산에 아가씨 혼자 가시겠다니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물론 아가씨께서 저희 전원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뛰어난 역량을 가진 마법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 됩니다. 아가씨, 부디 저희들에게 아가씨를 끝까지 지킨다는 소임을 다할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묶어 놓을 듯이 격렬한 반응을 보여 주던 아저씨들.
아저씨들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올 듯한 의지를 불태웠고, 소녀는 스승님이 친필로 작성한 서신을 보여 주고 나서야 겨우 그들의 뜻을 꺾을 수 있었다
폴카산은 빙결 마법을 공부하는 어린 마법사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고 그곳의 등정은 혼자 힘으로 하는 게 바람직해. 그러니 자네들은 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팔불출 아버지와 같은 추태를 보이지 말고 카밀라가 혼자 떠나는 걸 배웅해 주도록 하게. 그게 그 아이를 위한 길이야.
로레인 경의 지엄한 당부.
그리고 카밀라를 혼자 보내는 게 그녀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는 준엄한 사실 앞에 선원들을 나라 잃은 듯한 표정을 한 채 소녀의 홀로서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얼른 구경을 마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카밀라는 숙소 창문 틈 사이로 보이는 불빛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아저씨들이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 눈에 선했던 것이다.
“흐흐흥♬.”
한적한 새벽길을 떠나 설산을 향하는 소녀는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예년보다 훨씬 더 강한 냉기의 폭주 탓에 아저씨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냉기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만도 오만도 아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빙하의 축복이 선사하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춰 온 그녀에게 얼음과 눈은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그녀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어머! 벌써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중, 저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이 분홍빛으로 변한 걸 감지한 카밀라는 하얀 입김을 토해 내며 기쁨을 표현했다.
자신이 마을의 끝, 등산로의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정상이 붉게 물들다니 마치 폴카산이 자신을 반겨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꼭대기의 얼음 정령님, 기다려요! 지금 내가 곧 갈 테니.”
한껏 기분이 좋아진 카밀라는 새벽녘에 쏟아지는 눈과 같은 기세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곧 그녀의 뒷모습은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