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76)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76)화(76/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76)
―도착했습니다. 페이건 님, 수고하셨어요.
“수고는 내가 아니라 네가 했지.”
눈보라를 통과한 후, 검게 물든 창공을 지나 녹음이 우거진 폴리다고스에 도착하기까지.
풍경의 변화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 어지러워질 것만 같은 먼 거리를 날아왔음에도, 아직 초승달은 서쪽 하늘 가장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막 달이 떠오르는 걸 확인한 후 폴카산을 출발했으니 복귀 과정에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셈.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기숙사에 돌아가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작별 인사를 건네는 대신 아카이드를 마주하고 섰다.
―어? 페이건 님, 피곤하실 텐데 왜 안 돌아가시고 거기 서 계세요? 아! 나 칭찬해 주려고 그러는구나. 히힛! 페이건 님의 마음은 고맙지만 오는 길에 칭찬받은 걸로 충분해요. 그러니까 페이건 님은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네가 해준 일을 생각하면 칭찬은 백 번을 해 줘도 아깝지 않지. 하지만 네가 오늘은 충분하다니까 나머지 칭찬은 다음으로 미뤄 둘게. 어, 음 내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사실 아카이드 너한테 소개하고 싶은 사람, 아니 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덩어리?
코트 안쪽으로 손을 뻗어 몰랑몰랑한 덩어리를 꺼냈다.
아카이드의 눈에는 내 손바닥이 텅 비어 있는 걸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 손바닥 위에는 나날이 묵직해지고 있는 털 뭉치가 분명히 존재했다.
“너, 지난번에 그랬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볼 수 있게 하는 거,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웅, 분명히 그랬지.
“그럼, 너를 볼 수 있는 대상도 네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겠네?”
―그것도 웅, 이 몸의 고귀한 모습을 보고 못 보고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다는 말이지. 에헴! 뭐, 물론 오르페우스의 뜻을 수호하는 ‘사자’로서 오르페우스의 후계자인 네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하겠지만.
“그럼 됐네. 지금 이 순간부터 아카이드도 널 볼 수 있게 해 줘.”
―어? 진짜? 너 지난번에 그랬잖아. 이 세상에는 못 믿을 놈이 워낙에 많으니까 나는 가급적 숨어있는 편이 좋다고?
“그거야 못 믿을 ‘놈’들 얘기를 한 거지. 아카이드는 놈도 아니고 못 믿을 존재는 더욱더 아니야. 이 어린 친구가 나를 위해 불철주야 일해 주는데 너를 계속 숨기는 건 못 할 짓이잖아?”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하긴 내가 봐도 요 왕 독수리는 참 기특한 데다가 죽었다 깨어나도 너를 배신할 것 같지는 않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른 존재, 특히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폰은 평균적인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마음을 가진 종족이었고 특히 아카이드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녀석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듣고 있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미 아카이드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털 뭉치의 존재를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기에, 난 오늘 밤 두 마리를 소개시켜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페이건 님, 아까부터 누구랑 대화를 나누시는 거예요? 설마 그 옆에 있는 붉은 새 님? 혹시 그 새 님도 나처럼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요?
“라무테 님도 소개시켜 주겠지만 일단 이 녀석 먼저. 아카이드, 정식으로 소개할게. 이 녀석의 이름은 벨제키엘, 나와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낸 아주 오래된 친구야.”
―어흠! 왕독, 아니 그리폰아.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돼서 참으로 반갑도다. 내 이름은 벨제키엘, 클라디우스의 비전을 지키는 사자이니라. 요 건방진 페이건의 스승님 격인 인물이시지.
“스승은 무슨, 비상식량 주제에.”
두 발로 직립한 채 통통한 배를 한껏 내밀며 뻐기는 자세를 취하는 북슬이.
내 눈에는 별다를 것도 없는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아카이드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는 걸 보니 북슬이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듯싶었다.
―어흠! 어흠!
보아하니 북슬이는 아카이드가 나를 대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공손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우와! 페이건 님, 살찐 고양이 같이 생긴 이 쬐끄만 건 뭔가요?
하지만 아카이드는 북슬이가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상반된 반응을 보였고.
―우와! 야옹이가 말을 하네. 히힛! 되게 귀엽다.
―야, 야옹이?
북슬이의 포동포동한 얼굴은 순식간에 찌푸려지고 말았다.
―야옹아, 너 몇 살이야? 두 살? 세 살? 엄마는 어디 있니?
아카이드는 날개 끝을 북슬이의 머리통 위에 척 하니 올려놓은 채 질문을 던졌고.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야옹이래! 최소한 아기 호랑이라고 해!
―으아악 야옹아! 눈은 찌르지 마! 아프단 말이야!
결국 화가 난 북슬이는 그대로 아카이드의 얼굴에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어휴 페이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서 둘을 달래고 올게.
“라무테 님이요?”
―응, 둘 다 아직 어린애잖아? 물론 한 명은 나잇값을 못 하는 가짜 어린애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을 다루는 건 내가 조금 더 익숙할 테니까 이 일은 나한테 맡겨.
아카이드의 얼굴에 달라붙어 솜방망이 펀치를 연타하는 벨제키엘을 보다 못한 라무테 님이 포롱포롱 소리를 내며 두 사람 사이로 날아갔고.
―페이건, 넌 잠깐 저기 멀리 가 있어!
“그건 또 왜?”
―우리끼리 할 말이 있으니까 아무튼 넌 저기 가 있어. 빨리!
그제야 아카이드를 놓아준 북슬이는 안 그래도 퉁퉁한 뺨을 한껏 부풀린 채 나를 쫓아냈다.
그렇게 내 시야를 벗어난 상태에서, 전개된 삼자, 아니 세 마리 회담.
―페이건 님, 라무테 님!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스승님! 다음에 또 만나요!
―흥! 이제 조금은 들어 줄 만하네. 오늘 처음 만난 날이고 하니 일전의 무례는 특별히 잊어 주도록 하겠어. 아무튼 너도 잘 있어 다음에 만나면 인사부터 공손하게 올리는 거 잊지 말고.
십여 분 동안 진행된 세 마리 간의 회담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종결지어졌다.
아카이드와 작별 인사를 하고 멀어져 가는 길, 아카이드가 북슬이를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솔직히 말해. 너 무슨 짓 했어?”
―내가 무얼 으쨌다고오 으애?
아카이드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난 곧바로 취조에 들어갔다.
“아카이드한테 무슨 헛소리를 한 거냐고? 니가 무슨 근거로 저 녀석의 스승님이 된 건데?”
―느안 잘모탄거 으읍어. 궁금하며 나무테한테 무러보근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면 주는 대로 쭉쭉 늘어나는 북슬이의 뺨.
하지만 녀석은 뺨따귀가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나는 와중에도 내 눈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글쎄 난 잘 모르겠네. 그런데 둘이 죽이 맞아 스승, 제자가 되기로 했다면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호호홋.
라무테 님은 드물게도 내가 아닌 북슬이의 편을 들어주었다.
―거 부아아, 아카니드가 조아서 그런건데 괘니 날리야!
“혹시나 해서 부탁하는데. 착하고 순진한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아카이드가 너처럼 되면 어쩌려고 그래?”
―흐흐 저 고맹이하테 뭘 가르치지는 내가 아라서 할 닐이니까 넌 시겨 쓰니마아.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뺨을 놔 달라고 난리를 쳤을 텐데, 북슬이는 헤죽거릴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제자가 생긴 게 그리도 좋은 걸까? 북슬이는 뺨의 아픔을 완전히 잊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흐흐 드디어 마드렀다. 제자 1호 에헤헤헤.
* * *
―그럼 이제 도착까지 사흘 정도 남은 셈이구나. 오는 길에 어려움은 없었니? 구경은 재미있게 했고?
“네 오빠, 오빠가 추천해 주신 명소도 빠짐없이 둘러봤고, 스승님께서 꼭 가 보라 하신 장소도 갔답니다.”
교신용 수정구를 마주하고 앉은 밤, 카밀라는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자칫하다 재회가 주는 감격을 감당하지 못한 윗니가 그대로 혓바닥을 깨물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오빠 앞에서 덜렁거리고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
카밀라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 음절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수정구 너머의 유리안을 마주했다.
―그래, 잘했어. 급할 거 없으니까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으면서 와.
“하지만 여정에 너무 여유를 부렸다가 수업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면 어쩌죠?”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 설령 카밀라 네가 6개월을 내리 논다고 해도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걸. 이건 내가 장담할게.
반년 만에 마주했음에도 유리안의 얼굴은 여전히 반가웠다.
단 한순간도 자신의 것이 되어 준 적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
유리안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자연스레 대화의 주제는 카밀라의 여정으로 향했다.
―음… 로레인 장로님이라면 폴카산 등정을 추천하셨을 텐데. 폴카산에는 갔다 왔니? 아 참, 그런데 거기 올해 냉기가 폭주하는 해 아니었나?
“맞아요, 역시 유리안 오빠. 대륙의 지리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파악하고 계시네요. 맞다, 오빠, 사실은 폴카산 정상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요.”
―재미있는 일? 혹시 산 정상이 붉게 물든 광경을 말하는 거야?
“아니요. 물론 그것도 재미있기는 했지만 훨씬 더 재미있고 신기한 일이네요. 아,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재미있는 분’을 만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
그로부터 10분에 걸쳐, 카밀라는 자신이 폴카산에서 보고 겪은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카밀라의 목소리가 여자치고 저음인 탓에 설명은 대체로 자분자분 조곤조곤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나 이야기의 변곡점이 올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 톤은 평소답지 않게 높아졌다.
사냥꾼의 사냥을 지켜보며 느낀 생생한 충격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말만 남기고 그리폰의 등에 올라타서 훌쩍 날아가 버렸지 뭐예요. 오빠가 생각해도 신기하죠? 그리폰을 타고 다니는 내 또래의 소년이라니.”
―…그러니까 네 또래로 보이는 그 사냥꾼이 마지막에 그리폰을 타고 날아갔다 그랬지?
“네, 그리폰.”
―흐음….
유리안의 매끈한 미간에 실금이 그어졌다.
좀처럼 인상을 쓰는 법이 없는 유리안이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그리폰 라이더라는 존재가 그리도 놀라웠던 걸까?
―혹시 네가 만난 그 사냥꾼,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어떻게요?”
―새벽처럼 까만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그것보다 조금 더 까맣고, 콧날은 요렇게 오뚝한데 입술은 두껍지 않아서 고집 있어 보이는 그런 얼굴.
“음,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얼굴은 네 또래처럼 보이는데 키는 훌쩍하니 크고, 말투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이 강하고.
“음… 오빠 말을 듣고 나니 말투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아요. 왜요? 오라버니,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응,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요? 누군데요? 오빠는 그분을 폴리다고스에서 만난 건가요? 아니면 다른 장소에서?”
―그게 말이지, 카밀라 네가 이곳 폴리다고스에 오잖아. 그럼 그 그리폰 라이더의 정체는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거야. 아하하.
영롱하게 반짝이는 카밀라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유리안은 이 대화 구조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입학식 전이나 직후 ‘자기’와 문답을 나눌 때와 달리 이번 대화에서는 자신이 답을 주는 입장이라는 차이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화 현장에는 있지도 않은 주제에 한때의 행동만으로 화제의 중심이 된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대화는 그때와 닮아있었기에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응, 맞아. 틀림없이 알게 될 거야. 카밀라 네게 보여 준 행동이며 표정이나 말투를 보건대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으니까. 애초에 그리폰을 타고 날아갔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일 확률이 극히 낮았지만.
“오라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조신한 모양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밀라.
비록 자신을 향한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 분명한 귀여운 여동생’을 보며 유리안은 남몰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카밀라가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 이렇게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나?’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자기도 그렇고, 귀여운 카밀라도 그렇고.
왜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들은 그 만만찮은 ‘괴짜 신입생’과 자꾸만 얽히는 걸까?
가슴 한편에 이는 파동을 감추기 위해 유리안은 손을 뻗어 카밀라의 얼굴이 맺혀 있는 수정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곳에 도착할 여동생의 예쁜 눈동자를 바라본 채 홀로 생각했다.
‘페이건 군, 너도 참 여복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아니 이런 건 여복이 아니라 여난(女難)이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