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180)
761화 부탁인가? (3)
프랑스의 피데시앙 테니스 클럽 라커룸이었다.
흰색 반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은 남자가 라커의 문을 닫을 때였다. 정장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두 명의 남자가 라커룸 안으로 들어섰다.
테니스장에 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분위기도 살벌했다.
‘이런!’
시선을 던졌던 테니스복 차림의 남자가 눈가를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차갑게 웃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소음기 달린 권총을 꺼냈다.
“이럴 거까지는 없잖아!”
영어 억양이 묻은 프랑스어로 고함을 질렀으나 대꾸는 없었다.
푸슝! 푸슝! 퍽! 퍼억!
대신 곧바로 소음 권총이 불을 뿜었다.
콰득. 콰드등. 털썩.
왼쪽 가슴에 두 개의 구멍이 뚫린 남자가 라커룸 문을 붙들며 버티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얀 셔츠에 시뻘건 핏물이 넓게 퍼질 때,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아래를 향해 권총을 내밀었다.
푸슝! 푸슝! 푸슝!
세 발이 몸에 꽂히면서 쓰러진 남자의 몸이 이리저리 튄 직후였다. 재킷 안에 권총을 넣은 남자가 몸을 돌리고는 지켜보던 동료와 함께 라커룸을 나섰다.
***
금색으로 물든 단발머리에 블라우스와 감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30대 중반의 CIA 여성 요원 마르린은 생 호망 르뷔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나오기 무섭게 걸음을 재촉했다.
불안한 심정을 드러내듯 마르린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고, 더불어 주변을 살폈다. 그런 뒤에 춤을 추듯 서두르던 걸음을 포기하고, 아예 달리는 것처럼 속도를 높였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촘촘히 박힌 네모난 돌 위에서 다급하게 울린 뒤였다. 길 한쪽에 세워 둔 작은 승용차로 달려간 마르린은 운전석의 손잡이를 잡아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급하게 올라탔고, 앉기 무섭게 운전석의 잠금장치를 눌렀다.
“후-.”
그제야 마르린은 긴장된 심정을 숨과 함께 길게 내쉬었다.
왼손으로 핸들을 붙들고, 오른손으로 스타트 버튼을 누른 마르린이 상체를 세운 다음이었다. 습관처럼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시커먼 복면을 완전히 뒤집어쓴 남자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어?’
너무 놀란 마르린은 눈만 커다랗게 떴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 직후였다.
화악!
“끅! 끄윽!”
양팔을 운전석 앞으로 넘긴 복면 남자가 마르린의 목을 사정없이 당겼다. 양손으로 줄을 붙잡은 마르린이 핸들 아래에서 발을 버둥댔으나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강하게 목을 졸랐다.
잠시 후, 마르린이 축 늘어졌다.
끝낼 법도 한데, 줄을 풀어낸 복면 쓴 남자는 곧바로 소음 권총을 들었다.
푸슝! 푸슝!
어둠 속에서 도로 한쪽에 서 있던 작은 승용차 안에서 두 번, 요란하게 불빛이 번쩍였다.
***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 키상카니에 있는 제법 큰 3층 건물이었다.
콰앙!
‘샘 앤 미첨 트레이딩 컴퍼니’라는 간판이 붙은 3층 사무실이 거칠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허름한 복장을 한 흑인 남자 두 명과 동양인 세 명이 불쑥 들어섰다.
“뭐…!”
중앙에 앉은 40대 백인 남자가 책상 서랍을 열기 위해 상체를 기울였고, 중간 책상에 앉았던 젊은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급하게 몸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타다다다다당! 퍼버버버버벅!
네 명을 상대로 뛰어든 다섯 명이 AK 소총을 대놓고 갈겨 댔다.
책상과 그 위에 둔 모니터, 각종 자료들이 요란하게 허공으로 튀어 오를 때, 사무실에 있던 네 명은 총탄에 맞아 경련처럼 몸을 떨어 댔다.
털썩. 털써-억. 털썩. 털썩.
침묵 속에서 책상 아래로 널브러진 사람들은 직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모를 정도로 피범벅이었다.
***
새벽 시간이었다.
외교부 당직자에게 전화했던 김미영은 이어서 외교부 장관과 통화하고 나서야 홍진용 민정수석의 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 민정수석입니다.
“전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 김미영입니다.”
– 예, 말씀은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강찬과의 관계를 아는 모양인지 홍진용의 음성에는 반감과 경계하는 심정이 한 덩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거기에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당황한 기색도 느껴졌다.
“미국 대통령이 전화했을 텐데. 대통령님이 혹시 통화하셨나요?”
–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기밀에 가까운 내용이라 무리한 질문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외교부 장관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연결된 통화에서 굳이 가시처럼 날카롭게 대꾸를 할 이유는 없었다.
아직 붉게 물든 눈을 하고도 김미영은 차갑게 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면 전화 끊겠습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책임은 모두 홍진용 수석께서 지시는 거로 아시면 됩니다.”
– 여보세요? 전직 대사님! 지금 민정수석을….
“제가 남편에게 통화 내용을 알려야 하니까, 협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려는 거면 한 번 더 생각하시죠?”
– 아니,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봐! 무서워할 거면서!
김미영의 경고가 먹혔는지 홍진용이 다급한 음성을 쏟아 냈다.
“미국 대통령이 국가정보원 부원장과 요원들을 불러들이라고 요구할 겁니다. 아마 국빈 방문 정도의 조건을 제시할 텐데, 거기에 넘어가면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됩니다.”
– 그래서? 부군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지금 전하는 의견이 강찬의 지시라고 여긴 눈치였다. 대놓고 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홍진용이 이어질 내용을 물었다.
“뉴욕에서의 행동은 정보총국 부총국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당장 제지할 방법이 없고, 또 연락마저 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프랑스 정부와 조율 중이라고 하시고.”
– 잠시만. 잠시만요.
김미영이 알려 준 내용을 받아 적는 것처럼 되뇌는 홍진용의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넘어왔다.
– 네. 다음은요?
“국가정보원 요원들 역시 통화가 되지 않는다. 또한, 긴급한 상황에서는 이중 지시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 현장 지휘자의 지시만 듣게 되어 있다고 하세요.”
– 현장, 지휘자의, 지시만 듣게 되어 있다? 이런 규정이 실제로 있습니까?
느닷없이 나오는 한숨을 김미영은 억지로 삼켰다.
“미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규정집을 달라고 하면, 정보국의 속성상 그런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시면 됩니다.”
– 뒷감당은요?
이제 김미영은 아예 화도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미국이 국빈 방문을 제시할 겁니다. 그래 놓고도 실제로 방문하려면 우리에게 불리한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울 테니까 무조건 거절하셔야 합니다.”
– 아시다시피 미국 방문이 중요한 문제라서요. 그리고 거절할 핑계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유엔 총회 연설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10개국을 국빈으로 방문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당장은 쉽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시는 게 좋습니다.”
– 그게?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합니까?
“남편과 제가 나서죠. 국빈 방문 국가에 러시아를 포함하면 더 효과적일 겁니다.”
– 알겠습니다, 대사님!
어쩌면 감정이 이렇게 쉽게 드러나는 건지, 김미영은 촉촉했던 눈가가 차갑게 식는 느낌마저 받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하게 상대하셔야 합니다. 유엔 총회 연설과 유럽 순방을 마치면 오히려 미국이 더 애가 탈 겁니다. 그때면 국빈 방문 이상의 성과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 국빈 방문 이상의 성과라고 하시면…? 언질이라도 주실 수 없겠습니까?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성과가 되지 않을까요?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홍 수석께서 적극 협조해 주셨다고 부원장님께 전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대사님. 부군께도 무사히 돌아오시…. 큰 성과 이루시길 간절하게 바라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김미영은 가슴에 손을 얹고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냈다.
***
히든카드를 펼치는 심정으로 게릭 웨인 미국 대통령은 스피커폰 통화 연결 스위치를 눌렀다.
“잘 지내셨습니까? 미합중국 대통령 게릭 웨인입니다.”
게릭 웨인이 건네는 인사말 아래에서 통역의 음성이 달려간 다음이었다. 기쁘고 반가우면서,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대통령의 대꾸와 함께 영어를 전하는 통역의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인사는 이 정도면 됐고.
“지금 사태는 잘 아실 테고.”
늦은 시간이라 유감이다, 건강은 어떠냐, 따위의 안부를 생략한 게릭 웨인은 빠르게 상황과 원하는 내용을 전했다.
얼른 불러들인다고 말해!
게릭 웨인과 참모들이 권총을 들이밀고 지갑을 요구하는 강도처럼 스피커폰 기계를 바라볼 때였다.
– 지금은 프랑스 정보총국의 부총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프랑스 정부와 협의 중입니다.
뭐라는 거야, 이게 지금?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 날아왔다.
참모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게릭 웨인이 급하게 스피커폰 기계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니까 설득하라는 게 아니오? 설마 정보기관 부원장이 대통령의 지시조차 받지 않을 정도로 기강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 아니오?”
– 대통령님. 우리 국가정보원 부원장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정보총국의 부총국장입니다. 정보총국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이라….
“한국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함께 있잖소! 그렇다면 우선 국가정보원 요원들이라도 불러들여야 하는 거 아니오!”
인상을 긁은 게릭 웨인이 한국 대통령 신문성의 음성 아래에서 들리는 통역의 말을 뚝 자르고 고함을 질렀다.
‘참으십시오. 지금은 달래야 합니다.’
둥그런 테이블에 함께 앉은 참모 중 한 명이 양손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보인 다음이었다. 게릭 웨인은 어쩌지 못하는 표정으로 넥타이를 매만졌다.
“이번 일을 수습하고 나면 국빈 방문으로 초대할 테니 그때 백악관에서 함께 미래를 의논합시다.”
– 국빈 방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내용은 통역을 통해 듣지만, 억양과 음성을 통해 신문성의 감정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미끼를 문 듯한 신문성의 반응에 참모가 양손 엄지를 들어 보였고, 지켜보던 이들 모두 묘한 미소를 그려 냈다.
– 우선 연락해 보고,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소.”
답을 던진 게릭 웨인은 손을 뻗어 메인 스피커폰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국빈 방문은 분명 반기는 눈치인데 부원장을 불러들이지는 못한다고 버티다니? 프랑스가 먼저 연락한 건가?”
혼잣말처럼 게릭 웨인이 질문을 내놓았는데 당장 답을 하는 참모는 없었다.
설마 요원들조차 불러들이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겠지?
다들 멍한 상태로 게릭 웨인의 얼굴을 볼 때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도 백악관 안보 담당 부수석이 들어섰다.
‘이제는 아예 보고를 듣기조차 무섭다.’
그를 바라보는 게릭 웨인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아프리카에서 CIA 소속 요원들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뭐…?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짓을 했다고?”
게릭 웨인은 말할 것 없고, 참모들의 표정까지 삽시간에 시커멓게 바뀌어 있었다.
“희생된 요원의 숫자가 보고된 것만 스물일곱 명입니다.”
“철수 지시를 내렸다면서?”
“물론입니다. 그 바람에 공항에서 살해당한 숫자만 열 명이 넘습니다.”
“아-.”
비명처럼 들리는 탄식을 쏟아 낸 게릭 웨인이 머리를 잡고서 등받이에 몸을 떨궜다.
***
강찬은 엘리베이터를 맡은 정보총국 요원 세 명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움직인 뒤에 이곳을 습격할 수 있다. 감당하기 어려우면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와. 할 수 있겠지?”
“외인부대 제13연대 출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피식 웃은 강찬은 팔을 뻗어 정보총국 요원의 뒤통수를 툭 쳤다. 아프리카에서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기 전, 외인부대 제13연대 대원들에게 보여 주던 행동이었다.
들은 게 있는 눈치였다.
강찬과 제라르의 얼굴을 보면 지나간 세월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요원은 또 만족한 표정이었다.
‘안쪽 부탁한다.’
사무실 안쪽에 있는 요원에게 시선을 준 강찬은 시작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총을 들고 인질들을 지키는 요원이 고개로 답한 다음이었다.
개새끼들. 속 좀 탈 거다.
강찬은 제라르와 함께 각자 올라가기로 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디지털 표식이 ‘L’로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로비에 세워 둔 모양인데 저 숫자는 얼마든지 장난칠 수 있으니까 어쩌면 문을 열기 무섭게 적이 뛰쳐나올 수도 있다.
“가능하면 시끄럽고, 요란하게! 시작하자.”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지시와 함께 노리쇠를 당긴 강찬이 엘리베이터를 겨눴고, 제라르와 허은실, 최종일이 뒤따랐다.
‘시작해.’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이두희와 우희승, 2조에 속한 김인서와 김명규가 각자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대검을 찔러 넣었다.
끄등! 끄드등!
벌어진 틈으로 손을 넣은 네 사람이 인상을 구겨 가며 힘을 쓰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텅 빈 엘리베이터 통로와 그 틈을 길게 타고 이어진 와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라르와는 시선이면 충분하다.
‘제라르.’
‘위-.’
티잉. 팅. 티이잉. 티잉.
시선을 마주친 직후에 강찬과 제라르는 양손에 하나씩 수류탄을 들고 안전핀을 뽑았다.
단순히 칼튼 숀을 잡겠다는 게 아냐, 이 개새끼들아.
그 개새끼의 야비한 계획을 알고도 눈 감은 놈들, 혹시 그 틈에 얻어먹을 게 없을까 하고 침 흘린 새끼들, 마지막 순간에도 특수팀을 보내 뒤통수를 친 놈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이 지랄을 떠는 거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노리면, 그 잘난 모가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교훈을 절대 잊지 마라.
피식.
특유의 웃음을 신호로 강찬과 제라르는 동시에 수류탄을 텅 빈 통로에 던졌다. 네 개의 수류탄이 칠흑처럼 어두운 통로 아래로 자취를 감추는 모습이 어두웠던 과거를 향해 던지는 도전처럼 보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