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Assassination, Become the Strongest Healer RAW novel - Chapter (97)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97)화(97/240)
암살의 신, 최강 힐러 되다 (97)
지난 열흘간 베가스와 친해지기 위한 특훈이 시작된 이래로 난 매일 같이 유리안 선배를 마주하고 있었다.
열흘 전.
베가스를 손에 넣은 날, 장서관에서의 조사를 마무리한 나는 유리안 선배의 방문을 두드렸고.
선배가 적잖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준 게 정기 회동의 시작이었다.
그날 오전, 이미 한 차례 만남을 가진 바 있음에도 내가 선배를 찾은 이유는 베가스를 마음 놓고 사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속성 마법 저항력을 갖춘 수련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서였다.
폴리다고스의 모든 학생들 중 수련장의 저항력에 대해 가장 섬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 내가 알기로 유리안 알렉세예브가 최고일 테니까.
“이 시간에 어, 어쩐 일이야? 뭐? 학생에게 개방된 훈련장 중 어떤 훈련장이 가장 내성이 강하고, 그 훈련장을 빌리고 싶으면 어떤 절차가 필요하냐고? 으음, 물론 알고는 있는데 갑자기 훈련장에 대한 정보는 왜?”
방문을 두드린 이유를 밝히자 선배는 잠시간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내 의도를 파악한 뒤 곧바로 화색을 하며 노력을 기울여 줬다.
“「베가스의 송곳니」와 친해지고 싶다고?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 좋은 물건을 얻었으면 바로바로 훈련을 해야지. 그런데 이동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수련에 시간을 써도 괜찮겠어?”
“이동수업 준비는 차질 없이 해 나갈 거지만 훈련도 게을리할 수 없으니, 자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훈련을 하고 싶다고? 우와! 페이건의 열의에 이 형아, 감격! 좋아, 내가 도와줄게. 열심히 정진하겠다는 후배는 언제라도 환영이야!”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배의 도와주겠다는 말을 훈련장 대여를 알아봐 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생각이 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왔구나! 그럼 일단 서로 익숙해지는 게 먼저겠지. 음, 그런데 보아하니 페이건 너 하루 종일 베가스를 착용하고 있었구나. 확실히 익숙해진다는 측면에서 그게 좋아. 「베가스의 송곳니」를 착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마나 손실만 막을 수 있다면 그편이 가장 효과가 좋기는 해.”
수련장을 빌리는 데 성공한 첫날, 할당된 시간에 맞게 수련장에 도착했더니 훈련복을(그것도 나 이상으로 완벽하게) 맞춰 입은 선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페이건 네가 사용하는 그 흑검이나, 아! 이름이 티아매트야? 아무튼 티아매트나 침들도 광범위한 의미로는 마법 아이템에 포함되기야 하겠지만, 「베가스의 송곳니」처럼 직접적으로 마나를 소모하는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다행히도 나는 그 비슷한 것들을 많이 다뤄 봤으니까 페이건이 베가스와 익숙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선배에게 수련을 도와 달라는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수상하리만치 기이한 열정을 선보이며 내 수련을 돕겠다는 의지를 불살랐고.
“아니야. 나 괜찮아, 하나도 안 바빠. 이 정도 시간은 얼마든지 뺄 수 있어. 더군다나 페이건에게 카밀라와 관련해서도 신세를 졌는데 내가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응? 뭐? 정말로 괜찮다고? 수련장을 확보하는데 만해도 큰 도움을 받았는데 더 이상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잠깐만… 그런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지금 그 표정은 꼭….”
거듭되는 내 사양에 결국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아니, 지금 그 표정은 꼭 ‘어떻게 하면 저 방해꾼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쫓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얼굴이잖아. 물론 내 착각이겠지만, 엇흠!”
“잠깐! 내 말부터 들어.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돼. 아니 하늘 같은 5학년 선배님께서 각별한 현장 지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1학년짜리가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페이건, 너 혹시 방출형 마법 아이템이 우습게 보여? 네 재능이 뛰어나다고 마법 아이템을 우습게 봤다가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우습게 본 적이 없다니! 내가 도와주겠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는데, 구태여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게 우습게 보는 게 아니면 뭐야! 씨익씨익.”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은 이상 난 못 이기는 척하고 선배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선배가 내 훈련을 옆에서 지켜봐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사양을 했던 건 이미 수련장 확보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은 마당에 안 그래도 여러 일로 바쁜 사람에게 더 이상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최소한의 양심의 발로(發露)’였다.
그런데 본인이 저렇게 펄쩍 뛰니 호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물론 결투가 있던 다음 날 감동을 언급한 이래로, 묘하게 나를 대하는 데 격의 없어진 선배의 태도가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문제 없이 넘길 수 있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고, 지금부터 감사한 마음으로 내 도움을 받겠다고? 흐흠,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네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괜한 시간만 낭비했잖아. 그럼 일단 방출에 관한 매커니즘부터 이해해 볼까? 잘 들어, 이런 류의 방출형 아이템은 네가 주입한 마나가 원소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포인트거든.”
그렇게 난 선배의 협조 속에서 베가스와 익숙해지는 과정을 진행했고.
“오늘부터는 속성의 전환 속도를 올리는 연습을 해 보자. 혹시라도 페이건 네가 숲이나 던전에서 속성력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할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몬스터가 가지지 못한 속성으로 다양한 공격을 가하는 거거든. 네가 원하는 타이밍에 베가스의 속성을 전환할 수 있다면 속성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주 수월해질 거야.”
어느덧 선배와의 합동 연습은 꼬박 열흘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수련이 진행되는 내내 선배의 시의적절한 조언이 엄청난 실력 향상을 이끌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전생의 내가 여러 가지 무기에 통달해 있었다고 하지만 마법에 관해서는 조예가 깊지 못했고, 천재 마법검사인 유리안 선배가 지도해 주는 탁월한 식견은 그런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답례를 하겠다고?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선배가 후배를 도와주는데 대가는 무슨. 너 내가 그렇게나 속물로 보여?”
분명 몇 번이고 지도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다고 해도 펄쩍 뛰며 거절을 하던, 더없이 자상하고 현명했던 유리안 선배였지만.
다시금 현재.
“잘못? 웃기시네. 항상 경우가 바르고 깍듯하신 클라디우스 공자님께서 잘못한 일이 뭐가 있어? 잘못이 있다면 이상한 기대를 한 내 잘못이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통 어울리지도 않는 뚱한 표정을 한 채 고장 난 자명종처럼 연신 퉁퉁거리고만 있는 걸까?
내 행동의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탓에 저러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어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실실거리던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의 큰 잘못을 내가 저질러 버린 건가?
아니, 잠깐 애초에 나한테 불만이 있었다면 이 장소에 오지 않는 게 그 불만을 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 구태여 시간 맞춰 출석을 해 놓고서 흥흥거리는 건 무슨 생각이지?
―야! 쟤 왜 저래? 너 혹시 우리 몰래 저 꼬맹이 간식 뺏어 먹기라도 했어?
‘네가 하루 종일 내 머리 위를 지키고 있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 몰래 선배 간식을 뺏어 먹어? 그리고 간식을 뺏어 먹었다고, 화를 내다니 선배가 너처럼 철부지인 줄 알아?
―으음, 그게 아니야? 이상하다. 간식 뺏어 먹은 게 아니면 저렇게 화를 낼 일이 없는데?
선배가 화가 난 이유를 짐작해 보기 위해 북슬이와 머리를 맞대도 봤지만 (역시 이런 방향으로는 없느니만 못한 머리인 탓에) 뚜렷한 해답이 도출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흐음… 하는 행동을 봐서는 꼭 토라진 여자아이를 보는 것 같은데. 유리안 쟤가 여자아이도 아니고 페이건 너한테 토라질 이유가 없잖아?
라무테 님의 추측은 북슬이의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상황 파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
“야! 페이건 클라디우스!”
“네, 선배님.”
풀 네임?
첫 만남 이래로 선배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페이건 아니면 페이건 군이었는데?
“너… 진짜 나랑 안 친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나, 다 봤어. 오늘 오후에 해글러 나이투의 징계를 논의하기 위한 자치회가 열렸단 말이야. 거기서 해글러의 꼬붕들이 증언한 내용을 모은 진술서를 열람했는데… 네가 강철 심장 꼬붕들 앞에서 그랬다매! 나랑 하나도 안 친하니까 유리안 알렉세예브 같은 건 눈꼽 만큼도 신경 쓰지 말고 너네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짝.
‘해글러 꼬붕의 진술서? 아하, 그것이었구나!’
다행히도 선배가 화난 이유는 다른 사람도 아닌 선배 본인의 입을 통해서 밝혀졌고 난 감탄사라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해글러의 나이투의 여죄(餘罪)를 추궁하기 위한 위원회가 개최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선배님께서 참여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왜 너랑 친하지도 않은 내가 참석해서 해글러 그놈의 편이라도 들어줄까 봐 불안해?”
“설마, 그럴리가요.”
해글러 나이투가 나로 인해 고꾸라지기 직전까지 제아무리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한들 그 위세의 대부분은 대귀족들 간의 카르텔에서 비롯된 것.
그토록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준 데다, 대귀족 카르텔에서 배척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간 해글러 놈이 권세의 힘을 빌려 가리고 있던 숱한 죄들은 속속들이 공개되고 있었다.
드러나고 있는 해글러의 죄 중에는 놈이 자신의 꼬붕을 시켜 나를 협박하려 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유리안은 나와 해글러의 꼬붕들이 했던 대화를 알게 된 연유였다.
‘그래, 내가 분명히 해글러의 꼬붕들에게 유리안 선배랑은 친할 것도 없으니 선배는 신경 쓰지 말고 너네들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 자기 딴에는 나한테 이것저것 신경 써 주고 있는데 그런 말을 들었으니 사람 좋은 왕자님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수도.’
어쨌거나 선배가 화가 난 이유를 알았으니 그에 따른 대응을 해야 했기에, 난 생각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하늘에 맹세코 선배 ‘같은 거’라든가 ‘따위’라는 식의 발언을 입에 담은 적은 없습니다.”
“아, 그러셨어? 클라디우스 공자님께서 발언에도 신경을 써 주시고! 아주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눼에.”
하지만 서운함이 컸는지 선배는 좀처럼 기분을 풀려고 들지 않았고 결국 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답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과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다고 생각한 건 어느 정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움찔.
“물론 그렇다 하여 선배님을 존경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외려 시간이 지날수록 선배님을 향한 존중은 더욱더 커져만 가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 친하지는 않지만, 선배님과 더 많이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쫑긋.
“하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배님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태양 같은 분이고 전 태생이 경계인이니까요. 저를 미워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많아질 예정이고 그런 제가 함부로 스스럼없는 행동을 했다가 선배님께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큰 것도 사실이에요.”
“누, 누가 자기한테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해달라고 했나.”
“이런 연유로 그런 말을 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해 보니 선배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너무 가벼이 여기는 발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죄송합니다, 경솔한 발언이었어요.”
“그, 그런 생각으로 말한 거라면 진즉에 그렇게 얘기를 했어야지. 흐흠!”
항변의 효과가 있었는지 선배는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부스럭.
“…그런데 그 손에 있는 건 뭐야?”
한참 몸을 움직이다 갑자기 행동을 멈춘 탓인지 격한 갈증이 몰려왔고, 난 오는 길에 방문 앞에서 집어 든 음료 용기를 기울이며 답했다.
“방을 나오는 길에 문 앞에 있길래 가져온 겁니다. 바스티아 선배가 보내 준 것 같은데. 선배의 바람에 응하기는 못하겠지만 주신 음료까지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뭐? 바스티아? 아일리 바스티아가 너한테 뭘 보냈어!”
“음료며 간식이며 자꾸 사람을 통해 보내 주시는 데 참 곤란해요.”
“그 사람이 너한테 왜!”
“왜긴 왜겠어요. 자기가 운영하는 학회에 견학 한번 오라는 거겠죠. 이 정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 포기할 법도 한데. 보내 주는 걸 마냥 모른 척할 수 없고. 그렇다고 견학을 갈 생각은 더욱더 들지 않으니 곤란하네요.”
몇 번이나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아일리 바스티아의 선물 공세.
“선배님께서도 한 모금 드시겠어요? 그 마음은 부담스럽지만, 음료 향은 참 좋네요.”
“그거 이리 내! 꿀꺽꿀꺽.”
혹시나 싶어 음료를 내밀자, 선배는 재빠르게 내 손에서 용기를 낚아챈 후 단숨에 비워 버렸고.
꽈지직.
“이불여우같은게이런식으로끈질기게나온다이거지….”
응? 지금 여우 어쩌구 하는 말이 들린 거 같은데?
텅 빈 음료 용기를 찌그러뜨린 선배는 두 눈을 부릅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인데?”
“네? 뭐를요?”
“뭐기는. 그래서 이런 거 계속 받았으니까 푸른 달에 한번 가 볼 생각인 거야?”
“아니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를 원하는 바스티아 선배의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그곳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왜?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그냥, 좀 부담스러워서요.”
“헛! 허흠, 좋아. 방금 전 그 용단을 기념해서 이번에 알게 된 말실수는 특별히 용서해 줄게.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런 서운한 말 해 봐. 그때는 형아 진짜 화낼 거야.”
응? 언제부터 당신이 내 형이었어?
“흐, 흐흐. 그런데 제안을 거듭 거절한 건 정말 잘한 일이 맞지만 그래도 한 번쯤 얼굴을 마주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묵묵부답으로 거절만 하고 있으면 아일리 바스티아가 서운해할 수도 있으니까.”
“글쎄요. 선배님의 말씀은 맞다만 굳이 그렇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뭐, 페이건 군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흐, 흐흐.”
내가 바스티아 선배의 제안을 깠다는 게 저리도 흐뭇한 일일까?
선배는 완전히 풀어진 얼굴에 한참을 그렇게 헤실거렸다.
“페이건, 있잖아. 내가 충고 하나만 할게. 네가 아일리 바스티아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대응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조심하는 게 좋아. 그 여자, 겉보기와 달리 전갈처럼 지독한 면이 있거든.”
“전갈이요?”
“응, 조심해. 아일리 바스티아가 언제까지 너의 무시를 참아 줄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 너를 상대로 해코지를 하려 들 거야. 그러니 항상 조심하도록 해.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알겠지?”
헤실거림의 시간이 지난 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유리안 선배는 진지한 모습으로 당부를 건넸고, 난 수련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 동작에 들어가며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바스티아 선배가 어린애도 아니고. 또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고작 저를 향한 자신의 호의가 거절당한 걸로 감정적인 행동을 하려 들겠어요.”
* * *
다다다닥.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대리석 복도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경박한 발걸음 소리.
후룩.
‘도착했나 보네.’
오늘의 과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직감한 아일리 바스티아는, 세공 유리잔에 가득 담긴 찻물로 입술을 적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보라색! 내가 보라색으로 준비하라고 했잖아! 아일리 양이 지난번 연회에서 난 보라색이 잘 어울린다고 한 말 못 들었어!”
찰싹.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보라색 타이로 준비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천한 것들, 지체한 시간 때문에 아일리 양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너희 천것들은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야!”
피식.
귀빈실 측면 복도에 위치한 드레스 룸에서 들려오는 성마른 외침.
사용인들을 향한 손찌검의 흔적이 물씬 느껴지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분노의 분출을 들으며 아일리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멍청이. 보라색이건 빨간색이건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설령 네 우스꽝스러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든다 한들 네가 덜떨어진 멍청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안면 근육 사이로 파고드는 조롱의 미소를 감추기 위해 아일리는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복도를 내달려 온 ‘쓸데없이 혈통만 고귀한’ 저 얼간이는 적어도 영양가라는 점에서 만족할 만한 먹잇감이었으니까.
로덴토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저 쓰레기가 하굴가의 사절단에 관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면 ‘일족의 원’이 몬디 하굴 일행을 처리한 후 그들을 바꿔치기한다는 대범한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을 터.
‘비록 성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 결정적인 순간, 일의 성사가 흐트러지기는 하였지만. 후훗.’
어쨌거나 향후 일족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라도 로덴토의 애송이는 확실히 포섭해 놓을 필요가 있었기에 아일리는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설령 일족의 대계를 위함이 아니라 해도 지금 이 순간, 로덴토의 멍청이는 분명한 쓸모가 있었다.
최근 들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의문의 신입생’을 효율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로덴토의 얼간이가 가진 힘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페이건 클라디우스,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도도한 표정으로 있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 내 호의를 거절한 대가가 얼마나 크고 냉혹한지 지금부터 아주 천천히 가르쳐 줄 테니 기다리고 있으렴.’
삐이그덕.
아일리 바스티아가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귀빈실의 문이 열렸고.
“아일리, 오래 기다렸지?”
‘오베라토의 마녀’가 기다려 온 ‘인형 후보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머리카락을 한껏 멋들어지게 빗어 넘긴 채 ‘야릇한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과 시선을 마주한 채 아일리 바스티아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게오르그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못 본 사이에 그새 더 멋있어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