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Blackfield: Deadline RAW novel - Chapter (265)
846화 새로운 인물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냐? (完)
천중명의 능력은 또 한 번 도깨비 출신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푸슈슝! 푸슈슝!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댄 자세로 그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얼핏 소총을 내밀던 적의 머리가 숨어 있던 나무와 함께 터져 나가는 거다.
그룹 회장이잖아?
우리처럼 훈련받은 적도 없고?
“까!”
저속하기 그지없는 도깨비들 은어는 어떻게 아냐고!
의문을 오래 품지는 못했다.
후욱,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곽대출이 미친 인간처럼 달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푸슈슝! 푸슈슝! 푸슈슝! 철컥! 철커덕!
연달아 방아쇠를 당기던 천중명이 탄창을 가는 타이밍을 정말 알았을까?
앞서 달리던 곽대출이 물에 뛰어드는 수영선수처럼 다이빙으로 바닥에 처박혔다.
푸슈슝! 푸슈슝! 푸슈슝!
대출아! 내가 지킬 테니까 적을 까 버려! 그래서 바위를 차지해! 힘들겠지만, 바위 위에서 버티는 저격수를 제거해서 아군의 길을 뚫어 주라!
천중명의 사격은 바위 위에서 총구를 내밀려는 저격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푸슈슈슝! 푸슝! 푸슈슝!
때론 길게, 그 뒤에 단발로, 천중명은 귀신 같은 사격으로 저격수의 조준을 막았고, 주변에서 고개를 내미는 적을 잡아 댔다.
제대해도 도깨비 출신이라는 경력을 내밀지 못한다. 경호원으로 지원해 봐도 무경력자로 오해받기 일쑤여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곽대출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냥 취업만 시켜 준 게 아니다.
직원으로 고용한다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금액을 계약금이라는 명분으로 내밀었다.
“부회장님?”
“내가 맡기려는 일이 계약금을 전해 줄 만큼 위험한 거다. 가서 고민하고 내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아도 돼.”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곽대출은 끝내 멍하게 서 있는 대원의 주머니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서 할 만큼 했잖냐. 이건 너 같은 후배들이 안타까워서 선배가 주는 거로 생각해. 그러니까 모처럼 집에 가서 가장 노릇 한번 해. ”
전세금을 받고서 울음을 터트리던 아내의 얼굴을 기억한다. 저녁에 대형 마트에서 산 미국산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들떴던 아이들의 표정이 생생하고.
‘이익!’
그래 놓고 회장이 악착같이 방아쇠를 당기는 앞을 부회장 곽대출이 미친 인간처럼 달려가는데, 피가 끓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내가 불렀어! 너희를 죽이려고 부른 게 아니라고! 죽은 대원들의 가족을 만나느니 내가 가장 앞에서 달릴 거다!”
바위를 붙들고 매달리는 곽대출의 의지와 독기가 그의 몸에서 폴폴 풍겨 나오고, 그런 부회장을 지키겠다며 그룹 회장이 상체를 드러낸 채 방아쇠를 당기는 거다.
“저 개새끼는 내 거야!”
이성은 개한테 다 줘 버린 사람들처럼 도깨비 대원들이 바위에 매달렸다. 그 뒤에 붙어 선 대원들은 또 무슨 일이 있어도 매달린 동료들을 지키겠다며 방아쇠를 갈겨 댔다.
푸슈슝! 푸슈슈슝!!
어디에 대고 총구를 내밀어?
바위 저 앞에서 천중명이 갈긴 새하얀 불꽃이 바위 위쪽 저격수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부회장님을 지켜!”
“내가 두 번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킬 거니까 너는 회장님만 봐!”
두건 위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한 대원들이 순전히 팔심만으로 악착같이 몸을 끌어 올렸고, 바위를 타고 올랐다.
푸슈슝! 푸슈슝!
마침내 바위 위쪽에서 반가운 총성이 터져 나온 다음이었다.
곽대출이 보여 준 신호를 본 모양이었다.
– 저격수 잡았습니다! 성으로 들어가시죠!
이를 악문 듯한 천중명의 무전이 대원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
구르카 대원들은 비트를 파는 방법이 특별했다.
삽과 같은 연장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먼저 손으로 흙을 파내고 가능한 한 아래쪽에 박힌 돌들을 뽑아내는 방식이었다.
부스스.
바위 위쪽에 있던 흙이 무너져 내리면 작게나마 공간이 생긴다. 세 명이 줄줄이 서서 진짜 두더지처럼 손을 움직여 가랑이 사이로 무너진 흙과 돌들을 뒤로 던지는 방식이었다.
네팔은 가난했다.
구르카 용병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까지, 집안 하나가 벌떡 일어난다.
부모는 말할 것 없고, 누이와 형제들까지 나서서 온갖 험한 일로 벌어들인 돈을 학원비로 건네주고, 테스트 날이면 그 가족들이 모두 나와 양손을 꼭 부여잡고 통과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허리가 꺾일 것처럼 무거운 돌 자루를 이마와 목에 걸고 험한 산길을 달려 올라갈 때의 힘겨움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등에 멘 돌 자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마에 두른 끈을 덧대며 달리는 동안, 머리와 목, 등, 허리, 허벅지를 누르는 건 삶의 무게였다.
철퍼덕!
사람이니까 달리다가 넘어진다.
발목이 완전히 돌아간 네팔 청년이 울음을 삼켜 가며 절뚝이는 모습은 당장 달려드는 고통보다 가족들의 절망을 마주하는 게 더 끔찍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조차 삶의 무게를 놓을 수 없어서 찢어진 돌 자루를 한쪽 어깨에 두른 자세로 꾸역꾸역 산을 오른다.
일반적인 특수부대의 독기와는 다르다. 또 다른 나라의 특수부대원들이 지니는 유대감과도 확연하게 차이 나고.
용감하게 싸우다 죽으면 신이 그를 가엽게 여겨 가족을 지켜 주니까. 내가 비록 삶의 무게를 놓을 수밖에 없더라도 비겁하지 않으면, 내 동료를 대신하면, 신이 남은 가족이 겪어야 할 삶의 무게를 대신 들어 주니까.
강성태 말이다.
키란을 통해 달려온 구르카 용병에게 미화로 10만 달러를 먼저 지급해 주었다. 어쩌면 용감하게 죽은 대가로 신이 내리는 축복보다 더 크고 현실적인 보상이었다.
구르카 대원들이 희생될 때마다 양손을 붙여 이마에 대고 울음을 참는 강성태를 보았다. 칼에 찔린 사람처럼 볼을 씰룩이면서 신께 먼저 간 동료를 돌봐 달라고 매달리는 진정한 형제의 모습이었다.
강성태가 한국인인 게 뭔 상관이냐.
비록 죽음을 담보할지라도 쿠크리에 대고 형제가 되었음을 맹세한 강성태와 함께 임무에 뛰어든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한다.
지금도 그렇다.
만에 하나, 적과 마주치면 가장 먼저 신과 만날 자리인데도 강성태는 가장 앞에서 돌을 빼내고 흙을 뒤로 넘겼다.
부스스스슷!
앞쪽이 뚫린 것을 확인한 강성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티잉. 팅. 티잉. 티잉.
키란과 동료들은 수류탄을 꺼내 주저하지 않고 작은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진동은 견딘다. 그러나 좁은 통로를 타고 달려드는 폭발음과 충격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귀를 꽉 막은 뒤에 입을 살짝 벌린다. 그래야 귀를 파고든 폭발음이 고막을 덜 상하게 한다.
콰악.
땅을 파다가 천적을 만난 두더지처럼 몸을 웅크린 다음이었다. 놀란 적들의 고함이 들렸고,
콰으으응! 콰응! 콰으응! 콰으으응!
거대한 주먹이 옆구리를 세게 갈긴 듯한 충격과 함께 겨우 뚫어 놓은 구덩이가 무너지는 것처럼 흙이 쏟아져 내렸다.
신이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동료들을 지키겠습니다!
만약 내가 신께 간다면 남은 가족들과 동료들을 살피소서!
쏟아진 흙을 뒤집어쓴 상태로 강성태가 헤엄치듯 구덩이를 빠져나와 적들이 뚫어 놓은 통로로 달려갔다.
푸슈슝! 푸슝! 푸슈슝!
앞에서는 강성태와 키란이 소총을 갈기고, 뒤편에서는 대원들이 쿠크리를 뽑아 들고, 혹시 모를 근접전에 대비하며 밀고 나갔다.
콰으으응! 콰으응!
다른 쪽도 통로를 뚫은 모양이었다.
거대한 폭발이 강성태 일행을 휩쓸었다.
귀를 찢어 버릴 듯한 끔찍한 통증과 함께 처박혔던 대원들이 악귀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일어섰다.
형제가 바라는 일이다.
누구보다 형제들의 죽음을 아파하는 강성태가 원하는 일이다.
푸슈슝! 푸슈슝! 푸슈슝!
통로 저 끝에서 연달아 반가운 총성이 울린 다음이었다.
철컥! 철컥!
강성태와 키란이 총구를 돌린 반대편 통로에서 다른 지역을 맡았던 대원들이 다가왔다.
주먹을 쥐었던 동료가 검지와 중지를 뻗어서 좌우를 빠르게 가리켰다. 적들이 숨어 있는 나무 근처에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 적이 파 놓은 굴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그 뒤에 강성태의 독한 음성이 무전을 통해 또렷하게 들렸다.
***
이유를 알 길은 없으나 살다 보면 이상스레 하늘이, 혹은 그 안에 사는 신이 연달아 행운을 던져 주는 시기가 있다.
– 한국 정부에서 말을 바꾸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이오. 정말 총괄국장이 치료제를 확보했습니까?
“국가정보원과 협의했고, 프랑스 정보총국이 보증했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 치료제를 확보했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 거라 믿소. 이제부터 SIS의 결정이 곧 내 결정이오.
총리와의 통화에서 애덤 스캇은 더할 수 없이 든든한 힘을 얻었다.
남은 건 문바키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인데?
보안 전화기를 내려놓은 애덤 스캇이 상황을 되새기려는 순간이었다.
삐익.
– SAS 대테러팀장 막시언이 총괄국장님과의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책상에 놓인 인터폰에서 예상하지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SAS 대테러팀 팀장 막시언이라면 제이어 반 할트가 웅크린 성 주변을 통제하는 바로 그 지휘관?
생각과 동시에 애덤 스캇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연결해.”
– 연결하겠습니다.
보고가 들린 직후였다.
– 대테러팀 막시언입니다.
노이즈가 낀 듯한 음성이 인터폰에서 울려 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진입합니까?
뭐가 벌어졌는데 뭐를 어떻게 한다고?
애덤 스캇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등골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진입을 누가 결정한 거요?”
– 야드릭 시셰 총괄국장이 지시했던 내용입니다.
보고를 듣는 순간 애덤 스캇은 산더미처럼 커다랗게 변한 라노크와 안느, 문바키가 그를 내려다보며 잔인한 미소를 그리는 모습을 마주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누굴 죽이려고!
“절대 안 돼! 꼼짝도 하지 마!”
얼마나 급했는지 애덤 스캇은 평소 하지 않던 지시형 말투를 연달아 쏟아 냈다.
“설마 진입한 건 아니지?”
– 교전이 벌어지면 우선 진입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다만, 총괄국장님이 바뀌어서 확인하고자 연락드린 겁니다.
국내 파트인 MI-5는 누가 뭐래도 SIS 총괄국장의 소관이었다. 야드릭 시셰가 제거되지 않았다면, 혹은 막시언이 보고하지 않고 지시받은 대로 행동했다면, 이 어둠이 가기 전에 SAS 대테러팀이 강찬의 뒤통수를 때렸을 게 분명했다.
신이시여!
실제로 애덤 스캇은 오른손을 들어 이마와 가슴, 그리고 양쪽 어깨에 성호를 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위치를 지켜요! 그리고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이전에 받았던 지시는 모두 무시하고 내 지시를 받으면 됩니다.”
– 알겠습니다.
인터폰의 불빛이 사라진 걸 확인한 애덤 스캇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서운 인간, 제이어 반 할트.
SAS를 이용해 뒤통수를 칠 계획을 믿고 영국에 웅크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제이어 반 할트에게 먼저 전화해서 떠벌렸으니 문바키가 냉정한 음성으로 전화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대체 프랑스 정보총국과 안느, 문바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영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 인간이 개인적인 거래나 하니까 이런 수모를 당하지!”
죽은 야드릭 시셰를 떠올린 애덤 스캇은 뒤늦은 분통을 터트렸다.
***
숲을 뚫고 평지에 들어서면서 일렁이는 붉은빛이 더욱 강렬한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부슈-웅! 퍼억! 부슈우-웅! 퍼윽!
바위를 차지한 천중명 팀이 웅덩이마다 저격용 소총을 갈겨 댔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핏물이 튀었다.
푸슈슝! 푸슈슝! 푸슈슈슝!
함정을 파괴한 강성태 팀은 강찬 일행을 지키겠다는 양 달려와서 저격용 소총이 미처 다 잡지 못한 구덩이를 향해 소총을 갈겨 댔다.
이 새끼들은 왜 얌전히 처박혀 있다가 뒈지는 거지?
그나마 숲에서 잡은 놈들이 주력이었던 것처럼 평지에서 잡은 건 열 놈이 조금 넘었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성을 빙 돌아 깔린 개울 앞에 도착한 강찬은 고개를 높게 들어서 일렁이는 붉은빛을 눈에 담았다. 붉은빛이 튀어나올 때마다 타원형 창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끄응.’
염병할, 고통!
이를 악물고 참는 건 다예와 제라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대장? 우리끼리만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소?”
볼을 씰룩인 석강호의 의견이었다. 하기는, 이상한 나라의 갓 오브 블랙필드가 돼서 식인 토끼를 피해 달리는 건 강찬과 다예, 제라르로 충분한 거다.
강찬은 시선을 뒤로 돌렸다.
힘겨웠던지 좀 더 늙어 보이는 차동균과 우원준, 징그럽도록 잘생긴 강성태와 구르카 대원들, 그리고 이제야 도착한 천중명과 곽대출, 도깨비 대원들이 강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셋이서 들어갈 테니까 이곳을 지켜. 만약 안에서 폭발이 있거나 연락이 끊기면 하루 정도는 들어오지 마.”
눈가를 좁히는 강성태와 달리 천중명은 뭔가 아는 사람처럼 붉은빛이 일렁이는 창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가져왔다.
“무전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유리창을 부수십시오.”
천중명의 제안을 들은 강찬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강하고 능력 있는 인물들이 있고, 차동균과 김형정처럼 경험 많은 이들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다예의 표현대로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여 준 강찬은 다예와 제라르를 돌아보았다.
“여기에서 끝을 보는 겁니다, 대장.”
다부진 뜻을 내놓은 제라르가 고통을 이기기 위해 볼의 상처를 우그러트렸다.
“천 회장 말이오. 뭔가 아는 거 아니오?”
“물어봤다가 인터넷 어쩌고 하면 화나지 않겠냐?”
“푸흐흐흐.”
독기를 잔뜩 처먹은 석강호의 웃음이 나온 직후였다.
강찬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석강호와 제라르가 거의 동시에 성을 향해 움직였다.
성을 빙 둘러 흐르는 개울을 건넌 다음이었다.
안으로 통하는 거대한 나무 문을 제라르가 밀면서 웅크린 내부가 드러났다.
철컥. 철컥.
강찬과 석강호가 좌우로 빠르게 소총을 돌리는 앞에서 어둠이 깔린 대리석 바닥과 왼쪽 벽을 타고 도는 널찍한 계단, 중앙 한쪽에 놓인 식탁, 벽난로가 겁에 질린 듯 숨을 죽였다.
문 안쪽으로 들어섰는데도 오히려 붉은빛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대신 죽음의 숨결처럼 일정하게 울리는 소음이 더욱 또렷하게 강찬과 제라르, 석강호에게 달려들었다.
블랙헤드에 다가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껏 견뎠던 것과 달리 강찬을 찢어 버리는 듯한 통증이 달려들었고, 제라르가 튀어나오는 신음을 삼켰으며, 다예가 이를 악물고는 “씨발.”이라는 욕설을 뱉어 냈다.
고통을 핑계로 경계를 늦췄다가는 총알을 얻어맞고 계단 아래에 줄줄이 처박히는 수가 있는 거다. 지시하지 않아도 소총을 겨눈 제라르가 자세를 낮춘 채 안으로 향했고, 석강호가 계단이 있는 왼편을 살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강찬은 계단 위편과 혹시 모를 오른쪽을 날카롭게 살폈다.
왜 한 명도 없지?
이 넓은 성에 최소한 요리나 청소하는 사람 몇 명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철컥.
1층의 식탁 안쪽까지 들어가 총구를 돌렸던 제라르가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저었다.
철컥.
이번에는 벽난로와 계단 뒤편을 살핀 석강호가 독기 가득한 눈매를 던지며 뒤로 물러났다. 규모를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다.
위에 몰려 있나?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좌우로 시선을 던진 강찬은 자세를 낮춘 상태로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염병할.
계단처럼 한 칸을 올라갈 때마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고통은 늘 포기하라는 화려한 유혹을 던진다. 위기에 빠진 동료와 가족, 혹은 죽어 갈 사람에게 향했던 눈을 질끈 감으면, 혹은 차라리 모두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면 고통이 그칠 거라고 말이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씨발!
내 사람이 당하는 걸 알면서도 눈 감으라고?
이미 가슴에 담긴 숫자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악착같이 한 걸음씩,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강찬은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철컥.
강찬이 위를 향해 소총을 겨눈 틈에 석강호와 제라르가 천천히 계단의 끝을 밟고 2층에 올라섰다.
그 직후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경계선을 하나 넘은 것처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 달려들었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끄으.”
욕설을 뱉어 내 가며 버티던 다예가 벽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대장.”
강찬을 부르는 놈의 눈이 핏물에 담근 것처럼 붉게 빛나고, 실제로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가를 타고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데려가라고 하면 얌전히 따라갈까?
“올라오는 놈들을 맡을 거요. 그러니까 염병할 돌멩이를 부수고 오쇼.”
강찬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손등으로 피를 닦아 낸 다예가 소총을 좀 더 다부지게 안았다. 그러면서 강찬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미국에서 폭발에 휘말리며 셋이 엿 같은 세상에 떨어졌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뒤에 이렇게 세월을 비켜난 것처럼 살았다.
‘죽어도 같이 죽고, 엉뚱한 세상에 또 가게 되더라도 함께 갑시다.’
‘기다려.’
‘알았소.’
놈의 눈을 향해 강찬은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후우웅. 후우웅. 후우웅.
강찬은 소총을 겨눈 상태로 통로를 걸어 나갔다.
철컥.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문 옆에 있던 제라르가 몸을 돌리고는 높다랗게 발을 들었다.
콰아-앙.
철컥!
개새끼!
1층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이들이 이리저리 포개져 쓰러져 있었다. 금색 머리칼, 붉은색 머리칼, 온통 은색의 머리칼을 지닌 제법 나이 있는 이들이었고, 복장으로 봐서 요리, 청소, 혹은 그 밖에 내부 일을 하던 사람들로 보였다.
도대체 돈이 뭐라고 그거 좀 더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이렇게나 쉽게 죽일 수 있는 거냐?
험한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땀 흘려서 가족과 함께 따듯한 저녁 한 끼, 내일의 웃음을 준비하려는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개새끼야!
너는 반드시 죽인다.
이를 뿌드득 간 강찬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고통을 이기기 위해 눈매를 독하게 치켜떴지만, 제라르는 의외로 잘 견디고 있었다.
나중에 석강호 또 엄청 약 올리겠는데?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강찬은 마침내 죽음의 숨결처럼 일정한 소리가 들리는 문 앞에 멈췄다.
몸을 돌려 소총을 겨눈 강찬의 왼편에서 제라르가 문 옆의 벽에 붙어서 시선을 주었다.
‘준비됐습니까?’
강찬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제라르가 몸을 돌렸다.
콰앙.
그리고는 발을 들어 시원하게 문을 걷어찼다.
그 직후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일렁이는 붉은빛이 열린 문을 통해 쏟아져 나와 강찬과 제라르를 덮쳤고, 이어서 어두운 통로를 가득 메우며 석강호에게 달려갔다.
‘빌어먹을!’
강찬이 이를 악물었고,
“끄으으-으!”
계단 앞 벽에 기댔던 석강호가 신음을 토해 냈으며, 지금껏 잘 견디던 제라르마저 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상체를 기울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일정하게 일렁이는 붉은빛을 통해 들여다본 안쪽은 책상과 문의 정면에 보이는 창이 전부였다. 대신, 붉은빛이 피어날 때마다 온몸을 수백 개의 칼로 쑤셔 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폐와 심장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동시에 덮쳤다.
“끄으으으-.”
계단 앞에 있던 석강호가 떨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가며 버틸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강찬 역시 마찬가지여서 지금껏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빨리 끝낸다.
이를 악문 강찬은 붉은빛이 쏟아져 나오는 문 안으로 악착같이 걸음을 옮겼다.
철컥.
경계를 위해 소총을 오른쪽으로 돌린 강찬의 눈에 밀려난 서재 안쪽에 서 있는 제이어 반 할트가 보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그의 곁에 놓인 세련된 의자 뒤편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분명하게 보았다.
한 놈 먼저 해결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범인치고는 너무 쉬운 죽음이지만, 당장 석강호가 위험하고, 이어서 강찬도 얼마나 견딜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컥! 푸슝! 퍼억! 푸슝! 퍼억!
강찬은 곧장 제이어 반 할트의 이마와 심장을 연달아 뚫었다.
뭐야?
머리와 가슴을 뒤로 움찔했던 제이어 반 할트가 강찬의 앞에서 다시금 자세를 바로잡았다.
결국, 블랙헤드에게 잡아먹혀서 죽음마저 빼앗긴 괴물이 된 거냐?
“바퀴벌레 같은 놈.”
괴물이 돼서 말을 할 수 있다고?
입을 연 것만이 아니라 거북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긴 제이어 반 할트가 강찬을 향해 다가왔다. 물이 있으면 좋겠지만, 책상 위에 그 흔한 꽃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냐, 더할 수 없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 주마.
소총을 돌린 강찬은 허리에 꽂은 대검을 뽑았다.
스응.
그동안 지랄했던 것에 비하면 이것도 너무 쉬운 죽음 같지만, 목을 잘라 준다. 강찬은 대검을 움켜쥐고서 제이어 반 할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악! 콰악!
강찬이 놈의 머리칼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제이어 반 할트 역시 손을 뻗었고, 강찬의 목을 움켜쥐었다.
“끄으-.”
그 직후에 목을 잡힌 강찬은 대검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영국의 중입자 가속기 기지에서 블랙헤드에 갇혔던 때처럼, 온몸이 꽁꽁 묶인 듯 전혀 힘을 쓸 수 없었고, 처절한 고통만 남아 놈의 손길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스으윽.
“커흑. 컥.”
피처럼 붉은 눈을 한 제이어 반 할트가 왼팔 힘 하나만으로 강찬을 위로 들었다.
꽈악.
왼팔을 든 강찬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는데,
“끄으으으-.”
놈과 닿는 부위가 많아질수록 고통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성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으로 제이어 반 할트가 다음 동작을 펼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개새끼야. 지옥에 가면 많이들 기다릴 거다. 나머지는 그곳에서 해결해.”
이 한 번으로 끝낸다.
가까스로 오른팔을 든 강찬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듯 놈의 목덜미에 대검을 깊게 꽂아 넣었다.
그 직후에,
후우우우우우우우-웅.
일정하게 들렸던 기계음이 길게 늘어지며 의자 뒤편에서 뻗어 나온 붉은빛이 제이어 반 할트와 강찬을 뒤덮었다.
“끄으으-.”
비명은 강찬이 질렀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강찬을 덮은 건 새하얀 빛줄기였다.
철컹. 치이잇.
그다음에 보인 건 지포 라이터의 황색 불빛이었다. 엔조와 강찬의 얼굴에 정신을 팔린 라이터 불빛이 야바위꾼에 당하는 촌뜨기처럼 담배 끝에 옮겨붙고 있었다.
엔조?
“사람을 죽이는 것에 분노를 느끼면 위험해진다.”
엔조가 침대에 머리를 의지한 자세로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사무원은 타이핑을 하고, 외인부대원은 사람을 죽이는 거다.”
구부린 검지와 중지에 꽂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 엔조가 앞쪽이 환하게 빛날 정도로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명령에 따랐고, 그 과정인 거? 그게 전부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러니 왜 죽여야 했는지, 어째서 시체가 되었는지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강찬이 힘겹게 뒤로 물러나 책상에 몸을 기댄 다음이었다.
“상처를 치료해.”
“조금 이따가 하죠.”
강찬의 시선에 담긴 과거의 강찬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엔조가 강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과거에 없었던 모습이었다.
“누들레의 눈을 잊지 마. 그놈을 파괴하지 않으면 영원히 피 냄새 가득한 장기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무슨 소리야?
멍하니 바라보는 강찬의 시선으로 새카만 어둠이 달려들었다. 그런 뒤에 안쪽에서 은은한 빛이 나왔다.
뭐지?
강찬은 멍한 얼굴로 앞에 있는 아이를 보았다.
문바키?
문바키는 1미터쯤 안쪽에 가서 쪼그려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렇게 무릎을 끌어안은 아이가 고개를 묻었다.
“이 지하실에는 전설이 있어요. 아가데즈의 빛으로 몸을 씻은 사람만이 술탄의 유물이 지닌 진정한 힘을 얻는대요.”
무서워서, 그리고 혼자 있는 게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떨어진 화장실에 들어간 아이가 “밖에 있어?” 하고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린 술탄의 유물 없어요.”
“그래. 걱정하지 마.”
“다 죽였어요.”
강찬이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 아이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또렷하게 말하던 아이가 바로 잠이 든 거였다.
은은한 빛이 강찬과 아이를 씻기듯이 감쌌다.
화아아악!
그 뒤에 세상이 돌아왔고, 잠시 밀쳐냈던 고통이 해일처럼 강찬을 덮쳤다.
“끄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아귀힘에 목이 걸린 강찬은 제이어 반 할트의 목에 대검을 꽂아 넣은 자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놔.”
이 개새끼?
제이어 반 할트가 아니라 마치 블랙헤드가 그동안 빼앗겼던 힘을 내놓으라며 던지는 요구처럼 들렸다. 실제로 강찬은 힘을 모조리 빨려 버린 사람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누들레의 눈, 아가데즈의 빛, 그걸 되찾고 싶었던 거냐?
힘을 내야 하는데….
심장과 폐가 터질 듯한 고통에서 강찬이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대장….”
악에 받친 듯한 석강호의 음성이 뒤편에서 들렸다.
“다예…. 얼른 와서 잡아. 함께 가자.”
그 뒤에 제라르의 독한 음성도 들렸다. 본능인지, 놈은 프랑스 말을 하고 있었다. 다예가 못 알아들을 텐데 말이다.
그래. 우리 외인부대에서 만났던 거지?
염병할 고통 속에서 강찬은 피식 웃었다.
눈앞의 개새끼에게 고개 숙이면 어차피 제라르를 망칠 거다. 그 뒤에는 강찬을 향해 악착같이 다가오는 석강호를 죽이든가, 괴물로 만들 테고.
어디에서 힘이 났을까?
꽈악.
강찬이 대검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는 순간이었다.
“잠깐 기다리쇼.”
염병아!
뭘 기다려?
휘익. 푸우욱.
강찬은 동그랗게 뚫린 이마의 구멍 아래에서 붉게 빛나는 제이어 반 할트의 눈을 들여다보며 놈의 목에 박힌 대검을 힘껏 당겼다.
서거-억!
힘껏 대검을 당기면서 목의 앞쪽이 벌어진 제이어 반 할트의 몸이 그만큼 앞으로 기울었고, 요란하게 뿜어져 나온 피가 강찬의 턱과 앞섶을 흠뻑 적셨다.
“크르륵.”
징그럽다, 죽지 않는 괴물은!
목이 앞으로 기울어진 제이어 반 할트가 먼지를 털어 내듯 강찬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곧바로 더는 견디지 못한 강찬이 대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달캉.
나무 바닥에 대검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석강호가 악착같이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제라르와 어깨를 붙잡고서 동시에 강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작! 콰드드등!
넷이서 바닥을 굴렀고, 그 직후에 뻗어 나온 붉은빛이 네 갈래로 갈라졌다.
“아흐흑!”
애새끼가 비명도 참 독특하다.
“카피땐! 괴물은 우리가 맡을 테니까 빌어먹을 돌멩이를 해결하십시오!”
프랑스어를 던진 제라르가 목 앞쪽이 벌어진 제이어 반 할트를 향해 악착같이 기었다.
“대장! 얼른 좀 합시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 거요!”
누군 살 만한 줄 아냐!
상체를 일으킨 제이어 반 할트가 벌어진 목 때문에 뒤로 넘어간 머리통을 잡아서 앞으로 기울이는 앞에서 제라르와 석강호가 버둥대며 다가가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붉은빛에 휩싸여서 제이어 반 할트가 뿜어낸 피가 맹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콰악! 콰드등!
제이어 반 할트의 허리를 잡은 제라르가 레슬링 선수처럼 달려들어 주저앉혔고,
와락. 털썩!
“아흐흑!”
놈의 상체를 덮치듯 밀어붙인 석강호가 독특한 비명을 토해 냈다. 아까 강찬이 느꼈던 고통을 뒤늦게 받는 모양이었다.
“카피땐!”
제이어 반 할트의 허리를 누른 제라르가 강찬을 급하게 불렀다.
이제 진짜 끝이다.
강찬은 서재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러고도 살아 있을 수 있나 싶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 달려들었고,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두건을 적시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웅.
괴물의 울음처럼 울어 대는 소리를 배경으로 강찬은 의자의 앞에 도착했다.
너였냐?
의자 뒤편에 놓인 복잡한 기계 위로 타원형의 유리가 서 있고, 그 안에 탁구공만 한 블랙헤드가 숨을 쉬듯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우-웅.
강찬을 보며 분노한 건지, 두려운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붉은빛이 좀 더 강렬하게 빛났고, 의자 뒤로 놓인 기계들이 스위치마다 불빛을 번쩍였다.
염병 떨지 마!
모르나 본데, 죽음은 내가 결정해.
이가 드러날 정도로 독한 표정을 지은 강찬은 유리 케이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푸슝! 푸슝! 푸슝! 푸슝!
어둠에서 붉은빛을 파고든 것처럼 날아간 새하얀 빛줄기가 유리 케이스에 작은 선을 만들었고,
푸슝! 푸슝! 푸슝! 퍼서석!
마침내 주저앉듯이 유리 케이스가 무너져 내렸다.
망설일 거 없는 거다!
소총을 돌린 강찬은 블랙헤드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꽉 움켜쥐었다.
“끄으으-.”
드득. 드드득.
죽지 않는 괴물의 목을 당기듯 이를 악문 강찬이 블랙헤드를 위로 번쩍 뽑아 드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피처럼 붉은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
주변을 정리한 천중명은 웅크린 성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잠긴 성은 눅눅한 새벽 공기와 어둠을 품어서 음산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더는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2층 창을 통해 붉은색을 일렁여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함께 시선을 주고 있던 곽대출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심정을 완벽하게 대신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밀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강찬에게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려 주고, 또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후우우웅.
언젠가 천호득이 숨겨 두었던 기계에서 보았던 빛과 같은 붉은빛이었다. 늙지 않는 강찬과 석강호, 제라르에게도 천중명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들이 있지 않았을까?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 묵묵하게 곁을 지키는 강성태를 눈에 담았다. 붉은빛에 휩싸였다가 잘못되면 강성태를 비롯해 목숨을 담보로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을 위험에 빠트릴지 모른다. 그래서 강찬은 셋만 들어가겠다고 했을 거다.
“후-.”
기나긴 싸움이 끝나 간다는 사실에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감염과 관련된 모든 싸움이 정리되면 허선영과 함께 스웨덴의 성에 가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
곽대출에게는 어느 곳을 추천해 주는 게 좋을까?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천중명은 옅게 웃었다. 전투에서조차 이토록 잘 견디는 곽대출이 코피를 흘리는 모습을 떠올려서였다.
“회장님?”
엉뚱한 생각을 하는 천중명을 곽대출이 나직하게 불렀다.
“빛이 좀 더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거 같은데?”
뭔가 결판이 날까?
혹시 강찬과 이곳에 있는 누군가의 몸이 바뀌는 건 아니겠지?
긴장된 느낌으로 성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화아아아아-악.
눈이 아릴 정도로 강렬한 붉은빛이 창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비틀거나 손으로 눈을 가렸다.
***
창을 통해 아침을 알리는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올 때 강찬과 제라르, 석강호는 그 맞은편 벽에 다리를 길게 편 자세로 등을 기대앉아 있었다.
찰칵.
“후우-.”
셋이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비슷하게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에이, 개새끼. 내가 물에 푹 담가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서재 바로 안쪽에서 목 부근이 잘려 떨어진 채 눈을 끔벅이는 제이어 반 할트의 머리와 꿈틀대는 몸뚱이를 본 석강호가 시원하게 욕을 뱉고는 다시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 말이오. 아까 저 개새끼를 안고 버티는 동안, 알제리 어머니와 누이를 봤소.”
석강호가 눈에 그리움을 담다니?
진짜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지?
“너도 그랬냐? 나는 어릴 적에 사진 찍던 시절을 봤었다.”
흘리듯 희한했던 경험을 떠들었던 두 놈이 동시에 강찬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
“대장도 뭔가 본 거 아뇨?”
“뭘?”
“푸흐흐흐흐-.”
알 만하다는 투로 의미심장하게 웃은 석강호가 좀 더 밝아진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면 어떻소? 우리 셋이 이렇게 있으면 되는 거지.”
“돌대가리가 그런 말 하니까 안 어울린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내가 머리하고 손을 잡고 버텼으니까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 너 혼자 배 끌어안고 있었으면 벌써 목 돌아가서 뒈졌어!”
“웃기고 있네! 벽에 기대서 방에 들어오지도 못한 게 누군데?”
염병할!
어쩌자고 제라르가 한국말을 익혀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지!
“야, 그런데 너 혹시 외인부대 시절은 못 봤냐?”
“뭐?”
“콩고공화국에 갔을 때….”
“아, 거기!”
또 시작이네.
피식 웃은 강찬은 대리석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일어나자. 기다리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그럽시다. 이제 한국에 가서 원 없이 먹어 주는 거요.”
힘겹게 벽을 잡고 일어선 다음이었다.
“남은 일이 많은데 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제라르가 나직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안느, 문바키, 김형정 본부장, 그리고 바깥에 있는 새로운 인물들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냐?”
창을 돌아본 강찬이 피식 웃은 다음이었다.
제라르가 볼을 우그러트리며 기분 좋게 웃었고,
“푸흐흐흐흐.”
석강호가 오랜만에 만족한 느낌의 웃음을 흘려 냈다.
[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갓 오브 블랙필드의 외전 데드라인을 올려드린 글쟁이 무장입니다.
데드라인은 2017년 감염균에 의해 죽지 않는 증상을 보인다는 설정을 하승종 본부장이 제안했고, 이후 강명구 팀장과 셋이서 발전시켰던 내용입니다. 이후로 몇 번 습작을 작성했으나, 이어지는 다른 작품 연재에 따라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했었습니다.
직전 작품을 완결하고 나서 문득 강찬이 보고 싶었습니다.
제라르, 다예는 어떻게 지낼지, 장성에 있는 엄지환의 노모는 또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다가 ‘강찬에게도 천중명과 강성태 같은 조력자들이 함께하면 더 좋겠는데?’라는 감정에서 얼개를 다시금 만들었습니다.
글을 올리면서 늘 독자님들께 부족하거나 엉성한 한 편을 올리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능력이 부족해서 12권을 예상했던 글이 13권까지 이어졌으니 저는 여전히 부족한 글쟁이인가 봅니다.
이후에 두 편 분량 정도로 문바키가 SIS를 윽박지르는 장면과 김미영, 강철규의 모습들을 적었으나, 붙여놓고 보니 사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이 글의 마지막은 강찬과 제라르, 석강호의 강렬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어서 과감하게 삭제하였습니다.
부족한 제가 13권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또 글마다 응원을 보내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글을 완성하는데 많은 분이 도움 주셨습니다.
얼개를 함께 만들어 주었던 하승종, 강명구 두 분, 스토리 위즈 전대진 대표님과 임직원분들, 특히 교정과 편집을 위해 휴일마저 쉬지 못하고 애써 준 이정성 PD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데드라인은 외전이어서 이후 작품은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분들께서 그라운드의 지배자 후속편을 말씀하시고, 저 역시 후속편을 작성하고 싶지만, EPL, 그밖에 리그에 속한 팀 이름과 선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해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드립니다.
벌써 강찬과 제라르, 석강호가 그립습니다.
김형정과 문바키, 라노크, 바실리의 남은 이야기도 아쉽습니다. 다만, 붙잡고 있을수록 그들을 팔아먹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고, 외전은 이 정도 분량도 과분하다는 생각에 선을 그었습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오더니 어느새 겨울 냄새를 바람결에 담는 계절입니다. 독자님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행운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소망하고, 글쟁이인 제가 항상 품는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무장 드림.