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22)
603화 이제부터 쇼 타임 1 (1)
부족한 전력을 원망하듯 전구 속의 가느다란 필라멘트 선이 흐려졌다가 밝아질 때, 이용우는 폴더폰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말로 보고했으니 오마르나 그의 딸 자밀라는 이용우의 통화 내용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분위기와 표정, 통화 억양으로 이용우가 지금 상황을 보고했고, 그 결과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짐작한 눈치였다.
눈치챈 게 분명한데 굳이 입을 다물 필요 있겠나.
“제 상사에게 지금 상황과 두 분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했습니다.”
“뭐라 하던가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사람인 양, 오마르의 선명한 소망이 단박에 이용우에게 달려들었다.
“의논한 뒤에 답을 주겠답니다.”
“안 된다거나, 거절하라는 지시가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이오.”
이미 눈치채고 있던 만큼, 오마르의 대꾸는 평범했다.
짧은 대화의 끝에서였다.
쾅쾅쾅. 쾅쾅쾅.
심장을 철렁 내려트릴 정도로 거친 문소리가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을 덮쳤다.
염병! 시작이냐?
반사적으로 움직인 이용우가 붕대 감은 왼손으로 권총을 받쳐 드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다급하게 손을 들어 보인 오마르가 문 앞으로 움직였다.
쾅쾅쾅. 쾅쾅.
“오마르! 아무리 봐도 아까 도망친 코리안이 이쪽에서 사라졌어. 안을 살펴보게 문을 열어!”
놈들도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닐 테니까 어쩌면 늦은 요구인지도 몰랐다. 그에 맞서 딸을 탈출시키고 싶은 아버지 오마르가 지닌 건 없었다. 굳이 내놓으라면 이용우 하나 정도일까?
문을 보며 이용우는 픽 웃었다.
민병대?
까불지 마, 이 씨발 놈들아.
내가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받았는지 너희는 정말 상상도 못 한다니까.
쾅쾅쾅!
“오마르!”
협박에 가까운 부름과 거친 문소리가 울리는 도중이었다. 삽시간에 변한 이용우의 눈빛을 오마르가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쾅쾅쾅! 쾅쾅!
“오마르!”
뭐지?
이용우의 눈을 들여다보던 오마르의 표정에 민병대에 맞서겠다는 용기가 흩날렸다. 그리고 그는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자밀라를 돌아보고서야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날 밝으면 다시 오게.”
“감춘 게 없다면 못 열 것도 없잖아!”
여기에서 이용우가 들키면?
저들에게 끌려가느니 이용우의 권총에 숨을 거두는 게 오히려 인간적인 선택일 정도로 오마르와 자밀라가 감당해야 할 대가는 상상하기조차 징그러운 수준이었다.
쾅쾅! 쾅쾅!
“계속 버티면 강제로 열 수밖에 없어! 감춘 게 없다면 얼른 문을 열어!”
“이 집에는 내 딸 자밀라와 나밖에 없다. 이 밤에 내 딸이 있는 집 안에 들어오겠다는 건가?”
“아까 베란다를 닦았다던데? 거실하고 당신 방, 베란다만 살필 테니까 딸에게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해!”
“내가 아무리 미국의 색이 묻었다고 해도 이슬람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가장이다! 이 밤에 딸과 둘이 있는 집 안에 남자가 들어서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자밀라가 있는 집에 남자가 함부로 들어오기는 어렵지.
이용우마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순발력 있고, 당찬 대꾸였다. 그리고 그 대꾸 이후로 문밖에서 더는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이 의미하는 게 뭘까?
어차피 본보기로 제거하려던 오마르라면 대뜸 총알이 날아들 수 있겠다. 그 뒤에 자밀라를 납치해서 데려가려 할 테고.
대비하는 게 좋겠다.
‘안쪽으로 들어가요.’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 이용우는 자밀라에게 고갯짓을 던졌다. 그런 뒤에 문에 있는 오마르에게도 옆으로 물러나라고 눈짓을 보냈다.
‘물러나시라고!’
이용우가 두 번째로 요구하자 오마르가 문에서 비켜났다.
아버지.
저는 어쩔 수 없는 군인이고,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요원인가 봅니다.
문득 떠오른 이춘섭의 얼굴을 심장에 담은 이용우가 문을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좋아! 오늘 밤은 이대로 넘어가지만, 내일 아침까지 앞을 지킬 거니까 허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아침에 검은 미망인이 도착하면 그때는 문을 열어!”
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이용우를 멍하게 만드는 요구가 밖에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은 미망인?
왜 여기에서 ‘검은 미망인(Black Widow)’이 나와?
얼핏 보기에 오마르와 자밀라는 검은 미망인이 그저 집 안을 살피기 위해 오는 여자로 판단하는 눈치였다. 하기는, 지금 급한 건 내일 아침에 올 검은 미망인이 아니었다.
‘쉿.’
아직 입을 열지 말라는 의미로 이용우는 왼손 검지를 입 앞에 세웠다. 무엇보다 발걸음이 들리지 않는 걸 봐서는 놈들이 문에 붙어서 대화를 들으려 애쓰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이용우의 신호를 본 오마르가 딸인 자밀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늦었다. 이만 자자.”
그리고는 구석으로 움직여 스위치를 내렸다. 밖에서 거실 안의 윤곽을 살피지 못하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일단 또 시간을 벌었다.
숨을 길게 내쉬던 이용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멘에서 온 커피가 문제를 일으키더니, 수니파와 시아파, 민병대와 특수 경찰, 거기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의사가 끼어들었고, 마지막으로 검은 미망인들까지 등장했다. 도대체 커피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까지 다국적으로 일이 꼬일까?
‘문자부터 보내고.’
상황 변화도 그렇지만, 악명 높은 체첸의 ‘검은 미망인’이 이라크에 있다는 정보를 알려야 했다.
권총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운 이용우는 폴더폰을 꺼내고는 불빛을 가리기 위해 상체를 수그렸다. 막 폴더폰을 여는 순간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검은 천이 이용우를 덮쳤다.
홱, 철컥.
왼손으로 천을 잡아챈 이용우가 겨드랑이에 끼워 두었던 권총을 겨누었을 때, 놀란 얼굴의 자밀라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불빛을 가리라는 뜻이었어요.’
끝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는 검은 천, 시선으로 가리킨 폴더폰, 마지막으로 놀란 반응을 보며 이용우는 살벌하게 빛나는 눈빛을 풀었다.
그 직후였다.
“크흠.”
헛기침으로 이용우의 시선을 당긴 오마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초창기 모델이 아닐까 싶을 만큼 낡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쩌시려고?’
이용우의 시선 앞에서 오마르는 검지로 문밖을 가리킨 뒤에 다시 스마트폰을 뒤집어 통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무리 봐도 밖에 있는 민병대를 해결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말릴 틈이나 고민할 여유 따위 없었다.
오마르가 대뜸 통화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나 오마르요. 지금 민병대원들이 달려와 문을 열라고 협박 중인데 하필 몸도 좋지 않아서 내일 아침까지 병원에서 지내고 싶소. 이동할 테니 차에 탈 때까지만 보호해 주시오.”
들었지? 경찰이 이리 온다.
민병대에게 말하는 것처럼 문을 바라보는 오마르는 거칠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순진한 의사 선생님아.
외교 분쟁을 핑계로 겨우 밀어냈던 경찰을 불렀는데 그놈들이 얌전히 빠져나가게 두겠습니까?
이런 통화인 줄 알았다면 스마트폰을 뺏었어야 했다.
이용우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도착하면 알려 주시오. 참! 이쪽 민병대가 무장한 것 같으니 참고하시오.”
알려 주지 않아도 될 상황까지 전한 오마르가 통화를 마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밀라를 향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나갈 준비를 해.”
“지금이요?”
딸인 자밀라에게 고개를 끄덕인 오마르가 이용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게 분명했다.
“저 방에 내 옷과 모자가 있소. 마스크와 안경, 모자라면 이곳을 빠져나가 차에 타는 데까지는 크게 문제없을 거요. 당장 민병대도 설마 당신과 내 딸이 밤에 함께 움직일 거라 생각하지 못할 테고.”
그건 의사 선생님 바람이고.
민병대만 해도 지랄 같은데, 오기 곤란한 경찰에게 달려올 명분까지 쥐여 주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오마르는 일이 얼마나 꼬였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혼자 남겠다는 겁니까?”
기가 막힌 와중에도 혼자 남겠다는 의지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함정을 확인하기 위해 속삭이듯 건넨 질문이었다.
“딸과 나, 둘만 있는 집에서 어떻게 셋이 나가겠소? 만약 우리 셋이 함께 나가려다가 당신을 숨겨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민병대보다 경찰이 더 악랄하게 굴 거요.”
아닌데?
들키는 건 관두고,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경찰은 민병대보다 더 악랄하게 나올 건데?
생각은 그런데 이용우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여성을 하찮게 여기는 이슬람 세상에서 딸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아버지의 사랑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베란다 바로 아래 내 차를 세워 두었소. 그 차까지 경찰이 호위할 테니 타는 즉시 출발하시오.”
이용우의 심정을 알지 못하는 오마르가 절대 이뤄지지 않을 계획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검은색 차도르를 입은 자밀라가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아예 얼굴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었다면 좋겠지만, 이라크에서는 금지된 복장이었다. 하기는, 뭘 입었던 간에 밖에 민병대가 죽치는 데다, 조만간 경찰까지 들이닥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경찰이 온다니까 도움을 좀 받아야겠지?
속으로 계획을 바꾼 이용우는 습관이 된 것처럼 픽 웃었다.
***
이라크 정보부 부장 무하마드 하산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다 피운 담배를 눌러 껐다. 가로로 기다란 나무 탁자 맞은편에 세 명의 국장들이 앉았는데, 방금 눌린 담배꽁초라도 된 양,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한국의 요원이 이미 정보를 얻었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하게 무슈 강에게도 보고가 들어갔겠지?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할까? 좋은 식당으로 모시겠다고 해?”
조심스럽게 권유한 국장을 향해 무하마드 하산이 짜증을 터트렸다.
“15년이다. 15년. 무슈 강이 조용하게 보낸 세월이 15년이라고. 그런 그가 대놓고 움직이는데 첫 번째 방향이 바그다드 국제공항이라면 다른 나라 정보국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이렇게 상황이 뒤틀렸을 때는 주변 정보국을 통해 중재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라크 정보국은 능력은 말할 것 없고, 신뢰마저 의심받는 수준이었다.
갑갑한 심정을 표현하듯 담뱃갑을 집어 든 무하마드 하산이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잘도 흐른다. 그놈의 시간.
“빌어먹을.”
무하마드 하산이 욕을 뱉어 내는 순간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중간에 앉은 국장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독하게 변한 무하마드 하산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국장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런 뒤에 무하마드 하산의 표정을 연달아 살피며 통화를 이었다.
“알았다. 바로 연락할 테니 대기해.”
통화를 마친 국장이 뭔가 기회를 잡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오마르가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답니다. 이 기회에 차라리 민병대를 지원하거나, 그도 아니면 민병대의 소행으로 꾸미고 한국인 요원을 제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인간이 미쳤나?
무하마드 하산의 눈과 표정이 말로 뱉어 낸 것만큼 선명하게 국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갓 오브 블랙필드가 날아오는 동안 한국인 요원을 살해하면, 후폭풍은? 혹시 그가 정말 달랑 둘만 데리고 이곳으로 올 거라고 믿나?”
테이블 너머 국장의 얼굴에 당장 주먹을 꽂아 버릴 것처럼 무하마드 하산이 지포 라이터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날리는 대신 믿을 수 없는 인내를 발휘해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솔직히 주눅 들 만했다. 그런데도 중앙에 앉은 국장은 짧은 침묵을 파고들며 입을 열었다.
“민병대가 이미 체첸의 검은 미망인을 불렀습니다. 한국인 요원이 있다고 판단되는 장소에서 연달아 폭발이 일어난다면 당장 의심받을 건 민병대와 체첸의 검은 미망인입니다.”
뭐라?
구겨진 담뱃갑에서 비틀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던 무하마드 하산의 눈이 홱 중앙의 국장을 향해 꽂혔다.
“폭발은 증거가 남지 않습니다. 또한,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이거 봐?
확실히 표정이 바뀐 무하마드 하산은 솔깃한 눈치였다.
“민병대가 지금 이라크 연방 경찰국 소속의 외과 의사 오마르 아흐메드 가르기니 집 앞에 진을 쳤고, 근처에 있던 우리 특수 경찰도 한국인 요원이 오마르와 함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계속해 봐.”
담배를 끼운 오른손을 돌려 가며 무하마드 하산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미 협조 요청을 한 뒤니까 우리 경찰특공대와 특수 경찰이 가는 명분은 충분합니다. 도착해서 문을 열어 주면 여는 대로, 아니라면 강제로 열고 폭발시키면 됩니다.”
“민병대는?”
“대항이 있으면 더 좋습니다. 한국인 요원을 돕기 위해 나선 우리를 보고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고 발표하겠습니다.”
마음이 홱 동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결정이 쉽지 않은지 불을 붙이기 위해 담배를 빨아들이는 무하마드 하산의 볼이 평소보다 움푹 들어갔다.
“후우-.”
그런 뒤에 그는 여유를 얻으려는 것처럼 담배 연기를 먼저 길게 뱉었다.
“비밀 유지는?”
“우리만 아는 사실입니다. 지하드로 처리하겠습니다.”
“흐음.”
비밀만 유지된다면 무슈 강도 다른 말 못 할 만큼 완벽한 핑계였다. 게다가 이슬람 세상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전사야 이라크 정보국에서도 제법 보유했다.
결단에 앞서 무하마드 하산은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에이, 재수 없어!
하필이면 왜 이런 순간에 시계의 바늘이 피식 웃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그렇더라도 말이지.
“15년 전과 지금이 확실히 다르기는 하지.”
혼잣말을 뱉은 무하마드 하산은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해결해. 그가 도착하기 전에.”
“알겠습니다. 참고로 책임은 민병대와 예멘으로 넘기겠습니다.”
대답 대신 무하마드 하산은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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