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23)
604화 이제부터 쇼 타임 1 (2)
이용우는 거실을 세심하게 둘러보았다.
아무리 술의 수입, 제조, 판매가 금지된 이라크라 해도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면 집에서 적당히 즐길 줄도 알아야지, 사람이 뭐 이리 건전해?
술병, 이왕이면 양주병이 아쉬웠으나 거실 어디에도 그런 모양을 찾지 못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쪽 문이오.”
세탁실이 따로 없는 구조상 혹시나 해서 찾은 화장실이었다. 좁은 거실을 가로지른 이용우는 화장실 문을 열고서 상체를 넣었다.
아쉽다.
액체로 된 표백제, 그것도 아니면 유사한 제품을 찾았으나 역시나 이용우가 원하는 건 없었다. 대신 하나 건진 게 있는데, 변기 옆에 놓인 ‘뚫어뻥’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이용우는 자루를 들고 고무를 살폈다. 차이나는 제품이었다. 이라크의 화장실에 차이나는 제품이라니, 하기는 어디에서 만든 거면 어떠냐, 이거라도 건진 게 중요하지.
뚫어뻥을 들고 나서는 이용우를 오마르와 그의 딸 자밀라가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알코올과 솜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
“알코올과 솜이요.”
“그거라면…….”
몸을 돌린 오마르가 거실 한편의 서랍장에서 흰색 플라스틱병을 꺼냈다. 치킨을 시키면 주는 얍삽한 콜라 크기니까 190밀리리터 정도 되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솜의 양이 부족했다.
“자밀라. 마른걸레나 버릴 옷가지가 필요해. 불에 탈 만한 거로.”
“무슨 일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조용하게 나가는 게 아니오?”
“최대한 조용하게 나가야죠. 그렇더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는 해 두는 게 좋습니다.”
이용우의 답변을 들은 오마르가 자밀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이곳을 빠져나갔는데 한국에서 입국을 거절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오?”
아니, 그런 걸 걱정하는 양반이 냅다 경찰을 불러?
울컥 나오는 대꾸를 이용우는 꿀꺽 삼켰다. 때마침 방에서 자밀라가 나온 덕에 답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적당했다.
자밀라가 가지고 나온 건 헐렁하고 낡은 바지였다.
뭐 하려는 거지?
두 사람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이용우는 허름하고 낡은 바지를 뚫어뻥의 새카만 고무에 단단하게 감고서 끝을 묶었다.
“나갈 때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라고 했소?”
뚫어뻥을 휘두르라는 요구로 오해한 눈치였다. 말끝에서 오마르가 바지를 감아놓은 뚫어뻥에 시선을 주었다.
“옷을 갈아입으세요. 병원에 가는 것처럼요. 자동차 열쇠도 챙기시고.”
“예?”
내가 나가면 내 딸은?
오마르의 시선이 자밀라를 향했다가 곧바로 이용우에게 돌아왔다.
“시선을 끌어 줘야 나가기 편합니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말대로 준비해 주세요.”
“알았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잠시 망설이던 오마르가 결심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이것만으로는 좀 아쉬운데?
뭔가 놓친 게 없을까 싶은 이용우가 거실을 다시금 둘러보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으로 가 주세요.”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자밀라가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청을 건넸다.
하아, 참.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아버지와 딸이 서로 살길을 밀어주는 이 감동이라니. 누구라도 감동했을 장면이나 이용우는 달랐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밀라를 힐끔 본 이용우는 바지를 감은 뚫어뻥을 올림픽 성화 주자처럼 거꾸로 들고서 상태를 살폈다.
“당신은 어쩌려고?”
홀로 남아 감당해야 할 몫이 오마르 이상으로 처참하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알면서 그런 요구를 한다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
극단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그보다 무서운 이단의 물이 들었다고 결론 난 오마르는 무조건 목이 잘린다.
그냥 잘라 주면 고마운 축에 든다.
이단에게 형벌을 가하는 이슬람 전사는 죽어서 12명의 처를 얻는다는 명분 탓에 손가락마다 한 뼘쯤 길이의 못을 박고, 손톱 빼고, 바비큐처럼 불에 굽고 나서야 목을 자른다. 때로는 마지막 순간에 양쪽 귀를 기다란 쇠막대로 뚫기도 한다.
자밀라는 그저 그의 딸이라는 죄목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가 죽어 가는 동안,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극단주의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게 당하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 여자들의 시신을 보았을 때, 구역질하는 이라크 경찰이 있을 정도라면 이해되지 않겠나.
오마르가 들어간 방에서 옷장의 서랍을 미는 소리가 거실의 침묵을 밀쳐 낸 다음이었다.
“아버지와 둘이 나가는 건 쉽잖아요? 내 옷을 입고 나가도 되고요.”
“체형이 워낙 달라서 당장 들통나. 그건 그거고, 옷까지 갈아입고서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무서웠어요. 두려웠었고요. 하지만, 아버지를 두고 떠나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예요. 그러니…….”
말을 하는 도중에 감당해야 할 미래가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마른침을 삼켰던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이용우를 보았다.
“진짜 감당할 수 있겠어?”
“할게요.”
오마르가 나오기 전에 확답을 듣고 싶다는 투로 자밀라가 급하게 답을 내놓았다.
“혹시 떠나기 전에 나를 죽여 줄 수 있어요?”
그래 놓고는 또 엉뚱한 부탁을 내놓았다.
커다란 그녀의 눈을 본 이용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을 쏘는 건 나도 내키지 않고, 대신 이곳에서 아래로 던져 주지.”
‘2층이라 죽지 않을 거예요.’
자밀라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오마르가 나오면서 그녀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이렇게 헤어질지 모르니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죠.”
억지로 밀어 두었던 이별의 순간이 느닷없이 닥쳐서일까?
시선을 마주친 오마르와 자밀라의 눈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단 한 순간도 네가 불행해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어려움이 클 수 있지만, 나는 네가 한 사람으로, 여자로, 그리고 이 오마르 아흐메드 가르기니의 딸로 잘 이겨 낼 거라 믿는다.”
울음을 참는 얼굴로 자밀라가 오마르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
“진짜 감동적이네.”
우리말로 혼잣말을 뱉어 낸 이용우는 뚫어뻥 대신 알코올 병을 집어 들었다.
***
강성태가 아는 천중명은 관광을 위해 마우아에 올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면담을 요청받은 그는 ‘마운트 케냐 국립공원’과 ‘메루 국립공원’ 사이에 있는 마우아에서 보자며 차를 보냈다.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 거친 도로를 달리며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좁은 도로 좌우로 보이는 풍경은 지나칠 정도로 붉고 파랗게 칠한 1층 건물들과 그 사이로 뜬금없이 서 있는 빌라들이었다.
이런 곳에 유흥업소를 만들고, 조직을 꾸리라고?
멕시코 사정을 잘 알고, 시에라마드레 산맥에 들어설 거대한 산업 시설에서 일할 근로자들을 상대하는 것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아프리카는 다르지 않을까?
강성태가 천중명을 떠올릴 때였다.
“이 길부터 마우아입니다. 앞으로 10분 정도 뒤에 도착합니다.”
“알겠습니다.”
지루해할 강성태를 위한 것처럼 운전 직원이 남은 시간을 알려 주었다.
천중명은 또 단둘이 보자고 했다.
시간 끌지 말고 둘이서 오늘 담판 짓자는 의미라는 데 신월동 포장마차의 모든 메뉴를 건다.
10분쯤 단조로운 도로를 달린 뒤였다.
“저 앞에 보이는 3층 건물이 마우아병원입니다. 회장님께서는 저곳에 계십니다.”
“혹시 어디 편찮으시거나 다치셨습니까?”
“소말리아에서 부회장님과 함께 경계를 맡았던 직원 한 명이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 증상을 보여서 이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마침 케냐 정부와 협의하던 일이 있던 참이라 중간에 시간을 내셔서 들르셨습니다.”
은선곤이 존경한다더니 함께 고생하는 직원을 직접 찾아 위로하는 점도 포함됐겠다.
10분쯤 달린 승용차가 병원으로 들어섰고, 구불구불 3층 건물 사이를 지나서 빌라 형태의 1층 건물 앞에 멈췄다.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안쪽에서 지경의 직원이 분명해 보이는 한국인 남자 둘과 아프리카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조수석과 강성태가 앉은 뒷문을 열어 준 직원이 공손하나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인사했다.
갑갑했던 차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후끈한 열기와 강렬한 햇살이 달려들었는데, 그 순간 강성태는 긴 세월을 거슬러 느닷없이 용병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고맙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인 강성태는 직원을 따라 걸었다. 안으로 들어선 다음이었다. 찜통에 들어선 것처럼 복도에 갇힌 열기가 훅 달려들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서 복도까지 냉방을 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병원은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의료기 탓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병실이 절반이 넘습니다.”
복도가 찜통인 이유를 설명해 준 직원이 가장 끝의 문 앞에서 노크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대개 먼저 보고한 뒤에 문을 열어 주는데 이런 식으로 중간 과정을 없앤 것도 확실히 다른 회장들과는 달랐다.
직원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강성태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냉방이 잘 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안쪽은 그나마 열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선선했다.
“어서 오세요.”
강성태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천중명은 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복장도 그렇지만 열십자 나무로 만들어진 창, 그 앞의 책상, 중앙에 4인용 회의 테이블을 보면 수십 조의 개인적인 부와 가늠되지 않는 자산을 지닌 그룹 회장이 사용하는 사무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한 느낌이었다.
“앉죠?”
강성태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웃은 천중명이 중앙의 테이블을 권했다.
자리에 앉았고, 이어서 얼음 담긴 아이스커피를 놓아 준 직원이 나가며 사무실에 천중명과 강성태, 둘만 남았다.
어색할 수 있었다.
어려운 자리가 될 수도 있었고.
“편하게 합시다. 요구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고 했는데 솔직하게 말해 주겠습니까?”
그런데 천중명은 후배를 만난 선배처럼 그의 말처럼 편하게 강성태를 대했다. 희한하게도 그런 천중명의 모습이 강성태는 또 나쁘지 않았다.
“말씀드리기 전에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우리가 자리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말리아에는 유흥업소를 운영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무리해서 업소를 연다고 해도 유흥을 위해 올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강성태의 질문을 단박에 이해한 모양으로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회장이 멕시코에 구상한 신도시를 이곳에 하나 더 만든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컨소시엄 대신 건설을 지경이 모두 맡는 것도 멕시코의 신도시 구상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신도시의 관리와 운영을 강성태 회장이 맡아 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아무리 신도시를 건설해도 사람들이 들어와야 수익이 생깁니다.”
“세계적인 산업 폐기물 처리소를 소말리아에 건설할 예정입니다. 근로자들만 해도 엄청난 숫자가 될 테고, 케냐로 오는 관광객들도 적지 않습니다. 케냐에서 국경선을 넘을 정도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했다가 공사가 끝나서 근로자들이 돌아가면 큰 규모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준비했던 것처럼 대화가 오간 뒤였다.
강성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중명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지 못한다면 내가 강성태 회장의 능력을 잘못 판단한 게 되겠지요.”
이거 봐?
거칠게 달려드는 천중명의 시선에 담긴 뜻은 말로 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했다.
너는 할 수 있잖아?
강성태는 마치 전장에서 만난 용병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천중명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강하다, 이 남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꺾이지 않을 남자, 비록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힘에 눌리느니 마지막까지 달려들 남자.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처럼 보는 강한 눈빛을 피하고 싶지 않았고, 피할 마음도 없었다.
강성태의 도전적인 눈빛에서 의도를 읽은 모양이었다.
“강 회장도 나하고 같은 부류인 거 같은데? 지고 못 사는?”
이번에는 아예 입을 통해 천중명이 강성태를 긁었다.
신강남파 보스?
원한다면 붙어 줄 테니까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해 볼래?
지금 달려드는 천중명의 눈빛은 언젠가 이병렬을 찾아갈 때의 강성태처럼 거침이 없었다.
이 양반, 진짜 회장 맞아?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용병 경력이 있는 게 아니고?
은선곤은 분명 천중명이 천호득의 친아들이라고 했었다. 첫째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여러 가지 사건 끝에서 스스로 부회장 자리로 물러났다고 들었다.
진짜 한번 해 볼까?
그 와중에 천중명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붙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강렬한 햇살, 열기, 그리고 야전 병원처럼 보이는 건물들 틈에서 뛰어나오는 적, 귀를 파고드는 총성, 화약 냄새, 설마 천중명이 강성태의 과거를 계산해서 장소를 마우아병원으로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상스레 심장에 잠들었던 용병 시절의 감정이 불쑥 치솟는 것만은 인정해야 했다.
“거절해도 됩니까?”
“할 거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같은 부류니까.”
마지막에 툭 건너온 반말의 대꾸 역시 용병 시절의 선배나 동료를 대하는 느낌으로 다가와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가 모르는 게 있습니까?”
“한편이 되면 천천히 알게 되지 않을까?”
“계속 반말하실 겁니까?”
엉뚱한 질문이 연달아 오간 뒤였다.
강성태의 질문이 재미있다는 투로 천중명이 픽 웃었다.
“우리는 좀 일찍 만났어야 했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보기만 해도 좋잖아?”
왜 그럴까?
오가는 대화 끝에서 천중명과 강성태는 동시에 픽 웃었고, 마주 본 상태에서 킬킬대며 웃었다. 꽤 오래도록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할 거지?”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데요?”
눈빛, 태도,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 천중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천중명은 붙어 보지 않고도 강성태가 인정한 두 번째 남자였다.
아프리카, 붙어 보지 않고도 인정한 남자, 그런 의미에서 강성태는 붙어 보지 않고 인정한 첫 번째 남자가 떠올랐다.
“사람 한 명만 찾아 주십시오.”
“누구?”
“용병 시절 선배인데 아프리카에 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강성태의 요구에 천중명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