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120)
701화 염병, 이게 뭔 소리야? (1)
자가용 비행기였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했고, 중년의 동양인 통역을 제외한 남자들이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봐서는 강찬이 타고 왔던 비행기가 분명했다.
“끄응.”
붕대를 감은 다리를 받침대에 올려 둔 하동선은 맞은편에 앉은 차장들을 신음으로 불렀고, 의미심장한 눈짓을 던졌다. 그들 역시 붕대를 감은 다리를 테이블 아래 받침대에 올리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지?’
통로 건너편에 앉은 통역과 프랑스 남자들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하동선이 눈짓을 다시 던졌다.
“지금은 부원장님이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크흠.”
통역이 듣고 있다는 의미로 헛기침을 뱉었으나 차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삼성동에서 기다리던 요원들에게 철수 지시를 하셨는데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벌컥 감정이 올라온 하동선이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나 차장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듯, 실망스러운 표정마저 감추지 않았다.
“무식하게 생긴 러시아 놈들이 기관총과 권총을 겨누는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나? 자네라면 그 상황에서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어?”
이런 건방진!
하동선의 질책을 들은 차장이 시선을 모로 돌리고 있었다.
“나야 처음 봤지만, 자네들은 바실리 의장에 대해 알았잖아? 쇠꼬챙이처럼 생긴 사람이 노려보는 데서 내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 지금 살아나 있겠냐고? 대답해 보라니까!”
분을 참지 못한 하동선의 음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대화는 괜찮지만, 목소리는 낮춰 주십시오.”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통역이 경고와 같은 요청을 주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이런 꼴을 당한다.
강찬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기본 교육을 받았고, 군대와 국가정보원의 지원을 통해 힘을 키운 인간이 프랑스에 알랑대느라 국가정보원 수장인 자신을 팔아먹는다.
왜 권력을 잡으면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눈이 벌겋게 변하는 건지, 이 땅에 애국자는 정말 없는 건가?
비통한 생각에 잠겼던 하동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네는 국적이 어디인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럼 학교를 프랑스에서 다녔나?”
“어릴 적에 프랑스에서 자랐습니다. 학교는 한국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아깝다.
만약 하동선이 한국대학교를 나왔다면 선배라며 좀 더 관계를 발전시켰을 텐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한국에서, 그것도 남자의 세상에서 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데는 학연, 지연, 그리고 흡연이 먹히는 게 아니겠나?
“담배 있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동선의 요청에 통역이 몸을 일으켜 앞쪽으로 움직였다.
“한국대학교 출신이 누가 있지? 불어불문 전공자면 더 좋아.”
하동선은 앞에 앉은 차장 둘을 향해 속삭이듯 질문을 던졌다.
“외교부 장관과 차관 두 분이 한국대학교 출신입니다. 그 외에 유명한 분으로는….”
“왜? 누군데 말을 하다 말아?”
“주프랑스 대사로 있던 김미영 대사님이 역대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분입니다.”
“에이!”
하동선이 짜증을 토해 낸 뒤였다.
돌아온 통역이 손아귀에 들어가는 작은 재떨이와 담배, 라이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예. 그보다는 라이터가 위험 물품이라 회수해야 합니다. 담배를 하실 거면 불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안 하나?”
“괜찮습니다.”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간 하동선을 위해 통역이 라이터를 집었다.
찰칵.
“후우-. 캑! 캐액!”
억지로 피우는 담배에 하동선은 경망스럽게 기침을 토해 냈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된다.
어떡해서든 대화를 이어 가야 친해질 테고, 그래야 국가정보원 원장인 자신이 훗날을 보장하겠다는 미끼라도 던진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하동선의 눈에 통역의 손이 들어왔다.
“저런! 손을 심하게 다쳤던 모양이지?”
하동선의 질문에 반쯤 날아간 검지를 보던 통역이 묘한 느낌으로 웃었다.
“조국을 위해 나섰다가 다친 상처라 오히려 훈장처럼 느껴집니다.”
“조국? 그럼 군대에서 그렇게 됐나?”
“보안 사항이라 더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동선의 관심을 끊는 것처럼 통역이 통로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이 잘렸는데 보안 사항이라고 할 정도면 적어도 애국심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빠르게 계산한 하동선은 담배를 눌러 끄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국을 위해 일할 기회가 있다면 다시 나설 생각은 있나?”
하동선의 질문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통역이 고개를 돌리고서 하동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먹혔나?
하기는, 누구라도 기회를 잡고 싶겠지!
차장 두 명마저 기대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우리 대원들을 살해한 반군을 응징하는 전투였습니다. 그때 많은 대원들이 희생되었고, 아직 당시의 총성과 폭발음, 안타까운 눈빛을 고스란히 기억합니다.”
뭔 통역이 그렇게까지 처절한 전투를 겪어?
“당시에 전투를 지휘하셨던 분이 강찬 부원장님이십니다. 이 정도면 알아들으셨을 거라 믿습니다. 혹시 몰라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하동선은 뭐냐고 묻지도 못했다.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면 고민하지 말고 머리를 쏴 버려. 그게 조국을 위해 희생한 대원들을 위하는 일이다.”
꿀꺽.
“강찬 부원장님이 제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후로 한 번 더 의도가 담긴 대화를 시도하시면 먼저 간 대원들을 비행기 안에서 만나게 되실 겁니다.”
통역이 다부지게 말을 전한 다음이었다.
그의 옆자리와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프랑스 남자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
핼쑥한 얼굴, 몸을 감은 붕대, 여기저기 붙인 거즈, 그럼에도 감추지 못한 자잘한 상처들, 곽대출을 마주한 순간, 허선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해요. 고생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지내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약은 가져오셨습니까?”
마음 급한 질문에 허선영이 몸에 감은 작은 백을 풀어냈다.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했는지 두 겹으로 감은 고리를 푸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내가 직접 드릴 수는 없나요?”
“죄송합니다, 사모님.”
허선영이 건네는 유리로 된 작은 밀폐 용기를 받은 곽대출이 주인영을 향해 눈짓을 던졌다.
“제 방으로 가세요, 사모님.”
주인영이 조심스럽게 권유한 다음이었다.
“곽 이사님. 회장님이 혹시 위험한 상태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질문을 건넸던 허선영이 곽대출을 빤히 보았다.
“혹시 요즘 보도에 나오는 감염과 관련된 증상인가요?”
독기 있게 싸우는 건 절대 뒤지지 않지만, 진실을 원하는 사람의 눈빛에 대고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게 또 곽대출이었다. 그리고 굳게 버티는 곽대출의 눈을 보며 허선영은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만 부탁해요.”
“말씀하십시오.”
“약을 복용하고도 회장님의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나를 곁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회장님을 외롭게 보낼 수 없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사모님?”
진솔하게 당부를 전한 허선영이 곱다랗게 상체를 숙였다. 허선영이 상체를 세운 뒤였다.
“회장님은 이겨 내실 겁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외롭게 두지 않을 테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회장님?”
방금 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처럼 깍듯하게 상체를 숙였던 곽대출이 몸을 돌렸다.
“회장님은 반드시 건강하게 돌아오실 거예요. 나오셨을 때 반갑게 맞을 수 있게 조금이라도 쉬세요.”
“지금까지 이곳에 있었지요?”
“네, 사장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있는 대로. 솔직하게요.”
이제는 관록이 붙은 허선영의 요구였다. 더구나 숨기기에는 보고 들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언젠가는 알게 된다.
“이야기가 길어서 이곳에서는 다 말씀드리지도 못해요.”
주인영이 재차 권하고서야 허선영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곽대출은 안쪽 방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끄응.”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천중명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곽대출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고작 5분이었다. 그런데도 천중명의 눈이 이전보다 충혈돼 있었다.
“약입니다.”
천중명 앞으로 움직인 곽대출은 잠겨 있는 밀폐 용기의 고리를 풀었다.
무슨 약을, 씨발!
밀폐 용기 안에 들어 있는 건 비닐 포장지였다. 그걸 열고서 꺼낸 건 또 얼마나 랩으로 감아 댔는지 골프공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마음 같으면 잡아 뜯고 남았는데, 그러다가 약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평생 한이 된다.
천중명만큼이나 눈알이 벌겋게 되도록 인내심을 발휘한 곽대출이 마지막에 감긴 랩을 풀어내는 순간이었다.
“어윽!”
삼복더위에 재래식 화장실에 코를 박은 듯한 역한 냄새가 곽대출에게 달려들었다. 이 정도로 속을 뒤집는 냄새는 훈련에서 붙잡혀 실제로 재래식 화장실에 거꾸로 매달릴 때 말고는 처음이지 싶었다.
역한 냄새를 견디며 곽대출은 약을 살폈다.
한눈에도 볶지 않은 커피콩, 하나는 새카맣게 변해서 겉에 기름이 번지르르한 커피콩이었다.
이게 진짜 약이 맞아?
혹시 속아서 엉뚱한 걸 가져온 건 아니겠지?
“끄응.”
의심하는 곽대출의 신경을 천중명의 신음이 잡았다.
속았다고 해도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다.
“회장님. 얼른 먹으셔.”
아예 천중명의 곁으로 움직인 곽대출은 머리를 받치듯이 젖히고는 입에 두 알의 커피콩을 넣어 주었다.
“크흑.”
냄새 때문인지, 약이 독해서인지, 분노를 억누르려는 건지는 모른다. 약이 들어가기 무섭게 볼을 씰룩인 천중명이 책상의 끝을 꽉 움켜쥐었다.
“약을 복용하고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으면 허선영 사모님이 이곳으로 데려다 달라더라고. 회장님을 절대 외롭게 보내지 않겠다고.”
“끄으-응.”
“그래서 내가 어떤 상황에도 외롭게 두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괴물이 되면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니까 지금 들어 둬. 어떤 모습이든 내가 함께할 거야. 그리고 둘이서 도착하는 곳이 지옥이 되더라도 내가 곁에 있을 거고.”
“크으윽-!”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천장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한껏 젖힌 천중명이 사무실이 울리도록 고함을 터트렸다.
“우리 훈련받을 때! 내가 산에서 뛰어내리는 거 망설였잖아! 씨발! 이제 그런 거 없어!”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린 천중명이 흐느끼는 것처럼 상체를 떨었다.
“견뎌 주라, 회장님아. 내가 괴물이 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회장님을 필요로 하는 지경과 직원들을 생각해서 도깨비 회장답게 이겨 내 주라.”
곽대출의 간절한 바람이 전해진 뒤였다.
“푸후!”
천중명이 시커멓게 보이는 핏물을 뱉어냈다.
“대출아….”
“회장님?”
“물 좀 줘 봐.”
그리고는 그 끝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를 천중명이 내놓았다.
***
모하마드 암만 하릴 하지즈는 눈과 코를 뺀 나머지 부분이 온통 구불거리는 수염으로 뒤덮여서 첫인상이 몹시 강렬했다. 그러나 강렬한 인상과 달리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사려 깊어 보이는 눈과 눈빛을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묘한 매력도 지녔다.
화려하지만, 넓지 않은 방이었다.
창이 전혀 없는 구조였는데, 그런 만큼 벽과 천장의 틈에서 강렬한 조명이 쏟아져 나와 햇살을 대신했다. 고급스러운 책상, 책장, 카펫, 새하얀 디슈다샤를 입은 하릴 하지즈는 그곳의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금을 덧씌운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서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무슈 강이 아무리 배짱 있다고 해도 아랍과 이슬람 세계를 모조리 적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조금 더 인내하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미스터 맥퍼슨. 완벽하게 폐기했다던 치료 약이 무슈 강의 손에 있는 눈치고, 심지어 그걸 이용하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신 말을 더 신뢰할 수 있겠소?”
– 지적하신 부분을 아프게 받아들입니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커피콩을 모조리 회수할 계획이고, 더불어 소말리아에 있는 한국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병력이 이동하고 있으니 좀 더 지켜봐 주십시오.
“내 인내심이 작용하는 동안 적절한 조치와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 역시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 인정합니다. 더 실망하지 않도록 다음 통화에서는 약의 회수와 마리그를 정리했다는 기쁜 소식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미스터 맥퍼슨?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이슬람 세계의 완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팔을 내린 하릴 하지즈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들리는 혼잣말을 뱉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