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113)
694화 긁어서 좋을 게 없다니까요 (3)
피식.
강찬은 특유의 미소로 심도원의 인사를 받았다.
“질문을 드리기는 했지만, 확신은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얻었습니다.”
심도원이 짧게 말을 건넨 뒤였다.
통로 안쪽에서 여권을 가져갔던 직원과 뒤늦게 확인하라며 보낸 직원이 동시에 보였다.
“제가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강찬은 심도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할 말이 있는 눈빛인데 과거를 추억하자는 의미는 확실히 아니었다.
“삼성동 건물 알아?”
“경계 근무를 맡았던 건물 말씀입니까?”
두 명의 직원이 강찬의 표정을 읽을 정도로 다가와 있어서 강찬은 입을 다물었다. 여권을 받아서 속 페이지를 확인한 심도원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제라르에게 내밀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심도원이 고갯짓을 던지자 직원 두 명이 통로를 따라 걸었다.
“1층에서 보자. 몇 시가 편해?”
“19시도 괜찮겠습니까?”
강찬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법무부 사열대와 세관을 통과한 심도원은 입국장 출구 안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깍듯한 인사였다.
경력만 본다면 대테러 팀장을 맡았어야 할 요원이 공항에서 VIP를 챙기는 총대를 메고 있는 거다. 이런 임무라도 감사할 정도로 사고를 쳤을지 모르지만, 강찬은 그가 보여 주었던 눈빛과 대테러팀 요원들이 지닌 자부심을 믿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짧게 끄덕여 준 강찬은 제라르와 함께 입국장으로 나섰다.
정보총국이 지원한 승용차가 기다린다고 들었다. 굳이 찾을 거 없이 입국장을 나서면 ‘무슈 강’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을 거라고도 했다.
염병할, 진짜 놀랐다.
나쁜 뜻 아니다. 싫다는 의미 역시 손톱만큼 없다. 그저 워낙 놀라다 보니까 습관처럼 익숙한 표현이 나왔을 뿐이다.
보는 순간부터 설렜다.
평생 만들어 본 적 없는 미소도 생기고.
정장이 잘 어울린다.
교복도 참 예뻤는데….
빌어먹을 블랙헤드 새끼 때문에 지금은 조카를 마중 나온 막내 이모쯤으로 보이는 김미영이 강찬을 보고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제라르는 강찬보다 반 박자 느리게 김미영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
“왜 그렇게 놀라요? 제라르?”
“놀라기는… 요?”
“어머? 오랜만에 봤다고 존댓말로 대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면 내가 나이 들어 보여서 자연스럽게 나온 건가요?”
이중 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꿈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가장 편하다. 프랑스 생활이 오래된 만큼 김미영은 제라르보다 더 현지인처럼 들리는 프랑스어로 조였다. 이런 거 그냥 두면 제라르는 뼈와 거죽만 남는다.
“어떻게 왔어?”
“내가 누구랑 있는지 잊었어요?”
문바키가 입을 나불댄 건지, 아니면 라노크가 저 날 선 미소에 눌린 건지, 알 길은 없으나 그쪽에서 정보가 샌 건 분명했다.
“정보총국에서 차를 가져온다고 했는데?”
“내가 관두라고 했어요. 가요.”
뭐 그렇게까지….
주변을 돌아보던 강찬이 시선을 가져온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두 분은 집으로 가시죠?”
얍삽한 자식.
제라르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쥐어짜 낸 듯한 배려를 내놓았다.
“우리 신혼여행에도 함께했던 분이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죠. 사양하지 말고 함께 가요.”
몸을 돌린 김미영의 뒤에서 제라르가 간절한 표정으로 강찬을 바라보았다. 혼자 움직이게 보내 달라는 의미가 분명했는데 이 험한 서울에 혼자 보내서야 마음 편히 밥이 목에 넘어가겠나.
‘어쩌겠냐? 저렇게 하는데?’
어깨를 들썩여 보인 강찬은 김미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청사를 나와 도로 건너편의 주차장으로 향한 김미영은 고급 승용차의 운전석 앞에서 강찬과 제라르를 기다렸다.
셋이서 차에 탄 다음이었다.
“어디로 가요?”
“삼성동. 약속이 있어.”
“그럴 줄 알았어요. 벨트 매요.”
능숙하게 차를 움직인 김미영은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했다. 나이 먹었다. 그런데도 옆모습에는 백설공주라던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떡해서든 김미영과의 시간을 만들고 싶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감염 말이에요.”
“뭐?”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아직 힘들잖아요!
마치 현실을 일깨워 주는 듯한 질문에 강찬은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강찬을 김미영이 슬쩍 돌아보았다. 그냥 돌아본 거다. 그런데도 공무원 특유의 눈빛이어서 그런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지적받는 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거예요?”
“예방이나 치료 약을 생산하지 못하면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를 정도.”
이 정도의 답이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운전하는 김미영의 눈가에 관료 특유의 냉정함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삼성동 약속은요?”
“국가정보원 원장. 전직 요원, 현직 국가정보원 요원. 우선은 이렇게 세 명.”
“여전히 바쁘네요. 건강은 진짜 괜찮은 거죠?”
이건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서였다. 늘 강찬을 염려하는 심정에 편한 답을 못 주는 것도 그렇고.
“부탁이 있어요. 국가정보원장이요.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말아요.”
뭐라는 거지?
어떤 종류라도 강찬이 하는 일에 김미영이 이런 식의 부탁을 한 적은 없었다.
왜 이런 요구를 할까?
강찬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사관에 국가정보원 요원이 상주하는 건 알죠? 편하게 지내는 거 같은데 그분들에게 위험한 일들이 꽤 많아요. 귀순하겠다는 북한 사람들, 혹은 주요 정보원과 접촉하는 경우요.”
김미영의 말을 들으며 강찬은 공항에서 보았던 심도원을 떠올렸다. 위험하다고 해도 대사관에 속한 요원이라면 그나마 낫다. 몰라서 그렇지. 그녀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험한 일들이 많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요원들이 국가정보원 입구 벽에 별로 새겨진다.
“국가정보원 원장이 문제가 많은 건 대사관에 있는 동안에도 알았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분들이 좌절하는 모습도 보았고요. 원장을 만나더라도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이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너무 티 나게 하지는 않았으면 싶어요.”
티 나지 않게 하라는 정도야 뭐.
강찬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언제 왔어?”
“오늘 오전에요. 오늘은 나도 쉴 거고, 내일은 한남동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점심 먹을 거예요. 두 분이 제라르 이야기 많이 해요. 내일 시간 되면 제라르도 오세요.”
“그러지.”
“그새 많이 편해졌네요?”
잘 나가다가 꼭 이렇게 찔러요. 사람이.
반가운데 공연히 입맛이 다셔지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올림픽 도로를 느긋하게 달린 승용차가 삼성동에 도착했다. 건물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이었다.
“함께 올라가자. 일 마치면 데려다줄게.”
“테러에 주눅 들어 있으면 저들이 더 날뛸 거잖아요. 혹시 내가 나쁜 일 당하면 지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응징해 줘요. 다시는 나같이 당하는 사람 안 나오게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건넨 제안을 김미영이 참 강단 있게 받았다.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급한 건지 알고 이해해서 그런 느낌도 있었다.
“먼저 갈게요, 제라르.”
“조심해서 가.”
뭐 손까지 흔드냐?
제라르에게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 준 김미영이 운전석에 올랐고, 곧장 도로에 합류해 사라졌다.
위험하다고?
강찬은 주변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오는 동안 삼성동 건물 주변, 그리고 막 떠난 김미영의 승용차 주변에 정보총국 요원들이 깔렸을 게 분명했다. 김미영에게 강찬의 동선을 알려 줄 정도라면 이미 문바키가 그 정도 안전을 확보했다는 의미였다.
응징해 달라고도 했다.
김미영이 테러를 당하면 강찬은 누구보다 강철규를 말리지 못한다. 거기에 이모라고 부르며 막냇동생처럼 따르는 강태산은 어떻고?
피식.
강찬을 말릴 사람이 있기나 할까?
승용차가 사라진 도로를 보고 있던 강찬은 몸을 돌렸다.
“올라가자.”
오랜만에 들어서는 건물이었다.
입구 정면 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단순 방문객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일반 엘리베이터 구역을 지나친 강찬은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디지털 장치에 제라르가 엄지를 대며 문이 열렸고, 지겹도록 이 순간을 기다렸을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버튼을 누른 제라르가 시선을 돌려 가며 엘리베이터 안을 살폈다.
때앵.
문이 열리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다시금 디지털 장치에 제라르가 엄지를 대면서 사무실 문이 열렸다.
가운데 놓인 둥그런 테이블은 다예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배달해 먹은 기억을 메뉴처럼 담고 있었고, 한쪽에 있는 휴게실은 피곤에 절어 기절하듯 잤던 날들을 삼켰다.
안으로 들어서 테이블로 다가간 강찬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에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사는 거 진짜 별거 없는데.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지친 몸을 일깨워 주는 것처럼 달달한 냄새가 강찬을 깨우듯 달려들었다.
“대장.”
역시 운치를 아는 놈.
예상대로 제라르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다가왔다.
이런 순간에 담배를 외면하는 건 죄악이니까. 강찬이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자 만족한 표정으로 제라르가 볼을 우그러트리며 웃었다.
찰칵.
“후우-.”
러시아 공항에서, 날아오는 비행기에서도 피웠다. 그러나 긴 비행 끝에서 봉지 커피를 앞에 두고 피우는 건 전혀 다른 맛이었다. 지저분하지만, 커피를 마시고 난 종이컵에 피우던 담배를 넣는 쾌감은 또 어떻고.
모처럼 느끼는 여유 속에서 홀로 버텼을 다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떠올릴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강찬의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강찬은 테이블에 올려 두고서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이용우입니다, 부원장님.
“지금 어디야?”
– 문자로 보내주셨던 건물 로비입니다. 동료 박중상, 안전을 위해 함께 다니던 오마르, 자밀라도 같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마르와 자밀라는 이 공간에 있는 게 어설픈 호텔에 있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예멘에서 봤던 제라르가 내려갈 거다.”
– 그런 분이 직접 안내까지 하십니까?
이놈은 뭔가 뻔뻔한 느낌인데 그게 또 이상스레 밉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통화를 마치는 앞에서 제라르가 몸을 일으켰다.
“올라올 때 이용우 지문도 등록해줘.”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려서 그런데 나중에 해놓겠습니다.”
하긴, 세월이 얼마인데.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라르가 사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강찬은 창가로 다가가 창에 손을 짚고서 서울의 하늘과 빌딩 숲, 그리고 아래로 깔린 도로를 차례로 내려다보았다.
***
느닷없이 한국으로 보낸 오마르와 자밀라, 불쑥 장례식을 맡겠다며 프랑스 국적으로 귀국, 커피콩, 그렇게 사건을 몰고 다니던 이용우가 지경그룹 디자인 총괄 사장을 만났다. 그냥 총괄이 어쩌고 하는 사장이면 말 안 한다. 세상이 다 아는 지경그룹 회장 천중명의 부인이 무척이나 공손하고 정중하게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을 대했다. 이런저런 내용 탓인지 박중상은 ‘이 새끼 뭐지?’ 하는 눈으로 이용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삼성동 건물은 또 뭐냐?
박중상의 눈에 담긴 의미를 빤히 알면서도 이용우는 태연하게 건물 내부를 돌아보았다.
언제 오시나?
오마르와 자밀라마저 궁금해하는 시선 앞에서 이용우가 안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비상 통로인 듯한 문이 열리며 눈이 번쩍 띄는 남자가 로비를 향해 걸어왔다.
금발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깊은 눈매, 우수에 젖은 느낌에 대항하듯 볼을 타고 내려간 흉터,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슈트 핏, 거기에 기다란 팔과 다리, 제라르 드 미르미에라고 했었나?
예멘에서 보았던 프랑스 외인부대 사령관 출신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서울에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우리 말로 인사를 주고받는 제라르와 이용우를 박중상과 오마르, 자밀라는 아예 넋이 나간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분과의 인사는 올라가서 하고, 우선 움직입시다.”
“예.”
몸을 돌리는 남자를 따라 걸으며 박중상이 눈짓을 던졌다. 누구냐는 의미인데 지금은 답하기 그렇다.
공용 엘리베이터를 지난 남자가 비상 통로로 보이는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의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고, 이어서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예.”
목소리도 참 멋지다.
“알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방금 도착한 분이 있어서 함께 올라가죠.”
“예.”
대답한 이용우는 제라르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히익?’
하마터면 놀란 소리를 낼 뻔했는데 이용우는 가까스로 참았다. 곁에 있는 박중상은 좀 더 놀란 얼굴이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난 뒤에는 자세마저 뻣뻣하게 바뀌어 있었다.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나.
국가정보원 원장 하동선이 차장 두 명과 이 건물에 들어서리라고 말이다. 제라르를 알아본 모양으로 똑바로 다가온 하동선이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용우 일행을 돌아보았다.
“부원장은 어디 있소?”
“올라가면 됩니다.”
“마중도 안 나왔다는 말이오?”
하동선이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음성으로 질문한 다음이었다.
씨익.
질문을 받은 제라르가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웃음에 담긴 살벌한 의미를 알아본 이용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직 외인부대 특수팀 사령관을 건드려서 어쩌자고?
그냥 전직으로 끝나면 모르겠는데 현재는 정보총국 총국장을 편하게 부리는 위치였다.
‘그만하시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용우가 바라보는 앞에서 하동선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드러낸 채 큼큼거렸다.
“함께 갈 겁니까, 아니면 여기에서 돌아가겠습니까?”
“크흠. 올라가지.”
그러지 좀 말라고요!
긁어서 좋을 게 없다니까요.
제라르의 눈에 담긴 살벌한 미소를 확인한 이용우는 속이 바작바작 타는 느낌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