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89)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89)화(89/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89)
“…준수하고 심판의 판단을 최우선적으로 존중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대에 대한 존중과 감사를 잊지 말 것. 두 사람 모두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물론이죠. 크흐흐, 처음 해 본 것도 아닌데 그것도 모를까요.”
결투의 시작을 목전에 둔 시각.
두 사람 사이에 선 심판은 판에 박힌 규정을 구태여 열거해 주는 성의를 발휘했고, 당사자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동의를 표했다.
“크흐, 존중과 감사. 조부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고는 하셨죠. 네가 긍지 높은 나이투의 사람이라면 위 덕목을 잊어서는 안 될 거라고.”
“…지랄하네.”
“뭐?”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 생김새며 덩치 그리고 동의를 표하는 방식까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단 하나, 상대방에 대해 존중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감정을 품은 채 무대에 올랐다는 점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사전에 공지된 바와 같이 금번 결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인당 세 개씩입니다. 두 사람, 사용할 무기를 공개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대령했습니다!”
쿵.
심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글러는 장비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았고,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바닥이 크게 울렸다.
“상반신용 판금 갑옷과 강화 건틀릿 그리고 어깨 보호대입니다. 폴리다고스 공식 결투 규정에 따르면 한 쌍의 판금 갑옷은 두 개의 장비로 규정되지만, 상반신 전용의 판금 갑옷만을 착용할 경우 하나로 인정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지요?”
해글러의 장비 꾸러미가 그토록 무거웠던 이유가 드러났다.
해글러는 특제 강화 금속으로 제작된 판금 갑옷을 지참했고, 무게만 해도 100kg은 넘게 나가는 갑옷이 떨어졌으니 저토록 육중한 충격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갑옷이랑 건틀릿? 해글러 선배님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오셨네. 방심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건가?”
“당연하지. 오늘 아침에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관객 앞에서 짓뭉개 버리겠다고 한 거? 키킥, 해글러 선배가 전용 장비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저 건방진 새끼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라구.”
“아무리 생각을 해도 사용 장비 개수를 제한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인 것 같아. 장비를 바리바리 들고 와야 겨우 실력 발휘가 가능한 저 애송이 새끼랑 달리 선배님은 상반신 갑옷과 건틀릿만 있으면 본 실력을 다 발휘하실 수 있잖아? 더군다나 선배님께서 저 비장의 어깨 보호대까지 꺼낸 이상 큭큭.”
해글러 쪽 코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강철 심장 소속 부원들이 목소리를 낮춰 시시덕거렸다.
“어깨 보호대? 해글러 학생, 판금 갑옷을 착용하면서 별도의 어깨 보호대 또한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네. 뭐 안 될 건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걸로 확인 끝났으니 해글러 학생은 준비한 장비를 착용해도 됩니다.”
해글러의 장비 확인이 끝난 시점에서 고릴라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는 건 비단 강철 심장의 부원들뿐만은 아니었다.
관객들 역시 승부가 결정지어졌다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해글러 나이투가 아주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왔네. 솔직히 난 상황이 이 정도로 유리하다면 저 친구가 맨손 승부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거든. 그런데 저 정도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니. 이래서야 너무 일방적이라서 재미가 없겠어.”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소리 하기는. 해글러가 전용 장비를 꺼낸 것과 상관없이 저 1학년 꼬맹이가 장비 개수 제한에 걸린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난 거나 마찬가지였어. 난 해글러가 5분 안에 끝낸다에 금화 다섯 개 건다.”
“나도 해글러한테 금화 다섯 개!”
“나도! 나도!”
“야! 전부 다 해글러한테 걸어 버리면 어떡해! 이래서야 내기 성립이 안 되잖아!”
페이건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도 된 것인 양 떠들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들.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이긴다에 금화 300개.”
그런데 천박한 웃음소리 사이를 가을바람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에, 엘리시온 영애, 여, 영애께서도 내기에 참석하시려구요?”
“네. 선배님들, 저도 껴도 괜찮죠? 저는 페이건 클라디우스가 승리한다에 걸게요. 거기 분명히 적어두세요. 카밀라 엘리시온이 페이건 쪽에 금화 300개 걸었다고.”
“아,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난입에 깜짝 놀란 선배들은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카밀라는 확인 사살과도 같은 미소를 보여 준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멍청이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어. 제라르, 금화 300개 따는 대로 내가 도구점에서 아주 크게 한턱 쏠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카, 카밀라, 학생들 간 사사로운 내기는 규칙 위반인데….”
“저 바보 선배들이 내 친구를 비웃는데 그깟 규칙 위반이 문제야! 까짓거 들키면 징계 좀 받고 말지 뭐. 그리고 징계 한 번에 금화 300개라면 할 만하잖아?”
카밀라는 오늘도 그 단아한 외모와 딴판으로 호탕하기 그지없었고, 제라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페이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지.”
“그치만 너랑 나, 우리 둘 다 어제저녁부터 페이건을 못 봤잖아. 페이건, 혼자서 준비는 잘했겠지?”
“우리가 보고 안 보고가 뭐가 중요해? 제라르, 너 설마 페이건이 저 고릴라한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페이건은 이길 꺼야. 그게 페이건한테 제일 잘 어울리니까!”
카밀라의 도발에 제라르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페이건이 준비할 게 있다며 방문을 거절하는 바람에 어제저녁 이후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라르의 마음속에는 페이건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페이건 학생,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결투에서 장비를 한 개만 사용하겠다는 게 맞습니까?”
“네, 전 티아매트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확인해 주시죠.”
한데 바로 그때.
“응? 제라르, 페이건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장비를 하나만 쓰겠다고 한 것 같은데… 아하하. 페이건, 왜 또 그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두 사람의 굳건한 믿음조차 뒤흔들 법한 충격적인 발언이 페이건의 입에서 터져 나왔고.
“저,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지난번에 사용했던 그 침은 하나도 안 쓰고 덜렁 칼 한 자루로 해글러 나이투를 상대하겠다고?”
“미친 새끼, 저 새끼 어디 아픈 거 아냐? 맛이 가서 자기가 치료술사인지 기사인지도 헷갈리는 거 아니냐고.”
카밀라와 제라르를 깜짝 놀라게 했던 발언의 파동은 삽시간에 그 몸집을 키워 관객석 전체를 덮쳤다.
“미친놈, 시건방을 떨어도 유분수지.”
“혹시 저놈이 핑계를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어차피 침 두 개를 더 쓴다 해도 이길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니까 스스로를 제약했다는 핑계를 만들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냐고.”
“그게 사실이라면 저 새끼는 지지리도 멍청한 놈인 거지. 헹! 피떡이 되게 얻어터진 얼굴로 핑계를 대 봤자 누가 들어주기나 할 것 같아?”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웃음.
그 비웃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심판은 마지막 확인을 시도했다.
“페이건 학생, 미리 말해두는 데 혹시 결투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장비를 사용하고 싶다고 해도 지금 확인을 받지 않는다면 사용이 불가합니다. 정말 그 칼 한 자루로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확인을 끝냈으니 페이건 학생은 검을 잡아도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특기인 침술을 스스로 봉인하겠다는 페이건의 결정에 변화는 없었고, 심판은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확인 절차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3분 후에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양측 학생은 감응 장비를 착용해 주십시오!”
으드득.
철컥.
페이건이 보여 준 도발에 가까운 여유.
그 여유를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한 해글러는 이를 뿌득 갈며 감응 장비를 착용했다.
‘…건방진 새끼, 살려 달라고 빌어도 이미 늦었어.’
우우웅.
심장과 명치 등의 급소 부위에 장착 완료된 수정구는 빛을 뿜으며 가동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학생들 간 벌어지는 결투에서 목숨을 건 승부가 펼쳐질 수는 없었기에 감응 장비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준비된 최소한의 장치라 할 수 있었다.
착용한 급소 부위에 한도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 감응 장비는 자체적으로 방어 마법을 발동해 피해자를 보호했고.
마법이 발동된 기점을 기해 해당 장비 착용자의 패배로 결투는 마무리 지어졌다.
‘감응 장비가 측정하지 못하는 부위만 골라서 아주 뼈를 가루로 만들어 주마.’
물론 안전장치가 있다 하여 모든 위험이 제거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특히 해글러처럼 결투에 익숙한 학생인 경우, 장치를 피해 고통을 주는 방법을 빠삭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찾아올 쾌락의 시간을 기다리며 해글러는 입맛을 다셨다.
―30, 29, 28….
감응 장비의 착용까지 완료된 이상 더 시간을 끌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고, 이내 결투 시작을 알리는 초읽기가 울려 퍼졌다.
“미리 말해두는 데 이제 와서 울며불며 사과한다 해도 받아 줄 생각 같은 건 없어. 크흐.”
“개소리 집어치우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뭐? 이 새끼가 감히 선배님에게….”
“선배님? 조금 전에 심판이 말했잖아. 이 링에 올라온 이상 진검승부만이 있을 뿐 학년이니 나이니 그런 건 무의미하다고. 5분 전에 들은 걸 벌써 잊어 먹다니 대체 얼마나 멍청한 거야?”
“이, 이 새끼가 끝까지….”
결국 해글러의 미간은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리고야 말았지만 페이건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11, 10, 9….
“제라르에게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그 일, 네가 시킨 거냐?”
“그럼 내 심부름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명령을 들었을까? 그 새끼들이 병신 같아서 너를 따라다니는 놈을 두들겨 주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야. 그리고 그 원한은 오늘 네놈으로 갚는다.”
“그래, 그거면 됐어.”
―4, 3, 2, 1, 삐이이!
쾅.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둘이 맞부딪친 자리에서는 강력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가가가각.
티아매트의 날이 건틀릿 손가락 마디 사이를 긁어내는 소리.
“역시 해글러 선배님! 검날을 완벽하게 막아 냈어!”
“선배님 힘내세요! 여기 오는 길에 그러셨잖아요. 이제 새로운 건틀릿을 얻을 거니까 지금 쓰고 있는 그건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건틀릿이 다 해어질 때까지 두들겨 버리라구요!”
해글러의 후배들이 양팔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검사와 격투가의 싸움이라는 건 결국 거리재기 싸움이었고, 둘 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상황은 격투가에게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건틀릿이 티아매트의 날을 잡아 버렸으니 해글러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제압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하지만 희희낙락한 부원들과 달리 해글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충격 직후 발생한 상황이 자신의 당초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뭐야? 이 새끼 도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야?’
가가가각.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채 지루하게 이어지는 줄다리기.
예상대로라면 이런 광경이 펼쳐져서는 안 됐다.
마나의 양도, 근력도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게 자명한 사실이기에(적어도 본인은 이렇게 믿고 있다) 해글러는 초반 기세로 페이건을 압도해 버린 뒤 그 흐름을 이용해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마냥 무모하게만 보였던 페이건의 돌격을 굳이 피하거나 흘리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진 이유 또한 단번에 승부를 내기 위함이었다.
“이이이익!”
가가각.
하지만 어쩐 일인지 자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이 건방진 꼬맹이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짓누르기를 견뎌 내고 있었다.
“뭐야? 왜 저래? 왜 저러고 가만히 있는 거야?”
“격투가가 저렇게 파고들면 바로 초근접전으로 끌고 가거나, 메쳐 버리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런데 해글러 나이투는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바싹 붙어만 있지?”
예상치 못한 대치가 길어지자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관객들 또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대치 국면의 장본인이 이 말들을 들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면 입 닥쳐! 상대방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공세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알기나 해! 이 머저리들아!”
라고 외쳤겠지만, 불행하게도 멋모르는 이들의 수군거림에 응답할 기력이 작금의 해글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륵.
어느새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해글러의 미간에 간 주름 또한 더욱더 깊어졌다.
“크아아악!”
온 힘을 다해 찍어 누르고 있었지만 밉살스러운 애송이 놈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었고, 결국 페이건에게 고정되어 있던 해글러의 눈동자가 좌측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심판이 거듭 확인을 한 바 있는 세 번째 장비, 어깨 보호구가 빛을 뿜으며 번쩍이고 있었고 해글러는 입술을 깨문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제길… 이건 가능한 한 쓰고 싶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