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219)
800화 혹시 제가 할 역할이 있습니까? (2)
17시간이 넘게 걸린 수술이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체력의 한계는 분명해서, 수술을 마친 안호상은 느닷없이 반년쯤의 세월에 잡아먹힌 듯 늙고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쉬어야 한다.
나이도 그렇고, 체력을 생각하면 독한 술을 마시고라도 억지로 잠이 드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안호상은 깨어나지 못한 강철규의 침대 옆을 지켰다.
부어 있어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의사인 안호상은 알 수 있었다. 강철규는 얼굴부터 몸 전체에 군살이 없었다. 저 나이에 말이다.
이런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 태어나서 한 번도 한 적 없다. 프랑스에서 고가의 의수와 의족이 지원됐고, 치료비까지 모두 부담하는 조건이라는 유헌우의 말에 물어보기 전까지 그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비무장지대라니.
어릴 적에 북한군의 도끼에 미군이 당했다는 보도야 당연히 접했었다. 하지만, 풍족하게 살아왔던 안호상에게 그건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먼 세상의 보도였다.
이따금 그곳에서 죽어 나온다는 군인들의 이야기도 들었었다. 그 역시 과장했거나 혹은 사고라고만 생각했었다.
강철규는 그 시절 나라를 위해 군에 갔던 이 땅의 젊은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섰고, 그곳에서 부당하게 밀려났으며, 그때 당했던 부상으로 인생의 절반을 고통에 시달렸단다. 가정 역시 처참하게 망가졌다고 들었다. 그래 놓고도 또 나라를 위해 나이 든 몸을 이끌고 싸웠다는 말도 들었다.
강철규를 보며 안호상은 강성태를 떠올렸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 달려들었다가 매번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오는 강성태의 소망은 하나였다. 안호상이나 안다미가 알아주지 않는다면, 언젠가 세월이 흘렀을 때, 강성태도 지금 강철규처럼 힘겹게 홀로 누워 있지 않을까.
안호상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박사님. 제가 지킬 테니 이제 좀 쉬십시오.”
뒤에서 다가온 유헌우의 음성에 안호상은 고개를 돌렸다.
“강성태 씨도 깨어났다고 하고, 응급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상태도 만족할 만합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안호상은,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채 강철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 말일세.”
“예, 박사님.”
칼부림 끝에서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고 들어온 강성태에게 실망했을까?
유헌우는 이어질 안호상의 말에 집중했다.
“멕시코처럼 되는 걸 보느니 그 앞에서 가장 먼저 쓰러지겠다고 하더군. 나중에 다미와 함께 꾸릴 가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실망했나? 아니면 연달아 다쳐 오는 강성태를 치료하는 일에 지쳤을까? 그것도 아니면 안다미의 미래가 염려돼서?
“멕시코에 있는 동료들에게 물어봤지. 내 나름으로 찾아도 봤고. 10퍼센트의 국민이 90퍼센트의 부를 지닌 나라를 상상해 본 적 있나?”
유헌우의 걱정을 단박에 밀쳐내는 내용을 안호상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놓았다.
“그런데도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회장이 세계 1위 부자더군. 살인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도시 10위 안에 7곳이 멕시코에 있는데 말이지. 16세 미만의 살인사건이 연간 3만 건, 하루 최저 임금이 우리 돈 1만 8천 원. 믿기나?”
힐끔 돌아보았던 안호상이 침대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런 세상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럭저럭 먹고살겠지? 10퍼센트 안에 들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누릴지도 모르고. 강성태 그 친구가 그러더군. 쓰레기장을 뒤지는 아이의 눈을 본 적 있냐고? 12세의 아이가 청부살인에 동원돼서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데, 차마 그 아이를 쏠 수 없었다고.”
왜 갑자기 이러지?
차마 안호상에게 묻지 못한 의문을 유헌우가 떠올릴 때였다.
“멕시코로 갈 거라고 했었지? 그곳에 나도 가겠네.”
“박사님?”
“왜? 나는 나이가 많아서 안 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날카롭게 돌아보는 안호상의 눈빛에 유헌우는 얼른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 직후였다.
대화에 깨어난 것처럼 강철규가 힘겹게 눈을 떴다.
다리를 짚으며 일어난 안호상이 허리를 숙여 그런 강철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코에 노즐이 들어간 상태에서 강철규는 안호상을 알아보기 위해 억지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수술을 집도했던 안호상입니다.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수술만 놓고 보면 기대해도 될 거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힘겹게 나온 강철규의 인사였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에서 몸을 돌렸을 안호상이 손을 뻗어 침대에 놓인 강철규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저는 그냥 기술만 좋은 사람입니다. 선생님처럼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못했고, 제가 이렇게 누리고 사는 게 선생님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어서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만 공감하는 뭔가가 있는 건가?
강철규가 이해한다는 투로 안호상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께 오신 대령님의 수술도 만족스러워서 제 짐작으로 일주일 정도면 일상생활에 지장 없을 겁니다. 괜찮으니까 좀 더 주무세요.”
그렇게 강철규를 다독인 안호상이 몸을 돌렸다.
“자네가 지킬 거지?”
“그래야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수 시절의 날카로운 눈빛에 유헌우는 답과 태도를 좀 더 공손하게 바꿨다. 행여나 이 수술비는 안호상이 부담하겠다고 할까 봐 얼른 내보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참 수술비 말인데.”
“프랑스에서 이미 입금했습니다.”
“벌써?”
“예! 현금으로 넉넉하게 들어왔습니다.”
“그거 반환할 수 있지?”
“없습니다.”
의심 가득한 안호상의 눈매 앞에서도 유헌우는 꿋꿋했다.
“나중에 말하세.”
못마땅한 기색을 가득 담은 안호상이 병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아후, 손해 볼 뻔했네.”
유헌우는 기다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 때문에 저렇게 감정이 격해진 거지?
그런 뒤에 궁금한 눈으로 안호상이 나선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
안산의 공장은 모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개새끼들아!”
휘익! 콰작!
유충일이 대뜸 달려들어 꿇어앉은 놈들의 턱을 걷어차고, 그 주변에 흉측한 연장을 든 필리핀 기술자와 조직원들이 쭉 서 있으며, 한쪽에서는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 또 최치곤이 숙소 동생들과 독한 눈매를 뿜어내고 있어서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치곤아. 거기 연장 하나 줘.”
“예, 형님.”
말리는 인간은 아예 없다.
손을 내민 유충일의 손바닥에 최치곤이 회칼의 자루를 공손하게 올리는 걸 오히려 묵직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살려 주십시오, 형님!”
열한 놈이 줄줄이 꿇어앉았는데, 가장 왼편에 자리한 한장대가 피범벅인 얼굴로 애절하게 매달렸다.
“중국놈들이 넘겨주는 마약 돌려서 좋은 차에 금목걸이, 금팔찌 차니까 뵈는 게 없었지? 그 약을 중학생, 고등학생에게 돌리면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한 번이나 생각해 봤냐?”
“형님! 형님! 형니-임!”
콰악.
버둥대는 한장대의 머리칼을 왼손으로 붙든 유충일의 눈이 정말 무서웠다.
“이 씨발 놈아! 아무리 좋아도 처먹으면 안 되는 게 있어! 알았냐? 깡패 타이틀 달고 자존심을 살리는 건 좋은 차나 금목걸이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더라도 우리 구역만큼은 지키는 강단이라고, 이 개새끼야!”
말끝에 유충일은 거꾸로 잡은 회칼을 한장대의 뒷덜미에 바싹 붙였다.
“형님? 형니-임?”
서거-억!
머리칼을 붙든 상태에서 유충일은 회칼을 몸쪽으로 당겨서 한장대의 목을 절반이나 잘라 냈다.
한장대의 목에서 뿜어진 피가 허리 부근을 붉게 적실 때였다.
휙, 털써-억.
유충일은 붙들고 있던 놈의 머리를 밀쳐 냈다. 그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질 때, 유충일은 바로 옆에 꿇어앉은 지문관의 앞으로 움직였다.
“형님?”
“이 씨발 놈아? 충무 점박이 행사에서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잊었냐?”
“잘못했습니다, 형님. 쫄쫄이 타다가 까네가 보이니까 잠깐 눈이 뒤집혔었나 봅니다, 형님.”
“후-.”
지문관 앞에서 아픈 얼굴로 한숨을 길게 쉰 유충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덥석 놈의 머리칼을 잡았다.
“형니-임?”
“물건 어디에서 들어왔냐?”
“예? 형님?”
“물건 들여온 놈. 그거 몰라?”
“저 씨발 놈들이 풀어 준 거 받기만 했습니다, 형님.”
“하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충일이 이를 악물고는 회칼을 뻗어 지문관의 뒷덜미에 가져갔다.
“끄으-아아아!”
서걱! 서거-억!
칼날이 목뼈에 걸리는 바람에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지문관의 비명은 처참했다.
털써억.
무너지는 것처럼 지문관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진 다음이었다.
유충일은 아르윈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형님. 보셨겠지만, 근성 없는 놈들입니다. 이 정도로 했는데 말 못 하는 걸 보면 이놈들은 진짜 물건이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는 겁니다, 형님.”
“고생했다.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동생들에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형님.”
유충일의 청을 받은 아르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볼과 턱, 목덜미에 튄 핏방울, 허리 부근이 축축할 정도로 젖은 상태에서 상체를 숙였던 유충일이 몸을 돌리고는 회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뒤에 최치곤과 조성호, 그 주변에 서 있는 덩치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저 새끼들 잘 봐둬. 마약이라는 게 처음은 좋은 차 타게 해 주고, 돈 펑펑 쓰게 하는 것처럼 사람을 휘어잡지만, 결말은 저렇다. 약을 판 놈이든, 처먹은 놈이든, 다 똑같아.”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뱉은 유충일이 피에 젖은 회칼로 널브러진 두 놈을 가리켰다.
“성태 형님 말씀 기억해. 마약, 고리대금, 인신매매, 세 가지를 하고 싶은 놈이 있거나 할 생각이 들면 제일 먼저 나를 떠올려. 그런 놈은 내 손에 저렇게 끝난다. 그게 싫으면 나한테 먼저 칼 놔. 알았냐?”
“그럴 일 없습니다, 형님.”
무겁게 들리는 최치곤의 답을 들은 유충일이 슬퍼 보이는 웃음을 얼굴에 담았다.
유충일은 늘 최치곤을 챙겼다.
호남에서 은퇴한 누군가가 곤란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내려갈라치면 어떡해서든 최치곤과 함께 움직였고, 끝에서 꼭 백반이나 삼겹살에 소주잔을 나누곤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지갑을 탈탈 털어서 현금을 꺼내 주었다.
“형님?”
“받아. 액수야 부끄럽다만 내 마음이다. 아쉬울 때면 내려와. 술 생각나도 내려오고. 대신 우리 큰형님 곁을 꼭 지켜 주라.”
심지어 유충일은 조성호가 빤히 있는 자리에서도 최치곤에게 회칼을 달라고 했었다. 칼을 들고 다가오게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깡패들이 모를 리 있겠나. 그러니 칼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건 그만큼 믿는다는 의미였다.
“연장 하나 새로 사.”
“예, 형님.”
고개를 끄덕여 준 유충일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피 묻은 회칼을 조성호에게 건넸다.
“옷 갈아입으십시오, 형님.”
그런 뒤에 조성호를 따라 창고 밖으로 움직였다.
“형님! 형니-임!”
전국에서 잡혀 온 놈들이 애절하게 밖으로 향하는 유충일을 불렀고,
“야! 저것들 좀 정리해!”
아르윈이 독한 지시를 내렸다.
쇠파이프와 배트가 허공을 가르면서 꿇어앉아 있던 놈들이 모두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널브러졌고, 그 직후에 창고는 다시 침묵을 부둥켜안고서 숨을 죽였다.
널브러진 놈들 앞에서 아르윈은 잡아 온 마흔 중반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준비한 약 좀 가져와.”
“읍! 으읍! 으읍!”
아르윈의 지시를 알아들은 것처럼 입이 막힌 마흔 중반의 남자가 고개를 휘저었다.
“지랄하고 있네. 네가 팔던 건데 처먹기 싫으면 어쩌라고? 어디에서 약이 들어왔는지 불고 나면 살아 있는 채로 지옥이 어떤 건지 가르쳐 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하고 있어, 이 개새끼야!”
유충일의 행동과 말에 감정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아르윈은 말할 것 없고, 지켜보던 덩치들 모두 이상스럽게 흥분해서 당장은 대화 따위 이뤄지기 어려웠다.
***
뭐가 이러냐?
검은색 양복에 하얀 셔츠, 검은색 넥타이를 맨 석강호는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는 엄지환 모친의 사진을 보았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상주를 맡았는데, 이번에는 그 모친의 상주를 하고 있다는 게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착잡하기 그지없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말이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 곁으로 갔다고 생각하면 이게 나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좋으쇼?”
‘속없이 좋소, 성님.’
어쩐지 답을 들은 거 같아서 석강호가 슬픈 얼굴로 히죽 웃을 때였다.
들를 사람 없는 상가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마당에 둔 평상을 치우고 자리를 깔았는데, 친척이 없다시피 한 데다, 이웃들도 모두 돌아가서 상가는 텅텅 비었다.
석강호가 몸을 세우는 동안 방으로 들어선 남자는 모친의 영정 앞으로 다가섰다. 서른 중반? 아니면 마흔쯤? 움직임이나 눈빛으로 봐서 요원이 아닌가 싶은 남자였다.
향을 피운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 두 번 절했고, 이어서 상체를 곱게 숙였다.
이제 상주인 석강호와 맞절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몸을 돌린 남자가 무겁게 몸을 낮춰 석강호와 절을 나눴고, 이어서 힘겹게 일어섰다.
“어떻게 아시는 분이오?”
“혹시 석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소.”
“이집트에서 엄지환 선배님이…. 살려 주셨던…, 신입 우원준입니다.”
감정을 누르는 모양으로 남자는 어렵게 답을 내놓았다.
“어떻게 알았소?”
“박중상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꼭 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죄송합니다.”
안다. 저 심정을.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걸 순간순간 깨달을 때, 먼저 간 사람의 아픔을 봐야 할 때 얼마나 아픈지도.
고개를 끄덕인 석강호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움직여 힘겨운 표정을 하고 있는 우원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선생님.”
겨우 석강호를 부른 우원준이 입술에 힘을 꾹 주며 눈물을 삼켰다.
“엄 선배님의 마지막 눈빛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정보원을 데려가라고 지르던 고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얼마나 속이 아팠겠냐.
석강호는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혹시 CIA 건물에서 있었던 것처럼 힘겨운 임무가 있다면 제발 저를 보내 주십시오. 엄 선배님의 은혜를 조국에 갚을 수 있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왜 이러냐, 다들.
우원준을 보며 석강호는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