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140)
721화 당신이 원한 거 맞지? (3)
회의가 길었을까?
한 시간이라는 한계를 거의 다 보내고 정확하게 55분 만에 강찬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 홍진용입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정보국 책임자와 일행이 출발했다는 통보를 전했습니다.
떼로 몰려온다는 거지?
테이블에 비스듬하게 앉아 내용을 들은 강찬은 피식 웃으며 종이컵을 들었다.
“고생하셨네요.”
– 부원장님의 조건을 관철시키는 대신 우리도 몇 가지 양보한 점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대통령님께서 직접 면담을 주관하십니다.
에효, 이 멍청이들 진짜!
한편인데도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는 꼴이라니, 이러니까 중국과 일본이 한 수 아래로 대하는 거겠다.
– 장소는 청와대 영빈관으로 하겠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정보국 의장 바실리를 초빙한 관계로 시간은 새벽 5시, 비공개로 진행합니다.
“나머지야 받아들이겠는데 장소만큼은 국가정보원 지하 2층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낸 이들은 침대에서 내일을 꿈꿀 시간이었다.
– 부원장님?
“정보국 비공개회의에 대통령이 참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직접 참석하라는 건 그만큼 두 나라 정보국이 우리를 얕본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장소를 청와대로 하면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상대국 정보국장을 맞이한 꼴이고요.”
– 이미 약속했소.
강찬의 지적이 어지간히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그럼 대통령님이 만나시면 되겠습니다.”
– 뭐요?
“나는 지금 프랑스로 출국할 테니까 대통령님이 만나셔서 알아서 정리하십시오.”
– 이 사람이?
욕하지 말자.
불러서 때리지도 말고.
막 나가는 듯한 홍진용의 말에 강찬은 피식 웃고 말았다.
– 알았소. 그럼 출국하시오. 대신 양쪽 정보국이 책임자를 보냈으니 발표는 미뤄 주시오.
“그것도 대통령님이 직접 막으시면 됩니다.”
– 푸후.
이상하지?
밖에 대고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서 그들의 조건을 모두 받아 주는 인간들이 왜 안에서 대신 싸워 가며 지키겠다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거침없을까?
– 혹시 국가정보원이 불미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요?
피식.
– 당신 지금 웃은 거야?
피식 웃었던 강찬은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에 삼성동을 내려다보는 거실 창으로 움직였다.
– 왜 대답이 없어? 당신 지금 청와대와 대한민국 통수권자의 지시를 무시하는 거냐고?
“내가 지금 일본과 중국 정보국에 전화하겠다. 그렇게 해서 장소를 국가정보원 지하 2층으로 바꾸면 당신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 만약 장소를 못 바꾸면 내가 얌전히 물러나고 발표도 중지시켜 줄 테니까. 그 정도면 설명이 되나?”
반말에 놀랐을까, 아니면 내용을 감당하지 못해서일까.
민정수석 홍진용의 답은 없었다.
“집을 지키라고 둔 개가 도둑을 보고는 꼬리 치고, 식구들을 향해 으르렁대고 짖으면 어떻게 해야겠냐?”
– 왜 반말을 하는 거요?
“장소는 국가정보원 지하 2층으로 한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돌아가라고 해.”
항의하는 홍진용을 향해 강찬은 짧게 지시를 던졌다.
“아! 아까 말했던 개 말인데, 집 지키라고 둔 개. 그 개의 운명이 짐작되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말을 마친 강찬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쉽지 않다. 참.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참이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강찬의 심장이 커다랗게 뛰었다.
뭐지?
고개를 돌린 곳에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제라르와 최종일, 우희승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강찬을 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어떻게 다가왔는지 모를 위험이 장난처럼 불어낸 죽음의 숨결을 맡은 것처럼 얼굴마저 화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뭐든 와.
죽음의 숨결?
어차피 시작하려던 참이니까 내가 그걸 결정해 주마.
피식.
강찬이 독기 서린 눈으로 웃었고,
씨익.
강찬의 눈빛을 읽은 것처럼 제라르가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렸다.
***
김미영은 과일 깎는 칼을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는 나름 다부진 손길로 쥐고 있는 유리병을 향해 내리찍었다.
왜 이렇게 튀어?
예쁜 유리병에 라벨까지 붙여서 담아 놓은 흑설탕이 얼마나 단단하게 굳었는지 마치 돌덩이를 부수는 느낌이었다.
흑설탕은 왜 이렇게 단단하게 굳을까?
과일칼을 찔러 넣을 때마다 찍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면서 조금씩 부서지기는 하는데, 손이 아팠고, 다음으로 칼끝이 안전을 위해 구부린 것처럼 휘어서 더 이상은 무리였다.
‘너무하네.’
김미영은 아일랜드 탁자에 튄 설탕들을 주방 티슈로 모았다.
‘바보. 멍청이.’
아버지라 부르는 강철규처럼 강찬은 온전한 가정이 만드는 따스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물론, 강대경과 유혜숙이 있기는 하지만, 외롭게 지낸 세월이 십 년이 넘는다.
“위험하면 어때? 내가 외교관이 되었으니까 일하지 않아도 우리 둘은 살잖아?”
과거의 약속과 함께 김미영이 항의했을 때 강찬은 피식 웃었다.
지금 하는 말인데, 그 웃음 말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장소와 상황, 분위기에 따라 참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강철규와 강태산도 비슷하게 웃는다.
“원해서 시작한 싸움은 아니지만, 내가 외면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신 죽을지 몰라. 그거 끝내고 홀가분하게 함께 지내자.”
“그게 언제쯤인데?”
그때는 말도 편하게 했었는데, 그만큼 김미영이 순수했던 시절이어서 그랬지 싶었다.
질문을 받은 강찬은 말없이 김미영을 안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쓸어내렸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벌어 놔. 은퇴한 뒤에 세계 여행 다니게. 우리 둘이서 아프리카 여행하는 게 내 로망이다.”
“알았어.”
바보, 김미영!
그때 안 된다고, 당장 출발하자고 우겼어야 했는데, 강찬의 다독이는 음성과 아껴 주는 손길을 느끼는 순간에 마음이 약해졌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찬은 진짜 매력적인….
따르르릉. 따르르릉.
흑설탕을 부수다가 과거로 돌아갔던 김미영을 스마트폰이 아파트 주방으로 돌려놓았다.
좋았는데 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무엇보다 강찬의 번호는 김동률의 노래가 나온다. 그리고 저렇게 우는 벨 소리는 업무용 번호라는 의미여서 실망감이 더 컸다. 쨍하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던 김미영은 끝이 구부러진 칼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 너무 늦게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대사님. 급한 일이라 그런데 통화 가능하실까요?
“말씀하세요.”
외교부 2차관의 전화여서 몸을 돌린 김미영은 거실 창 앞에 놓은 책상으로 움직여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통화는 내용을 메모하는 건 기본이었고, 버튼을 눌러 녹음도 한다.
녹음 버튼을 누른 다음이었다.
– 이동명 차관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잠시 당황했지만, 김미영은 입술을 말아 숨을 내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걸 이 시간에 말씀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 체포한 기관이 국가정보원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김미영은 단박에 상황을 짐작했다.
누군가는 국가정보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다른 누군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밤늦게 전화를 돌리는 거다.
“다시 질문드립니다. 그런 내용을 이 시간에 제게 전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 곤란하시겠지만, 부군께서 국가정보원 부원장이시니 외교부의 명예를 먼저 생각해 달라는 요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불법적인 체포나 구금이라고 판단되시면 변호사와 의논하세요.”
– 그러려고 해도 이번 긴급 체포에 밖으로 알려져서는 곤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체포 과정이 그런가요, 아니면 사유가 그런 건가요?”
– 흐음.
사무적인 반응이 부담스럽고 서운하다는 느낌의 한숨이 나온 뒤였다.
– 이동명 차관은 이적행위자, 혹은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된다는 사유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외교부 차관이 이적행위를 했다는 발표가 나오면 정부의 신뢰도는 물론이고, 외교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받습니다.
“그렇군요.”
– 그런 이유로 국가적 망신을 사는 일이 없도록 대사님께서 조언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왕 말씀드리는 거라면 적당한 선에서 이동명 차관을 우선 방면하고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해 달라는 뜻도 전해 주십시오.
버튼을 확인한 김미영은 냉정한 눈빛으로 시선을 들었다.
“차관님. 당사자 간의 통화 녹음은 불법이 아니에요. 실제로 지금 통화한 내용을 모두 녹음했습니다. 이 녹음본을 국가정보원 강찬 부원장에게 전해도 될까요?”
– 아니? 그걸 왜?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녹음본을 전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는 게 좋겠어요. 이게 외교부 공식 입장인가요, 아니면 차관님의 개인적인 요청인가요?”
– 대사님?
“고민하시고 답하시는 게 좋아요. 외교부 공식 입장이면 장관님이, 아니면 차관님이 정부 기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게 되니까요.”
감정을 전혀 담지 않아서 정말이지 사무적으로 들리는 김미영의 대꾸였다.
어떤 선택을 할까?
김미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상대방의 침묵을 받아들였다.
– 개인적으로 드렸던 질문을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달하지 않아도 되나요?”
– 그렇게 하시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친 김관식도 이따금 재판 거래를 제안받았었다. 그럴 때면 세상 냉정하게 대하던 그 성품이 어디 가겠나.
“그럼 차관님의 질문에 답을 한 거로 끝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대. 사. 님.
마지막에 씹듯이 한 마디씩 뱉어 낸 직책으로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한 통화가 끝났다.
‘열심히 일하나 보네.’
액정을 내려다본 김미영은 내친김에 검지를 뻗어서 사진첩을 펼쳤다.
강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억울해!
추억을 되돌아볼까 해서 사진을 펼쳤던 김미영은 입술을 샐쭉하게 비틀고는 사진을 감췄다. 김미영은 십여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는데, 이때나 지금이나 강찬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인상과 몸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
어둑한 조명으로 버티는 예멘의 공항 건물 내부를 팽팽한 긴장이 차지하고서 바깥을 넘실댔다.
“프랑스 여권입니다. 이름을 외우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걸 뭐라고 읽지?”
“마르코 폴로이입니다.”
“내 이름을 모르는 상황이 생기겠군. 나이가 있어서 오해받으면 곤란한데?”
여권을 펼쳐 본 강철규는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는 가볍게 웃었다.
“무기는 소말리아에 도착하시는 대로 지경의 직원이 준비해 드릴 겁니다.”
“안내도 그 친구가 해 주나?”
“그렇습니다.”
여권을 덮은 강철규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선 차동균은 걱정이 앞선 얼굴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부원장이 수혈해 준 효과가 없어지기는 했지. 그래서 말인데, 이게 내가 부원장을 돕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어.”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알아.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힘이 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같으면 이미 손을 썼어야 하는 상황에서 몸이 반 박자 늦게 움직이더군. 차 장군은 어때?”
“학장님 앞에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강철규와 차동균이 동시에 아쉬운 웃음을 지으며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차 장군.”
“예, 학장님.”
“내가 현역 시절의 조국은 힘들고 어려운 모습이었다. 악에 받쳐 적의 목을 가르지 못하면 힘겨운 삶을 살다가 나라를 지키겠다며 달려왔던 우리 아들들의 목이 잘렸었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자리일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차동균을 바라보는 강철규의 눈매가 전에 없이 부드러웠다.
“살아서 이렇게 빛나는 조국을 보았으니 나는 더 바라는 거 없다. 그리고 이 나이에 조국을 위해 나설 수 있음에 더없이 감사한다. 먼저 간 녀석들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테고.”
“학장님?”
“그래서 말인데, 차 장군. 우리는 군인이었고, 군인으로 살았으며, 군인으로 죽어 가자.”
왜 그럴까?
인자한 표정으로 뜻을 전하는 강철규를 보며 차동균은 울컥 감정이 올라와 답조차 하지 못했다.
진정한 특수부대의 전설이어서?
워낙 뛰어난 능력을 타고난 선배여서?
아니, 그보다는 조국만 바라보며 살다가 늙어 버린 군인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감정 때문이었다.
차동균이 겨우 감정을 가라앉힐 때였다.
강철규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면서 강렬하게 빛났다.
혹시…?
“학장님? 제가 모르는 경고 같은 겁니까?”
차동균의 질문에 강철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이는?”
“박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철규가 마치 달려오는 적을 향한 것처럼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늙은 군인의 눈매가 몹시도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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