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122)
703화 염병, 이게 뭔 소리야? (3)
김형정은 히놀 사키코 가와구치라는 이름과 그녀의 연구에 관해 가장 먼저 강찬에게 전화를 넣었다. 메모했던 내용을 꼼꼼하게 전한 다음이었다.
– 내가 심장을 뚫어 준 일본의 정보국장 이름이 가와구치였습니다. 기억하시죠?
“알고 있습니다, 부원장님. 그렇지 않아도 히놀 사키코의 부모에 관한 자료를 정보총국에 요청해 놓았습니다.”
– 우연이라고 치기에는 뭔가 걸려서 그러니 히놀이라는 여자의 부모를 철저하게 조사해 주세요. 그리고 하릴 하지즈의 여섯 번째 부인이라면 내가 아는 이름과 다른데 그건 확인해 보셨나요?
“일본 여성은 결혼 전까지 아버지의 성씨를 따르고, 결혼 후에는 남편 성으로 바꿀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섯 번째 부인의 공식적인 이름은 히놀 하지즈로 되어 있습니다.”
김형정의 보고가 건너간 직후였다.
피식하는 강찬의 웃음이 넘어왔다.
– 가와구치가 일본의 정보국 국장이었다는 사실에 집중해 주세요. 놈들이 아무리 능력이 없다 해도 부인 하나쯤 숨기거나 바꿀 능력은 있을 겁니다.
“정보총국으로부터 알버트 재단과 히놀 사키코에 관한 자료들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조사하겠습니다.”
– 그 외에도 하릴 하지즈가 숨어 있다는 빌딩의 출입자 영상에 히놀 사키코가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출입자 명단에 여자와 아이들이 있기는 한데, 워낙 얼굴을 감춰서 위성 사진만으로 확인은 어렵습니다. 괜찮으시면 여성 요원을 투입해서 가까이 접근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동양인은 바로 얼굴이 드러날 테니 정보총국에 의논해 보죠.
“알겠습니다, 부원장님.”
통화를 마친 김형정은 종이컵을 들어서 식어 버린 커피를 입에 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정보총국에서 보내는 엄청난 자료들이 김형정의 모니터에 빠르게 올라왔다.
정말 강찬이 사살했던 일본의 정보국 국장과 관련 있는 인물인가?
김형정이 눈가를 좁힐 때였다.
“어?”
모니터에 올라오는 정보를 살피던 신광선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뭐냐, 또?
종이컵을 내려놓은 김형정은 대각선 방향에 앉은 신광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본부장님! 지금 올라온 사진 좀 보십시오!”
“사진?”
워낙 빠르게 정보가 올라오고 있어서 김형정은 서둘러 마우스를 움직였다. 부럽다, 요구만 하면 온갖 정보를 쏟아 내는 정보총국의 능력이.
피로 이뤄 냈던 정보총국과의 협약이 깨지고, 러시아마저 돌아서면서 국가정보원은 이류의 자리로 밀려났다. 하동선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나라 정보국도 인정하는 각 파트의 전문가들을 밀어내면서 삼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만든다.
국가정보원이 다시 일어서는 데 김형정의 피가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고 뜨거운 피를 쏟아 낼 각오도 있었다. 각오를 다지며 마우스를 움직인 김형정은 ‘이미지’라는 칸을 눌렀다.
“뭐야, 이게?”
나이 든 남자 둘 사이에 서 있는 여자아이였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정도?
등산 모자처럼 둥그런 챙이 달린 모자, 교복처럼 보이는 유니폼, 어깨에서 사선으로 건 가방, 유치원 시절을 찍은 사진이었다.
달칵. 달칵.
김형정은 사진을 확대했다. 그리고는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의 왼편에 집중했다.
“쿠니타치 요치엔(國立 幼稚園, 국립유치원)?”
발음이 맞고 틀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자로만 보면 ‘국립유치원’이라는 이름이었다.
언제인지 확신하기 어렵지만, 낡은 흑백 사진 상태와 고풍스러운 남자들의 양복으로 봐서 꽤 오래전 사진인 것만은 분명했다.
누군데 이런 곳에 다녔지?
김형정은 사진의 여자아이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오래전 일본에서 국립유치원은 왕족과 귀족, 그에 준하는 수준이 아니면 넘보지도 못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누구야, 이게?”
혼잣말처럼 질문을 흘린 김형정이 마우스를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히놀 사키코의 모친 사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뒤에 있는 자료를 보면, 이름은 토마미 요꼬 브랜든,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일본계 영국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광선의 말을 들으며 영상 아래의 자료를 확인한 김형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히놀 사키코의 모친이라면 지금부터 두 세대 전인데,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일본에 가서 국립유치원에 다녔다고?”
달칵.
마우스 버튼을 누른 김형정은 다시금 사진을 열었다.
국립유치원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던 김형정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양쪽에 서 있는 남자들의 사진을 유심히 살폈다.
‘이런 씨….’
어지간해서 욕을 하지 않는 김형정이 하마터면 원색적인 욕을 뱉을 뻔했다.
“이건…? 이게 말이 되나?”
“왜 그러십니까?”
김형정의 반응이 궁금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선 신광선이 바쁘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책상에 팔을 짚는 자세로 김형정이 들여다보는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김형정이 확대한 얼굴을 살핀 신광선이 궁금한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잠시만.”
김형정은 곧바로 마우스를 옮겼고, 이어서 키보드를 눌렀다. 짧은 틈이 지난 다음이었다. 왼편으로 세 장의 사진이 올라왔고, 오른편에는 방금까지 확인하던 오래된 사진 속의 남자 얼굴이 커다랗게 떴다.
“어? 이게 누굽니까?”
왼편에 올라온 선명한 사진 속의 남자와 오른쪽의 오래된 사진 속의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닮았다. 심지어 짧은 신장에 기다랗게 보이는 팔까지 흡사했다.
이래서 경험 많은 임원을 정보국에서 함부로 자르면 안 된다. 강찬이 일본 정보국 수장인 가와구치를 사살한 작전을 몰랐다면 김형정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거다.
“본부장님? 누구입니까, 이 사람이?”
“가와구치 다케히코. 전 일본 정보국 국장.”
“예에?”
놀라는 신광선의 반응에 상관없다는 투로 김형정은 바쁘게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시 만졌다.
오래된 사진 속의 또 다른 남자를 확대한 김형정은 눈을 찌푸렸다. 유독 흐릿해서 윤곽을 알아보기 어려운데 분명 낯이 익었다.
“얼굴이 너무 흐린데?”
“본부장님. 제가 잠시 만지겠습니다.”
상체를 바싹 기울인 신광선이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는 오래된 사진의 얼굴을 네모 칸으로 정하고 연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흐릿했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하게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버튼을 누르던 신광선은 아예 얼이 빠진 느낌이었다.
잠시 멍했던 신광선은 다시금 상체를 기울여 마우스와 키보드를 빠르게 조작했다.
“이건 아냐. 이러면 안 돼.”
왼편은 하동선의 사진이었고, 오른편은 오래된 사진 속에서 권위적으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과거 사진에 담긴 남자는 촌스러워 보일 만큼 넉넉한 양복을 입었으나 고개를 삐딱하게 튼 자세와 오만한 시선, 욕심 가득한 볼과 입술은 영락없이 하동선이었다.
“본부장님? 이게 말이 됩니까? 우연히 닮은 사람일 수도 있잖습니까?”
“지금부터 확인해야지. 그게 우리 임무니까.”
무거운 시선으로 모니터를 바라본 상태에서 김형정은 비장하게 답을 내놓았다.
“어떻게 레벨 원이? 아니, 레벨 원의 부친이나 조부가 일본에서 이런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앞에 본 사진으로 추정하면 일본 정보국의 수장 집안 아닙니까? 왕족이나 귀족만 들어갈 수 있는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힘 있는 집안이라면서요?”
“하나만 더 확인하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씹는 것처럼 말을 뱉은 김형정이 다시금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 직후에 모니터에 새로운 사진들이 올라왔다.
“왼편 여자가 히놀 사키코 가와구치, 오른편은 전 일본 정보국 국장 가와구치 다케히코.”
“아, 이건….”
김형정의 설명을 들은 신광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봐도 부녀 관계라고 할 정도로 닮았다. 특히 도드라진 입술은 아예 판으로 찍어 놓은 수준이었다.
느닷없이 닥친 폭풍처럼 충격이 두 사람을 휘몰아친 다음이었다.
“본부장님께서는 전 일본 정보국 총국장의 얼굴까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신광선이 존경한다는 얼굴로 물었는데 김형정은 답을 하지 못했다. 경험 많은 김형정과 신광선이 아프리카에 밀려난 현실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아서였다.
“우선 부원장님께 연락부터 드리고 보자. 커피 한잔 부탁해도 되지?”
“알겠습니다.”
잠깐이나마 이성을 추릴 시간이 필요한 김형정은 스마트폰을 들고서 숨을 길게 내쉬었고, 놀란 가슴을 진정해야 할 신광선은 커피 테이블로 움직여 종이컵을 뽑고 있었다.
***
통화 진짜 바쁘다.
김형정과의 두 번째 통화에서 강찬은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 냈다.
– 사진을 보내 드릴까요?
“정보총국의 정보망과 연결해 뒀으니까 여기에서 찾아봐도 됩니다.”
– 워낙 정보가 많아서 굳이 찾을 필요 없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찬은 잠시 시선을 떨궜다.
왜 항상 이러냐?
뭐가 어떻게 잘못됐기에 아등바등 올려놓으면 벼룩도 아니고, 이런 개새끼들이 툭툭 튀어나오냐고?
“무슨 일입니까?”
지켜보던 제라르의 질문에 강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최종일과 요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최종일, 우희승, 이두희, 심도원, 유강미 모두 김형정과 그가 일하는 방식을 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얼굴에 감추지 못하는 배신감과 분노가 아프게 올라와 있었다.
“사진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원장님?”
믿을 수가 없어서, 믿고 싶지 않아서, 최종일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다른 요원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제라르. 자료부터 확인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찬은 제라르, 최종일, 그리고 다른 요원들과 함께 정보실로 움직였다. 책상에 앉은 제라르는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달각. 달각.
마침내 김형정이 보낸 사진이 모니터에 올라왔고,
“씨….”
욕을 뱉던 최종일이 뒷부분을 억지로 삼켰다.
개새끼.
어쩐지 하는 짓이 이상하더라니.
보면 볼수록 의심할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말이다. 살다 보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신기할 정도로 닮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자를 강찬은 알고 있었다.
나직하게 숨을 내쉰 강찬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 건너간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나다. 그쪽으로 하동선이 가는 건 알지?”
–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는 중이오.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수송기를 아프리카로 보냈소. 식량부터 의약품도 부족하고, 생필품도 아쉽소. 당장 내일이면 라면하고 화장지, 커피가 떨어져요.
전화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월급날 직전의 주부라도 된 양, 통화되기 무섭게 석강호는 아쉬운 점을 줄줄 쏟아 냈다. 철수하든, 아니면 지원을 해 주든, 결정을 내려 주길 바라는 게 분명했다.
“우선 들어.”
강찬은 방금 확인한 내용을 간략하게 풀어서 들려주었다.
– 하, 뭐 그런 개새끼가?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바로 목을 돌려줄 테니 안심하쇼.
“그보다는 몇 가지 알아내야 할 게 있다.”
– 그건 또 뭐요?
“내가 보내 줄 사진에 관한 하동선의 설명, 놈이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알아보고, 의도적으로 경험 많은 본부장과 차장, 팀장들을 밀어낸 건지, 마지막으로 일본 정보국과 뭔가 약속한 게 있는지, 지금 말해 준 걸 한번 캐 봐.”
– 대장? 죽여도 되우?
“알아낼 수 있으면.”
– 푸흐흐흐.
어느 때나 비슷하게 들리는 석강호의 웃음을 구별하는 건 강찬과 제라르 정도였다. 그리고 강찬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석강호는 틀림없이 살찐 개를 앞발로 누른 배고픈 호랑이처럼 눈알을 번들거리면서 있을 거다.
– 아, 참! 혹시 그 새끼가 타고 오는 비행기에 컵라면하고 김치는 실었소?
“뭐?”
– 이런 개새끼!
이게 누구한테 하는 욕이야?
강찬의 의문이 채 식기도 전이었다.
– 그 개새끼가 워낙 대장을 정신없게 하는 바람에 라면하고 김치를 잊은 거 아니오? 개새끼, 오기만 해 봐.
“야! 알아내는 게 먼저야.”
– 내가 알아서 하겠소.
다부진 석강호의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차라리 차동균에게 맡길 걸 그랬나?
강찬이 입술을 뒤틀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 이용우입니다, 부원장님. 잠시 통화되십니까?
“괜찮아. 무슨 일인데?”
– 혹시 모가디슈의 빌딩 감시하는 일에 자밀라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왜?”
– 모가디슈에서 동양인은 아무래도 표가 너무 나기 때문에 근처에 접근하는 역할을 맡기면 좋지 않을까 해서 건의 드립니다.
이게 뭐가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했던 강찬은 스마트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용우. 분명하게 말해. 남자로 부탁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감시를 위해서 말한 거야? 만약 감시를 위한 거라면 정보총국에서 아랍계 여자 요원을 부탁하면 돼.”
사랑이냐? 정말 임무를 위해서냐?
질문을 던진 강찬은 피식 웃으며 이용우의 답을 기다렸다.
오02화 염병, 이게 뭔 소리야? (2)
몸을 세운 박중상은 맞은 자리가 뻐근한 모양으로 윙크하듯 눈을 끔벅였다.
“에이, 개새끼.”
“미안하다고 했잖냐?”
“그러게 왜 자다 일어나서 주먹을 날려, 이 새끼야?”
“지랄 같은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깼는데 내가 얼굴을 들이대고 있으면 너는 어떻게 했을 거 같냐?”
“그야 나도 냅다…. 아흐! 말이나 못 하면!”
역시나 주먹을 날렸을 거란 답을 내놓던 박중상이 말문이 막힌 것처럼 툴툴댔다.
“그런데 왜 깨운 거야?”
“아! 일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
“뭔데?”
“레벨 원이 느닷없이 러시아에서 정보국 의장을 구하고 예멘으로 간다고 발표했어. 그것 때문에 회사가 뒤숭숭해.”
말을 시작한 박중상은 보도에 나온 내용과 국가정보원의 분위기를 들려줬다.
“회의실에서 너도 화약 냄새 맡았지?”
“나야 그만둔 놈이라 상관없지만, 요원인 너는 일단 모른 척해. 그게 좋아.”
“그래야겠지? 아, 참! 잠 깼으면 자밀라에게 가 봐라.”
“왜?”
꿈에서 보았던 자밀라의 얼굴이 떠오른 이용우가 급하게 물은 다음이었다.
“뭔 생각을 하는지 소말리아에 가겠다며 난리다.”
“소말리아에? 거기를 왜 가는 건데?”
“난들 아냐? 내가 담당자니까 의논하는 거라면서 소말리아로 가겠다더라.”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 시계를 들여다본 이용우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 여섯 시였다.
“언제 그런 건데?”
“그 말 듣고 바로 온 거니까 10분쯤 됐다. 그건 그런데 너도 참! 요원이었던 놈이 어떻게 문을 열고 흔들 때까지 코를 고냐?”
박중상의 질책을 외면한 이용우는 호텔 내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맞은편 자밀라 객실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어설프게 들리는 우리말 응대였다. 목이 잠겨서 그런지 뭔가 촉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이 참 커.
– 여보세요?
엉뚱한 생각을 하던 이용우는 얼른 정신을 잡았다.
“소말리아에 간다고 했다며?”
– 맞아요.
아랍어로 건넨 질문에 자밀라는 촉촉한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거기를 갑자기 왜 간다는 건데?”
– 소말리아에 갈 거죠?
“누가?”
– 어제 만난 젊은 분이요. 커피콩을 드리는 걸 보면 상관인 거잖아요. 그분과 대화에서 소말리아, 모가디슈, 데그마다 빌딩이 나왔잖아요? 그 뒤에 미스터 리가 무서운 얼굴로 답했고요.
고작 몇 개 단어만으로 정황을 짐작했다고?
아차차!
감탄할 때가 아니다.
“그래서? 소말리아에는 왜 가겠다는 건데?”
– 데그마다 빌딩이요. 검색해 봤더니 그곳에 하릴 하지즈 왕세자가 운영하는 커피 유통 회사가 있었어요. 그걸 조사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뭐?”
– 커피콩, 커피 농장, 이라크 왕세자가 운영하는 커피 유통 회사,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잖아요. 나도 갈게요.
꿈이 징그럽더니,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
“쉽게 생각할 게 아냐.”
– 미스터 리가 아랍어에 능통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동양인이라 눈에 띌 수밖에 없어요. 내가 할게요.
“뭘 하는데?”
– 뭐든요.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박중상 앞에서 이용우는 눈가를 찌푸렸다. 느닷없이 매달리는 자밀라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다음으로 지랄 맞은 꿈이 떠올라서였다.
악귀로 변해 달려드는 자밀라?
꿈을 그대로 해석하면 마지막 순간에 자밀라에게 당한다는 의미 아니겠나?
– 같이 가요.
이용우의 불안한 심정을 움켜쥐는 것처럼 자밀라의 음성이 다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냐.”
– 그럼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야?”
– 왜요?
워낙 당찬 대꾸여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이용우도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 미스터 리 혼자 보내 놓고 마음 졸이는 거 못 하겠어요! 반군에게 몰려 피 흘리다가 베란다로 뛰어내리는 상상하면서 기다리는 거 못 하겠다고요! 내가 괜히 커피콩 줍는 바람에 죽을 곳에 가는 거잖아요!
“누가 그래?”
– 그러니까 함께 가요. 나랑 가면 의심받는 게 줄잖아요.
“자밀라? 진짜 왜 이러는 거야?”
– 나도 몰라요. 왜 이런지. 하지만 위험한 곳에 간 미스터 리를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건 못 하겠어요. 그러다가 못 보게 되면….
이거 혹시 그린 라이트?
왜? 무엇 때문에?
이용우마저 눈이 확 떠지는 미모에 영특하기까지 한 자밀라가 도대체 왜 인생을 시궁창에 던지려는 거지?
“자밀라 너 혹시 나 좋아하냐?”
– 그럴 리가 있어요?
파사삭.
머리 위에 떠 있던 녹색 등이 배트에 맞은 것처럼 요란하게 깨졌다.
– 커피 마시러 와요. 와서 얘기해요.
“알았다.”
느닷없이 통화를 마친 이용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게 밀당이라면 자밀라는 공중부양을 할 정도로 고수였다.
이용우가 멋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실 때였다.
“왜 그러는 거냐? 좋아한다고 그래?”
아랍어를 대강 알아듣는 박중상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럴 리가 있냐?”
“사람 일 모르더라. 혹시 말이다. 만약에,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서 묻는 건데….”
“없어! 우리 아버지 걸고 말하는데 네가 상상하는 거지 같은 일 절대 없어! ”
다부지게 답을 한 이용우는 점퍼를 집었다.
“어디 가?”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잔다.”
가자미처럼 눈알을 옆으로 한껏 돌린 박중상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용우를 살폈다.
“야! 그 방에 자밀라의 아버지도 같이 있어. 갈 거야? 말 거야?”
“가야지! 가서 뭐라는 건지 알아야 나중에 보고하지.”
다짐처럼 말을 뱉은 박중상이 이용우를 뒤따라 움직였다.
***
새벽 6시였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제라르가 여자 한 명과 남자 네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가장 앞에서 인사하는 남자는 중년이 된 최종일이었다. 강찬이 웃으며 내민 손을 잡은 최종일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안녕하셨습니까?”
“나이가 들더니 여성 호르몬이 많아진 거야? 왜들 이래?”
이어서 손을 잡는 이두희와 우희승 역시 웃고는 있지만,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또 뵙습니다.”
심도원과 악수한 강찬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다시 봬서 정말 기쁩니다, 부원장님. 저와는 악수 안 하십니까?”
이런 요구를 어떻게 거절하겠나.
강찬은 픽 웃으며 유강미의 손을 잡았다.
“앉을까?”
“커피 드십니까?”
고갯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던 강찬은 재미있다는 투로 웃고 말았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간 것처럼 이두희와 우희승이 커피 테이블로 움직이고 있어서였다.
이래서 살아 있는 게 좋은 거다.
다시 만나서 웃고, 커피 마시고, 담배도 피울 수 있어서.
모처럼 만났다.
달달한 커피도 앞에 두었고.
오랜만에 본 반가움으로 충분히 들뜰 만한 상황이었는데 이상스레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던 제라르가 강찬을 슬며시 보았다.
조국을 위해 다시 뛰겠다며 비상 연락망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 찾아온 다섯 명이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제라르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이 사람들은 이미 할 만큼 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긴 이들이 겨우 얻은 안정된 삶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건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였다.
피식.
무거운 분위기에서 강찬이 마음을 굳히는 순간이었다.
“부원장님.”
종이컵을 내려놓은 최종일이 강찬을 불렀다.
과거에는 일선에서 뛰던 독한 요원이었던 최종일이 지금은 요원들을 지휘하는 간부처럼 보였다.
“우리는 선배들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걱정하지 않을 만큼 받고, 연금도 나옵니다.”
뭔 소리야?
강찬의 시선을 확인한 최종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원장님을 뵈려고 그랬나 봅니다. 어젯밤 꿈에서 양동식 선배님을 뵈었습니다. 잘 지내냐고…. 당신들이 더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기다란 숨소리로 감정을 누른 최종일이 다부지게 시선을 들었다.
“혹시 다시 본 제 모습이 너무 나태해져서 망설이시는 거라면 오늘부터 신병처럼 훈련하겠습니다. 언제, 어디, 어떤 임무든 상관없습니다.”
최종일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이두희와 우희승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아주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라도 가족에게 미안했던 양동식 선배와 외롭게 사시다 홀로 가신 남일규 선배처럼 우리도 후배들에게 이 나라, 이 땅을 위해 싸우는 선배들이 있다는 걸 알려 주게 해 주십시오.”
“불행해질 가족도 생각해야지?”
“부원장님을 뵙는다고 안식구에게 말했습니다.”
606 출신이어서 누구보다 최종일을 몰아쳤던 부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건 진짜 강찬도 궁금하다.
생각은 비슷했는지 제라르도 고개를 돌린 채 최종일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가족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살아 있으면 지나다가 불쑥 들러서 물이나 한잔 마셔라. 그렇게 선배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빚을 털 때까지 집은 돌아보지도 마라.”
미친….
하마터면 안식구 이야기를 전하는 최종일에게 욕을 할 뻔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더라도 유강미는 곤란하지 않아?”
강찬은 상체를 편 자세로 앉아 있는 유강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산이 경호팀에서 제가 막내였습니다. 그날 차민정 팀장님이 몸을 던져 막아 주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지금도 잠이 들 때면 차민정 팀장님의 모습이 떠올라 뒤척입니다, 부원장님.”
참고 있던 감정이 말을 하면서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개를 떨궜던 유강미가 임무를 맡은 대원의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너는 괜찮냐고 물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태산이를 꼭 지키라고. 지금도 그 음성과 눈빛, 미소가 생생합니다, 마음의 빚이라는 거 부원장님께서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강찬을 향해 각오를 쏟아 낸 유강미가 보고를 마친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남일규와 양동식, 비무장지대 대원들이 그토록 후배들을 위하더니 결국 이런 요원들을 남긴 모양이었다.
강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각오를 듣고도 다른 소리를 하는 건 반칙인 거다.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던 시절을 들추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줄이고, 요약하자면 이번에 감염을 일으킨 놈들이 워낙 비밀리에 움직여서 나와 제라르, 석강호도 비슷하게 숨어 지냈다고 보면 돼.”
종이컵을 들어서 남은 커피를 마신 강찬은 다시 말을 이었다.
“감염에 관련된 소식과 보도는 알고 있을 거고. 오늘 부른 건 적이 예상하지 못하는 인원이 필요해서다. 과거에 경험했던 작전 이상으로 위험해. 사망해도 금전적 보상 외에 아무것도 없고.”
앉아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던 최종일이 시선을 가져왔다.
“이 숫자로 됩니까?”
“부족해.”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대략 이십 명.”
강찬의 답을 들은 최종일이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뒤틀었다.
“숫자가 부족하다 보니까 그만큼 더 위험해.”
“부족한 게 아니라 넘치는 게 문제입니다.”
뭐라는 거야?
“비상 연락망을 구축해서 대기하는 인원이 저희 빼고 마흔여섯 명입니다. 나중에라도 내용을 알게 되면 전부 마음의 빚을 더 받았다며 악을 쓸 텐데 그게 걸립니다.”
멍청한 사람들.
엉뚱한 인간이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서 한직으로 밀어내거나 해직을 통보했는데도 뭐 그렇게 좋다고 줄을 서 가며 죽을 자리에 가려고 발버둥 치는 건지.
“언제 출발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여성 요원은 몇 명이 필요하십니까?”
“이렇게까지 진행될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 나도 작전을 검토해 봐야 알겠는데?”
강찬의 답을 들은 최종일이 시선을 돌렸다.
“유강미? 독거미 출신 후배들이 몇 명이지?”
“다섯 명입니다.”
이건 강찬에게 알려 주기 위해 건넨 질문과 답이었다.
“작전을 알려 주시면 저희가 인원을 추려서 보고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찬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서울의 빌딩 숲 사이로 솟아난 태양이 새로운 날을 밝혔고, 그와 동시에 커다란 창을 통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끝에서 떨어져 지낸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익숙한 질문을 최종일이 던졌고, 우희승이 일어나 종이컵을 포개 가며 거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